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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권 시절,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정권에서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려는 이유가 여러 가지였겠지만,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축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도 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당시 그들은 1948년 남쪽만의 단독정부를 ‘건국의 시작’으로 삼고, 독재자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우상시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쳤던 것이다. 그러한 시도를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도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시도였다.
금년은 3.1혁명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최근 한겨레에서는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기사 형식으로 신문에 싣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3.1혁명과 임시정부라는 용어는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 자세한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하여 그동안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3.1혁명과 임시정부의 진행과정과 면모, 그리고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던 저자에게 이 작업이 갖는 의미는 각별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뿌리’라는 부제를 달아서, 3.1혁명과 임시정부가 우리 역사에서 뚜렷하게 정통성을 지녔다는 것을 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3.1운동’이라고 불렸던 것을 ‘3.1혁명’으로 명명하여, 우리의 역사에 걸맞은 위상을 정립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해방 이후 성립된 제헌의회의 초안에는 ‘3.1혁명’이라고 명기되어 있었지만, 독재자 이승만과 친일인사가 주축이 되었던 한민당 등에서 그 명칭을 ‘3.1운동’이라고 바꾸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왜 ‘3.1운동’이 아닌 ‘3.1혁명’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거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저자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해야 만 할 것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한 ‘국치 이래 희망을 잃고 노예처럼 살던 한민족은 3.1혁명을 계기로 근대적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고, 수많은 지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또는 망명지에서 독립운동 전선에 서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크게 ‘3.1혁명’의 진행 과정과 ‘임시정부’의 활약상에 대해서, 다양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조선 말기 무능한 정치인들에 의해 ‘나라가 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그것은 결국 ‘무능한 왕, 친일 매국노와 일제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14년에 발생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고, ‘러시아혁명’(1917)이 일어나면서 국제 정세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도 손병희를 주축으로 한 천도교 중심의 독립운동에 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33인에 의해 ‘독립선언문’이 발표되고, 이를 계기로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나아가 국외에서도 만세운동은 거세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3.1혁명은 민족해방을 목표로 계층, 신분, 성별, 지역, 종교를 초월하여 그야말로 범민족적으로 전개된 장엄한 반식민지 반봉건의 민족혁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제는 처음에 33인의 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지만, 성난 민심을 두려워하여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려애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양한문과 박준승 등이 안타깝게도 옥사하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을 하였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후에 친일행위를 자행하면서 친일파로 변절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제대로 친일에 대한 청산을 하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 친일청산에 대한 과제가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3.1혁명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거론하면서, 그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여성들의 활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까지의 우리 역사는 ‘돌이켜 보면 반만년의 가부장제의 남성중심 사회에서 사회 참여와 국권 회복 투쟁에 여성이 등장한 것은 3.1혁명이 계기가 되었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인도의 초대 수상이 되었던 네루는 조선에서 일어난 독립 투쟁 소식을 듣고, 자신의 딸에게 ‘바로 조선 소녀들을 본받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남성 위주로 기록되었던 그동안의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은 생략되거나 보조 역할 정도로 그쳤던 사실에 주목하고, 이 책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나열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3.1혁명의 가장 큰 성과로 바로 임시정부를 들고 있다. 권력자들이 망명하여 수립한 ‘망명정부’와는 달리, ‘임시정부’는 집권자들과는 상관없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해외에 세운 정부를 일컫는다. 따라서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기존의 왕조가 아닌 민주공화제의 새나라를 건국할 것을 천명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진행 과정을 읽으면서, 나는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의 독단과 권력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권력욕이 후에 대통령에서 하야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던 단초를 제공했던 것이라 하겠다. 임시정부의 활동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발생하면서 침체에 빠졌던 시기가 있었지만, 독립을 원하는 민족 구성원들의 염원을 바탕으로 ‘한인 애국단’과 ‘광복군’을 중심으로 대일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임시정부 요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이승만을 적극 후원했던 미군정에 의해 지속적으로 견제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1948년 남쪽에 단독정부가 들어서고, 그 다음 해인 1949년 김구 주석이 친일.분단 세력에 의해 암살되면서 임시정부는 사실상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저자는 3.1혁명과 임시정부의 진행 과정과 활약상을 서술하면서, 책의 말미에 일제에 의해 자행되었던 만행과 잔학상의 면모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내용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함으로써 임시정부와 3.1혁명이 우리나라의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3.1혁명 백주년이 되는 지금,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차니)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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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뜨거운 순간을 알려주는 가슴을 울리는 글이다.
"탑동공원에 모인 수만의 학생이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온몸으로 춤추면서 용감하게 장안을 관통하니 고목회사(늙은 나무가 살아남)가 아닌 우리민족, 금어총조(어항의 물고기와 조롱에 갇힌 새)가 아닌 우리 민족으로 누가 감읍지 않으리오."
