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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자본 시리즈 4권은 마르크스의 [자본] 제4장에 대한 읽기이다. 제1편 ‘상품과 화폐’의 1장에서 3장까지 읽은 저자는 이어 제2편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를 읽는다. 1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생산물과 상품을 구별하는 것은 가치라고 했다. 화폐 또한 일종의 가치형태이지만 다른 상품과 달리 일반적인 가치형태이다. 이론적으로는 보았을 때 가치개념이 자본개념에 선행하지만 가치개념을 설명하려면 자본에 기초한 생산양식을 가정해야 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은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이 변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는 것이기에 상품의 가치형태를 논할 때 이미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자본] 논의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정립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1편에서 상품과 화폐에 대한 논의를 마친 마르크스는 2편에서는 화폐가 자본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화폐는 화폐일 뿐이지만 어떤 관계에서는 자본이 된다. 그냥 화폐로서의 화폐도 있지만 자본인 화폐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본으로 쓸 때 그 돈은 다시 돌아온다고 강조한다. 화폐로서의 화폐의 경우 그 화폐를 쓰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자본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스스로 가치를 증식해가는 가치를 자본이라 했다. 증식한 가치는 바로 잉여가치를 말한다. 즉 잉여가치를 낳는 가치, 잉여가치를 위해 투자한 가치가 자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이 잉여가치를 낳고나면 그 둘은 다시 한 몸이 되어 자본으로 기능한다. 저자가 자본으로서의 화폐를 설명하면서 이 책의 제목에 ‘성부와 성자’란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이러한 자본의 특성은 보존과 증식이다. 상품 역시 자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은 유통과정이나 순환과정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순환될 때마다 잉여가치를 낳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자본은 상품과 화폐의 유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일반정식’이라 제시한 G(화폐)-W(상품)-G‘(화폐)에서 G'는 G보다 항상 커야하고 이 차이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 마르크스는 이 잉여가치가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본다. 유통과정에서는 등가교환이 원칙이기 때문에 잉여가치가 생겨날 수 없다.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구매한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판매할 제품의 교환가치 증대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정식을 G-W-W'-G'로 변형하여 설명한다. 상품 W가 W'로 변하면서 가치증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최종산물(W')의 가치는 원료·도구·노동력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커야 가치증식이 일어난다. 그러나 원료나 도구의 경우 등가교환이 일어나기 때문에 가치증식이 일어날 수 없다. 단 하나, 노동력만이 가치증식을 일으킬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노동은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고 1편에서 마르크스는 설명했다. 따라서 잉여가치도 노동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노동의 가치는 다른 상품과 같이 등가교환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에서 잉여가치가 생겨날 수 있을까?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으로 계산된다. 노동력 또한 상품이기에 그 가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이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이미 시장에 나온 상품 중 하나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력의 가치는 한 개인이 그 사회에서 자신을 재생산하고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이라고 말한다.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되고, 사회적 노동량의 ‘사회적’이란 평균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자가 실제로 수행한 노동의 양은 같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란 바로 이런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이 창출한 가치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한마디로 잉여가치란 잉여노동인 것이다. 이는 자본이라는 개념자체가 비록 그것이 적법하다 할지라도 착취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고,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때에 한해서 자본이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고 한다. 먼저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유롭게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분해방이 이루어져야 했다. 노동시간이나 노동조건들이 제도적으로 규제된 것은 노동력소유자와 화폐소유자가 법률상으로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넘기는 것은 노동력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노동자는 노동력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야 했다.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들이 있어야 상품으로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신분해방과 빈곤이 필수적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부의 창출 조건이 바로 빈곤의 창출에 있는 셈이다.
