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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슴의 발레리나
이 책은
이 책의 제목은 『큰 가슴의 발레리나』, 너무 큰 가슴 때문에 절망하는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저자는 베로니크 셀, 벨기에의 작가다. <리듬 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뒤, 고전 발레를 공연하고 가르쳤으며, 현대 무용과, 무용 창조 방법론인 라방 창조 무용 공연과 교육에도 종사했다. 프랑스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킨 『큰 가슴의 발레리나』(2018)는 그녀의 네 번째 소설이다. 작가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베로니크 셀은 고전 발레와 현대 무용의 공연과 교육자로 살아 왔다. 그녀의 해박한 무용에 관한 지식은 『큰 가슴의 발레리나』 속에 구석구석 녹아 있다.>
이 책의 내용은
등장인물이 특이하다. 하나는 바르브린이라는 발레리나 지망생, 또 하나도 인물인데 바르브린의 신체 일부분인 젖가슴이다. 그 젖가슴은 각각 이름이 부여되어 있다.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
이 소설은 그렇게 두 명의 등장인물이 번갈아 등장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때에,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각 장의 화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면서 읽어야 한다.
읽다가 보니, 감이 잡힌다. 각장을 표시한 숫자, 그냥 숫자만 있으면 주인공, 사람인 바르브린, 그리고 숫자 뒤에 bis 라는 말이 붙으면 그건 젖가슴 덱스트르의 말하는 차례다.
문장의 특이함
또하나 구성상의 특징을 찾자면, 사람 바르브린이 서술하는 이야기는 현재형 문장을 사용한다.
<첫돌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걱정하시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이론적으로는 두 발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직 뒷발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12쪽)
먼저 이런 구성을 취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현재형 문장을 사용하면, 의외로 흡입력이 있다.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문장을 현재형으로 쓰는 것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현장감이 살아난다. 눈으로 그녀를 현재형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이런 문장 구조의 변환을 통하여, 사람 바르부린은 순차적, 시간을 따라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고, 그 다음에 말하는 젖가슴은 현재, 과거를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조립해 나가는 것이다.
여성이 특히 몸으로 하는 예술인 발레, 그 발레를 통하여 여성을 생각하게 한다. 발레리나라는 꿈이 큰 가슴 때문에 좌절되는 경험을 한 바르부린은 딸을 낳자 이런 걱정을 한다.
<(그런) 두려움이 사라지자, 다른 두려움이 생겨난다. 큰 젖가슴 때문에 내가 겪는 곤란이 엄마의 젖을 통해 아이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아닐까?>(242쪽)
다시, 이 책은? 여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럼 저자는 이 소설의 대미를 어떻게 장식하는가 큰 젖가슴 때문에 좌절을 겪은 발레리나를 어떻게 위로해 줄 것인가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 결론을 내려준다.
