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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가 타계한지 벌써 8년이 지났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면 섬세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산문집이나 짧은 소설에서 느끼는 맛은 마음마저 부드럽게 만들어주는가 하면, 웃음을 머금게 하면서도 삶에 대한 통찰을 주기도 한다. 일전에 리커버판으로 나온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읽으면서는 어렸을 때 즐겨 읽던 콩트라 불리는 짧은 소설의 재미를 물씬 느낄 수가 있었다.
올해 박완서 작가 8주기를 추모하면서 그녀의 문학정신을 기리자는 취지로 개성 있는 작가 29명이 저마다 콩트를 썼고 이를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그녀가 살면서 천착했던 문제의식, 즉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저마다의 시선으로 풀어낸 짧은 이야기들은 말그대로 박완서 작가의 콩트 오마주다. 29명의 작가들 중에는 내가 모르는 작가가 아는 작가보다 더 많지만 그들의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흡사 박완서 작가의 짧은 소설을 읽는 듯한 낌이 든다. 글을 쓴 작가들 대부분이 직접적으로 박완서 작가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녀에게 헌정하는 것임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책 제목인 [멜랑콜리 해피엔딩]이 의미하듯, 29편의 이야기는 실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위선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민 낯을 그대로 보여주는가 하면, 가족과 인간애로 대표되는 서사 자체는 긍정적이지 않지만 결말은 가슴 뭉클한 위로와 화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권지예 작가의 [안아줘]에서 화자인 선영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자신을 엄마라 부르며 안아 달라고 떼를 쓰면 밀쳐버리곤 했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안아주지 못한 것이 회한이 된 선영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12월이 되면 ‘엄마처럼 제 품에 꼭 안아드립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나선다. 병원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선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다. 슬픈 얼굴을 한 어떤 남자가 와서 안기자 선영은 남자의 등을 토닥여준다. 여전하다는 남자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선영이 남자를 밀쳐낸다. 한때 애인이었던, 홀로 딸아이를 키우는 홀아비였다. 결혼을 원했던 남자는 선영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 때문에 계속 미루자 그녀를 떠나갔다. 그녀의 뒤를 몰래 따라다녔다며 이젠 도망가지 말라는 남자의 말에, 선영은 이제 자신도 누군가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김성중의 [등신, 안심]은 부부싸움을 한 부부간의 화해를 보여주지만 애처롭기만 하다. <부부싸움> 낭만은 순진함 또는 어리석음과 등가를 이룬다. 낭만에는 헤아리고 따져 드는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에 눈먼 상태나 다름없다. <지혈제> 이런 독서는 지혈제다.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내면을 떼어 놓고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녀는 책장을 넘긴다. <휴전> 싸우는 데는 만 가지 언어가 동원되지만 휴전하는 데는 ‘미안해’, ‘나도’라는 다섯 글자만 사용될 뿐이다. 등심과 안심으로만 되어있는 돈가스를 사오라는 남편의 말을 메모하고 보니 등신, 안심이라 쓰여 있다. 그와 나는 둘도 없는 상등신들이고 우리는 화해가 이루어져 안심하고 있구나. 이것은 등신들이 안심하는 이야기구나! <화해>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감춘 채, 가엾고 무해한 딸의 평화에 금이 가지 않도록 고기를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이라고,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순서대로 구분하고 화자인 그녀의 말로 대신해도 그들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호의 [다시 봄]은 생활고에 치인 가장의 비애를 담고 있다. 술김에 임대아파트 한달치 월세에 해당하는 값을 주고서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갖고 싶어하는 레고 블록을 사가지고 온 그. 뒤늦게 발견한 아내가 환불을 해오라고 하고, 두 부자는 레고 박스를 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와 함께 대형마트로 걸어가면서 그는 레고를 사던 어젯밤이 생각났다. ‘그는 그 레고 박스를 신용카드로 구입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머릿속에선 자꾸 반복, 반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봄이 다시 돌아오고, 또 봄이 돌아오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그렇게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할 것이고, 늘 집세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진땀을 뺄 것이며, (……) 그러다가 다시 어느 봄이 돌아오면 허망하게 몸이 아파오겠지…… 그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레고 박스위로 떨어지는 아이의 눈물을 보면서 그는 당황했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 풍경 자체가 낯익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그 또한 그렇게 울었던 봄 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는 그녀의 짧은 소설 들에서 화자의 말을 통해 물질적 토대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우리사회의 병폐를 그리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분노하지만 격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분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읽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더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방안에서 창호지에 바늘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통해 바깥세상을 엿보다가 그 시야 안에 들어온 인생의 낌새를 글로 썼다는 박완서 작가.
29명의 작가들도 그런 그녀를 기억하며 글을 썼다. 말 그대로 멜랑콜리하고 해피엔딩한 이야기를 가지고 그녀를 추모하고 있다. 이 봄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한편으론 피식 새어 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박완서 작가의 콩트 오마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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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하지 않기 위하여) 마치 공손함과 친근함을 양쪽 접시에 올려놓은 저울처럼. 한결같다고 정혜는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태도 말이다. 윤석은 그 좋은 평판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면서 지나간 일들에 대해 스스로 무죄를 획득하곤 했다. 그래서 저토록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가 기억한다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정혜의 마음을 저버렸는지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 시간을 갖자고 했던 정혜에게 미련을 남기는 게 더 비겁하다고, 마치 정혜를 위하는 척 세상 누구보다 슬픈 얼굴로 대답하기도 했다. 심사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와 창문 앞에서 블라인드를 올리며 정혜는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별한 연인에게 가슴 저리는 그리움이나 애틋함 같은 아름다운 감정을 차용증처럼 품기도 하겠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다고. 블라인드를 다 올리기 전까지, 그러나 정혜는 오래전 연인에게 아낌없이 바쳤던 마음이 고작 환멸로 변성되어 남겨졌다는 걸 깨닫지 못할 터였다. 환멸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등신, 안심) 그녀는 전화를 내려놓고 메모 밑에 `등심, 안심`이라고 적는다. 펜 뚜껑을 닫지 않은 탓인지 획 하나를 제대로 긋지 못한 탓에 종이에는 `등신, 안심`이라는 글자가 적힌다. 자기가 쓴 글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녀는 힘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등신, 안심. 그와 나는 둘도 없는 상등신들이고 우리는 화해가 이루어져 안심하고 있구나. 이것은 등신들이 안심하는 이야기구나. … 서로에 대한 실망을 확인하는 것 외에 발견되는 삶의 열정이라고는 없는 그들은 남매처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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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의 글이 수록되어 있기에 구매했습니다. 박완서 작가를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작가들이 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기념하여 박완서 작가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서 쓴 작품을 모은 단편집입니다. 박완서 작가의 문학 정신을 기리며 이 글을 모아서 바친다고 하였으며 총 29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오마주 기념집입니다. 제가 박완서 작가의 글을 모두 읽거나 통달한 것은 아니라 어느 면에서 오마주를 했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몇몇 단편은 취향이 아니었고 어떤 단편은 재밌게 읽었는데, 잘 모르던 작가들도 알게 되어서 좋은 기회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