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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책을 읽은 후 이렇게 감정이 뜨거워지는 느낌은 처음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또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장시간 대화한 느낌! 이 책을 읽고 있는 내내 가슴이 떨렸고, 때로는 기뻐서 찬양이 흘러나왔고, 때로는 감격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은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나 자신을 오랫동안 생각하게 했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신앙 훈련과 자기 부인에 아무리 힘써도,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로운 싸움에 아무리 발벗고 나서도 다 소용 없다."
저자는 '은혜'라는 단어가 이 시대의 마지막 최고의 단어라고 하면서 이 은혜이야기를 시작한다. 많은 단어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변질되지만 이 '은혜'라는 단어는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세속적인 풍조가 밀려들었어도 그 의미가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은혜를 설명하기보다 전달하고 싶어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이야기한다.
1부에서는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거져 오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 중에는 하나님께 가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음성은 은혜의 본능에 상반된 낯선 자유의 소리라서 날마다 은혜의 메시지를 듣는 귀를 달라고 다시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2부에서는 은혜의 반대인 비은혜가 가정, 국가, 기관 할 것 없이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를 설명하며 어떻게 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비은혜는 우리 인간의 본성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용서는 믿음의 행위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3부에서는 그렇다면 용서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다. 아무리 심각한 죄인이라도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과 죄를 동일시하지 않으셨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너무도 쉽게 이 오류를 범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로 치유된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용서'를 경험하므로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반론을 제시한다.
4부에서는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비은혜로 움직여지는 국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은혜가 정말 무엇인지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말 탁월한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인 필립 얀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수많은 이야기, 실예, 자신의 경험담, 유명 인사의 말, 성경 인용 등이 어쩌면 이렇게 저자의 의도하는 바와 딱 맞게 사용되는가 말이다. 이러한 얀시 덕택에 결코 지루함이 없이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은 것 같다.
현재 낙심해 있거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 경험하고 싶은 자들에게 1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찬송가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를 때 새로운 느낌이 들으리라 확신한다. [인상깊은구절]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신앙 훈련과 자기 부인에 아무리 힘써도,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로운 싸움에 아무리 발벗고 나서도 다 소용 없다. 은혜란 또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
| 은혜라는 단어에 대한 의미에서 생활적용까지 느낄 수 있다. 단지 감동과 기쁨만을 은혜라고 표현하는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은혜는 삶이다. 은혜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책에서 백인교회에서 유색인종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거부하면서 유색인종을 위해 선교헌금을 보내고 있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은혜는 포용이면서 용서이다. 은혜와 용서는 믿음의 행위이다. 용서는 자신을 풀어주고 자유케 한다. 용서를 통해 편해지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용서의 중요한 점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 수 없다. 율법은 긍휼만을 낳을 뿐이다.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한부분 한부분 가면을 벗고 정직하게 표현하고 나타냄으로 은혜와 용서의 삶을 살고 싶다. |
|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정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가난한데, 비참할 정도로 질병에 시달리는데, 그 누구와 비교해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데도 삶 자체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전신마비에다가 말도, 글도 제대로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중증 장애인 송명희 씨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찬양할 수 있는 이 수수께끼는 어떻게 가능한가? 미국의 저명한 그리스도교 저술가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바로 그것이 신앙의 비밀 - ‘은혜’라고 밝혔다. 은혜는 이미 오염된 ‘축복’과는 다르다. 물질적 풍요, 경쟁에서 승리, 외형적 성장과 자본주의적 속성에로의 철저한 순응, 십자가를 거세하고 보다 안락한 인생을 희구하는 그런 ‘축복’과는 다르다. 은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영접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만 성립한다.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꺼이 영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한 감격적 떨림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용서의 삶을 산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용서를 받았기에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떤 죄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다. 만일 그가 용서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도, 조건 없이 먼저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다가와 십자가로서 용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은혜는 정의(正義)의 원리와 맞부딪친다. 아직 용서 받을 만한 자세와 준비를 갖추지 않았는데 용서를 해버리면 그것은 역사의 정의를 구부리는 것이 아닌가? 십자가의 은혜는 정의에 위배된다. 