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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화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2009년 정도 인듯 하다.그런데 화가의 이름 보다 그림 속 인물들의 이름이 익숙했기 때문에 그림을 본 후 화가의 이름으로 다시 관심을 돌렸던 것 같다. 바로 '근원 김용준'과 '민촌 이기영' 이란 인물화였는데 두 작품을 모두 본 것인지는 기억이 가물하다.다만 <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라는 책을 2009년에 찾아 보았다는 메모가 전시를 보고 난 후 화가에 대해 검색을 해 본 것이 아니었나 싶다.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2년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출간 소식을 접했다.반가운 마음에 강연까지도 참석했었는데 ,어쩐일인지 메모해 둔 것을 찾을 수 가 없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읽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앞서 절판된 책을 안타까워했던 기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그런데 '변월룡의 국내 최초 회고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오랫동안 묵혀 두고 읽지 못했던,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변월룡>를 드디어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거다.
이 책은 '변월룡'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접근방식을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생애부터 시작해서,작품을 이해하고 화가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의 편지 그리고 가족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저자가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역시 가장 큰 힘이라면 예술가로서의 변월룡을 만나기 보다 인간 변월룡으로 먼저 만날수 있었던 것이 화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변월룡 역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었던 거다.가난과 아버지의 부재는 차지하고라도 고려인이라는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고통,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 등이 그렇다.어디 그뿐인가 화가로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을 때는 북한에서 권유한 귀화 거부로인해 배신자라는 멍에를 지게 되지 않던가.누구보다도 한민족의 미술발전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지만 물거품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북으로부터 귀화를 권유 받지 않고 그곳에서 후배들을 더 양성했다면 우리가 만나보게 될 그림은 더 무궁무진 하지 않았을까? 물론 화가의 가르침 아래 훌륭한 화가들도 더 나왔을 테고.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가가 주로 그린 분야 가운데 '인물화' 때문에 더욱 그렇다.여전히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월북예술가들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기도 하고,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을 텐데,변월룡 화가 덕분에 그림으로라도 만날수 있는 예술인들이 있다는 것이 반가울 따름이다.김용준,이기영,최승희 한설야 등등 그런가 하면 역사적으로 기록될 장소들 역시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사진의 역활을 그야말로 톡톡히 한 샘인거다.그러나 한민족 어디로 부터도 바르게 평가되지 못한 화가였기에 소실된 작품도 많을 뿐더러 북으로 보낸 편지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행운이라고 생각할 만한 점들이 많았는데 특히 선생이 생각한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에 대한 이야기였다.그림에 관심을 두고 있거나 그려 볼까 하는 마음이 있다거나 혹은 왜 잘 그려지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본질적인 질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작품 사이사이 에피소드 사이사이 소개된다.레핀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니 미술에 대한 해박함이야 당연하겠지만 설명이 어렵지도 않을 뿐더러 전혀 시대와 동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아 놀라웠다.
