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한겨레출판/2019. 11.1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실린 글은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들 중 짧은 글들을 모으고 그중 절반을 취해 가능한 수준에서 손을 보았기 때문에, 8년이라는 생명 중 일부를 주고 바꾼 글이라고 한다. 글을 짓는 다는 것을 흔히 건축에 비유한다. 저자는 글을 짓는데 필요한 준칙을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이라고 한다. 이 셋을 떠받치고 아우르는 더 중요한 원칙이 글쓴이 생명의 원천인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책의 서문에서 강조한다. 90편 조금 못 되는 글들을 5개의 주제로 나누어 엮었다. ‘1부 슬픔에 대한 공부, 2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3부 그래도 우리의 나날, 4부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5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그리고 각 부의 성격을 대변할 만한 글을 부의 첫머리에 두었다고 구성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1부의 주제이자 책의 제목이 된 슬픔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과 2017년 1월23일 저자의 아내가 수술을 하게 되면서 부터라고 한다.
“인간이 배울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타인의 슬픔이다.(p.27)”라고 말하면서 슬픔에 대한 생각의 문을 연다.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의 복수는 ‘같은 경험’을 인위적으로 생산해내는 기획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 양과 질 그대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가해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본인의 자발적 역량만으로는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해자의 성품과 노력의 차이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즉 ‘타인의 슬픔을 똑같이 느낄 수 없음’이라고 요약될 그것과 관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통스럽게 절감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교육하여 그로 하여금 제 무능력을 뛰어넘게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교육열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p.53)”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한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토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딸이 물지게를 지고 앞을 지나가게 하고 아들을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보여주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늙은 시종을 보고서는 주먹으로 머리를 치면서 극도의 슬픔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를 벤야민은 친구들과 토론을 하여 여러 가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확인해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야기 속 노인은 ‘시종’이 아니라 왕의 ‘친구’였다. 왕 자신의 해명도 이미 이야기 안에 있었다. “제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하기에는 너무나 크옵니다. 하지만 제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 만하옵니다.(p.31)”
모니카 마론은 <슬픈 짐승>에서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당해내질 못한다.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을 것이다. (p.69)” 라고 말했다. 나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의 마음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이 역사라는 변수에 종속돼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설이 한 개인의 삶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은 탄식이 나오도록 입증한다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삶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단편소설이란 이런 것이다.(p.117)” 즉, 단편소설은 하나의 사건에 숨어 있는 그 내면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고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에서 특히 소중한 부분 중 하나는 노년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을 응시하는 대목이라고 하면서 소개한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다독거렸다.(p.132)” 이렇게 생각하는 화자는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고 작중에 표현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모든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사랑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P.332)” 그런데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구조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교환구조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p.367)” 그러나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 흔히 인문학을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윌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평론가가 여러분보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비밀은 작품을 여러 번 본다는 데 있습니다.(p.389)” 소설이건 영화건 그 무엇이건, 한 번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영화평론가에 들은 적이 있는 말인데 좋은 영화는 최소 세 번은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고, 두 번째에는 비로소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고, 세 번째쯤 돼야 영상과 음악 등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것. 문학작품도 다르지 않다. 한 번에 다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보일 때까지 보고 또 본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창작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p.390)”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는 비평론을 가르치는 교수답게 여러 가지 책과 영화 등을 소개하며 다섯 가지 주제로 우리의 생각을 안내한다. 그러하기에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라 생각된다.
저자 신형철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고, 2005년 봄에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해 평론을 쓰기 시작했으며, 2007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출간했으며 2014년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비평론을 강의 한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한겨레출판/2019. 11.12 sanbaram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실린 글은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들 중 짧은 글들을 모으고 그중 절반을 취해 가능한 수준에서 손을 보았기 때문에, 8년이라는 생명 중 일부를 주고 바꾼 글이라고 한다. 글을 짓는 다는 것을 흔히 건축에 비유한다. 저자는 글을 짓는데 필요한 준칙을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이라고 한다. 이 셋을 떠받치고 아우르는 더 중요한 원칙이 글쓴이 생명의 원천인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책의 서문에서 강조한다. 90편 조금 못 되는 글들을 5개의 주제로 나누어 엮었다. ‘1부 슬픔에 대한 공부, 2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3부 그래도 우리의 나날, 4부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5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그리고 각 부의 성격을 대변할 만한 글을 부의 첫머리에 두었다고 구성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1부의 주제이자 책의 제목이 된 슬픔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과 2017년 1월23일 저자의 아내가 수술을 하게 되면서 부터라고 한다.