<어떻게 끝나는데 마지막에 가슴이 폭발해버려 그래서 여자들이 가슴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거지. 막이 내려.> (256쪽)
결론은 그래서 열린 결론이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할 게 뻔하므로.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숨결을 거둘 때까지 싸울 것이다.>(25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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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독특해요. 초반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중반부터 몰입하게 됐어요. <큰 가슴의 발레리나>에서 주인공은 셋이에요. 바르브린 그리고 시니스트르와 덱스트르. "... 장래 어마어마한 모양이 될 나의 가슴, 모든 것을 망쳐버리게 될 그 가슴에 대하여. 왜냐하면 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젖가슴은 발레리나에게는 음악가가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저주이다." (10p) "나의 가슴들은 나를 인질로 잡고 있다. 그들은 나의 정체성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세계와 나 사이의 메시지를 엉만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 춤을 출 때면,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나는 이 물렁물렁하고 불안정한 요소를 통제할 수 없고, 이 뼈 없는 기관은 나를 축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70p) 바르브린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큰 가슴 때문에 절망에 빠졌어요.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굶고, 압박붕대로 가슴을 졸라매고, 그리고는 손목을 그었지만 해결은커녕 부모님까지 고통에 빠뜨리고 말았어요. 특히 어머니는 무거운 가슴 때문에 겪는 문제를 딸에게 넘겨준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셨어요. - 덱스트르? - 왜, 시니스트르? - 끝도 없는 권태 같은 게 느껴져, 넌 안 그래? 깊은 권태. 언제부터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 어이구... 그게 그러니까 언제인가 하면... - 영역에 경계표가 생겼어, 시니스트르. 삶이 우리를 그 지루한 일상의 끈끈이 속으로 끌어들였어. 솔직하게 말해 봐, 시니스트르, 스물두 살짜리 젖가슴 하나가 삶으로부터 아직 뭘 더 기대할 게 있는 걸까? - 끝나는 걸 시작하는 거지. - 난 그게 무서워. (259-260p) 이제 알겠죠?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는 바로 바르브린의 젖가슴이에요. 독립된 인격체마냥 젖가슴이 자신들을 쌍둥이 형제라고 표현하며 바르브린의 삶을 지켜보고 있어요. 슬프게도, 우리는 수술팀에게 절제되었고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잃었어요. 그래서 분노했어요. 우리는 복수의 욕망에 사로잡혔으나 그녀가 죽으면 우리도 죽을 것이므로 냉정을 되찾았어요. 동물이나 사물을 의인화한 경우는 흔하지만 신체 일부를 따로 떼어 의인화하는 건 상당히 놀랍고 기발한 상상이에요. 왜냐하면 발레리나를 꿈꾸는 바르브린이라는 여성에게 한 쌍의 큰 젖가슴은 비극의 원인이기 때문이에요. 여성성을 상징하는 젖가슴이 저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그 당사자,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에게 남성의 성을 부여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왜 젖가슴의 여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 생각해보세요. 다 읽고나서야 처음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세포의 민주주의로, 내 가슴들과 내가 분할되지 않은 세포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거야." (7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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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슴의 발레리나 베로니크 셀 장편소설 나는 영양실조에 걸렸고, 압박붕대로 가슴을 졸라맸고, 그리고는 손목을 그었다. 이 모든 것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가슴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p.140 젖가슴은 살짝 뾰족해졌고, 조심스럽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당황한다. 나는 그들의 때를 모르는 재성장, 전략 적인 재조직, 광신적인 재생이 무섭다. 그들의 해로움을 제거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나는 그들이 1센티미터라도 더 자랐다는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졌다.p.160 바르브린은 발레를 한다. 큰 가슴으로 인해 발레를 하지 못할까봐 가슴이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쓴다. 가슴에 각질이 생길 정도로 매일 붕대로 감싸서 압박을 하기도 하며, 다이어트를 해서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한다. 심지어 손목을 긋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결국은 가슴 축소수술을 하였다. 이 책은 바르브린의 시제와 바르브린을 여주인으로 둔 가슴 양쪽 각각 덱스트르, 시니스트르 라는 자아의 시제를 사용하여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덱스트르, 시니스트르가 각자 느끼는 것도 다르며 어떤 것을 원하고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떤 생명력을 가지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알 수 있다. 가슴이 원하는건 빵과 오르가즘이다. 이것은 바르브린의 자아와는 별개인 것으로 느껴진다. 이들은 가슴 축소 수술을 당해도 성실한 일꾼, 수선공, 꼼꼼한 재봉사가 되어 세포 하나하나를 보강하여 다시 자신을 소유하게 된다. 어떻게든 가슴을 없애버리려는 주인과는 다르게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는 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 바브르린은 조슈를 만나게 된다. 조슈의 에로틱함에 의해서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는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브르린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는 모유를 생성하여서 젖가슴의 역할을 하게된다. 아무리 없어졌으면 하는 살도 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이 없다. 하지만 발레리나에게 큰 젖가슴은 음악가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글처럼 큰 젖가슴이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르브린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별개이며 억압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돼. 그게 정말 필요한 걸까.라고 응, 필요해, 덱스트르. 살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거든. p.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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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슴의 발레리나
