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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난 상처는 만지고 헤집을수록 더욱 더 덧나게 마련이지만 정신에 난 상처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떠올리기 힘들고 괴로운 기억일수록 오히려 시간이 날 때마다 되짚어 생각하여 그 전후의 인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침내 나를 쓰러트려 무기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적어도 상처로 기억되는 어떤 것들은 함부로 덮어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것을 마주할 용기는 작아지게 마련, '시간이 약이지.' 변명하는 말로 얼버무리게 된다.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정이라고 할 건덕지도 없었으니 슬픔도 쉬이 잦아들겠지.' 편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는 '아버지'라는 인물에 대한 '페이드아웃'을 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내 기억 속에서 점점 또렷해지는 '페이드인'을 명함으로써 나의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싶겠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실 제 부자지간의 정이라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우리가 혈연관계로 맺어진 친 부자 사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호적에 의한 법적 서류에 의존해서만 가능한 듯 보였다. 우리가 그런 지경까지 치달았던 데에는 아버지의 폭력 등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중학교 2학년에 내가 도시로 전학을 가면서부터 그 관계는 확고하게 굳어졌음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춘기의 소년이 돌봐줄 부모도 없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과 다른 집 아이들은 밥만 축내지 않고 스스로 제 밥벌이를 하건만 당신의 아이들은 공부를 한답시고 집에 코빼기도 안 비친다 생각했던 아버지의 불만이 수시로 충돌함으로써 우리는 예정된 길을 묵묵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는 메마르고 무미건조했던 관계, 가족이라는 웅숭깊은 관계에서 한참이나 멀어졌던 관계였기에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한 당신의 부재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 낙관했었다. 그러나 메마를 대로 메말라 더이상 슬픔의 유대는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머릿속에서는 바짝 마른 낙엽을 밟는 듯한 작고 건조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최근에는 보이지 않는 '관계의 유령'이 나의 현실을 방해하는 데에까지 이르렀고 나는 결국 그렇게 된 원인을 세밀히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온전히 잊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일부러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난관에 봉착했을 때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는 책을 열심히 뒤져본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곰곰 되짚어 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일단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았다. 그런 연유로 내 손에 쥐어진 책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였다. '글쓰기란 우리가 배신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이라는 장 주네의 말이 나의 마음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배신했던 게 언제일까?
"최대한 객관적으로 제시하려 애쓰는 이런 종류의 시도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 말들을 고딕체로 제시하는 것은 거기에 이중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거나, 향수든 애잔함이든 조롱이든 독자에게 공모의 쾌감을 안겨 주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거부한다.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p.47~p.48)
나는 이 글을 아주 천천히 쓰려고 한다. 일련의 사실들과 기억할 수 있는 사건들 속에서 아버지가 살았던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떠올리다 보면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 관점의 덫을 빠져나와 한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일이, 더구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의 아버지의 삶을 우울과 낙담의 늪에 빠지지 않고 되짚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삶이 가족들에게조차 부정당하는 것만큼 쓸쓸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가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표현과 생각은 프랑스어 수업이나 철학 수업, 그리고 빨간 벨벳 소파가 놓인 반 친구들 집 거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여름철이면 내 방의 열린 창을 통해 갈아 놓은 흙을 삽으로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92~p.93)
내가 대학이라는 문턱에 들어섰을 때 나는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내팽개쳤던 아버지의 유산을 나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 하나하나 다시 밝혀보겠다는 나의 시도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삶을 내 머릿속에서나마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비어 있는 한 '남자의 자리'를 뒤로 한 채 이제 내 갈 길을 가려 한다. 다만 그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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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전 '아버지'란 책이 서점가를 강타하였다. 몇 년 전에는 '도쿄 타워'도 많이 팔렸고... 덩달아, 한국 몇몇 작가들(혹은 유명한 사람들)은 감정을 마구 마구 남발하여 쓰레기 같은 책을 써내기도 했는데... 대부분 그런 책들 '마케팅의 승리'라고... 많이 많이 팔리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하튼 쥐어짜낸 듯한 오버스러운 감정, 혹은 미화, 신격화에는 이입되기도 어렵거니와 은근 재수 없기도 했고...그러다 보니 스테디셀러의 내공같은건 원래부터 없었는지 모르겠다. ( 어쨌거나 그 후, 몇몇 신진 작가들의 글쓰기가..나는 좀 맘에 안든다.)