- 3.1운동과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뿌리 -
김삼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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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에 앞서 내가 알고 있던 3.1 혁명에 대한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부끄럽게도 굵직한 큰 업적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함께 들여다 볼수 있어 새롭게 배워가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올해가 3.1 혁명의 100돌 이라는 사실 조차도 최근에서야 겨우 깨우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을 그전에 미리 만나볼 수 있어 더욱 뜻 깊다. - '운동'이 아닌 '혁명' 저자는 머리말에서 아홉가지의 이유를 들며, 이와 같은 역사의 대전환을 가져온 3.1 거사가 혁명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반문한다. 당시 일본만이 폭동 · 반란 등으로 치부했지만,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의 언론은 조선혁명 · 대혁명 · 조선해방투쟁 등으로 일컬었다.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초안에서도 전문에 '3.1 혁명' 으로 명시했었다. 그러나 한민당 계열 일부 제헌의원들이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3.1 혁명이 과격용어라고 진언하면서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굳어버렸다. (p. 8) 이 책에서는 이처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의미와 더불어 '운동' 이라는 용어로 100주년을 넘기는 것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한다. 나라가 망한지 10년이 채 안되어 우리는 이처럼 다시 나라를 되찾고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혁명의 태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독립만세시위와, 임시정부의 수립만으로 '자주독립' 과 '민주공화' 라는 목표를 즉각적으로 이뤄내진 못했지만, 많은 민족열사들이 고초를 겪고, 내부의 진통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도 꿋꿋히 일제와 싸워 해방을 이뤄내었고, 이는 오날날의 대한민국의 모태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 참으로 치욕스러웠던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병탄조약의 체결까지. 그 배후에는 친일파가 있었다. 나라가 온갖 부정부패에 몸살을 앓던 틈을 타 고종 황제를 겁박하여 을사늑약(1905.11.17)을 맺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것을 시작으로, 병탄조약 강제체결까지 도왔던 매국노들. 이로써 1945년 해방이 되기전까지 우리의 35년간의 일본 종살이 역사가 시작되었다. 치욕적인 순간이다. 나라를 빼앗기는데 누구보다 앞장선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국민이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화가 나면서도 참으로 씁쓸하다. 한쪽에서는 독립만세를 외치는 동안 그들은 일본이 계속 강대국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해 나라를 그들에게 가져다 바치고 있으니 말이다. 기미년 3.1 혁명이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이유는 항일독립전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민주공제화제로 전환되는 기원이 되는 동시에, 가부장적 굴레에 종속되었던 여성이 현실에 참여하고, 전통적 천민계급의 자주정신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범민족적인 혁명임을 알수 있다. 3.1 혁명은 민족해방을 목표로 계층, 신분, 성별, 지역, 종교를 초월하여 그야말로 범민족적으로 전개된 장엄한 반식민지 · 반봉건의 민족혁명이었다. (p. 67) 임시정부 수립의 장소로 상하이가 낙점된 이유는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 활동하기가 용이했고, 중국의 신해혁명의 거점도시인 데다, 외국 주권이 행사되는 조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조계를 택했던 이유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으로 자유 · 평등 · 박애 정신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소는 정해졌지만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많은 논란이 존재했고, 그러한 논란을 거쳐 마침내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국체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하여, 3.1 혁명에서 선언했던 '자주독립'을 실행할 주체가 탄생하였다. - 머리말에 거대한 호수에 비유한 표현처럼 우리의 3.1 혁명 또한 일시적인 만세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노력과 희생이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흐름으로 이어져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 건국절 논란은 더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잔인한 살육의 현장과 치욕적인 수모가 들끓었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는데 일조한걸로 모자라 주권 회복에서 끝내 고개를 저었던 매국노들의 만행은 지금까지도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과거 역사의 현장에서 그러했듯 현재의 우리도 한 뜻으로 그 의미를 되찾아 와야 할 것이다. 현재의 거대한 흐름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선 올바른 역사 의식이 먼저 세워져야 할 것이고, 이책은 그러한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책의 소개글처럼 혁명의 과정에서 우리가 잘 몰랐거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와 일본의 만행까지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으니 다가오는 3.1절 100주년을 맞이해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이책을 추천한다. 3.1 운동이라 배웠던 비폭력 독립만세시위를 이제는 3.1 혁명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와 더불어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가 되어준 임시정부의 수립까지. 한 눈에 쉽게, 그러면서도 아주 무게있는 내용들로 채워진 이책이 너무 고맙다. - (2019. 3.1) 100돌을 맞이한 비폭력 독립만세시위. - 총칼 앞에 맨손으로 들고 일어선 민족적 자주독립혁명의 날. -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 날. 근대의 횃불. (p. 6)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의 뿌리가 퇴색되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기 위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 이 리뷰는 출판사 두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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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이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특히 올해는 바로 삼일절 100주년에 해당되는 날이어서 이 날에 대한 의미를 곳곳에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과연 삼일절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생긴다. 33인의 민족대표와 독립선언서, 유관순 열사 이외에 우리가 삼일절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3.1 혁명과 임시정부]라는 책은 바로 삼일절에 대한 의미를 보다 깊게 다루고 있기에 이 시점에서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우리에게 익숙한 '3.1 운동'이 아닌 '3.1 혁명'이라는 제목과 '임시정부'는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3.1 혁명'에 대한 내용은 물론이고, 그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 성립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으로도 연결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우리나라의 기미 3.1 독립혁명이 이와 같은 거대한 호수였다. 동학농민혁명,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의병 전쟁, 국내외 항일운동 등 각급 민족운동의 흐름이 3.1 혁명으로 접목되고, 그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무장독립전쟁을 비롯하여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등 각급 독립투쟁은 3.1 혁명을 발원으로 하여 더욱 강화되고, 체계화, 조직화, 장기화된다. - p. 5 ~ 6 中에서 - 프리먼 교수의 로마를 다양한 역사 흐름이 유입되어 대문명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로마를 바탕으로 유럽 각국의 그러한 흐름이 이어졌다는 표현을 통하여 저자는 3.1 혁명 역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커다란 호수 역할을 하였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즉, 3.1 혁명 이전의 민족운동의 흐름이 결국 3.1 혁명이라는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고, 이후 이 호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무장 독립항쟁과 같은 물줄기가 흘러나왔으니 저자의 이러한 탁월한 표현은 이내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하게 된다.