바르브린은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라고 불리는 한 쌍의 젓가슴을 갖고 있는 발레리나 지망생으로 그녀의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발레에 재능을 보였지만 2차성징이 시작되면서 보통의 발레리나에게는 없는 큰 가슴을 물려받고 여성의 아름다움인 젓가슴을 증오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바르브린의 엄마 역시 마른 발레리나일수록 각광을 받다보니 결국 젓가슴 때문에 발레리나의 꿈을 좌절당할 수 밖에 없었기에 자신의 딸인 바르브린 역시 자신과 같은 체형으로 몸이 점차 변하는 것을 보고는 학업을 권하지만 큰 가슴의 발레리나 바르브린은 꿈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바르브린에게 있어 젓가슴이란 그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요소가 아닌 저주스러운 살 덩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른 발레리나를 원했던 발레계에서 그녀는 점차 지처갔고 그녀는 자신의 젓가슴을 감추기위해 붕대를 이용해 감싸다 염증이 생겨 고생하다 결국 유방축소술을 하기에 까지 이릅니다. 이 소설은 여성의 육체적 조건이자 상징인 젖가슴이 여성의 주체적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따로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젓가슴은 과연 진정으로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위한 요소인 것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 소설은 너무 큰 가슴 때문에 절망하는 발레리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젓가슴이라는 여성의 육체적 특성을 통해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 특히 발레리나에게 요구하는 아름다움의 정형성에 대해 생각해보게한다. 이 소설을 통해 여성의 성과 몸에 관해 본질적인 고민을 할 수 있었고 사회가 여성에게 원하는 여성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적나라한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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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왜 이 책을 저술했을까? 이 책의 작가는 여자의 성과 여자의 몸에 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다루어 여성성의 상징일 수 있는 가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
핵심 내용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바르브린이라는 발레리나 지망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 고양이를 따라 하면서 발레리나를 꿈꾸는 한 소녀에게 앞으로의 꿈에 걸림돌이 될 젖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책의 중반부에서는 큰 젖가슴으로 인해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와 젖가슴의 독백을 통해 젖가슴과 주인공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주인공은 최대한 가슴을 작게하려고 노력하고 젖가슴은 악조건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커지려고 노력하는데 주인공은 꿈을 위해 결국 가슴 축소수술을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젖가슴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아이를 위한 가슴으로 점점 긍정적인 부분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은 젖가슴의 독백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나에게 적용한다면? 앞으로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도록 도와준 좋은 책으로 페미니즘을 부정적인 부분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여성의 고민을 다루는 모든 부분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의 생각은! 나는 베로니크 셀 작가가 쓴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여성들에게 여자의 성과 여자의 몸에 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다루어 여성에 대한 원초적인 고민을 한 번 더 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첫째, 다른 소설처럼 주인공이나 작가가 서술해주는 책이 아니라 주인공과 젖가슴의 독백이 한 번씩 이루어지면서 여성의 상징이라고 하는 젖가슴의 생각을 알고 주인공이 왜 젖가슴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고 둘째,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 책을 통해서 페미니즘이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닌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며 셋째, 발레라는 몸의 언어를 통해 여성의 상징일 수 있는 우아함과 큰 가슴의 대조를 통해 여성의 상징들의 대비가 되어 여자의 성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베로니크 셀 작가가 쓴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여성들에게 여자의 성과 여자의 몸에 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다루어 여성이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고민을 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의 전문적인 지식인 발레 내용에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그 부분이 아쉽다.