은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전제 없는 용서이기 때문이다. 은혜로 이루어진 용서는 자연스레 관용을 동반한다. 그래서, 저자는 마약, 폭력, 인종 차별, 동성애자도 정죄보다는 기꺼이 대화하고 치유하려 한다. 그들의 행위가 옳기 때문이 아니다. 신앙은 그들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죄의 삶을 바라보는 안쓰러운 시선이 깔려있다. 거기엔 늘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던 자신의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받았다는 은혜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가난, 질병, 무지, 폭력 앞에서도 그 내면에서 시원한 생수를 길어 올릴 수 있다. 은혜는 죄가 있는 곳에만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깊이만큼 은혜의 샘물이 고인다. 오늘 은혜를 통한 용서와 관용이 메마른 것은 이 시대 전체가 죄 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내 존재 가장 깊은 곳에 바닥으로 깔려 있는 죄를 온몸 전율할 정도로 느끼는 이는 행복하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 용서와 관용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
| 2학년 때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샀다. 그 때는 대충 한번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올 겨울 들어 다시 한번 읽고 있는데 그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평소에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입장에 맞추며 읽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물론 객관적 입장에서 판단해 나가면 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말이다. 또 책의 종류마다 읽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방법이 낫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적 감동을 주는 책에 대해 비판적 시간을 갖고 보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자의 입장에 맞추어 책을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자의 의견에 반대하며 읽어 나간 것 역시 아니다. 저자가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나를 집어 넣어 읽어봤다. 얀시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은혜, 용서, 파문 등.. 정말 추악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의 부끄러운 신앙의 모습에 얼굴이 몇 번이나 붉어졌던 것 같다. 한 단락, 한 단락이 넘어 갈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나 역시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면서다른 이들을 볼 때는 과연 어떤식으로 보았나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의 악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어땠었나.또한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혹은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가족들과의 나와의 관계는... 평소에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을 바라보며 항상 고지식한 인간들이라 답답함을 느꼈는데 나 역시 그들과 똑같거나, 혹은 더 심하게 나감을 알 수 있었다. 하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 많은 율법들을 만들어내어 그 속에 살고 있는 나를 보았다. 무언가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것,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전적인 것을 하셨다. 이 책은 그 점에 대해 극명하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과연 어떤가? 나의 신앙은 가식적이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팔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많은 갈등들 속에서 나는 오늘도 심각하게 고민한다. |
|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방법이 있는 줄 알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종류의 대안과 제시가 있다. 하지만 유일한 길은 한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너무나 쉬운 답을 이 책을 읽고 서야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을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헤요. 말씀대로 사는 것도, 범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제안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한가지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책은 그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넘쳐 나는 책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어 주신 은혜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책이다.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들이 인간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은혜이다. 그 은혜를 정리해 보면 첫 주제는 "주 은혜 놀라워"가 은혜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 나와 있다. 이 세상의 많은 부분이 은혜가 아닌 비은혜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으로 오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율법과 은혜의 차이인데, 하나님에 대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의 노력으로는 완벽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을 때에 비로소 은혜가 다가오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 주제 "비은혜의 사슬 끊기"에서는 비은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어떤 큰 죄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은혜는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인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판단하려 하기에 비은혜를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는 단순히 받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주제 "파문의 향기"에서는 전혀 흠이 없는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주제에서는 사람들은 불량품을 싫어하는데 하나님은 불량품을 쓰시는 은혜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회의 원리에서는 엄격한 기준에 근거해서 불량품은 제거를 할 수 있지만, 교회에서까지 그런 원리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많은 교회에서 불량품들을 판단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와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불량품들을 판단할 자격이 결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이 판단 이전에 우리 불량품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작품이 된 은혜의 원리를 먼저 깨달아야 하겠다. 네 번째 주제 "귀머거리 세상을 위한 은혜의 꾸밈음"에서는 진리의 은혜를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 주제에서는 책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 예로 해널드 형의 슬픈 얘기가 나온다. 그는 도덕이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외치면서 타락한 나라를 떠나 도덕성이 있는 나라로 간다. 하지만 그 곳에서 그는 기존의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를 보면서 나는 다른 이들의 틀린 부분만을 지적하고 다른 이들이 변화되기를 외치며 사는 이의 슬픈 결말을 보았다. 도덕만을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타락의 길로 걸어가고 다시 돌아오기 힘들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는 것이고 세상 끝 날까지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은혜만이 살길임을 알아야 하겠다. |
