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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 해 동안 읽은 앨리스 먼로의 책만 6권이다. 오래 전에 사 두었던 2권에다 새로 4권을 더 사서 최대한 출간 연도 순으로 읽어보았다. 어떤 비평가의 혹평(?)처럼 어쩌면 비슷비슷한 소재의 변주라 할 수도 있게 일정 시기의 캐나다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주로 여성 주인공-의 삶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앨리스 먼로의 책들은 거의 단편들인데 때로는 작품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 돼 있어 장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몰아읽다보니, 어떤 인물이 어느 책에서 나왔던 건지도 헷갈릴 정도였지만 작가 특유의 섬세한 안목과 필치가 그 모든 단점 아닌 단점들을 가려준다. 이 작품은 비교적 초기작으로 각각의 단편들이 연작 형식을 이루고 있다. 먼로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는 '그게 바로 인생!'이란 한 마디로 대변될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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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소녀를 읽다. 오랫동안 손아귀에 있었다. 꼭꼭 씹어 음미하고자 그랬다. 장엄한 매질로 시작하는 이 책은 각각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연작소설로도 연결된다. 시공간을 아우르며 펼쳐지는 로즈와 플로의 얘기들과 로즈가 성장해 가면서 겪는 다양한 에페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삶에 정답이 있을까? 어떠한 삶도 함부로 평가할수 없고 진단할수 없다. 삶을 직시하는 차가운 시선 만이 있을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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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특이하다. 앨리스 먼로라는 작가는 매우 친숙하지만 그녀의 책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에 이끌려 구입했다. 거지 소녀. 나도 거지 소녀다. 아니 거지 아가씨. 아니 거지 엄마가 더 맞겠지. 앨리스 먼로가 그리는 거지 소녀는 어떤 여자일지 궁금하다. 나와 닮았을까. 나와 어떻게 다를까. 재밌는 독서가 될 것 같아 기대되고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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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민은영옮김/문학동네)”의 작가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의 국민 작가이자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 찬사를 받고 있다. 여성으로서 여성의 삶을 그려온 먼로의 작품은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임에도 이토록 익숙하게 느껴질까 싶은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단편 소설이고 수많은 수상은 노벨문학상까지 이어진 반면 2012년 출간한 “디어 라이프”를 마지막 작품이라고 선언한 만큼 먼로 작품 읽기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중년 여성이 되기까지 주인공 로즈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나 변곡점을 열 개의 단편으로 묶었다. 온타리오 주 핸레티에 있는 상점 뒤편, 사회구조의 상층부를 노동자부터 채워나가는 타운의 가난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첫 이야기 ‘장엄한 매질’에서 마을의 불안하고 피폐한 분위기와 유년의 로즈를 만나게 된다. “로즈는 플로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든, 자신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중요한 것은 갈등 그 자체이며,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은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멈출 수 없다.(34p)"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면서도 속수무책일 때의 무력감과 부조리는 간파당하기 바라는 의도와 노골적인 응대로 이어지며 상처를 남긴다. 갈등의 절정으로 향하는 단계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도 일종의 패턴을 갖는다. 구타에서 풀려나 자신이 취할 가능한 태도를 생각하다 위로의 눈길을 받고 예쁘게 차려진 쟁반 앞에서 갈등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연속적인 장면들. 이와 같은 심리 묘사는 숨소리 마저 그려 넣은 것 같은 극사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 정밀하기까지 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을 그대로 활자화함으로 공감케하는 동시에 감정과 상황을 대상화하고 관찰하게끔 만든다.
사춘기의 혼란스러움을 따뜻하게 보듬어준 사람은, 이끌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충격받고 까발려진 그녀의 감정은, 비록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시들면서 가장자리부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플로는 모든 것을 말려버리는 열풍이었다.(71p)" 돌아오는 것은 비아냥과 악의 정도. 그녀는 우는 소리를 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찾아-공부라던지, 또 공부라던지-자력 탈출을 시도한다. "조심해라, 너무 똑똑해지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88p)"라는 조언이 일반화되던 시간, 공간에서.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중략)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알잖아. 그림 말이야. 그 그림 몰라?(144p)" 피를 팔아서 스웨터를 사야 하는 로즈에게 이런 간극은 좁히기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가난’에 대해서 ‘오만’에 대해서 작가는 일말의 치장도 없이 분명하게 서술하는데 그 정확함이 위안을 준다. 노력으로 성취 불가능한 영역을 깨닫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녀는 정말로 패트릭을 존중했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중하지 않았고, 정말로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195p)" 시간이 지나서 여전히 배우고 있다.
