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펴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긍지의 날> 1955.2
나는 사실 김수영을 잘 모른다. 철학자 강신주를 좋아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강신주를 오늘날까지 있게 한 사람은 김수영이라고 한다. 가끔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유하지 않고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젊은 날 김수영의 시보다는 테크니컬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시만을 선호했었다. 한마디로 그냥 읽는 재미로 '시'를 읽었다. 나이가 들어 강신주의 철학이 가미된 김수영의 시는 거의 황홀한 지경이다. 강신주는 이 책을 통해 이제 김수영을 버렸다고 선언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김수영을 만나기로 했다. 짧은 사색의 시간으로 리뷰를 남기는 우를 범하지만, 내 내면에서는 언제나 이 시가 살아서 팔딱팔닥 뛰는 심장의 옆에 존재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은 후, 나도 모르게 흐르는 한줄기 눈물에 기대어 김수영을 기억해 보련다. 그렇게 김수영은 내 안에 들어왔다.
한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상은 작가의 삶과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독자인 자기자신을 읽는 것이 독서라고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강신주의『상처 받을 권리』에서도 저자가 강조하는 인문정신은 이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김수영이 깊이 뿌리 내린 인문정신과 똑같다. 저자는 거짓된 인문정신이 아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인문 정신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저자의 인문정신은 김수영에 깊이 뿌리를 내려 잎을 무성히 드리우고 철학의 열매들을 대중에게 열려주고 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삶을 조금 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나같이 시에 문외한이 김수영의 시에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김수영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타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 제대로 살아 내려고 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저자가 이 책으로 인해 김수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김수영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지와 같다. 삶을 살아 내는 것은 이런 절절한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그 소망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려고 했고, 끝내 그럴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제대로 된 시인이 되는 것은 김수영 본인으로서는 사활을 건 문제였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폭포 중에서 -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하는 고독의 순간에, 시인들의 시는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인이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삶을 살아내려는 결단의 순간, 자신보다 먼저 그런 결단을 실행했던 시인들, 세상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폭포가 내는 소리가 들리듯이 폭포를 이루는 거대한 물줄기에 합류하고자 했던 소망은 자신 스스로가 곧은 시가 되고 그 시가 곧은 시를 부르기를 원하는 소망이 엿보인다. 이처럼 모든 글다운 글에는 절망 속에 다시 강해지려는 희망과도 같은 것, 혹은 되찾은 희망속에서도 현재의 절망이 더 몸서리쳐지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자신의 소리,즉 제스처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 이것을 시인의 숙명이자 시인이 그토록 바랐던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인문정신은 태어나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게 끔 교육받았기에 타인에 의해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며 살아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내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타성에 젖은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팽이'를 본 순간 깨달은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를 읽으면 팽이처럼 끊임없이 돌아야 스스로 설 수 있듯이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여 스스로 설 수 있을때 시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삶의 방식'임을 말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김수영의 사상은 시나 삶 어느 경우이든 '단독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단독성은 김수영의 사상이다.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이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통찰의 결여,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 혹은 다른 누구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나의 포즈' , '자기만의 포즈' 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면 '자신만의 포즈'는 저절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정직하게 살아 낸다면,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공명하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들뢰즈가 '단독성만이 보편성에 이를 수 있다고 했듯이 김수영의 사상은 단독성이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 내야만 하는 ' 나 자신, '나의 온몸'이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비솝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메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그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 애 못 낳는 여자 ,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거대한 뿌리 중에서 >