내 마음속에 남은 문장
주인공에게 큰 가슴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 발레리나라는 존재는 왜 가슴이 커서는 안될까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은 가슴이 터지는 발레 무대인 '큰 가슴의 발레리나'라는 연극을 하기로 한다. 여성이 비상하기 위해 여자들의 신체 구조에서 가장 무겁다고 여겨졌던 것이 가장 가벼워지는 것으로 된다는 내용으로 가슴을 터트린다는 연극이다. 이 상황을 알게 된 두 젖가슴의 대화이다. 만약 주인공이 발레를 하지 않았다면 가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아직까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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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몸에 큰 불만 없이 비교적 만족하며 살려고 하지만, 제 몸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위가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평균보다 큰 가슴입니다. 크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분도 있을테고, 작아서 컴플렉스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한테는 이 큰 가슴이 어깨 통증의 유발자요, 맞는 속옷을 찾지 못해 좌절하게 만드는 원흉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져서 사이즈 때문에 고민할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예쁘고 저렴한'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속옷을 구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저한테는 별 의미 없는 살덩어리인 두 짝의 가슴은 조금은 불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가슴의 발레리나>의 주인공인 바르브린에게 젖가슴은 그저 무거운 두 개의 짐이 아닌, 가볍게 날아야 할 발레리나를 지상으로 추락시킨 두 개의 추와 같았습니다. 고양이를 보고 발레의 기본 동작을 배운, 본인피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발레를 했던 바르브린은 선생님으로 부터 '콩세르바투아르'를 목표로 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레에 재능을 보입니다. 하지만 가슴! 바르브린에게 달린 두 개의 가슴,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가 자신들의 야망을 뽐내며 더욱 더 뾰족하게 솟아날수록 바르브린 본인의 꿈인 발레리나와는 멀어져만 갑니다. 책이 진행되는 내내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정신을 어지럽게 합니다. 엄청난 수다를 통해 자신들의 욕망 - 남성에게 만져지고 싶다던가, 환희를 느끼고 싶다던가, 이성의 관심을 받고 싶다던가 - 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그에 반해 바르브린은 자신의 욕망인 '춤을 추고 싶다'는 것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심지어 남자친구와 아이에게 까지도요! 자신에게 닥친 일들인데도 바르브린이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주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일을 서술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슴. 바르브린의 몸에 붙어서 바르브린을 형성하는 신체기관중의 하나이면서 바르브린을 주인이라 부르지만 결코 주인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듯한 그 가슴. 바르브린이 무엇을 원하는가 보다는 자신들의 본능적 욕구들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인 두 가슴! 가슴들의 활약으로 바르브린은 신체의 주인이지만 자신의 신체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합니다. 첫사랑인 올리비에를 만나게 해준 것도 가슴이었으며, 솔렌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조슈를 선택한 것도 가슴의 일이었습니다. 솔렌에게 젖을 물리며 처음으로 제 기능을 해낸 가슴이지만 그것 역시 온전히 바르브린을 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성이 가진 신체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키지만 정작 여성성의 상징이라 생각되는 '가슴'을 여성의 신체에서 배제시키는 발레는 두 짝의 가슴과 그로 인해 꼬이는 남자들, 주변 남자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바르브린과 너무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바르브린이 발레를 그만두고 현대무용을 선택한 뒤, 젖가슴 두 쪽을 포함한 신체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가슴이 지상을 향하게 하는 추가 아니고 그녀를 하늘로 솟아오르게 할 풍선이 되도록 만드는 모습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감동을 잘 전달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제 배움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두 쪽의 가슴의 엄청난 수다와 바르브린의 가슴을 향한 세상의 시선과,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는 (주로)남성들의 시선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을 기억나게 하면서 울컥! 