더욱이 그동안 역사에서 우리는 '3.1 운동'이라고 알고 있던 부분을 '3.1 혁명'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은 이 책의 중요한 의미라 할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초안에서는 전문에 '3·1 혁명'으로 명시했던 것을 한민당 계열 일부 제헌의원들이 당시 이승만 국회의장에게 신생정부를 뒤엎는 과격한 용어라고 말하면서 혁명을 운동으로 바꾼 이력을 지적하면서 지금부터라도 '3.1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3.1 혁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용어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변경 이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를 혁명이라고 불리우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단순히 만세 운동으로만 알고 있던 삼일절을 집중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국치(경술국치) 9년 만에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전 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둘째,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셋째,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 현장에 등장했다. 넷째, 신분해방의 사회로 가는 주춧돌을 놓았다. 다섯째, 비폭력투쟁이었다. (세계 혁명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여섯째, 세계 피압박 민족 해방투쟁의 봉화 역할을 했다. 일곱째, 국치 이래 독립운동 일각에서 진행되어 온 존왕주의 복벽운동을 중단시키고, '주권 불멸론 - 국민주권승계론'에 따른 국민국가시대를 열었다. 여덟째 :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나가 살던 이주민과 망명자들까지 하나로 묶어 내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보여 주었다. 아홉째 : 독립의 당위성과 함께 일제의 패권주의와 침략성을 지적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국제평화, 평화공존, 인도주의 등 이상을 제시하면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 p. 93 ~ 94의 내용 요약 -
왜 3.1 운동이 아닌 3.1 혁명인지를 보여주는 위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3.1 혁명의 의미를 지적한 글을 그동안 보기가 어려웠다는 점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든지 '2월 혁명'과 같은 용어를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였지만, 3.1 혁명은 아예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자주독립 선언과 더불어 국민국시대로의 흐름이라든지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의 독립 투쟁에 영향을 준 점을 감안한다면 3.1 혁명 역시 '프랑스 대혁명'의 파급 효과에 충분히 비견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이라도 3.1 운동을 3.1 혁명이라는 용어로 변경하면서 동시에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깊게 들여다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3.1 혁명 이전과 그 발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도 눈길을 끈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애초에 3.1 혁명이 천도교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범종교, 범민족적인 양상으로의 흐름은 3.1 혁명이 1919년 3월 1일의 단발성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심지어 이를 위하여 친일파이자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까지 접촉하여 참여를 권유한 부분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또한 당시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수 백만이 참여하는 것이었다면 폭력 투쟁도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았느냐는 일각의 성급한 의견에 대해서도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발생될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3.1 혁명에 대한 방법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게 된다.
[3.1 혁명과 임시정부]는 3.1 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성립된 임시정부에 대한 내용을 통하여 3.1 혁명의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독립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끔 해준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의 성립과 더불어 항일 투쟁의 흐름을 보여줌으로써 3.1 혁명으로 촉발된 독립의 기운이 단발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독립 이후에 왜 우리나라에 친일파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였으며, 임시정부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여 그들이 해방 이후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점도 알 수 있기에 대한민국의 현대사와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3.1 혁명을 전후는 물론 독립 과정과 해방 초기의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잔혹한 일제의 천인공노할 잔혹한 행위를 짚어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끔 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하고,(이하 중략) - 대한민국 헌법 전문 中에서 - 저자의 지적처럼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는 '3.1 혁명'이 아니라 '3.1 운동'으로 기재가 되어 있는데, 단지 이것을 언급하기 위하여 헌법 전문의 일부 내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불거진 대한민국 건국 시점에 대한 논란 때문에 인영하였다. 글자를 알고 헌법이 무엇인지 조금만 알더라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 현재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임을 알 수 있는데, 1948년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논란이 과연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영토와 주권이라는 실질적인 나라 구성 요소가 없었다는 이유로 1948년을 건국절로 봐야 한다면 과연 헌법은 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이전의 독립 투쟁이 역사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헌법 전문에 명시된 내용마저도 무시하는 말도 안되는 논란이 버젓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역사에 왜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3.1 혁명과 임시정부]라는 제목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기에 이 시점에 꼭 읽어 보았으면 한다. 100주년이 점점 옅어지는 3.1 혁명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하는 의미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내용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들에게 일본은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그랬을 경우 파급효과를 감안한 것인데, 그와 동시에 3.1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노력도 계속 진행하였다.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물론 우리나라 내부에서도 친일 사관이라든지 정치적으로 쟁점화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일부 세력들에 의하여 3.1 혁명의 의미가 다소 흔들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올해의 삼일절 100주년은 이 날의 의미를 더욱 깊게 각인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아울러 기원해 본다.