“인간이 배울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타인의 슬픔이다.(p.27)”라고 말하면서 슬픔에 대한 생각의 문을 연다.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의 복수는 ‘같은 경험’을 인위적으로 생산해내는 기획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를 그 양과 질 그대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가해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본인의 자발적 역량만으로는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해자의 성품과 노력의 차이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즉 ‘타인의 슬픔을 똑같이 느낄 수 없음’이라고 요약될 그것과 관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통스럽게 절감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교육하여 그로 하여금 제 무능력을 뛰어넘게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교육열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p.53)”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한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토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딸이 물지게를 지고 앞을 지나가게 하고 아들을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보여주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늙은 시종을 보고서는 주먹으로 머리를 치면서 극도의 슬픔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를 벤야민은 친구들과 토론을 하여 여러 가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확인해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야기 속 노인은 ‘시종’이 아니라 왕의 ‘친구’였다. 왕 자신의 해명도 이미 이야기 안에 있었다. “제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하기에는 너무나 크옵니다. 하지만 제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 만하옵니다.(p.31)”
모니카 마론은 <슬픈 짐승>에서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당해내질 못한다.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을 것이다. (p.69)” 라고 말했다. 나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의 마음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이 역사라는 변수에 종속돼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설이 한 개인의 삶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은 탄식이 나오도록 입증한다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삶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단편소설이란 이런 것이다.(p.117)” 즉, 단편소설은 하나의 사건에 숨어 있는 그 내면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고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에서 특히 소중한 부분 중 하나는 노년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을 응시하는 대목이라고 하면서 소개한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다독거렸다.(p.132)” 이렇게 생각하는 화자는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고 작중에 표현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모든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사랑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P.332)” 그런데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구조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교환구조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p.367)” 그러나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 흔히 인문학을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윌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평론가가 여러분보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비밀은 작품을 여러 번 본다는 데 있습니다.(p.389)” 소설이건 영화건 그 무엇이건, 한 번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영화평론가에 들은 적이 있는 말인데 좋은 영화는 최소 세 번은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고, 두 번째에는 비로소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고, 세 번째쯤 돼야 영상과 음악 등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것. 문학작품도 다르지 않다. 한 번에 다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보일 때까지 보고 또 본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창작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p.390)”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는 비평론을 가르치는 교수답게 여러 가지 책과 영화 등을 소개하며 다섯 가지 주제로 우리의 생각을 안내한다. 그러하기에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라 생각된다.
저자 신형철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고, 2005년 봄에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해 평론을 쓰기 시작했으며, 2007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출간했으며 2014년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비평론을 강의 한다.
|
솔직하게 고백하거니와, 나는 신형철이 가진 생각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자주 미문에 감동하고, 종종 미문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거부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그의 윤리관과 내가 직조한 윤리관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때로는 그 충돌은 충돌만으로 끝나기도 하고, 때로는 균열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윤리관으로 보충해야만 하는 경험을 낳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지점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그의 글들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신형철의 매혹적인 무기인 미문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러한 생각을 담은 글들을 읽기라도 했을까? 과연 그러한 생각과 내 생각들을 대치시켜 더 나은 생각이 무엇인지 고민이라도 했을까? 부끄러운 자책과 함께, 그가 아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느꼈다. 그의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일로, 슬픔을 느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슬픔을 전적으로 내 것이라 여길 수 없었다. 그것이 내게는 못내 슬펐다. 나의 세계는 차라리, 김훈 선생이 『칼의 노래』 서문에 담은 그 고백에 가깝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나는 차라리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다급하게 여겨진다. 이 쓸데없이 긴 말들을 줄이자. (사실 이렇게 말해도 된다. 이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형철의 열렬한 팬이다. 많은 이들이 신형철의 미문에 위로받을 때, 나는 그의 미문으로 인하여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가 내 정신의 안일함과 부족함을 끊임없이, 날카롭게 물어뜯어주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그 상처로 인하여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나는 그래서, 신형철의 글이, 신형철이 필요하다. |
책을 통독하고나면 매력이 반감되게 마련이다. 한번 더 읽어야 하겠다는 간절함이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대개는 아~ 어떤 건지 알겠다. 그만하면 됐다. 이런 생각을 들면서 책과의 인연을 정리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강력한 예외가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워너비북 독서 경험 고백처럼 다 읽기도 전, 중간쯤부터 재독하고픈 욕구가 솟구친다. 다시 한번 꼼꼼하게 훑어봐야 하겠다는 의지를 북돋운다. 경탄에 경탄을 거듭하며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고갈되었을 때 코드를 꼽으면 되겠다고 위기탈출 매뉴얼을 하나 마련하게 된다. 한껏 충전할 수 있는 전원 단자가 여기 있으니.
