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2일에 리뷰를 쓴 스티븐 시걸 '조연'작 <퍼펙트 킬러>를 보면 주인공 잭 대니얼스(조지 이즈 扮)가 쓰고 다니는 모자를 보고 영감이 '니가 무슨 록킨줄 아냐? 벗어.'라고 하는 대사가 있다. 그런 펠트 페도라를 두고 그냥 '록키 햇'이라고도 (이제는) 부르는데, 사실 이건 원조가 따로 있다. 1973년작 <비열한 거리(오역이지만 널리 알려진 대로)>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해당 아이템을 쓰고 나온 이 장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왼쪽이 드 니로, 오른쪽이 스탤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가며 상대를 벙찌게 하는 이런 연기는 <.... 거리>에서도 그렇고 그 1년 전에 이뤄졌다는 <대부> 오디션에서도 드 니로만의 장기로 제대로 자리매김되었다고 해야겠다(DVD 부가영상에 나옴). 헌데 이 시리즈에서 록키 발보아가 펼치는 건 좀 성격이 많이 다른데, 같은 이탈리아계이긴 하나 두뇌 회전이 빠르지 못하고 발음이 시원찮은 편(낮은 교육 수준에 기인)인 그로서는 이 기술로 무슨 효과를 본 적이 없다. 워낙 딕션이 시원찮아서 모처럼 들어온 광고촬영도 마치지 못하고 계약은 파탄이 나고 만다. 하층민 특유의 몸에 밴 기질과 매너 때문에, 생애 동안 한 번 잡을까말까한 기회를 그대로 날려 버린 것이다. 챔피언과 벌인 기적의 매치로 간신히 인지도를 얻었건만, 정작 이를 활용할 아무 재능이나 주변머리를 못 갖췄으니 그는 도로 하층민 생활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초심을 잃지 않은 각본인 게 잘 드러나는 대목은, 록키에게 어떤 과도한 휘광을 덧씌우지 않고, 본바탕이 보잘것없는 하층민이 벼락 출세를 했을 때 어떤 딜레마에 빠지기 쉬운지를 담담하고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데서이다. 보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여튼 록키 발보아는 헛바람이 들지 않은 정직한 심성으로 아내를 기쁘게해 주고 싶어하고, 주변 사람들과도 여전히 격의없는 이웃, 동료로 지내길 원한다거나 하는, 본연의 캐릭터 컬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겠다. 이 각본 역시 1편처럼 스탤론이 직접 썼는데 사실 그로서는 1편의 성공 후 이만큼(즉 캐릭터 록키)이나 핀치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 부분이 더 대견한 것이다.
서두에서 1편의 결말을 좀 과하게 끌어와 붙인 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단 2편이라 해도 서사가 자립할 수는 있어야겠으므로 전편을 보지 않은 관객들에 대한 배려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층민들 특유의 단순한 생각과 반응, 계산으로 뜻하지 않은 충돌까지 비화하는 장면도 관객들에게 웃음을 짓게 하는데, 예컨대 '왜 니 남편을 좀 더 역성들어 주지 않니?'라며 여동생을 책망하는 폴리(버트 영 扮)의 모습 같은 게 좋은 예다. 바로 앞 장면에선 이 캐릭터가 자기 여동생한테 잘 안 해 준다고 록키를 나무라기도 했기에 더 그렇다.
고 버제스 메리디스가 1편에 이어 잘 소화한 사범 '미키' 역도 이게 딱 1970년대 베테랑 배우들에게서만 보이는 명연기 중 하나다. 기분상할까봐 1편에서는(?) 말을 안 해 줬지만 사실 록키 발보아는 복싱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못했고 엄밀히 말해 선수도 아니므로 그냥 체력 단련하고 기만 살려 주는 식으로 트레이닝을 했었다고 한다. 헌데 만약 리턴 매치를 가진다면, 이제 독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작심을 하고 경기를 치를 아폴로 크리드(칼 웨더스 扮)에게 링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늙은 사범님은 경고한다. '너는 첫째 너무 느리다. 크리드의 일발장타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못 알아챈 채 링에 뻗고, 죽을 것이다. 두번째 넌 왼손잡이이며, 이게 크리드와는 상성이 안 맞다(근데 내 생각엔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 셋째 너의 동작은 상대에게 다 읽힌다.' 록키는 허황된 몽상가가 아니기에 이 지적이 다 맞다고 인정하며, 세계 최강자에게 링 위에서 매 맞는 고생은 한 번이면 족하다는 데 아무 의심이 없다.