낙후된 현실을 낙후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에 대한 냉혹한 진단이자, 낙후된 현실을 넘어서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며칠 전 진중권이 "우리나라 진보는 죽었다" 고 한 말이 생각난다. 김수영 또한 독재정권에 반한 자유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좌절한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넘어졌다는 자각이 없다면, 일어서려는 마음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낙후된 현실의 자각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굴곡 많은 역사의 흔적과 지우고 싶은 더러운 역사 그리고 더러운 진창으로부터 일어나기 위한 위해서는 과거를 제대로 보아야 하고 정리해야 한다. 어쩌면 소위 진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결국 제자리 걸음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과거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결국 진정한 아름다움은 새로운 삶의 국면을 포착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껏 김수영을 그저 시인중의 하나로만 느껴왔다. 그러나 김수영은 진정한 자유주의자이자 혁명가였다. 카프카가 우리 영혼에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이 책은 내게 커다란 상처로 다가온다. 지금 이 땅에 진보가 사라지고 있는데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 것처럼, 억압된 자유에 길들여진 무서움을 본다. 한 시인이 전생을 바쳐 투쟁한 개인의 단독성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이유 또한 아마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땅에 온 몸으로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없고 자유를 향한 외침이 없다면 이미 진보는 죽어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단독성을 위해 나는 이제부터 김수영을 만나기로 했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을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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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은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이다'. 강신주의 단언이다. 글쎄, 선뜻 동의하기 뭐하다. 김수영 시인을 좋아하지만 한국 인문학의 자긍심으로까지 치켜올리는 데는 멈칫거리게 된다. 왜냐면 시인의 '속좁은' 품격과 내면에 간직한 울분 때문이다. 잘 나가는 소설가 이병주를 향해 "야, 이병주, 이 딜레탕트야." "네 작품에는 울림이 없어."라고 비판한 시인의 뼈있는 말은 실은 자신의 문학세계에 감추어진 그림자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놓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김수영은 평생 울림이 있는 작품을, 자신에게 가장 진지하고 정직한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경제적 압박 하에서 그런 이상을 지키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철칙으로 삼아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던 것으로 미화한다. 저자가 김수영을 통해 한국 인문학의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었는가는 독자들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뭐, 시가 불친절하다고! 시가 불친절하다고 단언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아, 저자가 진짜 시를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모든 문학장르 가운데 시처럼 독자들에게 친절한 장르도 없다. 시인은 결코 자기 시를 이렇게 저렇게 읽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산문은 독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밖에 읽을 수 없다는 독해의 테두리를 지우기 마련이지만 시인은 결코 그런 해석의 틀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결국 친절한 것이다. 가령 김수영은 자신의 시를 '참여시로 읽어주세요.' '모더니즘 계열의 시로 읽어주세요' '민족주의 계열의 시로 읽어주세요' 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는 순간,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죽어버리고 그는 더이상 독자들을 자극할 수 없는 죽은 시인이 되어버린다. 엄청난 상상력과 오독을 허용하기에 시는 그만큼 독자들에게 친절한 것이다. 또한 한 수의 시가 언제 어디서나 읽어도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공간이 바뀌면 그 시에 대한 이해 또한 달라지고 성장하는 법이다. 그래서 시는 독자들에게 친절하다. 언제나 오래토록 독자들의 다양한 열린 해석을 기대하고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인 김수영이 자유의 정신을 고취한 인문정신의 소유자라고 말하면서 시를 불친절하다고 평하는 오독을 저지른다. 한국 시문학의 돈키호테인 김수영 시인은 분명 저자의 이런 오해를 용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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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月 二週次
1. 詩人 김수영(金洙暎)을 만나봅니다. 우선 시인의 詩를 한 편 옮깁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 나무여 영혼이여 /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 정리는 /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 나는 /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 지지한 노래를 / 더러운 노래를 생기없는 노래를 / 아아 하나의 명령을" '序詩' 전문 (1957) - 김수영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 백락청 엮음 / 창작과비평사 / 1992. 2. 이 시집을 엮은이 백낙청은 발문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무릇 누구의 詩건, 또 시 아닌 어떤 작품이건, 살아남은 자들의 지성스런 되살림을 통해서만 그 생명이 존속된다. 그런데 김수영의 경우에는 그러한 뒷사람들의 노력이 특별히 필요한 까닭이 있다. 첫째는 뭐니뭐니 해도 그의 시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른바 '난해시'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김수영의 시세계가 60년대의 싯점에서 이룩된 '참여시'와 '현대시'의 독특한 결합인 반면 그런 형태로는 두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 될 까닭도 없는 - 결합이기 때문에, 모더니즘과 반모더니즘 쌍방에서 오해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3. '살아남은 자들의 지성스런 되살림' 과정에서 이 책 [김수영을 위하여]가 쓰여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김수영 시인의 시에 대해 '난해시'라는 평가는 다소 받아 들이기 힘들기도 합니다. 리뷰어가 텍스트로 삼은 시인의 시집이 1990년도에 초판 발행 되었다는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책(시집)을 구입한 때가 1992년도에 10월 30일 3쇄가 발행된 다음 해입니다. 벌써 20년이란 시간의 흐름이 있군요. 그 때는 솔직히 난해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걸요. 오히려 요즘 젊은 시인들의 詩가 더욱 어렵습니다. 역시 우리 젊은 시인들의 詩를 한 20년 쯤 뒤에 다시 읽어보면 이해가 될까요? 4. 