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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앨범을 펼치기 전 곡 순서를 볼 때나 음악이 귀로 전해질 때나 듣고 난 이후에나. 봄, 여름, 가을, 계절을 지나고 보니 아침, 저녁에 상관없이 어느 때나 좋다. 한 곡이 주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고, 악보가 연주자의 손에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마저 모두. '소리를 녹음했다'라는 표현 대신, '피아노의 울림을 담았다'가 적절한 앨범이다. 그만큼 피아노의 현의 울림, 울림판의 세기가 고스란히 시각적으로 들어있는 것 같다. Rubinstein의 녹턴을 지우게 할 정도로 쇼팽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었다. minor곡만 연결해서 밤 중에 혼자, 혹은 낮에 분주히 움직이는 중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공공장소에서 그 음악에 전념해서 들어보라. 쇼팽의 초상화가 보인다. 자신이 표제를 붙인 음악, 리스트와의 대화, 그 시대 폴란드의 상황, 그 시대 종교음악을 1곡밖에 남기지 않았으며 피아노 위주의 음악만 남긴 한 사람의 모든 것, 그 사람의 언어가 나타난다.
쇼팽의 녹턴. 한 예술가가 소타나, 발라드, 스케르조, 왈츠. 그 어느 것도 아닌 녹턴으로 쇼팽의 언어를 풀어낸다. 라벨 전곡을 연주할 당시의 연주자라면 쇼팽의 어느 곡을 선택했을까 잠시 생각하지만, 결국 지금은 녹턴이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중 Op.142가 아니라 Op.90을 녹음하고, 브람스의 곡 중에서 Op.76, Op.116, Op.117, Op.118, Op.119중 13곡을 선택하면서도 117번은 3곡을 선택했을 때, 어쩌면 쇼팽의 녹턴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2003년 'Complete works for piano & orchestra' 앨범에서 쇼팽을 이야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다. 어쩌면,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의 연주 속도와 보이지 않는 음가에서 녹턴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었을 지 모르겠다. 'Krakowiak'에서 보인 재기발랄함과 강약조절, 'Fantasy on polish Airs'의 분위기가 야상곡 분위기에 맞게 이동했다.
백건우 선생님 앨범의 특징은 한 작곡가의 한 곡을 순서대로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협주곡이나 변주곡처럼 순서를 바꿀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공연 프로그램처럼 이 순서가 의미하는 것을 통해 예전의 작곡가, 현재의 연주자 사이에 생각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곳에는 서사와 서정이 함께 있고, 연주자는 작곡자의 세계를 듣는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해와 설명을 통해서. 연주자의 언어에 설득은 없다. 의문이 드는 경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인정을 할 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곡이 아닌 선율을 쇼팽이 썼다면...이국땅에서 고국 혹은 가족을 그리워했을 쇼팽이었다면...그래서, 눈에 보이는 쇼팽이 아닌 선율 속에서 찾아야 하는 쇼팽이 이 앨범에 들어 있다. CD 1의 1번 트랙을 듣는 순간, 다른 것에 눈을 돌릴 겨를 없이 우두커니 서 있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쇼팽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게 된다.
CD 1은 단조 곡이 11곡 중 7곡, CD 2는 단조 곡이 10곡 중 3곡이다. 장조 곡의 녹턴은 쇼팽의 평상시 언어를 풀어낸 것처럼 평온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듯 하고, 단조 곡은 쇼팽의 독백과 나지막이 말하는 대화를 듣고 있는 듯 하다. 연주자가 생각하는 Lento부터 Andantino까지의 속도, 같은 템포어가 곡의 박자에 미세하게 다르게 들리는 듯한 움직임은 큰 구조에서 이 앨범이 갖는 특성이다. Op.9 No.1, Op.15 No 2, Op.27 No.1은 Larghetto로 각각 6/4, 2/4, C박자곡이며, 앞의 두 곡은 장조, 나머지 한 곡은 단조곡이다. 이 세 곡을 연주자가 어떻게 풀어내는가를 보면 이 앨범의 진가가 드러난다.
장조곡은 밝고, 단조곡은 슬프다는 명제는 쇼팽의 녹턴에서 잘 통하지 않는다. 한 곡에서 분위기가 몇 번이나 바뀌고, Op.9 No.1의 25-28마디처럼 ppp, f, cresc., p가 나오는 부분을 어떻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쇼팽이 표현하고 싶던 음악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설명을 단순하게 들려준다. 들으면 다 알 수 있다고, 당신이 듣는 이 음악이 바로 쇼팽의 마음이라고.
이 앨범의 백미는 CD 1과 2의 곡 배분이다. 구슬이 많이 달리거나 웅장면서도 화려한 쇼팽의 음악이 CD 1에 대거 포진되어 있다면, CD2는 좀 더 단순화한 세련미가 돋보이는 곡들이 있다. 특히, 연주자의 설명은 장단조 가릴 것 없이 한 곡에서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순간마다 쇼팽 또한 오늘을 사는 과거의 누군가였음을 상기시킨다.
백건우 선생님의 단조곡 표현은 음악이 배경이 아니라 음악이 그 목적인 듯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미세한 템포변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작곡가의 마음이며, 소리의 크기는 거대한 폭풍이 눈앞에 있는데 아직 나에게는 닿지 않은 듯한 소리를 전하기 때문이다. 특히CD1의 마지막 C minor, op.13과 CD 2의 7, 8, 10번의 F- C- C-sharp minor로 이어지는 곡들은 쇼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건반 위, 가볍고 날아갈 듯한 쇼팽이 아닌, 삶을 살아간 쇼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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