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책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고등학교 사회, 윤리 혹은 정치경제 교과서를 통해 그의 이름과 책의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상당 기간이 흘러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볼테르의 <관용론>, 존 로크의 <통치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과 함께 짝짓기 시험을 대비했던 기억이 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현재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본 책과 범우사에서 나온 또다른 번역본,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범우사 번역본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으나 이전에 범우사에서 나온 다른 고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접해보고 실망감을 느꼈던지라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 게다가 범우사 번역본 보다는 서울대출판사 번역본이 판매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좀더 신뢰할 수 있을 것으로 미뤄 서울대 번역본을 읽었다. <에밀>을 정식으로 읽은 것이 아닌, 책세상문고판으로 1부만 번역된 책을 읽었고, 같은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바 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을 접함으로써 그를 세번째 만난다. <사회계약론>은 본래 루소가 젊은시절부터 평생의 대작으로 꿈꾸었던 <정치경제론>에서 발췌해 내놓은 저서이다. 그는 <정치경제론>을 집필하던중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느끼고 이미 집필된 논문 중 <사회계약론>만을 따로 묶어 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루소는 책의 앞머리 '독자에게'에서 밝혀두고 있다. 제 1장의 제 1부의 주제에서는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루소의 명언이 나온다.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있다" 이후로 그는 초기사회, 강자의 권리, 노예제도, 사회계약, 주권자, 물건, 사회신분, 생산권, 법, 국민, 입법, 정부, 투표, 선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사회계약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펼쳐놓고 있다. <사회계약론>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에 따라 몇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장들이 글이 길지 않은데다 쉽게 쓰여져있어 소설읽듯 읽어도 금방 눈에 들어온다. 1부에서는 사회계약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한다. 초기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강자와 권력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는지, 노예와 권력의 관계는 어떠한지, 사회계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에 간하여 기본적인 사안들을 다룬다. 2부에서는 주권, 법, 국민의 관계에 대해서 논한다. 주권은 전체 의사의 행사로서 양도될 수도 없고 분할될 수도 없다. 3부에서는 정부와 정부의 여러 형태, 즉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2부에서 말한 법을 집행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하며, 정부의 한 형태인 민주정치는 전 국민, 혹은 절대다수의 정부이고, 귀족정치는 소수에 의한 정부, 군주정치는 한 사람에 의한 정부형태이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로마 정치사를 예로 들며, 전체의사는 때때로 잘못 인식된다 해도 결코 파괴될 수 없고 항상 절대다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루소가 살던 시기는 18세기로 계몽주의자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몽테스키외, 디드로, 홉스, 볼테르, 로크 등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등장했던 시기이고, 이들이 함께 뭉쳐 백과전서파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루소가 디죵 아카데미의 논문현상공모에 응해 상받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출간하고,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내놓으면서 저들로부터 멀어져가게 된다. 심지어 볼테르는 그를 향해 "인간을 네 발로 기는 짐승으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이는 볼테르 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관계를 맺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었고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루소를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루소는 사회와 문명 자체를 비판하고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회적 질서를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모든 악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잘못 통치한 인간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크게 위안이 되고 매우 유용한 것을 알게 할 것이다"(<나르시스>의 서문) 루소는 결국 인간을 야만의 상태로 되돌리려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법의 인위적이고 예속적인 체제 가운데 자연적 법의 순수한 자유를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은 그를 오해함으로써 루소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루소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은 그의 저서를 보면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전에 타인을 비판을 의식하며 어떤 문제가 제기될까 하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은 글쟁이에게는 지나친 기대다. 대개의 비판은 글이 출간된 이후에 벌어지며 다수의 비판 속에 소외된 저자의 목소리는 이미 그들에게 묻혀버린 뒤다. 루소는 그래서 그들에게서 멀어져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내는데 그것이 <고백록>이고, 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다. 또,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자기 스스로를 위한 글을 묶어냈는데 이것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추가 언급할 것은, 루소를 이해하기 위해서 로크의 <시민정부론> 혹은 <통치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더불어 함께 읽으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아직 <사회계약론>이외에는 본 책이 없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그렇다. |