“특권을 누린다는 느낌이 좋아서, 그 순간의 햇살이 너무 환해서, 그녀는 그것이 현명하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297p)"‘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일은 많고, 비슷한 모양새로 반복된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또’,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의 굴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사이먼의 행운’에서 이 문장 이후, ‘기다림, 기대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보고서가 펼쳐진다. ”사이먼을 고리로 바꿔 거기에 온 희망을 걸어놓은 그녀(301p)"의 스스로에게조차 내색하지 못하는 절망과 고통, 단념과 슬픔, 인정과 회복, 사랑과 세상의 관계를 깨닫는 부분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사랑은 세상을 지워버린다고, 사랑이 잘되어갈 때만이 아니라 망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308p)"
감정적으로 매몰될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 준 것은 그녀가 가진 ‘관찰자적 시선’이지 않았을까. 어릴때부터 시작된 ‘사건의 기록자 역할(81p)' 말이다. “그녀는 배우고 있었다. 일 년에 두세 번씩 학교를 분열시켰던 큰 싸움을 감당하는 법을 배웠다. (중략) 아무리 겁을 내고 소심하게 굴더라도, 그 어떤 충격과 불길한 예감에 시달린다 해도, 생존법을 배우는 것은 비참하게 사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기엔 너무 흥미롭다.(58p)" 아름다운 문장으로 피상적으로 스쳐지나가던 감정, 숙고할 문제들, 숨겨있던 진실, 파장을 감내해야 하는 결과들과 선택하기 어려운 반응 등 로즈의 시간을 잠시나마 함께 통과한 듯 하다. 결국 그녀는 모든 실패와 고단함, 허무해 보이는 귀향에도 불구하고 배우고 깨달음의 연속인, 바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낸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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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최근에 출간되었다. 메이저 출판사여서 그런지 홍보효과가 대단하였다. 또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작품이기도 하여 더더욱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의심 없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고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왜 이 책이 유명세를 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충분이 이해되었다. 작가는 대단하였고 작품은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
| 어느 블로그의 책 소개 코너에 끌려서 검색 후 구입까지 하게 된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 입니다. 대사들이 하나같이 주옥 같고 밑줄 그어 되집어 보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세심하게 묘사된 인물의 심리가 와닿습니다. 단편소설 형식이라 생각보다 술술 잘 읽힙니다. 이 책을 통해 웬지 감수성을 더욱 키워나가게 된거 같아 마음이 뭉글뭉글 합니다. 강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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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열 개의 단편으로 채워진 소설집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연작 소설이면서 하나하나의 완결된 단편이기도 하고, 그저 챕터가 나뉜 채 한 명의 주요인물과 하나의 서사로 연결되는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런 형태의 소설집 혹은 한 권의 소설을 근래에 몇 권 읽었는데, 모두 여성 작가들의 것이었다는 (그리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어쩌면 최근 백여 년의 시간들이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변혁적이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 이런 상태에서는 사건과 가능성들이 멋진 단순성을 띠게 된다. 선택은 자비로울 만큼 명백하다. 어물쩍 얼버무리는 말은 전혀, 조건을 붙이는 말은 거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결코’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확고한 권리를 얻는다. 그들과 결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증오가 담기지 않은 눈길로는 결코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벌할 것이고 끝장내버릴 것이다. 이러한 결의와 온몸의 통증에 감싸인 채로 그녀는 자기 자신도, 책임도 초월하는 묘한 편안함 속에 둥실 떠 있다.” (p.39, <장엄한 매질> 중)
로즈는 아주 어릴 때 낳아준 엄마를 잃었다. 그래서 로즈에게 엄마는 새엄마인 플로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로즈의 집을 겸하는 상점은 핸래티와 웨스트핸래티 중 웨스트핸래티에 속하는 곳에 있다. 가난한 시골 동네인 핸래티의, 그리고 더 가난한 동네인 웨스트핸래티의 생활은 척박하고, 로즈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웨스트핸래티가 아니라 핸래티에 속한다는 일종의 환상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로즈의 아버지는 때때로 심한 매질을 하고는 했는데, 매질 후의 로즈의 심상을 표현하는 문장에서는 앨리스 먼로의 섬세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았고 이내 이상할 정도로 행복해졌다. 플로가 뒤로 물러나고 웨스트핸리티가 날아가듯 멀어지며 그녀 자신의 피곤한 자아도 다른 모든 것처럼 쉽사리 버려지는 느낌이었다. 갈수록 낯설어지는 타운들이 너무나 좋았다. 한 여자가 기차 안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봐도 상관없다는 듯 잠옷 차림으로 자기 집 뒷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대설大雪지대를 벗어나 봄이 더 빨리 찾아오고 풍경이 더 부드러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뒤뜰에 복숭아나무를 기를 수도 있었다.” (p.112, <야생 백조> 중)
