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ce upon a time(옛날 옛적에) 혹은 Long long time ago로 시작하는 동화와 현실은 때로는 반의어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나조차도 자조적으로 ‘그렇지, 현실은 동화가 아니지!’라고 말하는 순간이 더러 있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들에 대해 답답해하다 체념했다고 할까. 이해하려면 할수록 미치는 게 부조리함이니까 말이다. 나는 왜 동화를 읽을까? 라는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다. 때로는 동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행복한 결말이 좋았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더 끌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형되는 다양성이 좋기도 했다. 생각건대, 진부하고 말도 안 되는 착한 사람들이 늘 이기는 동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았을뿐더러 다른 여러 장르에서 차용되며 그 위상이 줄지가 않는 이유가 끊임없는 재해석과 변형과 차용과 반론을 유발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동화는 누군가에게는 혹은 어떤 때에는 찬양의 대상이 되지만 반대로는 비꼼과 풍자를 당하고 놀림거리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동화를 동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조금씩 변형시켜왔다. 즉 동화라는 장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움직인 셈이다.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로부터 동화가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면에 잔인함을 숨기고 있기도 했고 연극<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처럼 주인공이 아니라 특정 인물이 주목받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영화<비스틀리>처럼 미녀와 야수를 현대의 실정에 맞게 새롭게 재해석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미국드라마에서는 그림 형제의 후손을 주인공으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동화 속의 잔인한 이야기를 그린 것과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동화 속 주인공들이 현대에 와서 기억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런 걸 보더라도 동화는 쉬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언제나 나는 더는 어떤 동화도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해석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경우 왕자의 입맞춤으로 동화가 끝났지만 페로 동화는 더 이어진다. 아니다. 페로 동화가 원전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이야기가 더 있었다는 표현이 맞다. 왕자의 새어머니가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귀였고, 왕자는 그런 어머니 때문에 공주와 결혼을 한 후 아이들이 생긴 2년 동안,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치게 되고 공주와 왕자는 왕비에 의해 또 한 번의 위험을 무릅쓰고서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덧붙여진 교훈인데, 부유하고 잘생기고 우아하고 다정한 남편감을 얻으려고 기다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평화롭게 잠을 자면서 100년 동안 기다릴 수 있는 여성은 이제 더는 찾기 어렵다고 한다. 페로 시대라면 외려 100년 동안 살 수 있는 여성이 없어서는 아닐까? <빨간 모자>의 경우 소녀는 숲을 지나며 늑대를 만나게 되고, 늑대의 말을 들어 주는 게 위험한 일인 줄 모르기 때문에 늑대와 대화를 하게 된다. 이것이 동화라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장면은 아니지만, 동화라는 걸 벗어버리면, 당연하게 동물인 늑대와 인간은 대화할 수 없다. 하지만 동물인 늑대가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은 늑대가 단순히 동물이 아닌 늑대의 습성을 지닌 인간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이런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기에 이런 부분에서 ‘잔혹한 동화’가 나오게끔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푸른 수염>은 성 안에서 부인들을 살해한 엄청난 부자인 엽기적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부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그 호기심은 푸른 수염에 의해 의도된 것이다. 즉, 부인을 죽이는 이유의 정당성을 호기심으로 덮고 있는 거라고 할까. 다만 다행스러운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푸른 수염 남편이 죽은 후 재산을 상속받은 신부가 한 일은 언니의 결혼지참금과 오라버니들의 군대에서 대위 직위를 사는 것과 자신은 아주 점잖은 남자와 결혼하는 데 보탠 사실이다.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는 잔혹한 문장이 눈에 띈다. <고양이는 즉시 끈을 잡아당겨 사냥감을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가차 없다는 표현이 동화라서 지나치게 잔인하다. <풀을 베는 양반들이여. 조금 있으면 전하께서 여기를 지나가실 텐데 지금 여러분이 일하는 곳이 카라바 후작님의 땅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육신이 온전하지 못할 겁니다.> 진정 장화 신은 고양이는 깡패 혹은 건달인가? 장화 신은 고양이는 반협박과 거짓말로 방앗간 집 아들을 공주와 결혼하게 하였다. 하지만 최고 일등 공신은 장화 신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공주이다. 방앗간 집 아들의 외부와 의상 그리고 부에 혹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 줄 관심이 없이 첫눈에 반했던 것이다. <요정들> 말은 보석이자 뱀과 두꺼비도 된다. 말을 할 때 보석을 쏟아낼 것인가 아니면 뱀과 두꺼비를 쏟아낼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상드리용(신데렐라)> 무난하게 전개되는 익숙히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였지만 마지막에 옮긴이가 덧붙인 교훈에서 실소를 머금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재능과 심성을 타고나도 그걸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대부나 대모가 없다면 출세가 어렵다나! 