결국 노동력이 없으면 잉여노동이 없고, 잉여노동이 없으면 잉여가치가 없고, 잉여가치가 없으면 자본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노동력이란 단 하나의 상품이 존재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가치증식의 또 다른 이름은 노동력의 착취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만나 거래하는 곳은 자유·평등·소유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한다. 자유로운 인격의 소유자가, 법적으로 동등한 사람이, 각기 소유한 것을 처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을 서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자본가의 노동자로서 그의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바쁘게 가고 후자는 가죽을 팔고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주춤주춤 따라간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여기서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에 앞서 이 책 ‘북클럽 [자본]읽기 시리즈’를 먼저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만큼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는 생각에서다. 이 시리즈를 다 읽고 나서 [자본]을 직접 읽게 되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기대가 높아진다. 다음 권은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을 다루는 [자본] 5·6·7장 읽기이다. 마르크스는 어떻게 풀어가고 저자는 어떻게 읽는지 따라 가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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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에서는 '농민들로부터의 토지 수탈',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자본주의적 차지농업가(남의 땅을 빌린 농사꾼)의 발생', '공업에 대한 농업혁명의 반작용', '산업자본을 위한 국내시장의 조성', '산업자본가의 발생', '아메리카에서 금은 산지 발견', '원주민 섬멸, 노예화, 광산에 생매장', '동인도 정복과 약탈의 개시', '아프리카 흑인 사냥의 상업화' 등등이 벌어졌다. 이중에서 마르크스가 특별히 눈여겨 본 것은 '생산수단을 잃은 대규모 노동인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폭력적으로 자신의 생존수단(농지)으로부터 분리되어 의지할 곳 없는 '무일푼의 프롤레타리아(노동자)로 노동시장에 투입된 순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특별하게 보았다.
이런 와중에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암튼, '공장'을 지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 자본가는 '공장설비'에 많은 돈을 투자하였기 때문에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어떤 것'이 절실했다. 이러한 때에 무일푼으로 전락한 값싼 노동자들이 대량 발생해 도시로 몰려오면서 '자본주의 발달'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셈이다. 만약, 무일푼의 노동자가 '동시대'에 발생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좀 더 더디게 발전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달하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뭐라도 다르게 형성되지 않았을까?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제값'을 주고 계약하는 일이 초기에 정착하게 되었다면...그래도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
한편, '땅에는 임자가 있지만 돈에는 임자가 따로 없다'는 말은 임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면 '신분제 사회'이며, 그 반대로 정해져 있지 않다면 '신분제 사회'가 아니라는 걸 뜻한다. 귀족과 성직자가 차지하고 있던 '장원(대농장) 경제'가 무너지면서 신분제 사회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고, 도시의 공업화로 인해 '화폐'를 긁어모은 부르주아지는 성공적으로 '자본가'로 자리잡으면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계급 질서'가 생겨났는데, '돈을 가진 자'가 주인이 되고, '노동을 파는 자'가 노예가 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거다. 이제 '인격적'인 땅에 예속된 삶이 아닌 '비인격적'인 돈에 예속된 사회가 형성되고 말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귀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귀족들은 부르주아지를 '돈만 밝히고 전통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족속'이라고 비난하고, 부르주아지들은 귀족을 '무능력하고 탐욕적인데도 저능아라서 돈 버는 법도 배우지 못하는 꼴통'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한 귀족들은 영지를 팔아 돈을 긁어모아서 '자본가' 대열에 합류하며, 부르주아지들과 함께 '초기 자본주의'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돈만 긁어모았다고 모두 '자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돈만 밝히는 이들은 '수전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본가'라면 돈을 굴려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그 공식을 [ W-G-W ], [ G-W-G]로 나타냈다. W는 '상품(Were)'이고, G는 '화폐(Geld)'다. 다시 말해, 앞선 공식이 '화폐로 쓰이는 공식'이고, 뒷 공식이 '자본으로 쓰인 공식'이다. 바로 '자본가'를 배불리는 공식이 [ G-W-G ]인 셈이다.
물론, 처음의 G와 나중의 G는 서로 달라야 한다. 돈을 주고 상품을 사들였다가 다시 돈을 받고 상품을 팔았을 때 '이윤'이 생겨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득'이 안 생기는 교환(거래)을 할 턱이 없다. 이렇게 생긴 '이윤'을 유명한 단어인 '잉여가치'다. 한마디로 자본가는 '자본'을 굴려서 '잉여가치'를 얻는데 기가 막히게 능숙한 이들이다.