아직 어린 소녀였던 로즈가 시골 동네를 잠시 떠나는 순간에 품는 마음의 결은 바뀌어가는 기차 창밖의 풍경에 고스란히 겹친다. 핸리티를 벗어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질시와 구설을 벗어나기 힘든 촘촘하고 무성한 소문들을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원행이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목사인 듯 목사가 아닌 듯 한 남자의 성추행을 묵묵히 감내하였던 소설 속 일화는 이후의 로즈의 삶을 짐작케 한다.
“... 헨쇼 박사는 가난을 그저 불우함이나 결핍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가난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흉한 막대기 모양 전등을 사용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도 때도 없이 돈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새로 산 물건을 놓고 악담을 하며 그것을 공짜로 얻은 건지 아닌지 입씨름하는 것을 의미했다. 플로가 정면 창문에 사서 단 비닐 커튼이나 가짜 레이스 따위를 두고 자부심과 질투가 난무하는 것을 의미했다...” (p.131, <거지 소녀> 중)
대학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전혀 다른 계급의 남자 패트릭을 만나게 되면서 로즈의 삶은 다시 한 번 휘청거린다. 패트릭은 로즈의 배경이 되는 가난한 삶이 믿기지 않고, 로즈가 방문한 패트릭의 부유한 본가는 리얼하지 않다.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곧 필연이 되기도 한다. 결혼을 앞둔 로즈의 불같은 낙담 속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었다.
“... 패트릭은 좋은 사람이었다. 좋지 않은 것은 그의 견해일 뿐, 사람 자체는 좋았다. 패트릭의 본질은 단순하고 순수하고 신뢰할 만하다, 로즈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주기는 고사하고 그녀 자신이라도 확신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p.201, <장난질> 중)
결국 로즈는 패트릭과 헤어진다. 그 헤어짐에는 친한 친구의 남편인 바이올린 연주가 클리퍼드가 있지만 온전히 그것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로즈는 곧이어 딸인 애나와도 헤어지게 된다. 이후 톰 그리고 사이먼 등과의 길거나 짧은 관계가 있지만 로즈는 결국 크게 성공하지 못한 배우의 길을 걸으며 외로이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로즈의 옛 동네 핸리티에는 플로가 남아 있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p.352,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중)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플로는 온전치 못한 정신을 지닌 채 로즈에 이끌려 요양원에 들어간다. 로즈가 방문한 핸리티는 여전한 듯 여전하지 않고, 거기에는 로즈의 과거가 로즈가 아는 과거의 인물들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시 한 편을 순식간에 외웠던 로즈에게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라고 물었던 선생은 이제 죽고 없지만, 그 말만은 여전히 남아서, 로즈에게 여태 질문 중이다.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 민은영 역 / 거지 소녀 (The Beggar Maid) / 문학동네 / 387쪽 / 2019 (1977,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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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소설에는 종종 같은 이름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앞의 그 소설의 등장인물인가 하고 읽으면 거의 대부분은 그저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각 단편이 이어지는 연작 소설이어서 같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그것이 소설의 등장인물을 더 풍성하게 한다. 뿐만아니라 앨리스 먼로의 단편은 그 자체로도 더할 나위가 없는데 그런 단편들이 서로 이어지며 책 한권을 끌어가는 것이 매우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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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단편 소설은 없었다. 이것은 단편 소설인가, 아니면 장편 소설인가. 평생 단편 소설만을 썼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 《거지 소녀》에는 10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모든 이야기마다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작가가 나고 자란 어느 캐나다의 시골 마을 출신의 로즈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플로의 슬하에서 자랐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의붓딸과 새어머니의 갈등에서 비롯된 ‘장엄한 매질(royal beating)’을 보라. 