자, 그럼 [김수영을 위하여]속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지은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철학자'라고 소개되는 강신주입니다. 이 분도 잘 아시지요? 프롤로그의 타이틀이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김수영을 아는가, 자유를 아는가'. 김수영을 모르면 자유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라는 뜻? 5. 책은 3부로 되어있습니다. 시인을 위하여, 사람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이 3부는 자연스럽게 [김수영을 위하여]로 됩니다. 지은이는 김수영 시인을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이라고 표현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김수영에 이르면서 무럭무럭 자랄 것만 같던 인문정신이, 시인이 피를 토하듯 시를 쓰며 열정을 담았던 그 기운이 어째서 지금 이렇게 나약해졌냐고 묻고 있습니다. 6. 지은이는 김수영 시인의 위대성을 그는 천성적으로 시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타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 제대로 살아 내려고 했음을 말합니다. 이런 절절한 의지와 소망을 관철시키려고 했고, 끝내 그럴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7. 김수영 시인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해결하기 힘든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토로했군요. 죽음, 가난 그리고 매명(賣名)입니다. 시인은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더는 죽음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바람일 수도 있겠지요. 시인은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구원을 꿈꾸며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가난보다 이웃의 가난, 특히 아이들의 궁핍한 삶을 더욱 걱정했다고 합니다. 매명으로부터의 구원은 문인들 중 특히 시인이 더욱 그러할 것 같습니다.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을 헤아릴 때마다 시인은 "진정한 '나'의 생활", 즉 시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 숙명을 저버리는 자신을 느끼며 자책했다고 합니다. 8. 리뷰어가 리뷰 초기에 소개해 드린 '서시'에 대해 지은이의 글을 간추려 옮겨 봅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는 부분은 시인이 시의 모더니티를 시적 테크닉으로 추구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다고 하네요. "정지의 미"에 소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지은이 강신주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지란 감각과 지성의 이분법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감각은 가변적인 것, 지성은 불변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정지란 계속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며, 감각적인 것이 아닌 지적이고 의지적인 이념을 상징한다." 9. 리뷰라는 공간에 이 책의 향기를 모두 담을 수가 없군요. 아마도 이제껏 나온 '김수영 시인'에 관한 책에서 넓이와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 정말 잘 만들어진 책입니다. 책에 실린 글 내용보다 편집이나 장정에는 사실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을 편집한 편집자 김서연을 주목하게 됩니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애쓴 편집자의 땀과 노력이 한껏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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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단독성(Singularuty)'에 대한 서로 다른 의미접근을 한 두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하나는 자유의 진지한 가치를 말함으로써 삶의 온전함을 말하는 이 책이고, 다른 하나는 『싱글라리티』라는 표제로 들뢰즈가 말한 단독성의 의미가 완전히 야만적으로 사용된, 즉 자유를 억압하는 소비주의의 극한적 방법론을 말하기 위해 이 담론을 끌어댄 책이다. 인문학적 담론이 우리의 삶에서 왜 필요한가를 자문(自問)할 때 그것은 “사회의 문제에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고, “사회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는 데” 유용한 지적바탕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이렇게 사용되지 않고 사회의 문제나 결함을 은폐하거나 그것들에 영합하여 인간의 보편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며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이용된다면 나는 그것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말 할 것이고, 그러한 자들에게 침을 뱉을 것이다.
반면에 저자 강신주가 시인 김수영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하고 이제 자기만의 진지한 삶을 가꾸기 위한 첫 걸음을 위한 이별식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개별자의 단독성을 말하는 것은 그래서 자유의 가치를 더욱 새롭고 진지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담론의 사용이 지성적으로 사용되는 그 실천적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고, 진정한 지식인의 세계와 마주하는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야만을 봄으로써 지성의 빛이 훨씬 명료해졌다는 얘기이다. 나로서는 이 우연한 두 책의 읽기가 다행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더욱 온전한 단독자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시작할 저자의 자유를 향한 실천에 조용한 응원을 보낸다.
1. 검열에 찌든 정신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은 자유의 지대에 살고 있다고 말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자유가 방해받거나 억압되어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어떤 한계에 부딪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경계 지어진 영역에 길들어져 순응하는 데 안주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벌어지는 마녀 사냥하듯 개인의 신념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을 가하는 거대 보수언론 권력과 수구 정치권력의 행태에서는 어떠한 자유도 발견 할 수 없게 된다. 얼마 전까지 권력에 저항하면 빨갱이로 몰아세우던 것이 종북이란 표현으로 화장하고 이 땅에는 단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다양한 신념이나 이념이 들어 설 수 없는 곳이 과연 자유의 지대일까?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이들 권력들은 더 이상 존중하지 않고 있다. 오직 자신들의 이념만이 옳다고 강변한다. 이들과 다른 신념을 말하면 사회에서 곧바로 매장되게 된다. 입을 달싹거리지 못하고 비겁하게 움츠러든다.