( 이 글은 출판사 두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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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혁명 정신과 대한민국 - 김삼웅, 『3.1 혁명과 임시정부』
김삼웅은 3.1 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 9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국치 9년 만에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전 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인구의 10분의 1 이상(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750만 명인데 시위에 나선 사람은 약 202만 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세계 혁명사에서 처음이다. 둘째,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하면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 법정에서 진술하고, 각종 지하신문은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 셋째,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 현장에 등장했다. 4천 년 동안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도에서 신음해 온 여성들이 독립된 주체로서 봉기했다. 의병투쟁 등에 소수의 여성이 참여한 적은 있으나 자주적으로, 집단적으로 역사현장에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넷째, 신분해방의 측면이다. 조선 사회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기생, 백정, 광대 등 하층인들까지 조국해방투쟁 전선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일제와 싸웠다. 이로써 군왕과 양반 중심의 계급사회가 민중이 중심이 되는 평등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비폭력투쟁이다. 3.1 혁명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를 지침으로 했다. 이 사실 역시 세계 혁명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여섯째, 세계 피압박 민족해방투쟁의 봉화 역할을 했다. 중국의 5.4 운동을 비롯 인도와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여러 민족의 반식민지 해방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곱째, 국치 이래 독립운동 일각에서 진행되어 온 존왕주의 복벽운동을 중단시키고, ‘주권 불멸론―국민주권승계론’에 따른 국민국가시대를 열었다. 여덟째,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 나가 살던 이주민과 망명자들까지 하나로 묶어 내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세계에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인이 거주하는 세계 곳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아홉째, 독립의 당위성과 함께 일제의 패권주의와 침략성을 지적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국제평화, 평화공존, 인도주의 등 이상을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3.1 혁명의 가장 큰 성과의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다. 망명정부와 임시정부는 어떻게 다를까. 망명정부는 왕조나 정부의 법통을 승계할 수 있는 위치, 즉 왕(임금)이나 왕세자, 정부의 수반 또는 승계권자가 외국의 침략이나 정변, 쿠데타 등으로 쫓겨나서 세운 정부를 일컫는다. 이와 달리 임시정부는 왕조나 정부의 승계자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국권(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해외에 세운 정부를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민간인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상하이에 세운 것은 망명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이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채택한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거주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으로 김구가 책임을 맡은 한인애국단의 단원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경, 일와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푸이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하고 경시청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은 일왕이 두 번째 마차에 탔을 것으로 짐작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일왕을 죽이지는 못했다. 수류탄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렇게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러시아에서 각종 의열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봉창에 이어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뤼순 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천장절(일본 왕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 겸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이날 행상에 참석한 시라카와 대장 등 일본 고위 장성 여럿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성'를 발표했다. 국치 31년 만에 우리 정부가 일본에 공식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순 한문으로 쓰인 ‘선전성명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여 의정원 의원에서 의결을 거쳤으며, 전문과 5개 항의 성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명서에는 1910년의 합방조약과 일체의 불평등조약은 무효이며,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난징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한편으로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채택했다.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을 제정한 시점은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기 40일 전이다. 임시정부는 미일전쟁을 내다보고,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면서 조소앙에게 건국강령의 기초를 맡겼다. 한 해 전인 1940년 9월 17일에 임시정부는 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까지 임시정부는 3.1 혁명의 이념을 이어받아 조선독립의 길에 매진한 셈이다.
3.1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와야 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남한에서 좌우익 갈등이 두드러지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정치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행정요원이 부족하다는 명분으로 친일파 행정 관료들을 다시 등용했다. 행정 관료뿐만 아니라 친일군인, 친일경찰도 이전 직위로 복직이 이루어졌다. 친일파 관료들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고,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완전히 분단이 되었다. 1949년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은 김구가 암살을 당하면서 3.1 혁명의 정신 또한 맥이 끊겼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명분으로 독재정권의 길로 들어섰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 잠시 숨통이 트이는가 했으나,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3.1 혁명정신은 다시 수면으로 가라앉아야 했다.