여하튼, 이 책에는 그런 부분이 없다. 담담하다못해... 소금간 정도만 살짝 해서 막 쪄낸 가자미처럼.
임팩트가 없는 이야기속에 무슨 재미가 있겠나, 했는데...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건진 가장 큰 수확은... 1인칭 시점에서 타인(책속에서는 아버지)을 기억하는, 관찰하는, 혹은 지레 짐작하는 내용..혹은 그냥 사건의 담담한 서술이 얼마나 더 크고 거대한 심상으로 내 마음 속에 쑤셔 박힐 수 있는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
약 130페이지 정도의 소설 때문에, 오늘은 시작과 끝이 좋았던 것 같다.
그녀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
덧붙임 1. 책제목이 'la place'면 그냥 '자리'라고 번역되어도 문제 없었으리라 보는데..이건 '아버지의 자리' 뭐 그런 의미로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뭘 욹어먹으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책 속의 아버지를 읽으며, 현실의 아버지도 많이 생각했으리라.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원제로 '자리'라고 제목이 정해지면...조금 색다른 각도로 보게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책읽고 뭘 느끼는건 제각각이겠지만.
덧붙임 2. 일단 읽다가 2군데 정도 오타를 발견하기도 하였고, 다소 매끄럽지 않은 문체가 거슬린다. 그러나, 읽기에는 무리가 없고, 또 신선한 글이라서...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열린책들의 명성을 고려했을때...정독 다시 하고, 매끄럽지 않거나 틀린부분은 좀 고쳐줬으면 좋겠다.
... 이런 식의 글을 쓰의 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47-48쪽
...상대방이 우리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호기심이나 선망의 감정이 드러날 수 있는 질문은 일절 하지않았다. <이거 얼마주고 사셨어요?>는 금지된 문장이였다. 65쪽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9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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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윤덕수(황정민)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기억하며 본인 스스로 가장이 된다.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핀다. 그게 자신의 의무라 여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하고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위해 베트남에 간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에게 남은 건 장애가 생긴 한쪽 다리와 계속 돌봐야 하는 가족뿐이다. 그게 당연한 거라 믿으며 그 의지를 꺾지 않는다. 시간은 흘렀고 그도 늙었다. 자녀들은 자라서 가정을 꾸렸고 손자들도 생겼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장통의 오래된 가게를 왜 끌어안고 사는지, 왜 오래 전 시간을 붙잡고 놓지 않는지를...
아니 에르노가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짚으며 말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 같은 아버지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 보편적인 개념의 아버지였다. 가족을 위해 애쓰면서도 애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함, 점점 자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자녀가 자라면서 거리감이 생기는 순서까지 똑같았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적어간다. 어떤 감정보다 지극히 객관적인 순서의 기록이었다.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적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가 어떤 교감으로 이루어졌을 한때의 시간이 준 기억.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순간부터 봐왔던 모습. 늙어가던 아버지의 생활과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쌓이는 서로의 삶. 그렇게 아버지의 존재감의 크기가 달라져간다.