하고 혈압 오르게 했지만, 그 모든 화를 이겨내고 맞이한 결말은 희망적이었기에 꾹 참고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르브린이 젖가슴(남성,제도,기득권,타인의 시선 등)에 끌려다니지 않고 신체의 온전한 주인이 되면서 날아오를 수 있었듯이 저를 포함한 이 시대의 여성들 또한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날아오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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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틈바구니에 끼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것이다. 웃기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종족들이 여자들이다. 그런데 그녀들의 글은 수다보다 더 감각적이며 모호하고 애매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이 문학의 거대한 잔칫상에서 말석이라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공감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인지 그냥 어머니와 아내. 딸에 대한 배려인건지 모지리중 하나인 나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확실히 모르겠다. 중반까지도 재미도 공감도없는 이 책을 그만 던져버리고 대충 서평을 쓰려고도 했는데 대체 무엇을 써야할지 몰라 한챕터씩 더 읽어보게 된 ..근래 드문 일중 하나였고 책였지만 .. 역설적으로 서평을 써야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더 읽다보니 뒤늦은 재미와 몰입이 있었다. 이 소설이 이제껏 본 것중 가장 확실한 페미니즘 소설이구나 싶다. 이 책의 제목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먼가 언밸런스하고 역설적인 상황을 강조하는 뉘앙스다. 사람은 남여불문 되어지고 싶은 것과 되어가는 것의 불협화를 숙명처럼 경험하게 되는 듯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발레리나를 꿈꾸지만 커져가는 가슴으로 인해 좌절의 예감을 갖게되며 또 그 가슴이 의미하고 지향하는 바를 의식하게 되어가고 경험하게 되는 과정을 자신과 가슴은 따로 국밥처럼 각자의 독백과 별개의 경험으로 처리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저자가 소녀의 가슴을 의인화해서 가슴의 열망. 희망. 감탄. 열락을 말한 것과는 좀 다르지만 나도 내 페니스가 아침에 텐트를 치거나 하루 첫 소변을 볼 때 또는 비 오는 날 야심한 밤이면 내게 난 오줌만 싸는 수단이 아니란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을 이해하고 소통한다는 일은 자신의 육체를 이해하고 소통한다는 말이기도 한 것일까..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내 가슴을 사랑한다. 우리는 끝났다." 소녀적 감성은 이런 상황. 상태를 수용할 수 없으리라. 그럼 나는 그의 시선을 즐긴다. 또는 만끽한다고 말하는 여자들은 변절일까 타협일까 수용일까.. 그녀는 늘 부유하는 듯 하지만 젖과 꼭지는 일관되게 빵과 오르가즘을 달라고 요구한다. 육체는 타협해야 할 대상일까 극복해야 할 대상일까..쉰 넘은 나도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숙제다. 발레리나를 포기하지 못해 유방 절제술을 경험하고 손목을 그으며 자살까지 시도했지만 우여곡절끝에 다시 솓아오른 젖꼭지들은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만끽하고 변조해서 부른다. 페미니즘은 실존주의로 가는 길의 어느 한 정거장일까.. 사르트르와 평생의 동반자관계라고 홍보하고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보봐르는 말만 그럴싸한 페미니즘의 짝퉁이 아닐까 싶은 의심도 자다 깬 이 새벽에 문득 스쳐간다. 발레리나를 꿈꾸는 여인과 가슴만의 이야기인 소설이지만 한 챕터에 저자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 모든 질문들이 반드시 하나의 대답만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의심이 허용되며, 수련과정은 여러 개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의 미래는 온전히 설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나는 내가 따라가야 할 방향에 대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라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일의 흥미로운 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런 말들은 소녀가 아닌 세월과 굴절. 전락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알베르 까뮈는 실존의 카오스에 벽을 느끼고 좌절을 맛보는 것으로 그쳤지만 21세기의 실존주의는 카오스 그 너머에 관심과 흥미를 갖는 게 아닐까 ..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의 몫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며 어떤 것은 난해하고 어떤 대목은 이해불가이며 어떤 부분은 공감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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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형태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처음 몇 페이지는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좀 어려웠다. 