한국의 수구정당은 대한민국의 법통을 1948년 탄생한 이승만 정부에 두고 있다. 겉으로는 3.1 혁명을 이어받은 임시정부를 부정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왜 그런 것일까? 한국의 수구정당은 친일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49년 친일파들을 척결하려고 한 반민특위를 폭력으로 무마시킨 세력을 이어받았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들은 이승만을 국조(國祖)로 생각한다. 그 와중에 3.1 혁명정신을 이어받는 임시정부 세력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암살당하기 직전까지 김구는 남과 북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분단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 세력과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3.1 혁명은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에도 친일파가 척결되지 않으면서 혁명정신은 해방조선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으며, 그 폐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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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부르는 3.1운동이라고 부르는 3.1독립만세운동을 저자인 김삼웅 前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으로 정명(바른 이름을 찾아가는)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한 때 1894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운동)을 동학농민봉기라고 불리우던 때가 있었다. 바른 이름에서 바른 사상이 나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다. 우리는 불과 100년전은 앞이 안 보일만큼 암울했고 광복을 맞은 것도 아직 74년 채 1세대가 안 지났다. 나의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바로 일제시대 태어나서 일제를 몸소 겪으셨다는 것이다. ![]() 저자인 김삼웅 선생님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는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저자는 특히 독립기념관장을 4년간 역임했고, 민주화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역사 바로세우기에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백범 김구평전>,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등 독립운동가 평전과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등 현대 민주화 운동 인물들의 평전도 저술했다. 한 떄 저자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서양에는 평전 문화가 있어 한 사람의 일대기를 여러 시각에서 보기는 하되, 객관적인 평가를 많이 내리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평전문화가 없어서 저자가 시작했다고 했다.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한반도 전역과 한인이 사는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는 우리 민족사를 크게 뒤바꾸는 엄청난 계기가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우리는 9년만에 범민족적인 만세운동을 통해 세계 만방에 독립의 의지를 알렸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지난한 봉건군주체제를 끝내고 민주공화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기미 3.1독립혁명은 거대한 호수였다. 동학농민운동,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의병 전쟁 등 다양한 국내외 항일운동 등 각종 민족운동의 흐름이 3.1혁명으로 응집되었고 이후 우리는 더윽 체계화, 조직화, 장기화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째,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와 같은 무장 항일운동 둘째, 이봉창, 윤봉길, 김상옥 등이 일으킨 은밀한 대외 의거 셋째,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각종 외교력에 의한 민족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한 정치적 운동
이렇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체계적, 장기적 성격을 띄고 광복의 그 순간까지 끈질긴 독립정신을 보여준다.
3.1혁명이 왜적의 총칼 앞에 생명을 내던지며 투쟁하면서까지 얻은 역사적 의미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면
1. 국치 9년만에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全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한 것,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하나의 단일 사건에 투입되어 전개한 혁명은 전 세계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2.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하면 민주공화제 국기로 수립할 것이라 법정에서 진술하고, 각종 지하신문은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 결국 우리 상하이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 3.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 현장에 등장했다.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독립운동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전민족이 참여한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4. 신분해방이 이뤄졌다. 천민계급에 속했던 백정, 기생, 광대 등도 모두 참여해 양반시대의 잔재가 허물어져 평등주의 사회로 전환했다. 5. 비폭력 투쟁이었다.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는 세계 혁명사 유례없는 일이었다. 6. 세계 피지배 민족 해방투쟁에 봉화역할을 해 중국의 5.4운동, 인도와 이집트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7. 국치 이래 독립운동 일각에서 진행되어 온 존왕주의 복벽운동을 중단시키고 국민주권승계론에 따른 국민국가시대를 열었다. 8. 국내만이 아니래 해외 모든 우리 민족이 참여한 거족적 민족 혁명이었다. 9. 독립의 당위성과 함께 일제의 패권주의와 침략성을 지적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국제평화,평화공존,인도주의 등 이상을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대전환을 가져온 3.1만세운동이 어찌 '혁명'이지 않겠는가. 당시 일본 정부와 어용신문은 '폭동,난동,반란'등으로 표현했지만 당시 중국에서도 신문,잡지에서 조선혁명, 대혁명, 해방투쟁 등으로 정의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혁명이라 불렀다. 하지만 한민당 계열 일부 제헌의원들이 국회의장인 이승만에게 3.1혁명이 과격용어라고 진언하면서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었고, 오늘날까지 굳어져 버렸다. 이제 저자는 다시 혁명으로 부르자고 이야기한다. 당연하다. 우리민족의 쾌거를 우리 스스로 낮출 필요는 전혀 없다.
그 뒤 여기서 주장한 여러가지 이론과 정강은 상하이 임시정부로 모두 계승되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탄생한다. 당시 3.1운동 이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우리나라는 국치 이해 최대 항일 대첩을 이뤘고, 세계의 시류 또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독선과 독주로 임시정부 요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임시정부는 힘을 잃고 만다.
이 책은 1장에서 경술국치의 전말과 황제의 서명이 빠진 무효의 병탄조약문에 대해 설명한다. 그 뒤 일제는 105인 사건과 초기의 무단통치로 우리 민족의 독립을 누른다. 그러다 요동치는 국제정세와 1차 대전 이후 동유럽의 헝가리 등 오스만 제국 해체 후 민족 자결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우리의 3.1혁명의 기운이 싹튼다. 특히 재일유학생의 역할이 컸다. 독립선언서 인쇄 중 나타난 친일형사의 이야기는 정말 영화와 같다. 민족대표 33명의 서명순서가 나오며, 유림대표 김창숙은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거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3,4장에서 3.1혁명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5장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이야기가 나온다. 6장부터는 그 뒤의 이야기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항거, 김구와 김원봉의 이야기도 나온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마지막으로 우리의 독립의 과정과 광복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절정을 이룬다. 아, 조금만 늦게 또는 일본 원폭이 안 됐다면, 세계적인 비극도 없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우리가 쟁취하거나 적어도 주도 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은 항상 있다. ![]() (임정요인들은 미군정의 방해로 결국 개인자격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일제의 만행과 잔학사가 실려 있다.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과 혹독한 고문으로 고생했던 단재신채호의 말을 빌려 일제의 죄악상을 들여다본다. 일제는 유달리 한국인에 가한 고문의 참상, 한국 여성들이 당한 참혹한 피해 등이 세계의 다른 지배국가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악랄했다. 이를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국민이 받은 상처와 일본의 잔혹성을 알면서 죄는 용서하되 잊지는 않기 위해서 저자는 이 내용을 실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수립 100주년 아직도 일부 보수세력들은 건국절이니 같은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그들의 친일을 감추기 위해 임시정부를 지우려 하고 있다. 지켜야 한다. 일제보다 더 나쁜 것이 이런 사람들이다. 일제시대에 협력해 민족을 괴롭혔던 것도 우리민족, 우리사람도 매우 많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고, 과거의 자랑스로운 일은 계승해서 오늘을, 그리고 미래를 가꾸어 나가는데 있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정의가 승리하고, 바른 역사를 우리 후손들이 알게 하는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이 책은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두레출판사의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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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3·1 운동이 벌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어디 이뿐인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요,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기도 하다.