이 무렵, 그는 벌컥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증오감에 입가에 뒤틀릴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다. 나는 어머니와 어떤 공모 의식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달마다 찾아오는 복통, 골라야 할 브래지어, 화장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였다. (중략) 우리에겐 그가 필요 없었다. (91페이지)
투병생활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달라져갔다. 얼핏 추측하기에 육체의 노쇠함보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더 삶을 짓눌렀을 듯하다. 나는 이제 상자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가족들에게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어. 나는 혼자야... 그에 반해 자식들은 점점 자라 다른 세계로 편입하고 세상을 알게 되어 자주적으로 살아간다. 관심 혹은 간섭의 기회까지 사라진 아버지의 영역을 오롯이 혼자 지킨다. 늙고 나약해져, 그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픽션을 거부하는 그녀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써지고 있지만, 그 개인적인 경험이 그녀만의 기억이 아니라는 데서 공감을 끌어온다. 애틋했던 부모와 자녀 사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덤하고 건조해진다. 서로 살아가는 방식, 시간이 달라 얼굴 보기도 힘들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벽을 쌓아간다. 보통의 경우 이런 시간을 거쳐 가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모습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 '보편적'인 범주에조차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대화로 시작된 말은 싸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자동으로 차단되는 마음.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우리'라는 표현이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은 나에게 늘 넘어야 할 거대한 산으로 자리한다. 그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모르는 시간을 알기 위해 부딪혀야만 하는 어떤 전쟁 같은 도전이다.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어른이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부모가 되었으며, 어떤 바람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아버지의 시간을 기록하면서 하는 말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그녀의 글을 통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오갔을 대화를 그려본다. 아버지의 유년기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딸의 눈빛, 몰랐던 시간이 오고가면서 쌓였을 애틋함과 이해, 아직 멀어지기 전 부녀의 관계. 어떤 바람 같은 시선을 던지며 이 짧은 분량의 소설을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화두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늘 답답한 가슴을 쥐며 읽어 내려간다. 애써 피해가야지 하면서 쉽게 건너가지 못하는 상황들이 만들어진다. 다행이었던 건, 그녀가 참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극히 감정의 파도가 일렁일 것 같은 에피소드 앞에서도 기록 의무자처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려 애쓰는 게 읽힐 정도다. 이게 가능할까 싶은 의문이 들면서도 그래야만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기억, 정리, 기록 같은 순차적인 일들이 가능해지는 순간. 언젠가 나의 아버지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나도 이런 기록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 가슴 속 말, 이해, 정리를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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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아니 에르노를 좋아한다. “단순한 열정”에서 보여주었던 그녀의 맹목적인 열정을 부러워했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여자 그녀의 삶이 궁금해서 읽게 된 책. 이번 책 “남자의 자리”는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자의 자리보다는 아버지의 자리가 더 어울리는 제목 남자로서 아버지의 모습은 죽어서 예쁘게 치장해드릴때 본 축 늘어진 성기를 가진 모습이다(넘 솔직한 작가)
할아버지때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 노동자 시절의 아버지와 가게 주인이 된 아버지의 변화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던 아버지와의 몇 개 안되는 추억들 아버지와 딸은 난생 처음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러 가서는 주눅이 들어 다시는 그곳은 찾지 못하고 결국 대출한 책은 어머니의 몫으로 남게되었다는 일화... 단순한 열정에 비해 좀 심심한 책이긴 하나, 여기에서도 작가는 굉장히 직설적이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무 뛰어난 아버지를 둔 아들은 그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생각하여 방황과 갈등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보면 아버지에게는 아들보다는 딸이 휠씬 사랑스럽고 편한 존재이리라. 나는 가끔 그분의 애인같은 딸이 되고 싶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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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어디까지 솔직해 질 수 있을까?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남자라면. 과연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그"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를 닮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에 대해 말한다. 술을 마지시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노동자라기보다는 상인처럼 보이고 싶어 했던" 아버지에 대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그"는 어렵사리 상인의 끄트머리에 안착하지만 조용히 꺼져가는 촛불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삶은 고스란히 딸의 인생이 된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부모는 자식을 통해 자신의 좌최된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고 나면 자식은 그들이 속한 세계와는 결별을 선언한다. 마치, 그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를 돌아보게 된다. 내 아버지와도 같은 "그"를.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으로 덮어 놓는 거야."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론 내가 들은 말과 문장들을, 때로는 이탤릭체로 강조까지 해가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제시하려 애쓰는 이런 종류의 시도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 말들을 고딕체로 제시하는 것은 거기에 이중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거나, 향수든 애잔함이든 조롱이든 독자에게 공모의 쾌감을 안겨 주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거부한다.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글을 쓰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공모의 쾌감이 아닌 공감의 애잔함을 느낀다. 나도 어느날에는 "끝났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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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내면적인 것은 항상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요.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사회학적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노르망디의 소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는 이 작품 역시 "판단, 은유, 소설적 비유가 배제된 중성적인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객관적인 문체를 통해 되살아나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나의 아버지, 당신의 아버지, 우리 모두의 아버지(들)로 확장됩니다.
