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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에 대하여 ]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두고, 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 이마 ] - 신미나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 모란이 피네 ]
외로운 홑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
그런데 애야,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 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그것의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정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긴긴 오뉴월 한낮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 당신께 보여주려고, 꽃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은 모란보자기
[ 휘영청이라는 말 ] -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은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 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 사이 ]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사이가 참 좋다
나와 나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새들과 새들 사이 지는 해오 뜨는 해 사이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 우물 ] - 이영광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 더 쨍한 사랑 노래 ] 그대 기척 어느덧 지표地表에서 휘발하고 저녁 하늘 바다 가까이 바다 냄새 맡을 때쯤 바다 홀연히 사라진 강물처럼 황당하게 나는 흐른다. 하구河口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 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마리 비칠대며 걸어다닌다.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 혹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곳?
[ 노독 ]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둥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속으로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소/라/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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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인의 좋은 시와 시인들의 시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알찬 시집! 시를 읽는 맛을 배가시키는 안도현 시인의 해설까지! 신철 화가의 따뜻하고 밝은 그림까지 새 봄에 선물하기 딱 좋은 시집이다. 대학을 들어가는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에게 선물하면 딱일 듯. 그림을 감상하면 뭔가 묘한 끌림이 있다.
이 시집은 한 편 한 편의 시와 또한 안도현 시인의 한 편의 시에 대한 감상을 읽는 시간 나는 좀 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읽는 순간 독자들은 한번쯤 시를 쓰고 싶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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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시만 읽었다면 별로 마음에 안 와 닿는다고 생각되는 작품들도 있었는데, 바로 옆 페이지의 설명을 읽고 다시 천천히 한 단어씩 곱씹어 가며 읽어보면 다르게 느껴지더라구요. 시란 후루룩 읽어나가는 장르가 아니라 여러번 다시 되새김질 하는 것이라는 새삼 깨달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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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잘 맞는 책을 고르는 방법 중의 하나가 그 분야에 정통한, 그러면서도 취향이 나와 상당히 비슷한 사람이 추천해주는 책을 읽는 것이다. 시 분야는 잘 모른다. 나에게 시는 부끄럽지만 윤동주와 김소월, 도종환과 서정윤 그 정도인 것 같다. 한달에 한 편의 시를 외우자는 낭만적인 CEO를 만나 한때 시를 외우며 살 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시를 외우며 살기엔 너무 바쁜 분이라 그 다짐은 쉽게 잊혀졌다. 그런 수준의 나에게 딱 맞는 책이 나왔다. 안도현 시인이 엮은 책. 게다가 미리보기로 본 책은 어찌나 예쁘던지. 봄 아닌가. 시 한 편은 읽어줘야하는 계절. 말랑말랑, 예쁘고 쉽고, 잘 아는 시가 잔~뜩 들어있을 것이란 예상을 완전 뒤집고 어디서 이런 시를 골라왔을까 싶게 다양한 시들이 들어있었다. 시를 읽고 갸웃갸웃 했다 안도현 시인의 코멘트를 읽고서야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시만 읽어도 속 시원해지는 그런 시가 나오기도 했다. 지하철 안에서 시를 읽으며 실실 웃다보니 오랜만에 시를 읽으며 심각하지 않아 좋구나 싶었다.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들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이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집에 못가다 - 정희성 나는 이 시를 읽고 그만 웃어버렸지만 시인은 집에 못가는 것이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에 갇히고 싶지 않은 시인의 마음을 읽었다.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 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병든 짐승 - 도종환 장관으로서의 도종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시인으로서 도종환은 참 괜찮은 시를 쓰지 않았나 싶다. 나도 가만히 있자라는 말에서 나도 그만 가만히 있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읽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 읽어도 좋은 시 65편,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