몇 장을 읽고 나서 파악이 되었지만... 화자가 여럿인 까닭이다. 주인공(여)인 바르브린과 그녀의 젖가슴 형제 (덱스트르, 시니스트르)가 바로 화자이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과 태아 시절 그리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장면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발레가 운명이자 고양이를 모델로 발레를 연습한 턱에 걸음이 느렸던 바르브린. 그리고 그년의 젖가슴들은 교대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서두에 대놓고 언급하듯이, 가슴은 여자에게는 자신을 뽐낼 수 있는(많은 여자들이 상대적으로 큰 가슴을 선호하기에) 여성성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발레리나에게 가슴은 좌절의 상징이다. 바르브린이 꽁꽁 싸매고 감춰도 보고, 결국 축소술까지 감행할 정도로 크나큰 핸디캡이니 말이다. 꼭 작곡가에게 청각을 의미한다는 비유까지 들 정도이니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가슴 덕택에(엄마도 발레를 했지만 큰 가슴 때문에 포기한다.) 바르브린은 좌절한다. 자살시도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가슴은 한편으로는 아이를 먹이는 중요한 밥줄(?)이다. 발레리나로의 가슴을 필요 없는 살덩이에 지나지 않으나, 엄마로의 가슴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발레리나를 위해 포기했던 가슴이 아이에게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포기한 가슴은 다시금 엄마의 가슴 역할을 하기에는 손상이 되었다. 바로 그 두 가지의 갈림길이 선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이다. 처음에는 왜? 단지 가슴에 대한 이야기고 주인공이 발레리나여서?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품 속에 뭉글하게 가라앉은 여성의 이야기가 점점 진하게 등장한다. 임신에 대한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기다림 없이,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끝내버리는 남자의 일방적인 섹스 안에서 두 젖가슴 형제는 쏟아져들어오는 체액들을 향해 바르브린을 대신해 무자비하게 외친다. 그 결과 여자는 자신의 몸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낼 수밖에 없다. 돈이 필요해 시작한 모델 일에서조차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단지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 체크하고 기웃거리고, 그녀의 가슴 위에 슬로건만 달아놓을 뿐이다. 이 소설은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바르브린을 대신해 젖가슴 형제의 입을 빌려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덕분에 늘 페미니즘 소설들이 갖고 있는 극단적 상황들이 이 소설 속에도 등장하지만 상대적으로 위화감이 덜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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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가슴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발레리나의 이야기라니, 프랑스 소설은 개인적으로 어렵게 느껴지기는 한데, 워낙 독특한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리나 궁금하였다. 예상대로 정말 독특한 이야기였다. 가슴이 너무 커서 불행한 발레리나라니... 어머니로부터 큰 가슴의 비극을 물려받은 바르브린은 발레리나로서의 삶에 큰 좌절을 안겨준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젖가슴이 발레리나에게는 그저 도약을 방해하는 무거운 살덩어리일 뿐이다. 그녀가 미국으로 건너와 수백 명의 무용가들이 살고 있는 건물에 들어섰을 때 그녀가 청소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그녀의 절망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지나치게 큰 가슴을 소유한 그녀의 모습은 무용수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그녀는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은 그녀의 형편없는 영어라든가, 관리인이 그녀를 청소부로 오해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발언이 그녀에게 힘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녀는 그 관리인이 나이기를 원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녀의 암담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젖가슴은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인데 덱스트르는 오른쪽, 시니스트르는 냉소적이라는 뜻이므로 덱스트르가 정공법을 택하면, 시니스트르는 가볍게 치고 빠지는 식으로 유머러스하게 상황을 말하지만 씁쓸함은 더 배가 되었던 것 같다. 여성들은 모두 큰 가슴을 가지기를 꿈꾸는데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을, 가슴에 달린 두 개의 정박 부표를 갖추고 있어야만 진실로 여자라는 것을 여성들에게 설득하는 말을 평생 들어야만 했던 저주받은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가엽게도 자살시도 후 유방축소수술을 하고서도 큰가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큰 가슴은 발레리나에게 음악가가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저주였지만 아픔을 겪은 후 비록 고전 발레를 하기에는 부적합했으나 현대무용을 통해 쾌락의 자기반영성 안에 빠져 있던 젖가슴이 풍선이 되어 그녀를 하늘로 들어올리게