권력이‘허용한 자유’만이 자유라는 논리이다. 권력이 허용하지 않은 자유를 발설하거나 행동하면 바로 서슬시퍼런 억압이 시작된다. 그러니 이런 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검열한다. 그리곤 스스로 자유에 어떤 경계를 친다. 체제가 그어놓은 줄 안의 자유 속에 안주하면서 자유의 지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책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김일성 만세...”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시(詩)에 갑자기 서늘하게 굳어버린 청중들의 표정처럼 획일화된 이념의 장막에 갇혀있는 자신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들 초상이다. 시인 김수영은 이처럼 허용된 자유를 자연농원의 동물처럼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깨워낸다. 스스로 자신의 정신을 검열하는 불완전한 자유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2. 단독성(Singularuty)에 대해서
“인간은 자유를 가로막는 저항에 맞서 자신의 자유를 관철하는 존재이다.” 온전히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사람이란 얘기이다. 이것이 억압되면 우린 제대로 된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없게 된다. 무엇으로든 테두리로 제한 된 것들 속에서 철저히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단독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이것을 통찰해 냈다.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고 그것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표현 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던 그는 단독성의 가치를 찾아낸 것이다. 온 몸으로 삶과 부딪히면 세상의 모든 쾌와 불쾌를 감당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명료하게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온 몸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저항에 직면할수록 단독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싱글라리티, 단독성은 그래서 자유의 경계를 자각하게 하고, 오직 자기만의 몸짓으로 겪어낸 것이기에 타인과의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그만의 고유한 것이기에 새롭고, 철저한 자기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어떤 일반성과도, 특수성과도 다른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어떠한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경계로 규정되지 않는 독특성 말이다. 김수영은 치열하게 이 단독성을 추구한 시인이다. 자신의 단독적인 표현을 찾기 위해 교육과 습관이란 고질적인 무의식적 유산조차도 떨쳐내려 했고, 허용된 자유라는 사회가 공유하는 삶의 규칙과는 다른 규칙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아마 이러한 그의 단독성의 추구가 많은 오해를 낳았던 모양이다.
단독성을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 그어놓은‘허용된 자유’를 넘나드는 것으로 보였을 테고, 이것으로 김수영은 자유의 모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빨갱이, 민족주의, 참여파 시인이란 딱지를 붙이는 오류들을 저질렀으니.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시, 자유를 관철시키려는 시인이 쓴 시는 당연히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던 시적 형식을 만들어 냈고, 내용을 만들어 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무지하고 탐욕스러우며 비겁한 무리들이 얼마나 그에게 철퇴를 내려치고 싶었을까? 터무니없는 범주화, 규정화, 패거리들의 오류와 기만들. 자유를 말하는 것, 허용된 자유라는 이기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권력에게는 불온한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다.
3.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되는 사회
시인은 단독성을 추구하는 자이다. 새로운 삶을 살아내려는 정말의 피와 땀이 어린 진지한 치열함을 가져야 하는 자이다. 팽이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하려는 자이다. 그래서 외롭고 서러운 과정이다. 자유란 이처럼 두려움과 슬픔이란 난관을 관통해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만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현실의 상황 속에서 쉬운 일이겠는가? 타협해야하고 공통된 무엇에 규정되고 틀 지워져야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소시민의 현실이다. 더구나 허용된 자유의 한계를 직면하고 분노했을지라도 권력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외면하고 피해가는 것이 미덕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조금 나아가 관념에서나 자유를 이해하곤 마치 최선을 다한 것인 냥 거들먹거린다. 실천으로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머리로서 주어진 조건을 지적 조작으로 새롭게 하려하거나 자신의 정서적 반응에만 주목하면서 말이다. 아내 김현경을 우산대로 때리곤 자신의 나약함, 이기심을 바라보는 김수영의 통렬한 시선에서 현실에 주저앉아 자기 삶을 주도할 용기를 내지 않는 나약함과 비겁함에 물든 내 찌든 몰골을 본다. 불편함, 불쾌감에 대한 응시, 그것을 직면해야만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정말의 의지가 작동되는 실천의 현장을 보고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또한 옳음과 그름은 생각의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구체적인 삶을 살아낼 때 비로소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확인할 수 있다는 실천적 의지와 온 몸으로 삶을 살아내는 단독자로서의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만 시가 될 수 있듯이 종교, 자본, 권력의 힘을 떨쳐내고 온전한 자유, 현실에서의 자유를 추구할 때 비로소 그 무수한 다양함들이 정작 우리의 문화와 민족, 인류의 발전이 되는 것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한 사회의 문화에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한다는 거대 언론과 자본 권력의 주절거림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억압된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는 오늘, 민주주의는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정신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것이며 이를 위해 단독성의 실천을 말하는 김수영 시인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낸 인문학자 강신주의 글에 어떤 긍지와 고마움을 갖는다. 한국인 모두가 시인이 되는 그날을 기대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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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새내기 때 처음으로 좋아하는 아이를 만나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캠퍼스 커플을 해본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설렘과 아기자기함을 안고 나는 그렇게 예쁜 연애를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이 내 사랑도 많이 서툴렀다. 감정의 균형이 맞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작은 균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삐걱거려 결국 사랑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많은 친구와 선배들의 위로 속에서 힘들게 버티면서 지냈다. 