그랬던 그는 셀럽으로서 인기를 이어갈 자질도 없고, 터무니없게도 사무직 일자리를 알아 보기도 하나 글자 하나 바로 못 읽는 그를 누가 써 줄 사람도 없다. 밀리고 밀려 결국 링에 다시 돌아왔으나, 기본기도 안 갖춰진 그로서는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승부다. 이제 자신을 다시 스스로에게, 아내에게, 사랑하는 이웃과 지인들에게 누군인지 바로 확인시켜 주려면 그러나 이 선택 말고는 남은 게 없다. 1편에서 꽤 명장면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게 필라델피아 도서관 계단을 겅중겅중 뛰는 록키를 화면에 잡으며 그 유명한 주제가 'I can fly now'가 울려퍼지는 씬인데, 이 2편에서는 여러 이웃들(동네 꼬마들)과 함께 운동하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잡아낸 '변주'가 눈에 띈다. 이 장면 말고도 이미 동네 명물이 된 록키가 시장 사람들의 성원을 받아 가며 훈련할 때의 그 천진한 표정도 오래 뇌리에 남을 것이다.
보통 우리가 '라운드 걸'이라 부르는 여성 행사 요원들은 저쪽에서는 '링 걸'이라고 부른다. 이 영화에서도 보듯 여러 명이 대기하는 게 보통이며, 여기서는 6라운드 앞, 14라운드 앞에 각각 한 번씩 모두 두 명이 나오는데 뒤에 나오는 분은 흑인이다. 앞에 나온 분이 꽤 미인이니 눈여겨 볼 필요 있음.
사실 록키의 전략은 어차피 기량으로는 상대가 안 되므로 정타 접전을 피하고 최대한 체력 소모를 끌어낸 후 후반부에서 럭키 펀치를 노리자는 매우 절망적인 성격이었다. 록키가 치고들어오지 않자 아폴로 크리드는 가드를 내리고 비스듬히 뒤로 허리를 젖히며 도발하는데, 이는 생전의 무하마드 알리가 그 놀라운 반사신경을 이용해 선보인 그만의 전매 특허와도 같은 테크닉이었다. 실물 알리처럼 이 픽션 속의 아폴로 크리드도 아주 강펀치는 아니었는지 록키는 12라운드도 아니고 15라운드를 근근이 버텨 낸다. 근데 사실 맞으면서 체력을 축적한다는 전략은 얼토당토않은 것이며, 아무리 영화라지만 저렇게 맞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다. 때리는 사람은 체급이 같은 이상 결코 힘이 빠지지 않으며, 판판이 펀치가 빗나가지 않는 이상 때릴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솟기 마련이다. 인간이 벌이는 모든 스포츠 시합은, 결코 뉴튼 역학의 원리만으로 온전히 남김 없이 설명이 안 된다.
(스포일러)
영화에서처럼, 복싱 경기 중 정말로 접전 끝에 동시 다운이 벌어지면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승자일까? 그렇다. 여기서 록키는 슬립 다운처럼 보이고, 아폴로가 정타를 맞아 넘어진 것이므로 내 생각엔 아폴로에게만 카운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차피 영화니까. 이 2편도 꽤 성공을 거뒀는데 주인공을 무조건 미화예찬하고 최후의 승자로 띄우지 않은 채 '져도 진 게 아닌 패배자의 비장한 승리'를 여전히 주제 한복판에 두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