한편 극도의 좌절감을 맛보게도 한다. 글 비슷한 부류를 끼적거려보겠다는 내 가당찮은 의욕을 처참하게 꺾어버린다. 저 도저한 상상력의 깊이, 절묘한 문장력,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결곡한 태도와 현상의 진면목을 꿰뚫어보는 직관력 앞에 내가 설자리는 바늘 하나 세울 만큼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 정도 글을 세상에 내놓고도 머뭇거리는데, 신변잡기에다 근거도 희박한 하찮은 문장을 어디 내민단 말인가. 자괴감이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다.
필자가 논어를 읽다 깨우친 대목의 논리를 빌리자면 천부적 재능을 타고나서인지(生), 배움과 노력의 산물인지(學), 늘 무지하다고 자신을 몰아부치는 갈급함(困)때문인지 그가 쌓은 견결한 문장은 거의 시(詩)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포리즘으로 구축한 탑과 같다. 한두 문장이 빛나는 게 아니다.
아포리즘에 감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특히 사랑과 슬픔에 대한 그의 전언은 제대로 한소식 들은 자의 신탁 같다. 이를테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채우는 '요소'가 아니라 나를 세우는 '구조'(여야 한)다. 나는 당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온전해진다. 결여는 여전히 있되 그 결여가 더는 고통이 되지 않는, 온전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338~339쪽)
이런 대목 앞에 아득해진다. 신형철을 통해 새로 알고 깨우친 게 많다. 생의 비의와 원리에 대해 그는 많은 것을 환기하고 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내고 있다.
글 가운데 참고문헌으로 언급한 책조차 반짝거린다. 책 말미에 따로 모아둔 추천도서 소갯글을 보고는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자본주의 용어로 나타내자면 지름신 강림의 제의가 따로 없다. 나는 막 접신한 참이고. 신뢰할 수 있는 멘토르의 권유이니 뿌리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신형철 버전 의식화 교육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기꺼이 밟아나가려 한다.
두고두고 읽고싶다는 말이 그냥 해보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 간절한 염원을 담은 말이게 만드는 책이다. |
제목 그대로 '슬픔을 공부한다'는 말은 너무 슬프다. 타인의 아픔, 불행에 무감각해지거나 공감하지 못하는(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에서 슬픔을 각성하고, 배우고, 무뎌지지 않도록 연습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왠지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일까, 책을 읽는 내내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은 감당하기 버거웠지만 어쩌면 나 또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싶었던 '슬픔'이란 감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저자의 이전 저작 <몰락의 에티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일찍이 감탄한 바 있던 좋은 문장들이 이번에도 역시 책 곳곳에 숨어서 깊은 울림을 전해주어 정말 좋았다. 게다가 저자가 인용한 여러 영화와 책들은 나의 사고와 시야을 한층 더 넓혀 줄 것이 분명하다. 다음 저작이 몹시 기대된다.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는 증오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고독에는 그 정도로 명확한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에는 반대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일까.
- 고독과 행복에 대하여 중에서 (p291-p292) -
|
지난 겨울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1부의 몇 편을 읽다가 남은 글들을 대충 훑어 본 후 다 읽지 않고 반납했다. 그리고 샀다. 사고 싶은 책이 되었던 것이다.
사 놓고 금방 읽어 버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더없이 천천히 읽었다. 읽다가 내버려 두었다가 다른 책을 읽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가 그렇게 오락가락 하면서 읽었다. 다 읽고도 개운하지 못하여 다시 첫쪽부터 넘기면서 어떤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보통의 내 읽기 방식이라면 읽고 넘기는 것으로 그만이었는데 이 책은 이 방식을 거부하는 책이었다. 가끔 이런 책을 만나면 나는 퍽 행복하다. 이 책을 만나려고 그렇지 못한 책들을 디뎌 와야 했던 것인가 싶기도 하고.
