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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밤에 이 책을 다 읽었다. 읽으면서 공감도 하고 무릎도 치고 고개도 끄떡이고 그렇게 읽었는데 읽고 나니 다 잊어버린것이다. 그래서 또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여러번을 읽었다. 나의 인생 교과서인냥. 처음읽을때와 다르게 자꾸 읽을수록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많은 제자들의 질문에 그토록 간단하고 간결한 한마디로 해답을 줄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놀라웠다.나는 평소에 선을 많이 한다. 머리가 복잡할때마다 선을 하는데 8년째하고 있지만 나의 선은 그 단계가 늘 머물러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앉아 있든지 아니면 오래 앉아있기를 잘하든지.
그런데 이 책의 첫 글에 한제자가 선이란 무엇이냐고 물었을때의 스님의 대답은 나의 8년 선경력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그 모르는 마음이 바로 네 자신이다. 선이란 바로 그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책을 보았다. 선에 관련된 책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고 확실하게 정답을 제시해 주는 분은 한분도 없었다.
또 평소에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좌선이다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님은 성교하는 마음과 참선하는 마음의 다른점에 대한 질문에 마음을 세가지로 분류해서 아주 쉬운 예로 설명해주셨다. 집착하는 마음(망념심)과 일념심, 명명심. 무엇이 사랑이냐라는 질문에 '너는 나에게 묻고 나는 너에게 물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불교에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뿐아니라 인생에 대해 고민이 많으신분들, 또 삶이 너무 힘겨우신분들, 생활이 너무 민밋하신분들은 이 책을 통해 좋은 해답을, 본인들에게 맞는 해답을 얻을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스승을 마음으로 만나실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인상깊은구절] 하루는 시카고에서 온 학생 하나가 프로비던스 선원을 찾아와 숭산 선사께 '선이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하였다. 선사께서는 주장자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는 말씀하시길, '이해하겠느냐?고 했다. 그 학생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선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 모르는 마름이 바로 네 자신이다. 선이란 바로 그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제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것이 무엇입니다?'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요.' 선사께서 말씀하셨다.'과자 공장에서는 동물 모양의 과자나 자동차 모양, 사람모양 또는 비행기 모양의 과자 등 각기 다른 모양의 과자를 구워낸다. 비록 이름과 모양이 다른 과자들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 같은 반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맛이 똑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우주 만물도 - 해, 달, 별, 산, 강, 사람 등과 같은- 비록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나 본래 그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이 우주는 상반된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빛과 어둠, 남자와 여자, 소리와 침묵,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과 모양은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하나다. 인간의 생각이 이름과 모양을 만들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생각을 멈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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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본질적인 물음에 답을 준다는 전제하에서 이런 물음을 해 본다. 종교이전에 사람들은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어디서 찾았는가? 하지만 그 본질적인 물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각에서 기인하는데, 만약 사람의 생각이 없다면 그 본질적인 물음이라는 것이 여전히 존재할까? 혹은 본질적인 물음을 해결하는 길은 생각을 없애는 것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 그 명제가 성립한다면 생각을 없애는 것이 곧 종교의 존재이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최초 전제 즉, 종교가 본질적인 물음에 답을 준다는 것이 거짓이면 이러한 논의가 과연 논리적으로 유효한 논의인가?
개구즉착, 입을 열면 그 즉시로 헛소리를 한 꼴이 된다. 이책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약속체계를 부정한다.언어를 부정하고 그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뒤의 전제를 부정하고 있다.언어와 전제를 부정함으로 해서 어떤 고정된 이미지의 실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생각의 논리성이 부정되고 있다.그러나 보여지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보여지는 것을 고정된 이미지로 묶어두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다. 불구부정(不垢不淨: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음), 부증불감(不增不減:늘지도 줄지도 않음), 색즉시공 공즉시색 등등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 현상을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
그래서 선문답이 언어를 부정하고 약속체계를 부정하는 형태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그런데 그만 고양이 밥그릇이 깨졌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선 이 선문답을 접하면, 반사적으로 묻게 된다. '왜 쥐가 고양이 밥을 먹지?' 그 다음 예기치 못한 사건(고양이 밥그릇이 깨지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 시 묻게 된다. '왜 깨졌지?' 이렇게 언어 뒤에 숨은 전제 즉 고정관념 속에 자리 잡은 약속체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물음들로 혼란한 틈을 타서 다시 한번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만다. '이것이 무슨뜻인가'답해보라는. 하지만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위의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쥐가 고양이 밥을 먹고, 고양이 밥그릇이 깨지고...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 것이고, 이유가 어찌되었건 고양이 밥그릇이 깨진 것 그것뿐이다. 쥐와 고양이, 고양이 밥그릇은 누가 정해놓은 것이고,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것인가? 그런데, 이것에 대해 왜 그런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걸 묻는 사람이 집착하는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정신차리라고 몇대 패주던가 혹은 위와는 무관한 언어와 약속체계를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답을 던지던가.하지만 모든 선문답이 위와 같지는 않다.