표현할 수 있어서 그나마 참 다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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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 속 페미니즘의 대부분은 이른바 '권리요구'로 정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하면 이는 오래전부터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으로서도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것이지만, 이를 떠나 반대로 내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내보자면, 결국 오늘의 페미니즘이란 일종의 계급투쟁의 형식을 빌린 '사회 변화 운동' 으로서 한층 더 극단적인 것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그렇기에 결국 페미니즘은 보다 격렬하고, 복잡하며, 또한 새로운 가치를 세상에 드러었으며, 이에 이 소설의 이야기도 그 나름 페미니즘의 분류법으로 들여다보자면, 소위 '탈 코르셋'의 가치를 내보인 소설로서 이해 할 수 있을것이다. '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자' 또는 '나 스스로의 믿음과 자아실현을 위하여, 사회에 만연한 어느 가치관에 저항하자' 이처럼 세상속에서 주장되는 탈코르셋의 정의를 마주하며, 과연 독자는 어떠한 감상을 가지게 될까. 이에 혹 저자가 표현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마주한다면, 나름 그 선택과 정의에 대하여 관대한 시선을 던져줄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소설 속 주인공은 나름 저자의 아바타로서, 그 개인의 정의를 대변하는 존재로 비추어진다. 물론 이에 어느 정도의 사실이 표현되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 주인공이 오롯이 자신의 추구하고자 하는 삶을 위하여, 세상 속 경직된 사고방식을 벗어난 '선택' 을 할 수 있는 위인으로서 비추어지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라 할 만하다. ? 이때 주인공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발레'이다. 그러나 오늘날 발레란 어떠한 것인가? 이미 여성의 입장에 있어서, 발레의 세계는 실력과 의지로 성공하고 또 개척 할 수 있는 친 여성적 무용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을 배신한 것은 그 스스로의 몸뚱아리다. 이미 소설의 제목에서도 비추어지듯 주인공 자신과 함께 성장한 (여성형)가슴이 그 본인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최대의 방해물이 된 것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소녀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모든 순간마다 발레를 위해 가슴과 싸웠다. 극단적인 다이어트도 해보고, 압박붕대로 가슴을 칭칭 동여매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발레를 할 수 없을것이라는 스트레스로 하지말아야 할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어른이 되어,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을때, 그가 선택한 최대의 결심 중에는 자신의 몸에서 가슴을 때어낸다는 것도 자연스레 포함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축소 수술인 것 같다) 가슴을 포기한 주인공, 그리고 뜻밖의 혼전임신과 출산으로 마주하게 된 (편모)어머니로서의 삶과, 발레리나로서의 삶...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자식에게 모유를 먹일 수가 없다. 때문에 그녀는 마음 한구석 아픔을 느끼게 되기도 하지만, 허나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자립을 포기하고, 온전한 어머니가 된다는 선택 또한 절대로 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삶! 나의 인생! 그리고 내가 불러온 결과를 오롯이 마주하며, 그녀는 스스로를 단순히 어느 자식의 엄마로 불리우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다 그녀는 발레리나다. 발레리나이자,어머니다. 어째서 이 두가지의 삶이 공존 할 수 없다 생각하는가? 어째서 주인공이 이 두가지의 삶을 버텨낼 수 없을것이라 생각하는가? 이에 혹 위처럼 부정적인 감상과 정의를 내린 독자가 있다면? 적어도 이 주인공이 말하는 주장에 대하여 보다 믿음을 가져보기를 바란다. 적어도 그녀는 자주적이고 강한 여성이 아닌가? 정말로 이 주인공은 스스로의 목표를 이루려는 자, 스페셜리스트라는 단어에 걸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