보통 이런 시기엔 노래방이나 거리에서 나오는 모든 사랑 노래가 다 자기 이야기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실제로 그때 대부분의 사랑 노래에 애잔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울지 않을 만큼 잘 참았다. 원래 내가 슬픈 감정에 파묻히려는 성격도 아니다. 그렇게 그녀를 잘 잊고 지내고 있다고 생각할 즈음, 우연히 거리에서 이런 노래 가사가 들렸다. ‘함께 걸으면 손 닿지 못할 만큼 한참을 뒤에 오던 그녀였죠. 빨리 오라며 그녀를 다그치고 답답한 마음에 난 앞서 걸었는데.. ‘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동안 잘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변 모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걸어갔는데 왜 유독 내게만 이 노래가 그렇게 절절하게 와 닿았을까?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첫사랑 그녀만이 가지고 있었던 습관이 생각나서였다. 그녀는 나와 싸우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땐 항상 나와 걸음을 맞추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이별의 예감이 짙어졌을 때도 그녀는 그랬다. 이런 가사는 나와 비슷한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공명이 나를 깊이 파고 들었던 것 같다. 내가 만약 첫사랑 그녀와의 사랑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노래를 들었다면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 솔직히 나는 ‘사랑’ 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도파민, 세르토닌 정도의 호르몬으로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 항상 본질은 단순하고 묵직하며, 현상은 너무 가볍고 흩날리는 성질이라 본질적인 것을 더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훌륭한 작가 될 거라고 격려를 해도 내심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 철학적 소재는 언젠가 바닥이 들어날 것이 뻔했고 그러면 글을 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게 될 것이니깐. 하지만 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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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휘를 얻는다는 것.
세계는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이 물리적 실체를 시각이나 후각 등 오감에 의해 인지하고 세계를 구분해왔다.
이러한 분절화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도 수행되었다. 따라서 물리계든 형이상학의 영역이든 세상은 인간에 의해 지속적으로 분절되어 왔고 그것은 하나의 단편적인 어휘의 형태로, 또는 일관된 진술 에 입각한 사상이나 자연법칙의 형태로 누적되었다.
그러나 그 분절화는 사람마다, 국가마다, 민족마다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는 단순히 표기체계만이 다른 것일 수도 있고, 관념 자체가 다른 것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아예 분절화의 경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민족마다, 국가마다, 사람마다 보유하고 있는 어휘에는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이라는 경계를 인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대체로 세계를 분절해온 결과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집단간의 묶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나타나는 분절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으며 이 세계관은 철저히 그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어휘에 의해 구성된다. 물리적 세계의 총량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따라서 물리적 세계를 지칭하는 어휘가 많은 사람은 그 세계를 좀더 세분화하여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관념적 세계의 영역이 그만큼 넓다고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국가를 전복하고자 하는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후자의 사람들은 이른바 '빨갱이'라는 의미 범주에 '새누리당 및 그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명칭이므로 이들이 가진 관념적 세계의 영역은 그만큼 폭이 좁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휘를 늘려간다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인지를 치밀하게 구성하려는 노력, 관념적 세계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세계가 분절되기 이전인 원시 사회에서는 이러한 분절화를 이뤄낸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갑자기 내리치는 빛덩어리를 신의 노여움이라고 분절해낸 사람은 신의 의지를 읽는 사람으로 인정되었고, 이러한 사람들은 그 사회의 대사제(왕)로서 사회를 지배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물리계에서 새로운 법칙을 분절해내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노벨상 등의 상을 수상하여 사회의 존경을 얻고 새로운 사상을 주창한 사람들 역시 그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인류의 지적유산을 풍성하게 만든 위인으로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라 불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목을 끄는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런 말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어휘를 가진 자, 세상을 가지리라!
2. 내가 얻은 어휘.
구구절절 이렇게 따분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의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세상을 분절해 낼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분절해내는 어휘를 하나 더 늘릴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그 하나만으로도 내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어휘는 바로 '단독성'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분명히 구분되며, 그 사람이 진실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단독성'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보편성'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단독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개의 어휘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들뢰즈에 의해 분절된 개념으로서 '일반성'이었다.
그러면 들뢰즈는 '단독성'과 '보편성'을 '특수성'과 '일반성'에서 어떻게 분절해 낸 것일까?
들뢰즈 이전 서양형이상학 전통에서는 '일반성'과 '특수성' 개념의 구분이 핵심이었다. 김수영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강신주나 김서연 혹은 김수영은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일반성과 특수성의 도식이 가장 극적으로 적용되는 사례가 자본주의다.
'일반성/특수성' 도식에 입각한 사유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들뢰즈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는 개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일반성'이란 기준에서 개체나 사건을 교환 가능하다고 보는 '특수성'이란 개념을 극복해야만 했다. 이런 고민이 응결되어 나온 개념이 바로 '단독성'이다. 그렇지만 모든 개체나 사건들이 다른 것과 교환 불가능하다면, 이들은 어떻게 서로 관계 맺을 수 있을까?