삶의 존재이유와 그 영위방식에 있어서 모든 가능태를 열어주면서 그 전제조건이 우리가 얽매어 있는 생각의 경직성을 깨는 일임을 쉬운 언어로 일깨워 주는 책이다. 끝으로 작가의 글 중 이 책을 대변하는 글이 있어 적어 본다 "우리는 스스로 잘못하였다고 느낀 순간부터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반면 내가 용서를 해야 하는 입장이면 상대방의 고통 따위를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인상깊은구절] 89.만인구제 어느 날 저녁, 케임브리지 선원에서 법문이 끝난 다음 제자 한 사람이 숭산 선사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선사께서 여기 오신 것이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들로 하여금 단지 견성만 하게끔 도와 주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기아, 전쟁,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신다는 뜻입니까?"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사라들을 구제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계시다가 말씀하셨다. "너는 이 뜻을 이해하겠느냐?" 그리고 다시 또 한참을 계시다가 말씀하셨다. "모두 놓아 버려라. 됐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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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쉽고도 어려운 책이었다. 외국인으로써 한국스님으로 출가하신 현각스님의 '만행'을 통해 현각스님의 스승님이자 서구세계에서 살아있는 성불로 추앙받고 계시는 숭산스님을 알게 되었다. 불교란 내게 있어 어떠한 종교라는 입장을 떠나서 인간이 살아감에 따르는 실존적 의문과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자 연구해야할 무엇처럼 느껴졌다. 뭐 그렇다고 내가 아는 것이 있다고 말할 처지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나는 보통사람, 그것도 아주 현실세계 한복판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고한 불교의 철학적 깊이를 알지못한다.
이런 사람이 큰 스님의 말씀에 관한 책을 읽고 무슨 느낌을 적는다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지만 항상 불교의 큰 진리의 창을 꿈꾸는 나에게 숭산스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부처님께 재를 털면'이라는 책이 나에게 좀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내가 평범한 사람으로써 깊이가 있지 못하여 넓고 큰 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숭산스님의 글이 어려웠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숭산스님께서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서구사람들에게 설법하시는 말씀을 어록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개방된 젊은이들에게 쉽게 이해가 갈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교입문서적과는 다르고 '선'이라는 명제하에 각각의 말씀을 엮어서 일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불교는 대단히 독특하고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더 깊이가 있게 발달되어 왔다고 알고 있다. '부처님께 재를 털면'을 읽다보면 내가 대학 시절 한창 읽어댔던 인도의 성자 '마하리쉬'보다 더 명확하게 마음의 근본을 짚어주시고 계셨다. 불행히도 나는 이땅에 살면서도 여태까지 숭산스님을 몰랐다. 변모된 사회속에서 개방된 서구사회속에서 실생활을 파고드는 큰 스님의 실천정신에 머리가 숙여진다.
요사이도 나는 절을 자주 찾는다. 숭산스님을 책으로 뵙고 오히려 우리의 불교는 너무 종교적으로 또 너무 계율과 품격에 치우쳐 딱딱해졌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 보다 큰 가르침이 일반 우리중생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인상깊은구절] "선은 너의 본래 자성을 아는 것이다. 넌 스스로 '난 무엇일까?'하고 물어야 한다. 이 큰 의심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일체의 생각을 끊어 내야만 한다. 네가 이 큰 의심을 이해하게 되었을때 넌 너의 자성을 알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면서 아테네 시를 돌아다녔다.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자신을 아시오?'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러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그 자체를 압니다.' 선도 마찬가지다. 바로 모르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너의 자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