책에서 제일 좋았던 점은 작가의 생각이다. 나와 같은 생각, 혹은 내가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글로 나타내고 있다. 통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내 생각을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아주 컸다. 내가 평소에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 내가 이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려고 애를 쓰고 있음을 격려받는다는 느낌, 나의 모자란 부분이 구박받지 않고 달램을 받고 있다는 느낌, 글을 읽는 동안 이런 느낌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읽는 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픔이 배경으로 살아서 끝내 사라지지 않고 있었어도.
책은 5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온전히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너무 슬퍼서 화가 났다. 더 공부하면 슬픔만 남게 될까, 자신은 없다. 2부는 소설에 대한 글이다. 문학평론가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글들이다. 내가 읽은 소설에 대한 글은 더 반가웠다. 3부는 사회에 대한 글이다. 1부와 이어져 있다. 또 슬펐고 화가 났다. 나는 슬프면 화가 난다는 것을 이 책으로 알게 되었다. 4부는 시에 대한 글이다. 2부와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특별히 만난 시인이 신철규다. 그의 시집을 구해 읽어 볼 생각이다. 5부는 문화에 대한 글이다. 1부와 3부에서 못다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록으로 추천 리스트가 나온다. 내가 이 책을 산 가장 큰 이유다. 욕심대로라면 작가가 추천한 이 책들을 보고 싶은데, 못 읽은 책이 하도 많아서 언제 읽게 될지 자신은 없다. 그래도 든든하다. 책 제목만 품고 있어도 좋은 그런 마음.
이 책으로 내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아진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을 느낀다. 내일 도로 뒤로 물러서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 서 본 기억을 잊지는 않을 것 같다. 이 또한 슬픔이 되겠지만.
|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그의 글을 단순히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달리 좀 더 그럴듯한 말을 찾기도 어렵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항상 나의 부족한 글솜씨와 빈곤한 어휘력이 더 두드러지게 와닿는다. 글쓰기에는 천재가 없다고 하거니와 유일한 글의 발전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듯, 그의 글짓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그만큼 깊고 넓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글이 괜찮은 글을 넘어 나에게 꽤 좋은 글이라고 느껴지는 데는, 비단 그의 글솜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글 자체로도 물론 최고지만, 글 전체에서 묻어 나오는 그의 인생에 대한 태도가 글을 더 읽을 만하게 만든다. 인간의 슬픔, 그 깊은 곳 안까지 들여다보고자 하는 노력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오랫동안 사건과 사연에 귀 기울이고 가장 마지막까지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느끼고 공감한다. 그런 삶에 대한 자세와 세상을 보는 눈이 글에 담겨 문체를 만들어 낸다.
눈을 잡아끄는 표현은 덤으로 얻는 수확이다.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내가 게을리 생각하며 찾아내지 못한 묘사, 단어, 표현들을 읽는 것이 즐겁다. 읽는 순간 시선을 멈춘 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몇몇 문장을 보자.
앞으로 그와 나에게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그곳에 우리가 꼭 함께 있었으면 한다. 그 일이 다른 한 사람을 피해 가는 행운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그런데 대체로 인간 개개인의 진실이라는 것은 도무지 한두 마디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일 때가 많다…. 진실은 이렇게 시작되는 긴 이야기의 끝에서야, 겨우 떠오를 것이다….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헤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글 속에 사유를 담고, 논리와 수사를 겸비한 괜찮은 글을 읽고 나면 짧은 독서리뷰라도 글쓰기가 꽤 고된 일이 되고 만다. 잘 쓴 글들이 자꾸 떠올라 글의 속도가 붙지 않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을 읽는 것은 마음이 넉넉해지는 인생의 가장 기쁜 일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표지의 금박이 아름답다
*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맹렬하고도 우아한 태도가 좋다
* 다음책은 언제 나오나요 일 년에 한 권씩 써주세요
* 왜냐하면 누구나 제 몫의 결여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런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기적인 우리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랑 속에 있을 때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 신이 있다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겠지만, 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자 위대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에 관한 한,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곁에 있어줄게,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 p.8
독서하고 사유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그 중 하나가 상대방에게 공감하기 위한 훈련 방법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시각이기는 하지만 사람은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경험한 일이라면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직접 피부로 체득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험하지 않았던 일들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고 조금이나마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 책은 신형철 평론가님의 에세이다. 얼마 전 신작 소식을 듣고 주위에서 많은 추천을 받았다. 신작은 시를 주제로 한 평론집이라고 해서 조금 망설이고 있었던 와중에 독서 모임의 도서로 전작이 선정되었다. 꼭 읽고 싶었던 신형철 평론가님의 책이기에 나름 큰 기대를 하고 읽게 되었다.