요즘 사회에서는 조언자(멘토)겠지. 호박을 마차로, 쥐를 말로, 허름하고 낡은 드레스를 세련되고 우아한 드레스로 만들어 줄 조언자(멘토)를 두 눈 크게 뜨고 찾아야 함을 보여 준다. <도가머리 리케> 이 동화는 사교계가 주 관심사인 상류층들을 위한 동화이다. 못생기고 기형적인 리케 왕자.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무식한 공주. 사랑하면 상대방의 단점도 장점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다. 절대 벗겨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듯. <엄지 동자> 우리가 알고 있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는 페로의 <엄지 동자>를 그림 형제가 상당 부분 개작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생한 기근 때문에 생활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다른 동화와 다르게 요정은 등장하지 않고, 일곱째 막내의 기지와 용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도 가족은 버리지 말아야 함을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할까! 이 책에서 가장 문제의 작품이 바로 운문동화<그란젤리디스>이다. 페로조차도 도도한 파리여성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을 직접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페로 동화 가운데 가장 길며, 내용도 아동 독자에게 지나치게 충격적인 사건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분야의 연구자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한다. (그럴만하다.) 이 동화는 우리네 엄마나 할머니들의 삶을 당연하고 이상적인 삶으로 그려놓고 있다. 참고 또 참고 또 또 참고 죽기 직전까지도 참는 여자를 말이다. 문제는 올바르지 못하고 도리어 미친 행동임에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적인 마초이즘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도대체 페로의 여성관은 어떻단 말일까? 이 운문동화 때문에 동화를 넘어서 페로라는 인물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다. 그 당시 시대가 어떠하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여자는 멘탈붕괴.) <당나귀 가죽>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와 재혼하라는 왕비의 유언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신의 딸과 결혼하려는 왕은, 금화를 만들어 내는 당나귀를 희생(부의 포기)시키고도 딸과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당나귀 가죽을 덮어쓰고 도망자 신세인 공주는 살짝 의도적으로 왕자를 자신에게 이끈다. 다행히 왕은 마지막에 정신을 차린다.
동화 장르가 샤를 페로로 대표되는 18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처음 생겼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동화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페로의 동화집>이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림동화> 역시 페로의 동화를 다시 쓰거나 고쳐 쓴 것이다. 페로 동화집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페로 동화는 진짜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었다. 그런 의문에도 이 동화를 읽히기 바랐다면 페로가 살았던 당시 시대가 어땠을까? 페로가 살았던 시대는 17세기 후반으로 프랑스가 근대화로 가는 길목에 있을 때였다. 빈부격차가 심했고 보수주의에 반하여 진보주의가 대두하기도 한 혼란기였다. 페로는 중년에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아이들을 정성껏 키웠는데, 동화도 그의 아이들을 위해 썼다고 알려졌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점은 동화가 끝나고 난 뒤 마지막에 교훈(모랄리테)을 붙여 놓은 것이다. 이 교훈들이 어른들이 들어도 여간 날카롭고 서늘한 게 아니다. 페로가 서문에 밝힌 분별력 없는 아이들의 분별력을 기르게 해주고 싶었던 교훈이 이 동화라면 페로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책에 등장하는 식인귀나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버리는 비정한 부모나 배고픔, 왕따, 살인마 남편 등을 이기는 것은 용기와 신념과 인내와 선과 정의이기보다는 기회주의적인 지혜와 아이답지 않은 신중함, 곰보다는 여우가 되기, 계산적인 현실 감각, 민첩한 상황판단, 적 스스로 무너지게 하기, 이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을 살아가기 위해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잔혹하리만치 날이 선 현실적인 충고이니 말이다. 다만 당시는 폐쇄적인 사회여서 계급이동이 불가능했지만, 페로는 동화에서 가능하게 만든 것과 모든 동화의 끝이 행복한 결말을 지향하고 있어서 페로라는 인물의 현실성 뒤에 숨겨진 동화적 감성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서 동화를 읽어본 적이 있던가? 나에게 동화를 재미 혹은 즐거움 그 이상은 아니었던 같다. 헌데 이번 <페로 동화>는 페로보다 더 멋진 교훈(모랄리테)을 생각해내려고 애도 써 보고, 이상하다고 느끼는 행동에 대해 그 이유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동화라면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건만 페로의 동화는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 꽤 달랐다. 사실 페로 동화에서 소소하지만 이런 점(표현)이 좋았다. <왕자는 먹음직스러운 과자를 게걸스럽게 먹다가 하마터면 반지까지 삼킬 뻔했습니다.> 늘 진수성찬을 먹고 호화스럽게 사는 왕자가 상사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이 만들어 준 과자를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표현은 뭐랄까, 이런 게 진정 동화적이지 않을까? 페로의 동화는 동화라는 환상적이고 가공적인 상상의 세계에 군데군데 현실의 이면을 숨겨 놓은 페로식 보물찾기라고 할 수 있다. 찾은 보물을 보면 기분 좋은 것도 있지만, 때로는 찾은 보물을 보고 욕도 하게 되는 진정한 페로다움이다.
