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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아프다며 울지 마라. 길고양이가 갸르릉거린다. 너의 고백은 신파 같아 이 밤이 주술적으로 깊어간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음악은 가사를 잃어버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름답게 말문이 막히지 못하는 나의 시는 좀 더 가쁘게 숨이 차올라야 한다. 진실은 아무도 없어 외로운 행간에 감추어져 있다던가. 앞과 뒤,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눌 수 없는 언어가 천상의 질서일지 모른다. 마침내 텅 빈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너와 나는 자꾸 어둠이 번진다. 더 이상 이유를 말하지 마라. 그래서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이해한들 밤은 좀처럼 검푸른 적막을 씻어내지 못한다. 어디서 달빛이 시름에 야윈다. - 조항록, 「그믐」
그믐은 적막하다. 그믐은 무(無)를 향해 간다. 어둠의 막바지에 이른 그믐달 아래서 누군가 삶의 아픔을 고백하며 울고 있다.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길고양이도 갸르릉 운다. 시인은 “너의 고백은 신파 같아”라고 말한다. 신파는 지나친 감상에 빠진 것이다. 정말로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슬픔을 보여주기 위해 우는 척하는 게 신파이다. 누군가의 신파 같은 고백이 그믐달이 뜬 밤을 “주술적으로” 깊어가게 한다. 주술적인 세계에서는 땅과 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어둠을 향해 가는 그믐은 하늘과 땅을 온통 어둠 속에 묻는다. 어둠에 묻힌 이 세상을 상상해 보라.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은 별다른 쓸모가 없다. 어둠에서는 듣는 귀가 빛난다. 어둠에 묻힌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워 미세한 소리까지 들으려고 한다. 시인이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음악은 가사를 잃어버려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둠 속을 거니는 사람들은 소리에 특히나 예민할 수밖에 없다.
소리는 리듬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몸속을 흐르는 리듬을 느낀다. 숨을 쉬고 내쉬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주목해 보라. 리듬을 타고 펼쳐지는 숨에 맞춰 우리는 온몸을 느낀다. 밝은 세상에서는 느끼기 힘든 생명의 느낌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한결 세세해진다. 시각에 억눌려 있던 온갖 감각들이 어둠을 틈타 이리저리 뻗어 나온다. 시인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이런 감각을 흐르는 음악처럼 받아들이려고 한다. 흐르는 음악은 의미, 곧 가사를 거부한다. 가사는 음악의 흐름을 자꾸만 한정한다. 가사를 내던져버리면 소리는 또 다른 소리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시인은 “아름답게 말문이 막히지 못하는 나의 시는 좀 더 가쁘게 숨이 차올라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은 한껏 고조된 소리와 어울려 리듬으로 타오르는 시학(詩學)을 낳는다. 시어는 의미 이전에 생명의 리듬과 맞닿아 있다. 리듬이 있고 난 연후에야 의미가 붙는 법이다.
언어로는 진실을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인간은 언어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사물의 일부만을 표현할 뿐이다. 언어와 사물은 다르다.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언어는 단지 인간의 언어로서 기능할 따름이다. 언어로 사물을 표현할수록 사물의 의미는 더욱 더 미묘해진다. 그 미묘함을 방지하기 위해 인간은 언어로 사물의 의미를 한정하는 약속을 한다. 인간끼리 하는 약속은 사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물은 여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며 언어가 부여하는 의미로부터 멀찌감치 도망친다. 언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언어의 행간, 달리 말하면 언어의 틈에 의미가 있다. 시작(詩作)은 언어의 틈을 통해 사물로 나아가는 길을 연다. “앞과 뒤,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눌 수 없는 언어가 천상의 질서일지 모른다.”는 시인의 진술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은 앞과 뒤를, 왼편과 오른편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는 그저 어둠이 있을 뿐이다. 어둠에는 앞과 뒤가 없고, 왼편과 오른편이 없다. 어둠의 앞에는 어둠이 있고, 어둠의 뒤에도 어둠이 있다. 온통 어둠뿐인 세상에서 방향을 가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인은 언어를 통해 늘 언어 너머를 꿈꾼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으랴. 하지만 시인은 지상의 질서에 얽매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지상에 매인 언어는 앞과 뒤를 나누고, 왼편과 오른편을 나눈다. 사물을 사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사물로서 존재하는 사물을 표현하려면 언어 또한 사물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마침내 텅 빈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너와 나는 자꾸 어둠이 번진다.”라는 진술에 그리로 가는 방편이 나와 있다. 텅 빈 그곳으로 가려면 어둠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둠 속에 몸을 묻어야 어둠이 내보이는 감각을 비로소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더 이상 이유를 말하지 마라.”고 시인은 강조한다. 그믐이 무(無)로 가는 이유를 물으면 무(無)를 알 수 있을까? 이유는 따지는 것은 머리의 장난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머릿속에 든 지식으로 사물을 판단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물은 언어(지식) 바깥에 있다. 바깥에 있는 사물로 나아가려면 언어와 지식의 바깥으로 기꺼이 뛰쳐나가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시인의 말마따나 머리를 가득 채운 지식으로 어느 것을 이해한들 “밤은 좀처럼 검푸른 적막을 씻어내지 못한다.” 밤이 풀어낸 검푸른 적막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있다. 묘하지 않은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우리는 늘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無)를 향해 가는 그믐달은 시간이 흐를수록 야위어간다. 자기를 고집하면 무(無)로 가는 길은 이내 막혀버린다. 검푸른 적막에 휩싸인 밤은 어둠 속으로 온몸을 내던지는 존재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시인은 과연 어둠 속으로 온몸을 내던졌을까? 대답은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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