그는 술에 취해 더욱 침울해진 낯으로 집에 들어왔다. 걸핏하면 헌팅캡을 벗어서 아이들을 후려치곤 했다. 거친 사내여서 아무도 감히 그에게 시비를 걸지 못했다. (...) 못된 성질은 그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 가난을 견뎌 내게 하고 자신이 사내임을 믿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는 특히 집안의 누군가가 책이나 잡지에 빠져 있는 꼴을 보면 난폭해졌다. 그는 읽거나 쓰는 법을 배울 시간을 갖지 못했다. (본문 중에서)
소젖 짜는 농부, 공장 노동자를 거쳐 소상인에 이르기까지 '나'의 아버지는 "어쨌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행복"하다고 믿으면서요.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삶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가난을 견"디고 "자신이 사내임을 믿"기 위해,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손수건으로 덮어 놓"으면서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아버지는 지식인 세계에 대한 열등감과 경외감을 품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그에게 있어 '선생님'의 존재는 "모든 행실과 동작을 지휘하는 무서운 우주"였지요. 감정의 은폐는 그 열등감과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고향의 말을 버리고 의식적인 표준어를 사용하거나 혹은 침묵하면서 자꾸 희미해져가는 동안, 그의 딸은 표준어는 물론 외국어까지 구사하면서 아버지의 세계, 즉 "단순하거나 하찮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멀어집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이나 음악은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난 살아가는 데 그런 거 필요 없다.」 (본문 중에서)
"그를 멸시한 세계", "부유하고 교양있는" 세계에 자식이 속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아버지의 큰 자부심이며, 삶의 이유 자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등졌거나 등지려고 애쓰는 "저 아래 세계"에서, 자식들이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던 모든 아버지들의 구원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이 작품이 단순히 아버지의 희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말을 빌려 보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삶과 문화를 위해 자신이 살아온 삶과 몸담았던 문화를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야 했던, 자기를 바친 것이 아니라 없애 버린 사람들의 운명이 거기 있"습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와 감동이 있습니다. "엉뚱한 짓을 해 창피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실수로 터뜨린 방귀만큼이나 고약한 인상을 주게 될 잘못된 표현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시골뜨기"로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 . "좋은 신분을 얻고, 직공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고통". 자신을 둘러싼 "천박한" 세계를 부정하고 벗어나려는 이 고통스러운 욕망은 우리 모두의 욕망이기도 하지요. 부정할 수 있습니까? 매우 담담하게 그려지는 이 신분상승의 욕구에서 우리가 담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아니 에르노)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을 자존심으로 여기"는 아버지의 감정을 호주머니에서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입니다. "성별도 모호하고, 종종 나의 말이기보다는 타인의 말일 수도 있는, 전체적으로 다인격적 형태"를 띠는 '나'에 대해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부연합니다. "그것은 나를 픽션화하는 수단이 아닌, 내 체험 속에서 현실의 지표들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좋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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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아버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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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글은 글의 내용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묘사들이 나온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대가 신경쓴 유일한 것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대가 신경쓴 유일한 것은, "내가 Y......의 중산층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작가도 말한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아버지는 그 자부심을 위해 자신이 전부로 알던 삶을 살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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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후 그의 삶을 글로 정리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시작된 작업은 더디었고, 희미해진 기억을 살리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자칫 미화되거나 가족간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첨부할수도 있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삶을 어떠한 꾸밈도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싶어했다.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알리고 싶다던 그녀의 바람대로 이 책은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쓰여졌다. 하지만 화려한 수식어도 없고, 아름다운 내용이 없음에도 자꾸만 문장 하나하나에 가슴이 울리고 아프고 감동받게 된다. 때론 딸의 입장에서, 때론 아버지의 입장에서 책을 읽게 된다. 