화가에 대해 가졌던 처음의 관심은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정였는지도 모르겠다.근원김용준 선생을 그렸다는 사실이 그저 궁금했을 정도였으까.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인물화를 유독 많이 그린 이유가 혹 그리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에 대해 자연스럽게 물음이 따라온다.소위 말하는 성공도 했고 단란란 가족을 꾸렸지만 늘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하는 설움.동시에 귀화를 거부 당한 이후 우정을 나누고 예술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나누던 이들을 만날수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래서였을까? 책을 다 읽어 갈 즈음 가장 눈에 들어 온 건 연해주 시절 그린 소나무 연작 시리즈였다.화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일그러진 소나무가 분단의 아픔을 그린 것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벗들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화가의 절규가 내게는 더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렘브란트 영향으로 동판화 작업을 했다는 사실 보다 소나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그려냈을 화가의 마음을 나는 더 깊이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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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나훗카의 소나무 19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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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케네드 클라크의 말도 참조할 만하다. <명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그는 "명화란 격이 좀 떨어진다 해도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지으면서, "만일 한 미술가가 감동할 만한 회화적인 요소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면 그는 운이 좋은 화가이며, 그 화가에게는 그만큼 명화를 남길 확률도 높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명화를 남길 확률이 많았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잃어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385) 변월룡은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그 시대의 언어로 말을 한 예술가다. 이런 천재적인 화가가 남북분단 상황으로 인해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
| 책 제목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화가 변월룡선생님의 여러 귀한 작품들과 사연들로 인한 작가의 고뇌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책을 따뜻한 봄날에 만났습니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하던 이쾌대 선생님 전시에 뒤이어 변월룡 선생님 전시도 여러번 봤고요. 전시를 본 분들은 알겠지만 오픈날짜에도 웬지 뭉클해졌습니다. 시기별로 잘 짜여진 구성과 전시도록을 능가할만한 어마어마한 수의 작품들이 눈에 확 들어와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여러 작품을 엮어둔 작가의 지난 오랜 시간속 고군분투에 충분히 놀랄즈음 알기쉽게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화가의 상황을 그릴수 있게되었습니다. 또한, 발견된 지인들과의 수많은 편지들과 가족의 인터뷰를 통한 증언들이 힘을 실어 화가를 더 이해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화가의 능력을 넘어 그를 평가하는 내용이 풍부하기에 웬지 너무 미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과연 이런 인물이 존재 가능한가에 의심도 송구스럽게도 해봤습니다. 에칭의 섬세함과 사연이 있는 각각의 초상화에서 품어내는 온화함 그리고 늘 정착하지 못한 국제적 미아로서 고국에대한 애매한 그리움등이 책을 읽으면서 변선생님이 더 처연하게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더 늦지않게 전시를 비롯하여 이 책이 알려져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듭니다. 잃어버린 그분을 찾으러 햇살이 한껏 뽐내는 봄날에 변월룡 선생님전시와 함께 이 책이 동행을 해준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을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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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은 1916년 러시아 연해주의 어느 한인 유랑민 마을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이미 출중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교과서의 삽화를 부탁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최고의 미술 교육기관으로 손꼽히는 레핀미술대학에 진학한다.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학교가 있던 레닌그라드는 끔찍한 포위전을 견뎌내야 했지만, 다행히 변월룡은 어머니 병구완차 타슈켄트로 떠난 뒤였다.
책을 읽기전에 몰랐던 이 뛰어난 화가를 책을 통해 만나게 되서 반가웠다. 그의 작품이 책속에 가지런히 놓여있어 그의 작품을 음미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다만 변월룡을 과하게 찬양하는 듯한 서술은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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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보았을 떄, 난 이 생각부터 들었다. "누구지?" 변월룡.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사진이 나온 표지를 보니 20세기 사람인 건 분명하고, 훌륭한 작품을 남겼지만 한국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면 십중팔구 북한으로 갔을 것이다. 한국에서 무시당했지만 외국에서 인정받았다면, 오히려 훨씬 더 유명할 테니까. 그런데 얼마 전 웬만큼 유명한 월북 미술가들을 정리한 글을 읽었을 때, 변월룡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이 의문이 시작이었다.
변월룡은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잊혀졌다. 원래 북한 태생이었든 월북했든 남북분단 때 북한에 있었다고 남한에서 제명되고, 후일 북한에서 숙청되어 북한에서도 제명된 케이스는 아니었다. 변월룡은 소련에서 활동했고, 소련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한국이 아닌 공산권에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남한 예술계는 변월룡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고, 북한은 북한대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북한은 변월룡을 무시하다 못해 적대시해버렸다.
이 책은 변월룡의 일대기를 되짚어 보며, 작품 세계를 둘러본다. 변월룡은 가진 것 없던 집에서 태어난 소년이 노력해서 성공하는, 전형적 인간성공 스토리보다 훨씬 굴곡진 삶을 살았다. 변월룡은 외국인 유랑민 신세로 소년기를 보냈고, 살고 있던 나라는 학생 시절 자신의 핏줄을 잠재적 배신자쯤으로 취급하는 정책을 실시했고, 그 직후 세계 2차대전에 독소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극한 처지에서도 변월룡은 끊임없이 노력했고, 결국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둔다. 한국인 최초로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고 엘리트만이 될 수 있던 교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교수가 된 이후로도 명성을 거듭 쌓아갔고, 마침내 소련 예술계를 이끄는 존재가 된다.
