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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시작을 뉴스 기사와 함께 한다. 사실 기사 자체보다는 댓글들에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안에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댓글들이 민의를 대표한다거나 대다수의 사람의 뜻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 중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댓글들을 찾아보는 편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거대한 쓰레기장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댓글은 찾기 힘들다. 대부분이 비난과 비방, 모욕과 조롱이 대다수다. 자극적인 글일수록 공감이 높다.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은 많지만, ‘정의를 논의 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치나 사회면만 그런게 아니다. 스포츠, 연예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정의를 성토한다. 일정부분 그런 정의에 공감하지만, 그 정의가 무섭다.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은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과연 정의감만으로 하는 언행일까?', '잘못을 지적할 만한 상대를 찾아 공격하면서 분풀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례가 적지 않다. (p.28)” 굳이 사례를 들 필요가 없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정치 또는 스포츠 기사 하나만 클릭해 보면 된다. 저마다의 입장에서 의견을 표현한다. 밑도 끝도 없다. 그들은 왜 그런 댓글을 썼을까. 우선 개인적인 이유가 있겠다. 저자는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은 인지 복잡성이 낮다.(p.123)”고 말한다. “입장이 다르고, 입장에 다라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고, 그 판단이 옳다고 설명하기 위해 내세우는 이치가 (p.71)” 다른데, 그것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상대에 대한 이해, 공감의 부재가 의사소통 저해한다. 여기에 익명성에 따른 공격성이 더해지면, 지옥도가 펼쳐진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알아야할 이유가 없다. 모니터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은 살아서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분풀이의 대상, 공격의 대상일 뿐. 이런 상황에서 기사와의 소통, 댓글간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진지한 논의보다는 감정의 배설, 만 댓글에 대한 만 댓글의 투쟁이 벌어진다. 이런 지옥도에서 건전한 논의는 불가능하다. 진중권 교수가 한 말 그대로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개인적인 문제란 말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불만과 분노를 자아내는 사회도 한 몫 한다. 알권리라는 명목 하에 무분별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지금은 많은 뉴스가 시청자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감정이나 어떤 극단적인 반응을 부채질하는 요즘의 보도 방식은 시청자로 하여금 매사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습관을 앗아가고,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게끔 유도한다. (p.105)” 안 그래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생활, 생기 없는 자신(p.212)”에 짜증이 나는데, 뉴스는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 술 권하는 사회다. 감정노동과 세계화 등등 욕구불만과 분노는 점점 쌓이지만, 이를 해소할 방법은 없다. 결국 “잘못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조직을 비난하면서 푼다. (p.212)” “어떤 윤리관으로 움직인다기보다 그야말로 비난하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p.229)” 이런 현상은 막을 수 없는 걸까. 알아듣지 못하니 포기해야하는 걸까. “정의로운 사람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정의감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이 때문에 쌓인 울분을 안전한 형태로 해소(p.324)”하려다 보니 그렇게 “점점 위험한 사람이 되어가는(p.325)” 현실을 막을 수 없을까. 저자는 거기까지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들에 대해 다양한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제시 할 뿐이다. 사실 이런 책이 없어도 원인은 다들 알고 있다. 어쩌면 방법도 정해져 있다. “자신의 이치만을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주장에 근거가 되는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것을 존중하려 가능한 합의점을 찾는 자세(p.74)”를 가지는 것, 이런 자세, 합의와 믿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 실천만 남았다. 오늘 역시 지옥도로 아침을 연다. ----------------------------------------------------------------------------- '이것이 과연 정의감만으로 하는 언행일까?', '잘못을 지적할 만한 상대를 찾아 공격하면서 분풀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례가 적지 않다. p.28 이렇게 보면 자유경쟁이 옳은지, 경쟁을 규제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옳은지와 같은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단지 선택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p.60 입장이 다르면 매사를 보는 구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내세우는 이치도 달라진다. 어떤 이치가 옳은지 판가름하는 일은 결국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내(p.63)가 내세우는 이치가 상대에게 통하지 않아서 곤란할 때, 상대의 이치를 받아들이기 힘들 때, 그래서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입장 차이를 무시하면 아무리 논의해도 서로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가 잘못되었다고 믿어서 상대를 공격하기만 한다. p.64 입장이 다르고, 입장에 다라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고, 그 판단이 옳다고 설명하기 위해 내세우는 이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p.71 "정의는 힘을 가진다."