비록 살았던 시대와 나라는 달랐지만 이 책은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특별한 사람의 영웅담이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한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끝났어" 란 말로 아버지의 임종을 알렸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별은 통곡과 충격으로 소란스레질 법도 하지만 아니 에르노가 묘사하는 그 순간은 지나치릴만큼 담담하다. 친척들이 찾아와 위로하고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시신이 거둬지는 모습이 마치 제 3처럼 쓰여졌다. 돌아가신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얼굴, 시신에서 났던 끔찍한 악취 등은 굳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그녀가 쓰고 싶었던 글이었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기리는게 아니라, 때론 부끄럽고 치부를 드러내는 것 까지도 솔직하게 쓰길 원했다. 가난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배우지 못한 열등감은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드러냈다. 그래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읽고 쓰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가난한 수레꾼 이었고, 아버지도 가난 때문에 일찍 일터로 나가야 했다. 오로지 먹고 사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그 시절의 처참한 가난은 역사책속에서만 보던 그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불평 하지 않고 약간의 돈만 받아도 열심히 일했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농가, 공장의 직공, 기와장이를 거쳐 작은 가게를 운영하기에 이른다. 부모의 가난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며 착실히 일한 결과였지만 언제 다시 노동자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옥죄었다. 가게 형편이 나빠져 다시 공장에 들어가야 했고, 전보다 더 바쁘게 일하느라 몸과 마음은 지쳐갔지만 노력의 결실은 그들을 노동자로 돌아가게 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바빴고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 마음이 절절히 공감된다. 불과 몇십년 전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배우지 못한 아픔을 자식이 닮지 않기를 바랐고,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시키고 뒷바라지를 한 부모님들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고등교육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지만, 이는 곧 부모와의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학교 공부를 물어보고 싶어도 부모는 아는게 없고, 세련된 학교 선생님들과 어른들을 경험하면서 배우지 못한 부모가 창피하게 느껴지고 대화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부모는 아이들이 많이 배워 성공하길 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리감과 단절을 야기한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선 어린 시절엔 너무도 커 보이고 멋져보였던 부모님의 모습이 왠지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부모님들, 특히 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하고 무뚝뚝했으니 사랑 같은 건 느낄수가 없었다.
그런 경험을 아니 에르노도 경험했다. 마치 윽박지르는 것 처럼 큰 소리로 말하고 혼내고 딸의 학교 생활은 아는게 없으니 조언도 해줄수 없었다. 사진에 남겨진 아버지의 모습은 한번도 웃은적이 없고 무뚝뚝하기만 했다. 세상 사람을 자신의 가게에 오는 손님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고, 친척과 이웃들이 가지지 못한 걸 소유하길 바라면서도 욕 먹지 않기 위해 처신했다. 정원 가꾸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등의 아주 소소한 일상까지 적은 이 책을 통해 평범하지만 위대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비록 부드럽게 말하는 법도 모르고 여러 모순점도 가졌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고 어쩌면 유일한 하나의 꿈을 이뤄냈으니 말이다. 딸이 자신의 아내처럼 가난한 직공에게 시집가길 원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꿈 말이다. 딸이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이뤄졌을 때 그는 분명 기뻐했을 것이다. 평생 감정을 숨기며 살아왔기에 기쁜 내색을 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낯익어서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입 밖으로 소리내게 해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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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을 보아서는 이 책 안의 내용이 가늠되지 않았다. 남자의 자리라, 어떠한 남자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힌트도 없이 여자의 얼굴 뒤에 자리 잡은 책의 표지에는 나무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주인공이 앉아 있었을 그 의자 뒤로 한 남자의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나는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보았다. 내가 태어난 해 르노도상을 수상했다는 그녀는 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적인 기록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다. 아마도 그 의자는 그녀의 아버지의 자리였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단어보다 ‘그’라는 단어로 담담하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고백해 나가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해 봐야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소녀 시절에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그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계층 간의 거리, 하지만 무어라 이름 붙이기 힘든 특별한 거리였다. 