변월룡은 일반적 기준에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만으로 많은 예술가의 선망을 받을 터인데, 부와 지위와 명예도 얻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서, 사회적으로 성공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예술가들이 흔히 꿈꾸는 희망사항을 거의 성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 변월룡이 아니라, 인간 변월룡은 고독하고 쓸쓸했다.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고향에 갈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남한은 냉전 시대 세계 정세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고, 북한은 북한대로 변월룡을 내쳐버렸다. 남한이야 세계 정세 문제니 그러려니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같은 공산권에다 직접 가서 여러 제자를 가르치고 국가미술교육의 기초를 닦아 주었던 북한에서 문전박대당하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그의 이름을 다시 되새겨본다. 변월룡, 외국에서 인정받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랜 시간 고국에서 잊혀져야 했던,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 이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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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미술학 박사이자 러시아 최고 명문 레핀미술대학의 교수였던 변월룡 화가를 우리는 잘 모른다. 이 책을 집필한 문영대 씨는 우연히 러시아에서 변월룡 화가의 작품을 접했고 이 만남이 이렇게 책으로까지 나오게 되는 머나먼 여정이 되었다. 그 과정은 실로 험난했는데 그의 작품을 한국에서 전시회를 할 기회가 산산히 조각난 일도 있었다. 유족을 만나 허락을 받고,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도움까지 받았는데 느닷없이 변월룡씨의 아내가 이를 거부한 것이었다.
영문을 알수없었지만 삼고초려 끝에 겨우 승낙을 받게 되는 과정도 참 힘들었겠거니 했는데, 한국에서 돌연 전시회가 취소가 됐다. 그 이유가 북한과의 관계 때문이라는데 귀화를 거부해서 북한에서 제명당한 변월룡 화가는 죽어서도 이런 대접을 받으니 정말 기구한 운명이다. 겨우 마음을 연 미망인에게 이런 비보를 전하게 된 문영대씨의 입장이 난감했을 것이다. 문영대씨는 아직도 미망인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표하는데, 이런 남북상황이 천재화가를 잊혀지게 했구나 싶어 더 가슴이 아팠다.
변월룡씨의 인생은 기구한 한국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고, 어머니와 누나들은 어려운 형편임에도 변월룡씨의 재능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 학교를 보냈다.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홀로 공부를 하던 그는 교과서 삽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가족과 헤어지게 되는 아픔을 겪었다. 한국인 이었던 그는 신분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해 몇년 간 가족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이런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는 그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고, 설사 알려졌다 하더라도 스탈린이 그랬을리 없다는 분위기 였기 때문에 변월룡씨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 작품 중엔 스탈린을 그린 것도 꽤 된다.
하지만 꾸준하게 실력을 쌓고 좋은 성적을 쌓으며 그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북한의 부름을 받게 된다. 처음엔 몇달만 북한에서 그림을 가르치면 되겠거니 했고, 왜 자신이 불려가는지 몰랐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항상 조국을 그리워했기에 기꺼이 임했다. 이때 만난 북한 화가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추대되는 경사도 누리며 평양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고국에서의 꿈 같은 나나들이 홀연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그가 영구귀국을 거부했다는 이유에서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북한은 그를 변절자라 여기며 모든 기록을 지워나갔고 남한에선 아직까지도 변월룡이라는 화가에 대해 잘 모르게 된 연유이다. 이렇게 조국에게 잊혀지기엔 그의 놀랍고 빛나는 재능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푸대접을 받기엔 그는 너무 뛰었는데 말이다. 만약 그가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만큼 진한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만약 문영대씨가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하고, 그의 일생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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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가운데 이런 화가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변월룡이라는 화가를 발굴한 저자의 노력이 더 놀랍고 안타까웠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지금껏 이런 화가를 몰랐다는 사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변월룡의 그림들은 우리에게 한국 서양화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림들과 함께 그의 일생을 읽어내려 가면서 감동적인 만큼이나 착잡했다. 