|
|
지은이 : 샤를페로 옮긴이 : 이경의 출판사 : 지만지 누구나 동화는 참 많이 알고 있다. 어떤 식으로 접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유사한 혹은 같은 이야기들을 당연하게 공유하며 기억하고 있다. 비록 중간에 윤색이 되는 경우도 잦아 나와 다른 사람이 약간은 다른식의 과정과 결말을 알고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던지는 교훈은 대다수가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다.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에서 제시하는 메시지가 '정직'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사람의 의식체계를 지배하는듯한 동화의 이 파급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동화는 언제나 거기 까지라는 느낌을 준다. 더 새로울것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어릴적 한 번 들어때만 새롭고 흥미로울 뿐 나이가 들고 어느 순간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게 될 때는 가르침을 위한 텍스트의 역할만으로 인식된다. 물론 동화는 교육에 있어서 상당히 효육적인 교육 컨텐츠가 될 수 있다. 여러차례 만화로 영화로 각색되면서 점점 화려해지지만 기본적인 텍스트의역할은 결국 고정되고 만다. 어릴적부터 들어왔고 지금도 구전되는 동화 텍스트의 고정성에 대해서 비판할 일은 아니다. 어느 이야기나 최초의 원작 부터 변하지 않는 메시지가 존재한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경될 부분도 아니고 설사 변경되었다 하더라고 그 골자는 그대로 유지한다. 메시지 자체가 변질될 경우 이야기의 양상도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메시지 전달에 더욱 주안점을 둔다면 오히려 구전에 있어서 그 부분은 상당히 편리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동화 텍스트의 고정성 탓에 더 깊은 고찰이 외면되기도 한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며, 새롭지 않기 때문에 흥미도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샤를페로의 '페로 동화집'은 매우 참신한 자극이다. 동일 텍스트의 이본들을 비교하여 보게 되면, 본인이 알고 있던 이야기와 다른 부분에서 매우 큰 흥미를 갖게 되고 기본 텍스트의 커다란 틀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대다수 동화들에 대한 인식 포인트는 매우 협소하다. 어렸을때 이미 들은 이야기지만 나이가 들면서 본인이 인상깊었던 장면 혹은 중요하게 생각되는 주제에 따라 자가편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당 이야기에 대한 다른 작가들과 배경을 접하게 되면 알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서 매우 새로움을 느끼게 된다. 고정성의 탈피가 이뤄지는 것이다. 페로의 동화집의 동화들은 원전에 가깝다. 해당 지역과 나라에서 존재하던 민담을 채집하여 각색하고 새롭게 창작해낸 작업과정이 있었겠지만 완성해낸 이야기 자체는 오리지널이다. 진위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안데르센이나 그림형제의 이야기들이 페로의 적지 않은 동화들을 각색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큰 틀이 민담에서 이어졌다는 점에서는 페로 역시 각색의 과정이 있었겠지만 날것의 이야기에 메시지를 담은점에서 페로의 동화는 선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페로 동화집에 소개된 이야기들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낯익으면서도 새로운느낌이 든다. 이러한 감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 언제나 들어온 어떤 동화들의 내용 요소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면서도 구성과 설정의 부분에서는 간혹 생소한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대가 지나면서 이야기의 구전 양상도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하지만 페로의 동화에는 날것의 느낌이 든다. 이것은 가공의 유무를 떠나 이야기 자체가 갖고 있는 생동감에 관련한 이야기다. 거칠면서도 냉혹한 그리고 솔직함이 페로의 이야기에서 물씬 느껴진다. 페로의 동화에는 인간의 모랄관을 뛰어넘는 자연적 욕망에 입각한 본능적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근친상간의 소재다. 물론 이야기 속에서 근친결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 가능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금기된 사항으로 명시되지만 삐둘어진 인간의 욕망이 들어설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마련해둔 것이다. 그런점이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경계 체계이면서 매우 솔직한 전달을 위한 방안인것이다. 비록 삐뚤어진 욕망의 왜곡된 발로의 소재로 채택한 이야기겠지만 매우 자연적인 본능을 끌고 이야기속에 녹인점은 그 어떤 동화 텍스트 보다 더 생생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러한 날것의 감성은 페로의 동화가 어디까지나 아이들을 대상으로한 동화 텍스트의 제약성을 뛰어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페로 동화집의 동화들의 끝에는 '교훈'과 '또 다른 교훈'이 등장한다. 교훈을 이야기 말미에 드러내놓고 보여주게 되면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고정되어 굳어지는 단점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교훈뒤에 바로 뒤 따라 오는 또 다른 교훈은 독자가 깨우쳐야할 현실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재밌게 볼 수 있는 부분이 그 교훈이 어린이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으나 오히려 어른이 접했을때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훈을 제시하는 느낌이 인자한 이야기꾼의 다정함과는 거리가 있다. 쿨하게 전할 뿐이다. 이뿐만 아니다. 해설 부분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샤를 페로의 행보는 어느정도 정치적인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후원자였던 콜베르의 사망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페로의 동화들 속에는 당시 사회적 인식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임이 드러난다. 이야기를 통한 해학과 풍자가 녹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동화의 순수성이 퇴색된것은 전혀 아니다. 그만큼 아이와 어른을 아우르는 메시지와 시사성을 함께 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페로의 이야기가 원전임에도 불구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유동적인 텍스트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