| 이 책을 읽기 전에 필립 얀시의 책을 서너 권 정도 읽었다. 그 중에는 실망한 책도 있고, 책의 내용은 좋지만 내가 처한 현실에서는 그다지 위안을 받지 못한 책들이었다. 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에도 별다를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 책의 중반 이후부터는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많이 아팠다. 내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만 하나님께 손을 벌리는 내 모습과,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결 같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계속 머리 속에 잔상으로 남아, 나를 아프게 한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서 하나님께 원망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 나는 지금까지 참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원망 했었다. 실망도 하고, 의심도 해보고…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많이 실망하고, 원망 하셨을까는 미쳐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 또 나를 아프게 한다. 용서를 할 줄 모르고, 나를 아프게 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했던 내 모습이 오히려 용서 받아야 할 죄였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 앞에 너무나 당당했었고, 떳떳했다. 그것도 말로는 죄인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 책은 나에게 좋은 책이라기 보다는 고마운 책이다.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놀라운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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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 필립 얀시 집의 책장을 살펴보다가 나온 책인데.. 좀 알아보니 꽤 유명한 책인듯. 차일 피일 미루고 있다가 이번에 유진 피터슨의 소천때 모 목사님께서 자신은 이 책으로 인해 필립 얀시에 빠져있어서 유진 피터슨을 건너뛰었다는 포스팅을 보고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는 조건없이 주어진다. 우리가 선행을 함으로써 은혜를 받는것도 아니고, 헌금을 많이 해서 받는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어진다. 우리가 흉악한 죄인이라도 주님께서는 은혜를 내려주신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 주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부으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주님의 은혜는 용서와 함께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때 주님의 은혜가 퍼져나간다. 주님께서는 용서하는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 주님의 은혜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비은혜의 흔적을 용서를 통해 지워내고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율법주의가 무조건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집중하다보면 인간은 자꾸 비은혜의 길을 따르게 된다. 그러다보니 타인을 정죄하고 자신마저도 율법에 의해 정죄하고 비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는 그 모든것을 넘어선다. 주님의 은혜 아래에서 깨끗하게 되지 못할 죄는 없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갈때 우리의 삶은 변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대상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듯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모습을 즐겁게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주님의 은혜 아래에서 우리는 주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기꺼이 살아갈 수 있다. 보수 기독교는 주님의 은혜를 간과한다. 회개해야만 주님의 은혜가 부어진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조건없이 은혜를 부으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회개하고 죄를 뉘우쳐도 결코 온전해 질 수 없다. 은혜를 받을만하지 못하다. 그냥 주님께서 은혜를 부으심으로 그 은혜 안에서 의로워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각으로 판단하여 의롭지 않은 이들이 은혜의 길로 나아오는 것을 막고 있는게 아닌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은혜의 길로 나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죄인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한가지 아쉬운 점은, 가해자의 이야기가 빠져있다. 피해자에게는 용서를 이야기하면서, 가해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피해자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화 밀양의 이야기에서 처럼...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와 용서하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피해자의 모습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어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는 피해자는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그에게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자는 그냥 그렇게 주님의 은혜 안에 평안히 살아도 될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이 어렵고 두렵고 힘들고 바보같더라도 주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독서 #독서감상 #은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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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것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믿으면 구원된다는 교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의 겹치는 부분들을 하나씩 제거했을 때 오직 기독교에만 한가지가 남는다고 합니다. 바로 은혜!