헤어진 사랑의 그것처럼 말이다. –본문 ‘끝났어’ 이 한 마디로 시작된 소설은 이 말로 다시 끝을 맺는다. 한 인간의 생이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한 남자의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한 생을 살다간 그의 이야기가 딸인 그녀의 기억에 의해 재조명된다. 억지로 슬프게 혹은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담백하게 이어나가면서도 그녀는 이 소설이 너무나도 빨리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대해 이토록 빠르게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했다. 무뚝뚝한 아버지를 닮아 글에서 마저 여실히 그의 딸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그녀의 문체는 그래서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나와는 30년이란 간극이 존재한다. 그의 인생은 이미 30년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인생은 내가 다섯 살이 넘어가는 시점 이후부터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잃어버린 35년은 오롯이 그가 나에게 알려준 내용대로 구성한 나의 머리 속에서 재구성한 것들이다. 35년의 시간을 단 10여분 정도의 시간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해 주었고 나는 그것으로 그의 젊은 시절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사실 현재와 너무나도 다른 그의 세상은 흑백사진에나 등장할 만한 사건처럼 느껴졌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그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를 만나 작은 제과점으로 시작하여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지금까지 왔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 나의 세계에서는 밥을 굶거나 전쟁을 경험하거나 하는 일들은 없었기에 어느 정도 누릴 것을 누리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수 있었으나 그것은 모두 나의 부모의 주름과 굳은 살과 맞바꾼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 역시 그러했다. 그들이 아름다움, 한 줄의 글로 가슴 설레여 하는 것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들의 가게를 열고 나서도 원금조차 회수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긍긍하며 손님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초조해했으며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자리가 물거품으로 사그라질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방들은 어두컴컴해 대낮에도 전깃불이 필요했으며,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넓이의 안뜰에 있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들은 그대로 강으로 방출되었다. 그들이 외관에 무심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본문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지 않고 딸에게 혹시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무지함은 숨기며 딸은 그러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가진 지식이 그녀에게 담기기를 소망했다. 어느 날인가 자신을 뛰어 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딸을 보면서 그는 조용히 그녀의 삶이 자신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글짓기에서 칭찬을 받아 올 때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시험에 합격하고 상을 받아 올 때마다, 딸이 자신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던 것이다. –본문 공부는 좋은 신분을 얻고, 직공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본문 나의 아버지 역시 딸들에게 자신이 못다한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주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당신이 가지 못한 길을 자신의 분신이 가고 있다는 행복에 수 백 만원의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오는 그 날을 내심 자랑스러워하셨다. 언젠가 장학금 덕에 고지서의 금액이 2만원 남짓으로 날아든 봉투를 들고 은행으로 향하던 날 보단 원래의 등록금을 내러 가는 그의 뒷모습이 내겐 더 없이 가벼운 발걸음과 당당함으로 각인되어 남아 있다. 대학을 다닌 다는 것에 대해, 그만큼을 가치를 지불하고서 얻는 것이 어쩌면 타당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단 한 문장의 영어 문장을 내뱉은 딸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그 순간의 찰나를 위해 매일 새벽처럼 일을 하신 아버지는 내게 당신의 행복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전달해 준 적은 없었지만 함께 해온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성장해 갈수록 점점 늙어가고 있었으며 그녀는 이제 그를 뛰어넘게 되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게 된 부녀는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거리는 실제 그들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그녀가 새로이 알게 된 세상을 아버지에게 전달하려 했던 그 이전의 노력의 시간들도 추억이란 글자에 묻어지고 어느 새 이전의 그가 아닌 나약해진 한 남자만이 남아있다. 만일 바캉스를 보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다면 내 자신이 부끄러웠겠지만, 그의 상스런 방식들을 고쳐 주려 하는 행동은 정당하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그는 다른 말을 갖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헤어나 음악은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난 살아가는 데 그런 거 필요없다] –본문 이제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라고 쓸쓸히 말하는 그를 보며 눈가에 눈물이 핑 맴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갖기 위해 몸부림 쳤다기 보다는 살기 위해,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투철히 던져진 그의 몸이 이제 그가 원하는 대로 더 이상 움직여 주지 않는다. 