| 우리들에게 과연 "古典"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저자가 누구인지, 대략적인 내용이 무엇이지는 알지만 실제로 읽어보지 않은 책'이란 이미지가 강할 것이다. 누군가가 "고전은 시간이란 엄격한 체를 통과하고 남은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새삼 되새기며 장 자크 루소의 "사회 계약론"을 읽었다. 지금 "사회 계약론"을 독파한 후의 느낌을 말하자면, 루소가 "나는 이 책 안에서 일반적 고찰에서 벗어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듯이 사회학과 정치학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내게도 비교적 이해가 용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루소가 하려고 했던 말을 100%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지라고 그 대의와 핵심에는 근접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4부가 각각의 소주제에 대한 비교적 짧은 고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지치지 않게 하고 번역 또한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루소가 "사회 계약론"에서 표명하고 있는 정치사상의 요체는 "권력의 합법성"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합법성 혹은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정권이 국민의 전체의사 즉, 주권 위에 군림하였던 우리에게는 "사회 계약론"의 주장은 파격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루소가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함을 인식하면서도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직접 민주제를 강력 옹호했던 점 또한 현재 한국 사회의 대의 민주정치의 여러 폐단 앞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대략 25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오늘날에도 실효성을 가지며 깊은 감동을 준다는 것이 바로 고전의 진가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루소가 자신의 책에 대해 한 말 - "나는 새삼 나의 최신작을 당신에게 추천할까 합니다. 비록 이것은 소설처럼 빠르게 보급될 성질의 것은 아니라 해도 나는 그것이 그런 식으로 소모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시대를 위한 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을 인용하며 자신있게 여러분들도 일독하기를 권한다. |
| 어거스틴에 따르면 이 땅에 두나라가 있다. 인간이 만든 국가와 하나님의 백성. 인간이 만든 국가에 대한 정의는 루소와 동일하다. 다수의 전체의사의 결집과 그 힘, 곧 법에 의해 성립되는 계약체.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에게 있어 진정 의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일뿐 이 지상의 국가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로마의 멸망을 즈음하여 그의 이런 주장은 로마를 지상의 유일한 국가로 여기던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소속은 국가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루소는 국가의 재건을 이야기한다. 중세와 절대주의 시대의 군주주의라는 어처구니 없는 전통을 깨고 원래의 국가이미지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로서의 국가가 무엇이며 어떤 형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할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에게 가장 바람직해 보이는 귀족정치로의 회귀의 모델은 로마이다. 루소는 계약에서 출발하여 여러국가의 상황에 맞는 정부의 형태와 인류역사의 경험상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라 하더라도 잘 운영될 수 있는 실행의 방법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논의의 중심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의 이기심의 기반위에서도 인간전체를 위한 유익하고 균형잡힌(뭐 비록 영구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 국민을 위한 국가, 비교적 무식한 사람은 무식한대로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대로 만족스런 국가. 이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장 [시민종교](국가와 결합된 종교를 뜻한다)는 전체논의중 부가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길고,루소의 어조 또한 단호하고 가열차다. 루소의 의견에는 이미 국가와 영합한 종교도 물론이거니와 순수한 기독교는 더더욱 국가의 존립에 위협적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의 대안은 종교의 순화 즉 국민의 윤리의식,애국심 고양과 법의 신성성 부과의 한도에서만 종교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여러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여 국가에 손을 못대고 타종교와 경쟁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개념 위에 유럽 근대국가는 세워졌고 그들은 시민종교의 불관용성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사제 종교인 가톨릭은 교리에서 불관용을 없앴고, 국가종교인 유럽신교와 정교회는 사회주의,자본주의 한때는 공산주의조차 모두 [포용]했다. 아니 거기에 흡수되었다고 하나? 더이상 국가간의 이익의 충돌은 있어도 불관용은 없다. 