첫째, 국치 9년 만에 전 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세계 혁명사에서 처음이다.
이상의 아홉 가지 근거는 책에서 머리말과 본문(4장) 등 두 번에 걸쳐 나온다. 저자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보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1943). 오른쪽부터 방순희, 권기옥, 김순애, 맨 왼쪽 최소정
책은 8장으로 구성되었다. 형식상 세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3·1 혁명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역사적 의의를 되짚어본다(1~4장). 이어 의열투쟁과 임시정부 수립과 광복군 창설 등 독립 준비과정 (5~7장), 마지막으로 일제의 만행과 잔학상(8장)을 고발한다.
문 대통령 충칭 임시정부청사 방문(2017.12.16)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기념. 충칭 임시정부청사(1945.11.3).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경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정부는 이 날을 올해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인근 서대문구 의회청사 부지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건립을 추진 중이다. 기념관은 도서관, 자료관과 박물관 기능을 한데 갖춰 자료 수집 및 전시, 교육 등 다양한 역할을 도모한다. 올해 4월 11일 기공식을 거쳐, 2020년 8월 개관할 예정이다.
본문 속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가 희미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을 찾아봤다. 여기서 태극의 모양과 감리 괘의 위치가 지금과 다름에 유의하자.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 그 유래다. 이후 다양한 형태의 태극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1949년 10월 15일 「국기제작법고시」를 통해 국기 제작 방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저자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늘날 그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볼 수 있는 화두를 제시했다. ‘3·1 운동’이 ‘3·1 혁명’으로 불리려면 역사학계 등의 논의를 거쳐 정부가 공식적으로 선언해야 가능할 것이다.
저자 김삼웅 제7대 독립기념관장
한편 독립기념관은 오는 2월 26일부터 ‘겨레의함성’(제3관)을 재개관한다. ‘겨레의함성’관은 3·1운동의 시작, 전개과정, 역사적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3·1운동이 한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중요한 분수령이었음을 널리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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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이 봉기한 지 1백 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그런 만큼 여러 유관 단체들과 국가 기관에서 그 의미를 기리기 위해서 많은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진행 중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3.1운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많다. 솔직하게 말해서, 역사를 전공하거나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잠시 배운 지식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3.1운동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한 주의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책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책은 바로 독립운동사 연구가로 잘 알려진 김삼웅이 쓴 『3.1혁명과 임시정부』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의 저자는 우리에게 3.1운동으로 익숙한 역사적 사건을 ‘3.1혁명’으로 정의함으로써 대단히 독특한 관점을 대변한다. 물론 이런 평가에는 3.1운동을 대하는 기존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이 책의 저자가 취하는 입장과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기존의 입장은 이 책의 저자가 펼치는 논증을 듣는 과정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 책이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는, 3.1운동의 정확한 성격과 의미를 역사적 근거에 기초해서 정확히 규명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3.1운동이 인류 혁명사에서 두 번 다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단히 획기적이고 미증유적인 혁명이라고 규정한다. 저자가 내세우는 논거로는 (1) 다수 국민의 자발적 참여, (2) 민주공화제 정립의 계기, (3) 여성의 참여, (4) 신분 해방과 평등주의로의 전환, (5) 비폭력투쟁, (6) 세계 피압박 민족해방 투쟁의 기폭제, (7) 국민국가시대의 개시, (8)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국제평화, 평화공존, 인도주의) 제시 등이 있다. 저자의 논리를 따르면, 참으로 우리가 지금껏 3.1운동으로 인식했던 한민족의 독립혁명은 그것의 혁명적 성격을 과격한 것으로 치부하여 운동으로 격하한 이승만의 결정 때문에, 심지어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3.1운동이 봉기하기까지의 역사적 추이(한일병탄과 조선 멸망)를 생동감 있게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참으로 암울했던 그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3.1운동이 지닌 혁명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각성하도록 돕는다. 이 부분은 나에게도 대단한 충격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지금껏 역사 시간에 간략하게 배운 지식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비분강개의 감정이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3.1운동이 봉기하는 그 순간까지의 과정이 참으로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처럼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던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결국 3.1운동은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인물, 환경, 세계사의 전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었다.
