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이 시집의 제목을 보는 순간 국민학교 시절 방학숙제가 생각이 났습니다. 필수 숙제였던 독후감 2편과 함께 영원한 숙제였던 일기 쓰기.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과연 일기장을 들쳐보기라도 했나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 누가 냈는지, 안 냈는지는 확인하셨겠지요. 몰아서 일기를 쓰다보면 ‘이하동문’이라고 할지라도 그럭저럭 내용은 맞추겠는데, 날씨가 문제입니다. 날씨는 왜 꼭 써야만 했는지요. 비가 오면 어떻고, 눈이 오면 어떠리..아마도 ‘몰아 쓴 일기’를 잡아내려했겠지요. 박성준. 시인의 시집 제목은 ‘몰아 쓴 일기’인데, 그 일기는 보이지 않고 ‘아껴 쓴 일기’만 보입니다. 이 시집의 첫 시로 독자에게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나는 왜 / 열 살부터 너라는 이름의 평전을 쓰기 시작했니? // 동무야, 화단 밖에는 너보다 일찍 다녀간 통증이 있단다 / 부르자마자 입술과 헤어지는 말이 있단다 / 꽃을 감싸고 있단다 // 저 꽃은 꽃이 아니려고 애쓰는 동안에만 꽃인데 / 나무야. 온갖, 젊지도 않은 모양으로 구름을 쑤시는 필체가 있단다. // 어머니보다 긴 이름의 여자가 있단다. 대책 없이 모르는 날씨 / 누이야. 숨을 쉬기 시작했니?“ - ‘아껴 쓴 일기’ 전문 이미저리가 심상치 않지요? ‘부르자마자 입술과 헤어지는 말’..오늘하루도 내 입술과 헤어진 말들이 많지요. ‘꽃은 꽃이 아니려고 애쓰는 동안에만 꽃인데’..꽃이라고 애쓰면 오히려 꽃이 아니랍니다. 기억하렵니다. 하 ~ .. 박성준 시인..귀신을 좋아하는지, 귀신이 박시인을 좋아하는지 아무튼 귀신이 많이 나옵니다. 귀신과 친한 것은 영이 너무 약하거나 반대로 상당히 강하거나 둘 중 하나로 본다면, 강한 쪽으로 손을 들어 주어야겠지요. 약한 사람은 두려움에 떨지언정 귀신 이야기 잘 안하지요. “귀신 같다. 어지러운 집은 귀신 같고 어지러운 집에 사는 나는 귀신이 아니다. 어제 몸에 든 귀신이 몸이 가렵다고 한다. 어디가 가려운지 모르겠는데 ............ 어떤 사람은 귀신처럼 앓는다. 커튼의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그림자처럼, 그림자를 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너는 귀신을 닮아 귀신처럼 방을 어지르는 사람 어제부터 오늘까지 천천히 죽었다.” - ‘어떤 싸움의 기록’ 일부 ‘어지러운 집은 귀신같고 어지러운 집에 사는 나는 귀신이 아니다.’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람이 많을 듯합니다. 귀신 빼놓고요. 시인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종횡무진입니다. 선뜻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군요. 이런 시 참 신선합니다. 나는 꿈 도 못 꾸는 시입니다. “주문한 남편을 생각합니다 새벽이 무서워 손톱 끝에 봉숭아 꽃물 들이며 홈쇼핑을 켜지요 몸속에 물관들이 단단히 차오르고 새 남편의 그림자가 잉크처럼 번집니다 세 시간을 잤을 뿐인데 꿈속에서 삼 년을 산 것 같은, 헛것들과 허튼 꿈만 꾸고 놀다 갑자기 밀린 빨래가 생각난 듯, 엉킨 몸들 사이에서 제 몸 찾아 건조대로 가지요 ............... 현관문을 잡고 망설입니다 몸이 열리기도 전에 배달될 남편만 생각하던 새벽 이렇게 꽃물 든 몸속에다 집을 짓지요 주문한 절반의 생을 잡지 못해, 웃으며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리는 표정, 시들기로 작정한 꽃처럼 휩니다
- ‘결혼 홈쇼핑’ 일부 시 제목 하나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주저흔’이라는 시(詩)입니다. 법의학 관계자들이나 수사관들이 쓰는 용어입니다. 김경주 시인도 동명의 시를 쓴 적이 있지요.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는 시구가 들어 있습니다. 주저흔(躊躇痕). 그리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한번에 급소를 찾지 못해 여러 차례 자해한 흔적, 혹은 삶에 대한 미련이나 자살에 대한 주저함 때문에 치명상을 만들지 못해서 생긴 깊이가 얕고 미세한 손상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판단합니다.
숲이 나를 불렀으니 이제 좁은 몸속 옷장에 걸려 있는 바람들 흐물거리는 빗장뼈를 밤의 내부로 가라앉히네 두꺼운 승모근이 옷걸이마다 붙잡고 있던 바람 꼬리 아홉 개 달린 별똥별 여우야 가지마 가지마 나는 밤을 만지려고 그림자에 스며들어 누웠네 뻐꾸기시계를 끌어안고 잠든 사내가 옷장으로 들어가 바람이 되었다는 소문과 그 소문에 오독당한 귀들이 떠오르네 나사가 삐걱거리는 내 복부를 열어젖히고 보았을까 그런 밤의 축축한 잔해들 혈거하는 울음들이 무릎 꿇은 바람을 일으켜 여우 굴에 벽화를 그리네, 밤과 내통한 빛이 그리워 내 갈비뼈, 어두운 물속에서 가만히 떠올랐던가 울음이 악보를 찾아가듯 숲이 밤을 찾아가 어두운 옷장 속 빈 것들이 나를 기다리네 깜빡깜빡 허공을 긋고 가는 저 불빛들 - ‘주저흔’ 전문
다행히 염려했던 장면들은 직접 담겨져 있지는 않으나 은유의 언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삶의 피로와 고통은 승모근의 긴장을 초래하고 무겁고 두텁게 만들어줍니다. 그 승모근은 밤마다 옷걸이에 걸립니다. 복부마저도 션찮습니다. 삐걱거립니다. 순환이 되는듯하다가 막힙니다. 우리의 일상입니다.
‘밤과 내통한 빛’ 이런 표현들이 참 좋습니다. 시인은 젊습니다. 1986년생입니다. 젊은 감각과 생각을 배웁니다. 앞으로 더욱 깊이 있고 따뜻한 작품들을 기대합니다. 박성준 시인을 주목하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