묵묵하고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살아온 그를 제대로 알 시간도 없이, 아니 알고자 하는 노력도 제대로 못해보았는데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나는 그를 통해서 그의 세계를 살고 그의 삶을 기반으로 나는 도약을 한다. 무심한 듯 지나간 그의 자리를 이제서야 돌아본다. 나는 그가 영원히 강한 남자의 모습으로 살기를 바랐다. 나에게는 무서우면서도 엄한 당당한 그의 모습으로 남기만을 기원하지만 어느 새 그에게도 세월이라는 흔적이 그에게 풍화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의 자리에만은 그림자가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것들이 많기에 나의 아버지와 나 사이에 흐르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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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는 작가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써내려간 자전 소설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고 솔직한 감정으로 아버지의 삶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인지 감정을 강요받지 않고 작가 의도대로 자연스레 흘러가며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아버지의 모습을,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을, 나의 아버지의 모습을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작가의 명성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읽어본 책이 없었기에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는 이렇게 담담하게 쓴 글이 더 가슴을 울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했고 작가의 명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나 역시 지나친 감정과잉을 배제한 채 읽기 시작했고 그녀의 아버지의 삶과 모습에서 물 흐르듯이 나의 아버지의 삶과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결코 싶지가 않다. 물론 부모님의 입장에서 자식의 본 모습을 이해하고 인정하기란 더 쉽지가 않겠지만 말이다. 작가는 그러한 점들을 뛰어넘어 되도록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조명한다.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한 남자의 남편으로, 아이의 아버지로 살았던 한 남자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지독하리만큼 가난했던 형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배움의 기회를 놓친 그는 목동에서 공장노동자, 소상인으로 신분을 조금씩 상승하면서도 배우지 못한 열등감이 있었고 지식인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딸은 어쩌면 자신의 한을 풀 수 있는 존재였기도 했고 다행히 딸이 자신이 바라던 삶의 일원이 된 모습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과 점점 멀어지는 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일원이 된 딸의 모습에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만족해한다. 자신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된 딸의 모습에서.......
딸은 대부분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었고 아들들은 잘 통하지 않았던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곧 자라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보다는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모녀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그만큼의 거리만큼 아버지와는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곧잘 아버지께 편지도 썼었는데(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어리광 가득한 편지)그것조차도 그때로 끝이 나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딸과 아버지를 서서히 멀어지게 하고 다시는 어린 시절의 관계로 돌리기가 어려워지는 것일까?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와 비교(?)를 해도 나의 아버지는 비교적 다정다감하시고 차별은 생각도 못하시는 분이라 더 가까워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어느 순간 아버지께 퉁명스럽게 대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별 일도 아니었고 그냥 뭘 물어보시는 거였는데, 선선히 대답하지 못하고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겸연쩍어 하시는 모습에서 울컥 속이 상했었다. 오히려 더 퉁명스럽게 대했지만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끔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휙 지나가버린다. 왜 그러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작가처럼 아버지보다 더 나은 삶을 살지도 못하고 자랑스러운 딸의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태도는 왜 그러는지. 책의 마지막 5장을 남겨놓고는 눈물이 갑작스레 쏟아져서 많이 울었다. 작가와 작가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나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오늘부터는 좀 더 싹싹한 딸이 되어보려고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이야기도 하고 웃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다. 쟤가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직장인보다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