앞서, 돈을 긁어모을 줄만 아는 이들을 '수전노'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부에 대한 무한한 탐욕'과 '교환가치의 열정적 추구'라는 점에서는 '자본가'와 차이점이 없다. 다만, '실현'하는 방식에서 다를 뿐이다. 따라서 '수전노가 정신 나간 자본가라면, 자본가는 합리적인 수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수전노'가 사용하는 공식이 꽤나 단순하다. 가진 돈으로 상품으로 사서 다시 되파는 일만 했을 뿐인데, '잉여가치'를 잘도 뽑아냈다. 그렇다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탐정'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르크스가 '잉여가치'가 나오는 곳을 찾을 때에도 그런 느낌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결론만 얘기하면, '잉여가치'는 [ G-W-G ]라는 공식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건 바로 '노동력 착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노골적으로 '노동자의 편'을 드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노동력 착취'가 합법이라는 사실이다. 왜냐면 '노동력'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합법적인 계약'을 통해서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어째서 '착취 당할 것'을 알면서도 계약서에 사인을 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건 바로 '빈곤'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유시장'에서 합법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기로 계약을 했지만, 결코 '제값'을 받지는 못했다. 그건 노동자들이 너무나도 빈곤한 탓에 자신의 유일한 생산수단인 '노동력'을 헐값에라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이를 통해서 '잉여가치'를 최대한 끌어모을 수 있었고, 값싼 노동력으로 엄청난 생산량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이윤'을 긁어모을 수 있었던 거다.
만약, 이때의 자본가가 양심적이게도 '노동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주고서 '노동력'을 사갔더라면, 착취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자본가'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그건 '자본가들끼리의 살벌한 경쟁' 때문이다. 비슷한 상품이라면 더 싼 값에 내놓은 상품이 더 많이 팔리는 것은 '기초적인 경제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공장에서 만든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가격경쟁'을 벌이게 되고, 그로 인해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가야할 '이윤'이 삭감되고, 자본가의 몫은 고스란히 보존하는 방식이 널리 유행(?)하면서 노동력 착취는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 거다. 허나, 이런 식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자본주의'는 멀지 않아 곳곳에서 부작용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건 이 시리즈의 나중 이야기일테니 좀 더 두고 보자.
암튼, 자본가는 '합리적인 이윤추구'를 위해서 '노동자의 빈곤'을 이용했고, '노동자들의 절박함'을 악용했다는 점에서 비판과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밖에 없을 거다. 마르크스는 이런 점을 잘 밝혀냈고, 노동자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허나, 노동자들이 '사실'을 알아챈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늘날에도 '최저임금'을 보장했다며 자랑으로 삼는 사장님들이 계시다. '최저임금'이란 적어도 이것 이상은 줘야 한다는 '하한선'일 뿐인데, 이걸 자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실상은 더욱 가관이다. '최저임금'도 지키지 못하고 낮은 임금을 주기 일쑤고, 그나마도 떼어 먹기 일쑤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최저임금' 때문에 대한민국 경제가 망할 거라고 아우성을 치는 언론들도 있다. 정말이지 부끄러움이라는 걸 잊어버린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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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 이 자본 시리즈를 완결 전까지는 아직 읽지는 않고 있습니다. 좋은 책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책들은 대체로 빨리 절판되는 경향이 있어서도 그렇고, 연재되는 소설을 조금씩 모아 한 번에 다 읽고자 하는 욕심에서도 그렇습니다. 마치 잔치상 음식을 먹으려고 일주일을 굶는 기가 막힌 거지처럼 말이죠. 이 시리즈를 그렇다고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고 조금씩 내용을 쭉 훑어 본 결과 제가 내린 결론은 맑스가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형태의 바로 그 자본론이 아닌가 합니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을 제대로 다루는 그런 책 말이죠. 그 어떤 경제학자도 노동자보다는 자본가들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던 바로 그 시절 오로지 노동자와 피착취 대중을 위해 연구한 맑스가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자본론은 바로 이처럼 쉽고도 핵심을 뚫는 형태가 아니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출퇴근 하면서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함니다. 많은 분들이 저처럼 장시간 근무에 주말까지 거의 독서할 틈이 없으실 것이며 오직 유일한 독서 시간은 출퇴근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볼 수 있는 형태로 (일단 작고 귀엽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수식 없이 이렇게 발간된 자본론은 이게 유일한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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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의미에 대해서 좀 다른 시각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유란 자유의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자유의지라는 것이, 각각 단절되어 독립된 개인으로서 존재할 때 그 자유의지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성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렇게 각자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자유를 누구나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평등이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등장하게 된 역사성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인간성은 이기적인 개인의 탄생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보여집니다. 1권에서도 강조된 바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만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이고 이것이 마치 인간본성인 것 처럼 해석되곤 하지만, 자본주의라고 하는 시스템을 벗어나는 곳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자유와 평등을 찾을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내가 바라는 자유와 평등은 과연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독서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