사랑이라는 하나님에 의해 사랑받는 존재와 사랑하는 존재로 지음받은 사람들이기에 사랑을 하며 살아가게됩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은혜를 남에게 베풀수 있는 겁니다. 바로 대가와 값없이주는 사랑... 그 사랑이 은혜!
이 책은 얀시의 책중에서도 삶속에서 은혜를 느낄수 있는 이야기가 풍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는내내 마음이 따뜻함을 느꼈다고 할까요? 메마르고 거칠고, 차갑기만하게 보이는 이 세상이... 그래도 서로 보듬으며 눈물로 일어설수 있는 이유가 값없이 주는 사랑, 은혜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리운 분들은 이 책을 보시길 바랍니다. 어느덧 당신의 마음도 촉촉히 은혜의 비가 내리고 있을 겁니다. |
| 오래전 어느 선교사님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인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제목으로 봐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에 관한 책일것 같아서 '그냥 그런 책이겠지' 하고 읽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왜 진작 읽지 못했을까?' 라고 후회할 정도로 기독교인의 필독서라고 추천하고 싶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은혜란 말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선 은혜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예화를 하나 든다. 그 예화가 바로 '바베트의 만찬' 이다. 이 예화를 통해 은혜란 무엇인지 맛보기를 해준다. 책의 초반부에선 계속해서 은혜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말이 많아 일고나서도 자세하기 기억이 잘 안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상 너무 말이 길어서 요점정리가 좀 힘든 면이 있다. 그러나 읽다보면 내가 너무나 은혜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고 나는 전혀 비은혜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어나갈 수록 더욱더 나는 정말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깨달음가지 주게 해준다. 내가 한가지 충격을 받은건 책의 중반부에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 부분이다. 그 게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그 게이들은 교회에 가고 싶지만 다른 교인들의 비난 때문에 교회에 가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저자는 게이들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비은혜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도둑질 한 자나, 거짓말 한 자나, 살인 한 자나, 간은 한 자나, 남색 한 자나 모두 같은 죄인일 뿐이며 우리의 죄는 누가 큰 죄고 누가 작은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고 다만 모두 죄인일 뿐이다. 우린 다만 모두 지옥갈 죄인일 뿐이며 자신의 죄는 작기 때문에 게이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것 자체가 비은혜라는 것이다. 나의 죄도 지옥갈 죄이며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할 죄이고, 게이들의 죄도 지옥갈 죄이며 예수의 피료 용서받아야 할 죄이라는 것이다. 모두 똑같은 죄인일 뿐이기에 남을 판단하고 남을 정죄하고 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다. 오직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같이 되려는 하와가 죄를 지은 것처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려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난 정말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날라리신앙일까? 이른 내 생각은 틀린 것은 아이지만 전혜 비은혜적인 생각일 뿐이며 나는 그들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들을 품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게된 동기가 어느 창녀의 말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요! 거긴 뭐하러 가요? 그러잖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에요!" 그렇다. 우리는 교회에 오래다닌 우리는... 교인들을 정죄하고 교인들끼리 파를 나누고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거룩한채 한다. 이 얼마나 우수운 일인가? 우리는 모두 불량품일 뿐이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일 뿐이다. 은혜를 느껴라. 왜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가? 자신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죄는 큰 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다정하게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은혜를 누가 더 많이 느끼느냐의 차이라 본다. 자신이 깨끗하고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사함을 적게 받은 것으로 여겨 이 창녀보다 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은혜란, 베푸는 자의 부담으로 거져 받는 선물이다. 값없이 조건없이 그냥 받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자이다. 값없이 그냥 거져 용서받았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오직 은혜로만 용서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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