3.1운동의 결과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저자의 설명도 그 당시의 현실을 매우 생동감 있게 소개하는 동시에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그러면서도 풍부한) 사료들을 제공한다. 비록 분량은 100여 페이지로 그리 많지 않지만, 저자는 참으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꼭 알고 있어야만 하는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의 역사를 대단히 간략하면서도 꼭 필요한 내용들을 모두 담아 전달하는, 대단히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저자의 노력은 우리가 국사 수업 시간에 단편적으로 습득하는 역사적 진실과 사실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서, 일제 강점기 당시에 전개된 우리 민족의 독립 활동의 전모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3.1운동이 더 이상 하나의 독립운동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염원을 담아서 전 방위적으로(전 국민적으로, 전 지역적으로) 펼쳐진 독립혁명이었음을 분명히 표명해야 한다. 3.1혁명을 3.1운동으로 지칭하는 것은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염원과 투쟁을 격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치명적인 역사 왜곡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성토하는 일제의 폐습보다도 훨씬 더 파괴적인 영향력을 우리 민족의 정신에 끼친다(이런 점에서 보면, 비록 역사적으로 얼마간의 업적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승만 박사가 민족의 후예들에게 대단히 중대한 죄를 범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정말 뜻 깊은 2019년에 3.1혁명의 진정한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 그리고 3.1혁명을 바탕으로 성립된 임시정부의 활동을 종합적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책의 일독을 권유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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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의 거대한 물결은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국사책에서 배웠던 것이기에 누구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일제의 통치방식을 문화정치로 바꾸는 계기였다는 것,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정도로 얘기는 끝났다. 그 과정은 제쳐두고 결론에 초점을 맞춰서 오로지 시험용으로만 접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상해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이념과 방법으로 다양한 세력의 뭉치고 헤어짐이 계속되어 복잡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고급 수준의 시험범위에 속해 있어서 수박 겉핥기 정도로만 알고 수많은 저항과 독립운동의 하나쯤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의 ‘혁명’이라는 호칭은 뜬금없는 정치적 수사로만 들렸다. 그런데 김삼웅 선생님의 책으로 한 두 페이지가 아닌 하나의 책자로 접하면서 새롭게 다시 보게 된다.
다중혁명의 가치를 구현한 3.1혁명은 안으로는 동학농민전쟁, 의병투쟁, 만민공동회, 의열투쟁, 무장전쟁 등 밑으로부터 전개되어 온 민족운동과 독립협회와 신민회 같은 단체 활동과 같은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밖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1917년 레닌의 민족자주론,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론 등이 영향을 받았다. 그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삼천만의 물결은 임시 정부라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였다. 역사에서 하나의 획이라는 역사는 단순히 어느 단체나 한 개인의 뜬금없는 객기로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의 물결’ 속에서 움트고 자라나는 것이었다.
재일 유학생과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시작되어 손병희 중심의 천도교가 3.1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왜 여러 가지 수단 중에서 독립선언서만 발표하고 그것도 시위 현장이 아닌 태화관에서 행하고 바로 일본에 자수를 하고 3.1혁명이 비폭력주의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거사가 특히 3.1에 있었던 이유도 알게 해 준다. 전개과정에서 펼쳐지는 일제의 학살과 수십 가지의 고문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기를 어렵게 한다.
수십만의 피, 땀, 눈물의 3.1혁명의 결과로 결집된 것이 서울, 상하이, 연해주 등에 8개의 임시정부의 설립이었고 그해 4.11에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어 9년 만에 나라의 법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전횡, 그로 인한 탄핵과 임시정부의 분열과 국민대표회의 과정, 박은식, 이봉창이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된 여정, 윤봉길의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 수뇌부 폭살, 광복군 창설에 이르는 과정에 김구와 김원봉의 좌우의 합작의 노력, 미국, 영국, 소련의 전략은 하나의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하고, 이 또한 강대국의 논리라는 시대의 흐름을 비켜나가기 어렵다는 알게 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거사 기금 모금에 동참하고 만세 물결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만주, 간도, 연해주, 미국으로까지 퍼졌다. 그 와중에 독립선언 참여에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도 ‘일생애를 통하여 학자의 생활로서 관철(p50)’이라는 아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가치 때문에 선언서 서명에서 빠졌고 뒷날에는 변절도 서슴지 않았다. 악질 친일 형사는 보성사에서 선언서 인쇄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거금 5000원을 챙겼다. 이처럼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연달을 추구한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혹독하고 잔인했다(p210). 박은식 성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나오는 3.1운동 과정에서 일본이 저지르는 만행을 하는 부분(p86 이하)은 아주 목불식견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수많은 민중과 지식인들이 자신과 가문을 미래를 걸고 위험을 감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악하고 이해타산에 밝은 선택보다는 만세와 투쟁에 현재를 뿌렸을까?