변월룡 전시회가 국내에서 꼭 열리고, 그의 작품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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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뉴스에서 스치듯 보고 반했다가 잊었던 책이다. 작년 덕수궁미술관에서 기획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처럼 이끌려 찾아가게 되었다. 압도적이었다. 고희동의 어둑함과는 달랐다. 오지호의 밝음과도 달랐다. 렘브란트가 조선사람을 그린 것 같은 충격이었다. 저자는 국립 러시아 미술관에서 한국인의 모습이 그려진 서양화를 발견한다. 작가의 이름은 펜 바를렌. 러시아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화가는 연해주의 유랑촌에서 태어난 고려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변월룡은 도시 유학길에 오른다. 학업과 그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그는 차근차근 성장해 젊은 나이에 국립 대학 교수까지 맡게 된다. 이어 북한-소련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북한 미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지만 당국의 귀화를 거절한 이후 다시는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북한은 그의 이름을 지웠고, 남한은 그를 모른 척 했다. 저자는 상처받은 유족들의 마음을 힘들게 돌려 대규모의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그가 태어난지 백년이 지난 해, 늦었지만 만나게 되어 기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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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최근 까레이스키 즉 고려인 화가 변월룡 선생님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슬쩍 이 분에 대해 얘기를 해줬는데 이 분이 북한미술의 근간을 다지신 분이시다는 말을 해주더군요. 북한 사람도 아닌 고려인이 북한 미술의 근간을 다졌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 전시회 가기전에 이 책을 읽고 가는게 좋을것 같아 한번 읽어봤습니다. 변월룡 선생님은 연해주 태생으로 어릴적에 그냥 한번 그린 그림을 그의 할아버지가 소질을 알아보게 하고 미술교육을 시키게 됩니다. 문제가 넉넉하고 유복한 환경이 아니라 정말 어려운 환경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그림을 공부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그의 그림실력을 인정받아 교과서 그림까지 그리게 됩니다. 다시말해 같은 또래 학생들이 다시말해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교과서의 그림을 그렸다는겁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림 실력이 대단했다고 말할수 밖에 없습니다. 나중에는 출판사 그림 뿐만 아나리 극장 포스터 혹은 영화관의 간판 그리는 일도 하면서 하면서 미술공부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 대학진학도 당시 러시아에서 내로라 하는 미술학도들이 모인다는 대학에서도 인정받으며 실력을 쌓아가는데 나중에 부교수자리를 제의 받으며 학교에 남아 강의와 그림 그리는데 시간을 보내던중 1953년 소련의 정부에서 북한으로 판견근무를 명합니다. 이는 6.25 전후 국가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실력있는 미술인들이 부족과 교육시스템 미비로 어려운 북한 미술을 체계적으로 갖출 인재를 보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져서 변월룡 선생은 북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15개월동안 북한의 평양미술대학에서 강의주제, 자료, 교과서등 체계적인 미술지도 시스템을 갖추는데 노력합니다. 그의 뛰어난 미술솜씨에 북한의 미술계는 존경의 다하였고, 변월룡선생도 고국에 돌아왔다는 즐거움에 기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나중에 북한으로의 귀화를 권유 받았는데 강한 권유가 아닌 은근 슬쩍 받은 권유였고 또한 뢰핀대학문제, 소련에 있는 가족문제로 거절했었는데 그게 원인이 되어 이질치료를 위해 북을 떠났다가 나중에는 재입국이 영영 못하게 됩니다. 또한 북한 최초의 김일성체제 전복시도인 8월종파사건의 영향으로 소련파들이 숙청 당하면서 그의 입국은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가 배신자라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재입국의 영영 물건너간 셈이죠. 결국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매년 연해주를 가서 그림 그리는 일로 자신의 뿌리를 재확인하여 일생을 보내다 1990년 뇌졸증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는지 비석을 보면 그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져 있는걸 확인할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남한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몰랐던 위대한 화가. 러시아에서 가장 알아주는 화가중의 한명이며, 어떤 이들은 그를 러시아의 램브란트라는 칭호까지 부여하기도 합니다. 변월룡 선생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면 북한의 미술을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