3. 서툴게 시도해본 잡생각들
내가 몸담고 있는 IT 업계에는 '가동율'이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철저히 '일반성/특수성' 논리에 근거한 단어이다. 존재로서 치부되기 때문이다.
'가동율'이라는 말 자체가 워낙 사람 냄새가 아닌 기름 냄새가 나는 단어이다보니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숫자의 입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기업의 입장에서 기업의 본질은 자본주의이고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배와 위계의 논리만큼 맹위를 떨치는 것이 없는만큼, 아무리 첨단 산업이라는 IT라 한들 당분간 이 범주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단독적'인 구성원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은 주체보다는 타자와의 관계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친구로서, 직원으로서, 국민으로서 등등의 일반화에 익숙한 경향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무엇"으로서 존재감이 강화되는 개인은 대체 가능한 '특수성'의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색깔이 강회되어 갈수록, 즉, 관계로부터, 배경으로부터 철저하게 독립되어 '단독성'을 획득할수록 오히려 보편적인 "누구의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따라서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치환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소리쳐 알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소리, 자신만의 판단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강신주'가 '김수영'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송별사이다.
강신주에 의하면 김수영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본 책에 등장하는 김수영의 각종 시와 산문들은 철저하게 단독적인 존재가 되려 노력했던 김수영, 그래서 보편적인 시의 반열에 자신의 시를 올릴 수 있었던 보편적인 시인 김수영이라 는 관점하에 재단되고 평가되고 있다.
또 한편 이러한 평가는 강신주가 '강신주'이기에 할 수 있는 김수영에 대한 해석의 시도였다. 것이고, 따라서 강신주의 말마따나 이 책을 김수영에 대한 조사(弔辭)나 묘지명(墓誌銘)으로 헌정하고 강신주는 김수영을 떠나 강신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한 가지 각오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건 김수영의 시를 김수영의 시 그대로 한 번 접해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겐 대단히 치명적인 선택이다. 둔한 놈인가!
하지만 강신주가 게워낸 김수영이나마 내게는 너무나 황공하기 그지없는 토사물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2012년에 발행되었으니 그가 우리 인문학계에 또하나의 단독자로서 우뚝 서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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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삼일 앞두고 열린 후보 간의 마지막 토론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개그콘서트보다도 더욱 재미있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웃음보가 연신 터져 나왔는데, 그 끝맛은 씁쓸하면서도 텁텁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에게서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치열함. 삶이 오로지 진지함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이 즈음 해서 그리운 이름이 하나 있어 외쳐본다. 1968년 6월 16일. 그날은 시인 김수영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교통사고였지만 언제나 깨어있고자 안간힘을 썼던 시인의 생전 모습을 고려했을 때 국가나 권력에 의한 사망이었다 하여도 전혀 이상치 않았을 것이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그의 시 <풀>을 통해 저항정신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보았을 터. 하지만 그 삶을 좀더 깊이 살펴보면 그의 문학에 깃든 모든 것이 곧 그의 삶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슨해질 때마다 김수영을 읽었고, 내 삶이 나를 배반하는 것 같을 때마다 김수영을 찾았다고 저자는 말했다. 취업을 걱정한 부모의 배려(?)로 공대를 졸업한 저자는 그리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뒤늦게 김수영에게 고별사를 날리다니 조금은 이상했다. 하지만 김수영의 진면모를 아는 자라면 아류 김수영이 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김수영으로부터의 독립은 곧 김수영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제2 의 김수영이 되길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김수영의 저항정신을 닮을 수 있음을 알았기에 다소 시릴지라도 저자는 이별을 택했다. 홀로서기. 그것은 김수영이 평생을 통해 실천해온 바였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핑크빛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을까 기대가 없진 않았지만, 현실은 녹록치가 못했다. 전쟁이 터졌고 위정자들은 제 안위를 위한 독재를 꿈꿨다. 그 시대엔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김수영의 삶은 시대의 불행을 고스란히 껴안은 표본과도 같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자유의 가치에 눈을 떴다. 어떠한 말을 해도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허락되는 것은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시인은 자신의 예민함을 잠재워가며 생(生)을 추구했다. 가족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살아 돌아간 곳에 아내는 없었다. 사랑 없이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은 어떤 고독보다도 더욱 깊은 상처를 시인에게 남겼다. 그 와중에도 그는 온몸으로 시를 썼다. 머리나 가슴을 사용하지 않고 몸을 사용한 그의 시는 내게 유난히도 투박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글자수를 인위적으로 맞추어 가며 아름다워 보이려 드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제외한 많은 시인들이 외적인 무언가에 집착했다. 시대의 혼란을 외면하고자 문인이 되었다는 속설이 난무했을 정도로 그들이 쓴 시에서는 현실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학은 현실참여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저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으로 흡족해 할 지어다! 많은 작가들이 이를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따랐다. 김수영도 한때는 그와 같은 길로 빠져들 뻔했다. 박인환 등 모더니즘 시인들과 합동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 상태를 답보했더라면 오늘날 김수영에 대한 평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부정을 시도했다. 일종의 변증법마냥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나아갔다. 