3.1 만세 시위가 ‘운동’이 아니라 ‘혁명’이어야 하는 이유는 인구의 10분의 1이 시위에 참여했고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현장에 등장했고 기생, 백정 광대 등 천민계급까지 조국해방 투쟁 전선에 주체로 참여하여 평등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고 군주제를 폐지하고 만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 국민주건계승론에 따른 국민국가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후천개벽’의 대전환을 가져왔기에(p95) 혁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친일의 식민지근대화를 주장하며 소위 건국절을 주장하는 세력이나 혁명을 헌법제정주체의 변동이라는 아주 좁은 의미로 접근하여 논란을 부추길 수도 있기에 탄탄한 이론적 접근을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친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끝내지 못해서 오는 불필요하고 소모적 논쟁에 원천적 차단을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참고;http://blog.yes24.com/document/11061737 )
일제가 내란죄로 걸고 넘어졌던 공약 3장의 ‘최후의 일인까지’(p70)라는 문구, ‘피 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로 끝마치는 윤봉길이 조국의 청년 제군에게 보내는 유서(p155)의 장엄하고 굳건한 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헌법 전문과 우리 가슴 속에 뜨겁게 살아서 앞으로 100년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 문구와 유언을 보고 뜨거운 가슴을 느꼈다면, 얼마나 잔인했던지 아마 그 광경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이 나라 민족의 아픔에 공감을 하고 있었으면, 시대의 간절함을 생각했으면 1965년의 ‘한일협정’이나 2015년의 ‘위안부 합의’ 같은 체결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1 혁명의 함성으로 만들어진 임시정부가 오늘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고 전국에 퍼지는 만세 소리는 지금도 우리들 가슴 속에 생생하게 살아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드는 데 밑바닥의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명백해 보인다. 100년 전의 이름 모를 수많은 민중들과 지식인들의 피, 땀, 눈물이 간절함으로 뭉쳐서 오늘에 이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제 후세들이 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평화통일을 이루어서, 산화한 독립운동가들이 영원한 안식에 들도록 해야 할 것(p104)이 이 시대의 간절한 흐름일 것이다.
100년! 역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또 시대의 흐름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법륜 스님이 출가할 때 스승님이 "1000년을 내다보고 살아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후 그는 ‘1000년은 못 내다보더라도 100년은 내다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오셨다고 한다. 그의 말을 들으니, 오래 전 아주 어렸을 때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1000년의 근심으로 사는 구나”라는 어느 CF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그 말은 근심하지 말고 지금을 즐기면서 살라는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시간의 흐름을 한 개인에게만 그것도 눈에 보이는 육체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우리’라는 뜨거운 공동체 정신과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 개인은 가고 없지만 뜨거움과 흐름은 100년을 넘어서 1000년을 가서도 얼마든지 살아서 현재에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얼마든지 적시고 또 적실 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숙연해지고 뭉클해진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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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억지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 극보수를 끌어모으려는 정치인으로 인해 시끌벅적하다. 그 정치인은 그냥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계획된 행동이다. 시대적으로 혹은 흐름의 변화에 의해 박탈감을 가지게 된 연령대의 후원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면서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된 해이다. 이번에 읽게 된 책은 3.1 혁명과 임시정부라는 책으로 3.1 운동이 아닌 3.1 혁명이라고 부르자고 말하고 있다. 3.1 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시 나라의 백성들이 독립을 원하고 우리만의 힘으로 우뚝 서기를 원한다는 것을 전국에서 증명해주었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결과까지 이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병탄 7적(매국 7적)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잘 그려진 사람들이다. 총리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중추원 의장 김윤식이다. 병탄 조약문(국치 조약문)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여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중략...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각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했다... 중략..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 책은 지금까지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3.1 운동 혹은 3.1 혁명에 대해 앞뒤의 분위기나 어떻게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해 잘 기술이 되어 있다. 운동을 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데 이때 이곳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것이 33명이었다. 이때 최남선은 스스로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면서 서명에서 빠진다. 원래 오늘은 야외로 운동을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갑자기 취소가 된 덕분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기미년 3.1 혁명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민족이 봉건적 신민 의식에서 근대적 신민 의식으로 전환되었고 가부장적 굴레에 종속되었던 여성이 현실에 참여하였다. 어떻게 보면 자본에 의해 불평등이 심화된 지금보다도 더 평등한 세상을 꿈꾼 것이다. 경성 복심원은 3.1 혁명의 여파로 잡힌 민족대표 48명의 형량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승훈, 함태영, 한용운 - 징역 3년 최남선, 이갑성, 김창준, 오화영 - 징역 2년 6월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 징역 2년 그리고 비교적 협조가 덜했다고 생각했던 12명에게만 무죄가 선고된다. 감옥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게 될 까 봐 공포에 질려 있을 때 한용운은 "독립운동을 하고도 살 줄 알았더냐!"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먹지 말 것, 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을 몸소 실천했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올랐으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 의원들은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승만은 1921년 5월 29일 마닐라행 기선 컬럼비아호를 타고 상하이로 떠나서 분열을 가속시킨다. 이에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2년 6월 10일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해 6월 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되고 이승만은 탄핵된다. 그러나 그는 구미위원회의 사업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쌈짓돈으로 사용한다. 지금으로 본다면 권한이 없는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국채를 파는 격이다. 드라마 등에서 등장하지만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일왕 마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을 비롯하여 윤봉길은 상하이에서 일본 수뇌를 폭살시킨다. 한국광복군의 제1대 지대장은 김원봉, 제2지대 지대장은 이범석, 제3지대 지대장은 김학규 등이 활약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처절하게 싸웠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뒤 해방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활동하면서 독립을 위해 달렸던 수십 년의 시간이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의 뿌리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