로마시대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국가는 악의 결집체였다. 국가의 탄생은 계시록에서 멸망받을 짐승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불러내어진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은 그래서 루소가 보듯이 계약국가의 적이다. 그들은 딴 주머니를 차고 있다. 로마시대 이들은 공공연히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공직의 부름을 거절했고 그것 자체를 영예로운 책임에서 악하고 자아에 함몰된 권력욕으로 바꾸어 불렀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살인를 거부했다. 그 신은 로마와 연합하고 로마를 축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삽시간에 퍼져나가고 나라의 기강을 뿌리에서 허물고 대제국을 소멸시켰다. 국가라는 체재에서 볼때 결코 건강하지 못한 백성들인 셈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지키는 신은 그래도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와 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연합의 적이다. 그는 국가의 시스템과 체제 혹은 반체제와 결합한 종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하나님이었다. 그 제자들은 결코 국가를 따를 수 없었다. 루소와 기번은 이 점이 안타깝다. 이상적 국가형태를 왜 거부하는가? 엘룰은 이것이 기독교인의 국가에 대한 관점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가 더 좋은 형태인 것이 인간의 존재와 가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는 그 자신의 자유와 인간됨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루소의 말처럼 개인의 자유와 관점, 개인으로서의 존엄을 담보한다. 국가는 그것을 [사고], 안전과 소유 확대의 기회를 [판다]. 그리스도에게서 보인 것과 같은 인간시스템에 대한 조롱은, 이 매매의 어리석음 곧 생명을 주고 나라를 얻음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생명 즉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서 볼 때 국가는 도리어 그 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시민종교화된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는 아닌 셈이다. 현재 미국의 기독교는 이 시민종교의 불관용을 소유한 채, 무한전쟁을 벌리는 국가를 옹호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 기독교는 반미파와 친미파 혹은, 반노파와 친노파로 갈려지고 있다. 국가에 의해 뒤틀려진 기독교는 더이상 그 순수성을 말할 수 없다. 무한 체제 붕괴의 종교는 루소가 정의한 틀 속에선 살아갈 수 없다. |
|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성과 도덕 및 정의의 요구에 부합하는 가장 합리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원칙을 파악하여 가장 이상적인 입법조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먼저 자연상태의 인간을 상정하되 이를 전쟁상태로 본 홉스와 달리, 자유와 평등의 자유로운 상태로 파악한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날 당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연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 정치적 현실은 이와 반대로 도처에서 인간을 쇠사슬에 얽매어 놓으며 태어날 당시의 그 천부적인 자유를 잃고도 그것이 비합리적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루소는 그 근거를 사회적 계약에서 도출한다. 즉 인간이 자연의 상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더 이상 유지해 갈 수 없을 때 이러한 자연상태는 더이상 존속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각 개인의 힘을 결합시킬 수 있도록 계약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계약을 맺는데 있어서 "각 구성원의 몸과 재산을 공동의 힘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하는 결합의 한 형식을 찾아내되,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울 것'이라는 조항이 필요하게 된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루소는 "각 구성원을 그 모든 권리와 함께 공동체의 전체에 대해 전면적으로 양도할 것"을 주장한다. 왜냐면 각 구성원이 각자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양도할 경우 각자는 다른 성원에게 양보해준 것과 마찬가지 권리를 각기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연적인 일차적 자유를 보다 고차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포기하는 것이고 그러한 때에 비로소 개인의 진정한 자유 및 발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 각자는 모든 몸과 힘을 공동의 것으로서 일반의지의 최고의 지도하에 두게 된다. 여기서 일반의지는 '항상 옳으며 공동의 선 내지 이익'을 그 목표로 하게 된다는 것이 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권은 일반의지를 행사하는 권리이다. 따라서 양도, 분할할 수도 없으며 모든 인민은 평등한 권리와 의무가 부여된다. 또한 법률도 사회계약에 의하여 성립한 일반의지의 표현에 불과하고 따라서 입법권은 인민에게만 속하게 된다. 다만 인민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법을 제정하지 못하기에 인민의 갈길을 밝혀 줄 입법자를 골라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입법자는 주권자가 아니라 주권으로부터 나온 권력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민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언제든지 정부의 집행권자를 해임 혹은 임명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정부는 영토의 크기, 국민의 수, 자질 등에 따른 적합한 형태여야 한다. 요즘 국회가 국민들의 생각을 무시한 채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바가 많은데 그분들은 자신이 단지 '국민의 종'일 뿐 이라는 생각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도 나라일에 무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