서정주와 김춘수, 나중에는 이어령까지 시대와 현실을 외면한 작가들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한 성찰을 끊임없이 했기에 그의 시는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집 안에 거미줄을 친 거미의 메말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가 느꼈을 아픔을 어느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는가. 어지럽지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선 계속해서 뱅글뱅글 돌아야만 하는 팽이의 숙명에 대해 그 누가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김수영은 그 모든 것을 해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張勉)이란 관리가 우겨 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이는 김수영이 1960년 10월6일 쓴 <김일성만세>라는 시다. 여전히 이 시는 모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갖추었다. 뿌리 깊은 반공을 건드린 탓이다. 만일 김수영이 북쪽에 속했더라면 이 시에서의 ‘김일성’은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되었을 것이다. 자유를 꿈꾸는 그에게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곱씹어 본 적 없는 우리 사회였기에, 아직 김수영을 위한 공간은 어디에도 마련되지 못했다. 시인의 불운을 함께 끌어안은 그의 처 김현경 님은 지난해 자택에 시인을 위한 전시 공간을 꾸몄다. 지난해 업무차 도봉산엘 갔었다. 한때 시인이 닭을 키우며 살았던 곳에는 생뚱맞게 닭볶음 요리를 다루는 음식점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인근에 시비가 있어 이 곳이 김수영과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지만 여느 문인과는 다른 길을 걸은 이를 추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우리 모두가 각종 금기를 뛰어넘어가며 조금 더 불온한 삶을 살게 된다면, 그리하면 달라지려나. 대선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웃다 보니 김수영, 그 이름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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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본질인 자유를 통해 본 김수영 현대인인 사회와 사람들과 소통하는 도구는 많다. 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만 두었던 지난 시대와는 분명 달라진 점이다. 그 중심에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자리한다. 자신의 생각에 즉각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공감하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가능하며 보다 적극적인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온 국민의 가슴에 트라우마를 남긴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연일 울분과 걱정을 토로하는 글들이 페이스북을 점령하고 있다. 그 중심에 시인을 비롯한 문인들이 있다. 문인들이 시대정신에 부응하며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임을 다하는 모습으로 모여 시린 가슴이 위안되기도 한다. 현대정치의 현안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길게는 양반 사회 조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짧게는 박근혜 정부에 이르는 시간동안 우리에게 내재된 문제의 발현이라고 보면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때그대 사람들이 실감하는 현실에 대해 직시하지 못하거나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일련의 일들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당면한 문제를 노정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문제해결 의지가 모여 현안을 타파하려고 시도하는 노력이 오늘 문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환원되고 있다고 본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근래 인문학이 화두로 대두된 한국의 미래는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 인문학 강의의 선두에선 철학자 강신주는 강단철학에서 벗어나 대중 아카데미 강연들과 책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소통과 사유를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굴곡의 현대사인 1950~60년대를 철저히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던 시인 김수영의 삶과 시를 통해 인문학의 본질과 인문학이 나아갈 길에 대한 강신주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책이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라고 보인다. 김수영에 대한 강신주의 이야기에 앞서 김수영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자. 시인 김수영은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4.19와 5.16 등 민족의 운명을 뒤바꾼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대를 살았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북을 오가는 우여곡절을 겪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2년간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시를 쓰며 시인으로 살고자 했으며 ‘달나라의 장난’(1959)을 발간하였다.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타계하기 직전에 쓴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시인 김수영에 대한 평가는 민족 시인이나 참여시인 등으로 모아졌다.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김수영에 대한 이야기의 근거는 이 책의 편집자가 건넨 1981년에 발간된 《김수영 전집》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를 통해 김수영의 삶과 시를 살펴 김수영의 삶과 시에 투영되어 있는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강신주가 밝히는 김수영의 근본정신은 인문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즉, 자유인 김수영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현실인식과 시, 시인과의 관계를 인문정신의 뿌리를 간직한 시인 ‘김수영’이라는 시각으로 접근 분석해내고 있다. “위대한 작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저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인문정신의 중심 키워드는 ‘자유’다. 이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다. 시인들은 자신만의 시를 갈망한다. 자신만의 시는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문인들이 현실문제 해결의 선두에 설 수 있는 근거로 보고 있다. 강신주의 김수영에 대한 이 ‘김수영을 위하여’는 50년 전 사람과 현재 사람 강신주가 공존한다. 그 공존의 공통분모는 자유를 중심으로 한 인문정신이다. 현재의 인문학자가 김수영은 시인이자 혁명가였고, 진정한 인문정신의 소유자로 평가한다. 강단에서 내려와 대중과 함께 인문정신의 실현에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는 강신주와 통하는 부분이다. 