상대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며, 슬픔을 공부한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저자가 보았던 소설, 시, 그리고 사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부분은 같은 시대를 살았기에 많은 공감이 되었지만 소설이나 시는 처음 접하는 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촌철살인과 같은 저자의 문장들이 마음을 울렸고, 하나씩 곱씹어서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몰입했던 것 같다. 감탄하면서 인덱스로 문장들을 표시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보통 독서 시간보다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해 읽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깊이 있는 사람에 대한 부분이다. 내용은 평론가로서 어떤 작품을 선호하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깊이 있는 작품이라는 답이 조금은 어렵지만 싫지 않다고 한다. 같은 맥락으로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다면 깊이 있는 사람이라는 대답을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깊이라는 게 주관적인 기준이기에 사실 그런 대답을 들었을 때에는 의문이 들기 마련인데 저자는 인간 이해의 깊이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참 마음에 와닿았다.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어둠 속에 있어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낀다는 표현은 읽으면서 감동했다. 조금은 애매한 깊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짚어 준 점도 좋았다.
두 번째는 문학을 읽음으로서 느끼는 부분이다. 사실 이 내용은 서두에 이야기했던 내용과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저자는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우기에 문학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배우는 것은 체험을 통해서 바뀌는 존재이므로 시행착오로 진정하게 바꿀 수 있다고도 한다. 피를 흘리면서 배운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문학을 읽는다는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 지점에서 앞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조금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으로서의 경험을 마지막에 이르러 피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문학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나름의 노력을 인정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밖에도 사회에서 벌어진 슬픔들을 공감하고 사유하는 저자의 태도는 참 인상적이었다.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부터 시작해 세월호에 대한 내용 등 소수나 아픔을 가진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저자의 문장 하나하나가 공감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일상에 쫓기다 보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의 아픔을, 또한 내가 가졌던 그 아픔조차도 잊고 살았던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읽으면서 반대로 두 가지의 아쉬움도 들었다. 이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는 것과 좋은 책이라는 사실을 평면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라는 점이다. 책이 나온 지는 꽤 오래 되었는데 조금이나마 일찍 만났더라면 더 많은 사유를 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책인데 부족한 표현력으로 인해 벅찬 마음을 이 정도의 단순한 문장으로 리뷰를 적는다는 게 참 안타깝다.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저자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혹은 책에 등장하는 도서와 영화를 보았던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겼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슬픔을 공부한다는 게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책을 덮으면서 더욱 공부가 필요한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짐과 동시에 아직 2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인생 책을 만난 듯한 느낌도 들었다. 개인적인 표현력과 이해력이 뒷받침되어 주지 못해 한계에 대한 아쉬움과 마음을 너무나 크게 울렸던 책을 만나서 좋았다. |
금박으로 인쇄된 제목과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려진 표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슬픔이 은은히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니? 얼마나 멋지고, 심오한가? 제목에 이끌린 독서가 어떻게 끝이 날지 기대하는 마음이 커진다.
저자 신형철은 문학평론가로 1976년에 태어났고, 서울대에서 10년 동안 국어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2005년 문학동네로 등단하여 평론을 쓰기 시작했으며, 2007년 여름 계간 <문학동네>의 편집 위원으로 합류했다. 2014년부터는 조선대학교 문예 창작학과에서 비평론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등이 있다.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1부는 책의 제목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으로 문학과 영화 등을 소재로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 평론가로서의 남다른 시선과 생각을 문학을 매개체로 풀어나가고 있다. 삶이 진실에 베일 때, 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라는 큰 제목으로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있다. 제목이 마음을 붙잡기도 하고, 오래 바라보게 하기도 한다. 문학평론가의 산문집에서 내가 알고 있는 문학은 몇 개나 되나 하는 호기심으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발걸음을 옮긴다.