라는 말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힘이 정의가 된다. 그래서 '힘이 정의가 된다.'는 사고방식에 편승해 무력으로 타국을 지배하려는 국가가 나오거나, 자본을 휘둘러 국경의 벽을 넘고 거침없이 착취하려는 글로벌 기업과 그들을 후원하는 국가가 나타는 것이다. (p.73) ... 힘이 정의가 되는 상황에서는 강압적인 승부를 규제할 수가 없다. 강자의 논리가 옳기 때문이다. 그때 필요한 것은 상대의 입장에 공감하며 서로 이해하고 다가가는 일이다. 매사를 자기주장대로만 밀어붙이려고 하면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다투게 되고, 결국 힘센 자의 전면적인 승리로 끝나고 만다. 어떤 이치가 옳은지 다투기만 해서는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이치만을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주장에 근거가 되는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것을 존중하려 가능한 합의점을 찾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p.74 온라인에서 어떤 글을 보고 정의를 지키고자 행동할 때는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실은 부당한 행위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p.79 익명성이 일방적으로 정의를 주장하게 만든다. p.97 객관적으로 판단할 정보가 적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시선에 따라 감정적으로 자극받으면 사건을 극단적으로 바라보게 될 위험이 있다. p.104 지금은 많은 뉴스가 시청자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감정이나 어떤 극단적인 반응을 부채질하는 요즘의 보도 방식은 시청자로 하여금 매사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습관을 앗아가고,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게끔 유도한다. p.105 자기만의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은 자기 관점만을 고수할 뿐 타인의 관점을 헤아리지 못한다. p.112 도쿄대 명예교수를 지낸 정신과 의사 도이 다케오도 자신의 관점에 집(p.113)착할 수록 공감력이 부족해진다고 했다. p.114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은 인지 복잡성이 낮다. 인지 복잡성이란 매사를 다각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p.123 설득을 다루는 심리학에서도 인지 복잡성이 높은 사람을 설득하는 경우와 낮은 사람을 설득하는 경우, 적용하는 설득법이 다르고 설명한다. 가령 인지 복잡성이 높은 사람에게는 양면적 설득법이 효과적이며, 인지 복잡성이 낮은 사람에게는 일면적 설득법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쉽게 설명하면 이점만이 아니라 원가가 좀 높다거나 습득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도 함께 설명하는 것이 양면적 설득법이다. 반면에 어떤 상품을 팔거나 제안을 할 때 그 이점만을 설명하는 것이 일면적 설득법이다. p.126 분노에 사로잡혀 과도하게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어쩌면 그 내면에 어떤 갈등이나 불만이 있어서가 아닐까? p.147 자기주장만 밀어붙이며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거부당해 욕구불만이 생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p.169 자신을 과대평가하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게 된다. p.185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노동> "이 노동(감정노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겉모습을 유지하고 감정을 북돋거나 억누르면서 상대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이런 노동은 정신과 기분을 잘 조절해야 하고, 나아가 각자의 개성을 구분하는 본질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p.187 일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여 이렇게까지 한계에 내몰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스트레스가 자기주장만 앞세우고 타인을 비난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p.192 왜곡된 정의를 내세워 사람이나 조직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소위 악플러들 중에는 이렇게 버릇처럼 타인을 비난하여 자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게 아닐까. p.201 자기합리화, 즉 자신에게 어떤 정당성을 부여해 그러한 이기적인 행위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누군가를 비난하는 행위에 대해) 어떤 정당성을 부여받고 싶을 때, 절호의 기회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타인이다. 그런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p.203 정리하자면,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앞세우거나 잘못한 사람을 비난하는 까닭은 평소에 쌓인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일종의 분풀이인 셈이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생활, 생기 없는 자신에 대한 짜증을 잘못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조직을 비난하면서 푼다. p.212 "샤덴프로이데" 타인의 불행을 더 달콤하게 느끼는 심리 p.222 어떤 윤리관으로 움직인다기보다 그야말로 비난하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p.229 현재 진행 중인 세계화는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의 윤리관을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사회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이긴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사람의 불만과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p.243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므로 밀어붙인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p.258 타인의 입장과 기분은 알고 싶지 않아. p.259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상대방과 소통하는 능력이 없다. p.263 정의로운 사람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정의감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이 때문에 쌓인 울분을 안전한 형태로 해소하려고(p.324) 한다. 그렇게 점점 위험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p.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