강신주의 거칠 것 없는 자기주장이 여기서도 펼쳐진다. 이는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특정한 부분을 건드려주고, 보여주고, 허영을 깨주고, 바닥을 보여주는 그런 '철학'을 강조하는 강신주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이다. 김수영에 대한 재해석에서 강신주가 주장하는 바에 주목할 때 인문정신의 발현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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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것이 자신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또는 자신의 머리속에 흐르는 생각의 핵심요결을 노래부르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작년에 선물 받은 책임에도 시란 것에 대한 거리감, 시인이란 존재의 낯설움등도 있엇던것 같습니다. 희한하네요 외가집에 시인이 있는데도요. 나와 다른 이질감에 대한 선입견과 빨갛게 그라데이션처리한 배경에 담배를 물고 있는 시인이 멋지기도 하고 독특하기도 합니다. ![]() 철학자가 읽어주고 설명하는 시집의 구상은 독특한것 같습니다. 좋은 점은 체계적으로 매락과 논리를 갖고 설명해준다는 점이고 조금 어려운 점은 그의 사고체계가 그대로 나에게 전달된다는 종속적인 점이 아닐까합니다. 그럼에도 처음 김수영이란 사람을 강신주란 사람을 통해서 보는 과정이 꽤 괜찮은것 같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서 사람이 타고난 시대를 선택하지 못하는 운명과 그의 삶을 통해서 사람에게 주는 영향과 그 사람이 선택하는 반작용의 과정, 그 속에서 갈구하는 것에 다가가는 시대정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도 그의 시가 일부는 마음에 와닿고, 일부는 세월의 격차처럼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시대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온몸으로 밀고나가 구현하고자 했던 오늘이 아닌 내일을 노래하는 시인, 그 속에 그가 심고자 했던 생각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비록 그가 말하는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의 이데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정신이 필요한 것은 작은 불빛이 세상을 좀더 다륾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오색찬연하지 않을까합니다. 그를 통해서 제가 생각하는 liberal, 자유롭다는 생각이 좀더 또렷해지는 부분과 심도있게 생각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분명 청춘이었다는 생각을 덫붙이지만,그의 시대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붙여서 그 를 이해하는 한계가 아니라 그 정신를 새롭게 구현하는것이 그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모든 것은 why로 시작해서 how로 흘러가는듯 해 보입니다. 검색을 해보니 김수영에 대한 좋은 자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2010년 EBS 지식채널e도 그렇고, 한겨례에 기사가 난 기구하기도 한 김수영 아내의 에세이도 괜찮을듯합니다.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금년에 나온 그녀의 이야기는 또 어떨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 youtube EBS 지식채널 e-rm 해 4월 시인 김수영 1부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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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하던 한 청년에게 글쓰기에 대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만나게 된 시인 김수영. 김수영 시인으로 그 청년은 다시금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지금까지 그 만이 가질 수 있는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글로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강신주 라는 철학자가 시인 김수영을 위한, 김수영을 향한 오마주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읽는 내내 문학비평서로 읽으면 김수영 시인의 사상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공부가 되었을 것 같았고, 그에 동반해 시인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을 듯한데, 그런 점에선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철학자가 들려주는 인문학에 대한 사상은, 글쎄 나를 약간은 당혹스럽게도 만들고 조금은 혼란스럽게도 다가왔다. 김수영 시인의 생애를 얘기하다가 어느덧 시인의 그러한 삶의 여정을 통해 시인의 인문학적 소양와 그 사상을 설파하기도 하고, 거기에 저자의 김수영 시인에 대한 존경과 저자의 사상도 언뜻언뜻 내비친다. 그래서 내겐 조금은 난해한 독서가 되었다.
김수영 시인의 위대함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굳이 다른 시인이나 문학가들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부분도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수영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인문학적 사상을 기초로 한 그의 시 전반과 삶 전반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기 충분해 보이는데, 폄하할 상대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빛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저자가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던 김수영 시인에 대해 이제는, 이번을 기회로 삼아 시인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글쓰기를 선포한 것은 매우 의미 있어 보인다. 현대의 시간을 향해 오면서 문학가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권력의 힘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세우지 못하고, 안주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또한, 당대의 지식인이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시대는 민주주의에 있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수영을 위하여]는 사회의 잘못된 권려의 힘에 맞서 지식인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어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면에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대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완성될 때,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몇 년 전에 [철학, 삶을 만나다]를 통해 처음 접했을 때의 철학자 강신주에 대해 받았던 신선하고 깊이 있는(오로지 내 기준임) 느낌이, 빈번하게 출간되고 있는 저자의 여타 책들에게선 가지지 못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철학자 강신주라는 이름 석 자가 항간에 인기있는 논객이 아닌 저자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철학자로 남아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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