시간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준 것이다. 여기 묶은 글들은 내 8년 동안의 생명 중 일부를 주고 바꾼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쓰면서 나는 죽었다. 그러나 이 글들은 지금 나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p6) 책머리에 나오는 저자의 말이 가볍지 않다. 세상에 교환 아닌 것이 없으므로 좋은 글을 얻고 싶다면 가치 있는 것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므로 생명을 주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시간을 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시간을 준다는 것이라고. 그런 설명들과 함께 읽는 문장은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완성도도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글들을 나는 이런 마음으로 쓰고 시간을 들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고로 글이란 이런 것이어야 하는구나 싶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의 생명들은 무엇과 바꾸어 왔던가? 시간이 생명이라는 깨달음으로 생명을 나누어 하는 일들에 조금 더 집중하고 의미를 두어야겠다. 매일 하는 집안일들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고귀한 섬김과 정성을 들이는 일로 그렇게 의미를 두어야겠다. 가족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은 하찮거나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p38) 나를 위로하지 못했던 그 공허한 말들의 정확한 해답을 찾은 것처럼 이 문장으로 크게 위로받았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얼마나 공허한 것이 되는가? 상대는 나를 위한다고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위로하지만 그 위로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마음에 섞이지 않는다. 또한 나의 위로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이해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사람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위로는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다. 힘이 들어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처럼. 책을 읽으며 위로받았다는 접대용 멘트에서 진심으로 체험하는 경험을 한다. 책이 사람을 위로한다. 정확히는 정확히 인식한 문장이 사람을 위로한다. 위로의 정확한 의미와 힘을 느끼며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어설픈 위로 대신에 상대를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애써야겠다. 정확히 인식하여 제대로 앎의 상태가 된다면 위로는 어쩌면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거나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테니 말이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p53) 실제로 덜 아픈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아프고 느끼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같은 일에도 더 많이 상심하고 상처받으며, 아프고 상대의 아픔과 힘겨움을 고스란히 느끼기 때문에 모진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을 덜 아픈 사람들은 약하다고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더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는 사람이 사실은 덜 아픈 거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 문장이 명쾌하고 사실이라서 좋다. 그래서 위로받고 힘을 얻는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이제 그만하라는 식의 충고와 위로를 했던가? 이제는 지겹다는 말로 날마다 새로운 슬픔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 말을 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오랜 아픔을 지겨워하기도 하고 언론에서 그만 나왔으면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마음들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날마다 새로운 아픔과 고통으로 스스로를 죽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않으면서 그만하라고 지겹다고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을 했다. 미안함을 느끼면서 그래서 슬픔도 공부해야 하는구나 느낀다. 그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왜 슬픔일 수밖에 없는지 처절하게 깨달으면서.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P202) 고통에 공감하는 것도 능력이며 인간의 한계로 인해 경험하지 못한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통에 가까이 있어본 사람, 고통을 느껴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된다. 이 부분을 독서모임에서 나누었다. 선생님은 몇 해 전 지진 피해를 당해 본 경험이 있어 이번 태풍에도 불안으로 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하셨다. 사실 남편의 경우는 안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태풍이 온다고 예보가 되면 차를 높은 곳에 세워두고 퇴근을 한다. 또 베란다 유리창을 고정하고 뉴스도 집중해서 본다. 나는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조금 유난이다 싶었다. 그런데 재해를 경험한 사람의 고통을 안다면 나는 이렇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닫게 되었다. 속으로 남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이 잘 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경험하지 못한 나는 자연재해의 두려움을 몰랐던 것이다. 비단 자연재해뿐이 아니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모두 경험하지 않았으니 공감이 부족하거나 아예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인간의 한계로 인해 공부가 필요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게 공감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하니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는 조금 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
소설, 에세이, 시, 평론, 영화, 대중가요 등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다. 작품들을 향한 저자의 깊이 있는 이해와 생명을 들였다는 저자의 글들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너무 가볍게 이해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도 하고, 저자의 시선과 관점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산문형식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저자의 마음들과 생각들을 따라가며 그려본 모습도 좋았다. 아내의 수술실에서 함께 안고 울었지만 아내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지 못했다는 말은 정학하게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이해했다. 그렇다. 누군가의 슬픔과 눈물이 온전히 내 것이 되거나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를 포기하거나 일방적으로 상대를 참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배워가는 것이겠지. 슬픔을 공부한 다는 것은. 책에 나온 책들을 거의 알지 못해서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이 늘었다. 또 저자가 마지막에 추천 리스트를 친절하게 부록으로 덧붙이는 바람에 더 많이 늘었다. 부담감보다는 즐거운 압박감을 느낀다. 세상에는 좋은 책이 참 많고 나는 아직 많이 모르는구나를 깊이 느끼기도 했다. 실수가 폭력이 될 수 있음도,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라는 것, 열정도 재능이라는 것을 배웠다. 촌철살인 같은 문장들에 밑줄을 치며 감탄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조금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누군가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법을 슬프게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책의 제목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될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대해 인지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는 생명을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