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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at being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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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를 읽는데 작년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났다. 그가 자신의 일에 좀 덜 충실하고 양심적이지 않았더라면 우리 곁에 좀 더 오래 있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슬퍼했었다. 저자의 아내가 대신 마무리한, 죽음으로 완결된 이야기는 우울하게 나를 강타했었다. 그에 비하면 <아픈 몸을 살다>(집필 후기는 해피엔딩의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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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몸을 살다를 읽는데 작년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났다. 그가 자신의 일에 좀 덜 충실하고 양심적이지 않았더라면 우리 곁에 좀 더 오래 있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슬퍼했었다. 저자의 아내가 대신 마무리한, 죽음으로 완결된 이야기는 우울하게 나를 강타했었다. 그에 비하면 아픈 몸을 살다>(집필 후기는 해피엔딩의 환상을 깨지만)는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 좋았다. 우리가 일반화된 이론을 끄집어내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늪을 직시할 수 있었다.

 

  저자 아서 프랭크가 수십 년도 전에 쓴 글을 읽으며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에 대한 인식에 있어 우리는 얼마나 뒤처져 있는 걸까. 오년 전 국립병원을 드나들며 너무 놀랐던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대개 남자분들은 여성 보호자가 함께 했지만 부인과는 유독 혼자인 사람이 많아 씁쓸했었다.

 

  겁이 많은 나는 그 당시 수술이 두렵지 않았다. 수술만 받으면 만사 오케이일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저자도 언급하지만 무엇보다 이력서에 공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몸은 생각보다 서서히 회복되었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른 이상 소견들이 줄지어 전해졌다. 미성숙하게도 나는 말끔히 빠르게 회복되지 않는 몸에 분노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전락하게 했는지 원인을 찾으며 제대로 관리하지 못함에 자책을 넘어 분개했다. 잦아들지 않는 화를 잠재우려 필립 로스의 짧은 소설들을 연이어 읽었다. 나보다 더 세상과 몸의 한계에 분노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내 자신과 원만하게 화해하지 못한 채 지냈고 어느덧 오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 아픔은 저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시 임박한 병원 순례에 앞서 두려움이 가득하다. 여기저기 불편해 병원을 찾으면 의사들은 암은 흔하다거나, 이제 그런 증후가 나타날 때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환자의 공포를 감소시키는 방법이겠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부추긴다. 누군가의 아픔이나 삶의 주기에 너무나 무감각한 사람들이 의사 가운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의사들의 말대로 환자와 병은 널렸고 흔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환자들은 병에 대해 대체적으로 함구하고 의사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묻거나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름은 지워지고 환자 번호로 대상화된다. 환자나 가족이 오롯이 소외와 어려움을 감당하고 사회는 이상무를 외친다. 아픈 것도 힘든데 죄책감과 낙인에 시달린다. 저자는 병은 그냥 발생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경험이라는 재차 강조한다.

 

  삼십대 후반을 기점으로 여기저기 나빠지는 몸을 보며 두려운 마음이 크다. 건강을 잃어보니 가라앉아있던 기억들이 출몰했다. 암에 걸려 돌아가신 뒷집 아주머니와 허리통증으로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던 사모님, 어느 날 갑자기 휠체어 신세가 되어 버린 친구 엄마도 모두 사십대였다. 지금 보니 너무 이르다 싶은 삶의 일방적인 통보이자 잔인한 중간결산이다. 그들은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까. 병을 둘러싼 오명은 묵은 채로 계속되고 있다. 나부터가 병의 실체보다는 병을 둘러싼 루머에 더 익숙하다.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된 게 있다. 나빠지는 몸 때문에 이런 쪽에 관심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나는 이십대부터 줄곧 몸과 몸 관련 사회학적 지식에 오픈돼 있었다. 저자가 의료쪽 사회학 전공자인 까닭도 작용했겠지만 자신의 병력과 경험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해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감정적으로 낭만화시키는 면이 거의 없었다. 이성적인 가운데 그가 기대는 음악과 그림과 문학과 성경 구절이 사람의 마음을 잔잔하게 터치했다. 병에 관한 분석과 체험이 어느 순간 인간애 혹은 인간다움의 조건으로 전환되었다.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자기 앎과 타인에 대한 이해, 포용이 너른 창공을 형성했다. 처음에 책 제목으로 삼고자 했다는 위험한 기회에 부합되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Getting out of the hospital always seemed like a rebirth. Hospitals deprive the senses; outside I was aware of real air and colors and textures, variations of light and the noise of a normal world going about its business. (79)

 

  그의 말대로 잊는다는 것은 어떤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일 수 있다. 삶의 통찰과 사는 이유, 삶의 숭고함을 배우는 기회를 KTX 기차를 타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이다. 저자의 인생전환기에 찾아온 병과 치료, 재발을 들으며 우리는 잠시 이곳에 머무는 먼지라는 각성이 들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병 앞에 왜 저인가요? 뭐 때문이죠?”라며 불필요한 감정에 매달리는 에너지 소모를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굿걸이 되어 사회가 정해둔 패턴을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도 없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아픔을 겪은 후 최고보다는 내가 감수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선택을 할 뿐이다. 생산성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깨달은 정신력과 고통에 대한 뿌리 깊은 이해는 설명될 언어와 공간을 잃는다. 문학이 추구하는 인문학적 가치가 반드시 예술작품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보다 나은 인간성을 구현할 수 있다.

 

Being alive is a dual responsibility: to our shared frailty, on the other hand, and to all we can create, on the other, the mutual responsibilities of the ill to express and the healthy to hear meet in the recognition that our creativity depends on our frailty. Life without illness would not just be incomplete, it would be impossible. (128)

 

  요즘 뉘우치고 신경 쓰는 부분이 사람을 통해 배우려들지 않는 닫힌 귀와 마음을 여는 일이다. 나의 아픔은 누군가의 경험과 맞닿아 있고 결코 혼자 겪는 일이 아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를 알게 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상대의 말은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응축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주침의 기회를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열심히 들으려 노력 중이다.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해 똑같은 분석틀을 가져다 동어 반복적으로 해석하는 일도 자제하고 싶다. 나의 독단과 허영을 내려놓고 먼저 개별성과 존엄함을 고려했으면 싶다. <아픈 몸을 살다를 읽으며 빙판 위에서 균형을 잡는 스케이트선수가 우리를 매료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이 삶이 꼭 얼음 위처럼 불안한 것이다. 그런 미끄러움에 맞서 균형을 잡고 제 몫을 연기해내니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스케이트의 날에 체중을 싣고 넘어지지 않는 기교는 어느 순간 예술의 경지로 넘어가기에 힘겹지만 오늘도 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XUPHmKPWFmM)

 

  우리 삶이 향하는 궁극점은 의외로 단출하고 소소하다. 저자가 뜻밖의 횡재라고 표현한대로 우리는 햇빛과 적당한 바깥 공기를 원하고 해가 비치는 강가를 거닐고 싶은 것이다. 머리위로는 푸른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반짝이는 강물이 출렁이는 자리에 함께 하는 작은 경이를 오늘도 소망하는 것이다.

 

But today I can go down and walk by the river. I say the same short prayer I always say, and I try to let the wisdom of the trees and water touch me. I try to recognize their creation and recognize myself as part of that creation. (154)

이달의 사락 s********d 2018.01.22.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