아마 로즈도 자신의 도발이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모르고서 플로의 권위에 도전했던 게 아닐까. 장엄한 매질의 왕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로즈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지만, 플로가 준비한 먹거리에 그녀의 서툰 보이콧은 그만 눈 녹듯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아마 그런 의지박약한 모습에 로즈 자신도 놀랐으리라. 지금이야 가정폭력이 용서받을 수 없었겠지만 한때는 서구 사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로즈가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의 배신이야말로 “일상성의 이면”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기차여행에서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당한 성추행에 대한 로즈의 경험담은 오싹할 지경이다. 그전에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새어머니 플로의 경고를 로즈는 한쪽 귀로 듣고는 무심코 흘려버린다. 사제복이나 목사 차림새는 악당들의 범죄행위로부터 그들을 가려주는 철저한 카무플라주의 코드로 사용된 게 아니었을까. 때로는 꼰대들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자란 로즈는 대학에 진학했고, 자신의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신발을 구입하고, 아이스크림선디를 사 먹는다. 로즈를 동의어처럼 따라다니는 가난은 그렇게 궁핍했노라고 증언한다. 미래의 남편 패트릭은 로즈를 사랑했다. 그들은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으로 결혼은 했지만, 결혼생활을 영속시킬 수는 없었다. 로즈는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비상할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로즈와 패트릭에게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패트릭과의 이별은 로즈에게 축복이었던 것일까. 일견 위태로워 보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거지 소녀에게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아니 도대체 앨리스 먼로는 이런 놀라운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앨리스 먼로는 연작 소설집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가 산골 출신 철부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대가다운 스타일로 잡아낸다. 패트릭과 이혼하고 딸 애나까지 거느린 로즈는 갑자기 내린 폭설로 도로가 봉쇄된 상황에서도 연인 톰과의 밀회를 기대하며 전력투구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된다. 연애사업에서 로즈의 거듭된 실패는 하나의 연단의 기회로 작용한다.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된 로즈는 어느 파티에서 자신의 텃밭에 관심을 보이는 매력적인 강사 사이먼을 만나기도 한다. 로즈는 주위의 남자 사냥꾼이냐는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그와 원 나이트 스탠드로 직행한다. 사이먼과의 재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로즈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사이먼을 잊기 위해 아예 근거지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나중에 독자가 알게 되는 최종 진실은 결국 비극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한때 허영을 삶의 무기로 삼았던 로즈처럼 우리는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곧 플로가 직면하게 될 ‘보이는 것도 재미난 일도 없는 일상’을 나라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가끔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게 될 두려움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간극에 대한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지소녀 #앨리스먼로 #문학동네 #독파챌린지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시리즈 #세계문학전집176 #단편작가앨리스먼로의걸작 #2024고전읽기17 #도서추천 #책블로그 #북블로그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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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소녀는 앨리스 먼로가 1978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최초의 작품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부터 절필 선언 직전에 나온 디어 라이프까지 수십 년간 이어진 창작 활동에서 비교적 초기에 자리한 단편집이다. 먼로의 고국 캐나다에서는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는 '거지 소녀'로 발표되었다. 첫번째 제목은 상대의 존재를 단숨에 하찮은 것으로 깔아 뭉개는 질문 아닌 질문이며 두번째 제목은 왕에게 구조되는 거지 소녀의 그림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두 가지 모두 먼로 작품에서 자주 변주되어 나타나는 소재, 즉 체념적 동화를 강제하는 시골의 폐쇄적 공동체와 거기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는 여성 인물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