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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사 - 이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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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만을 커버한다 해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364쪽이라는 분량으로 가능할까 싶은 게 독자의 선입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중국사 전체를 다루는 책도 있고, 저자의 역량에 따라 너른 스케이프의 개관이 얼마든지 가능할 뿐 어떤 페이지 수라는 게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 싶습니다.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립하고, 경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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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만을 커버한다 해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364쪽이라는 분량으로 가능할까 싶은 게 독자의 선입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중국사 전체를 다루는 책도 있고, 저자의 역량에 따라 너른 스케이프의 개관이 얼마든지 가능할 뿐 어떤 페이지 수라는 게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 싶습니다.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립하고,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독특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다." 저자의 말입니다. 사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립이란, 그 말이 쉬울 뿐 현실에서 이의 믹싱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故 J K 갤브레이스가 양 체제의 수렴을 논한 적 있으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한쪽 체제가 붕괴한 적 있습니다. "경제와 정치"는 서로 "분리"되는 게 체제를 불문하고 바른 원칙이죠. 경제외 정치가 분리 안 되는 걸 두고 우리는 정경유착이라 일컫습니다. 중국은 과연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나라일까요? 오히려 그렇지가 않기에 "한한령" 등으로 한국인들 상당수가 고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재미있게도 공식적으로 "한한령" 같은 건 발동한 적 없다고 합니다. 역시 "경제와 정치가 분리 안 된 것"은 어느 체제에서도 창피하기는 한 일 같습니다.

 

과거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할 때 붙인 멸칭 중 하나가 프로테스탄트였으나 현재는 이에 자랑스러운 저항의 사연이 붙어 당당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신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도 마찬가지여서 한때는 말 자체가 배척의 뉘앙스를 띠었으나 지금은 그저 고유명사 비슷한 쓰임입니다. 만주족은 낙인이 아니라 아예 있지도 않은 명칭이었고 여진인이라는 호칭에 배척과 야만의 규정을 담았으나 이들이 정복자가 된 후로 지배인의 위상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래도 "여진"에 담긴 부정적 인상은 어쩔 수 없었는지 불교의 배경을 담아 민족의 개칭이 이뤄졌죠. 청 제국이야말로 한족 질서를 완전히 뒤집지 않고 "만한 병용"이라는 실용의 길을 택했는데 이것이 이전의 원대가 채택한 극단적인 민족우월주의와 달리 만주족의 세련된 정책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물론 청말에는 이런 동화의 제스처조차 무색하게 되어버렸습니다만.

 

청조가 만약 앞선 왕조처럼 정상적인(?) 패턴의 쇠망 경로를 밟았다면, 훨씬 노련하고 세련된 시스템을 정착시킨 제국이 선례들과는 무엇이 달랐을지 비교 검토하는 재미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청조는 천만뜻밖에도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아 이전 제국의 쇠망 코스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타격의 결과로 멸망했기에 단순 비교가 어렵습니다. 또 청조는 공식적으로 신해혁명이 원인이 되어 그 막을 내렸기에 혁명가와 민중의 역할을 사상 처음으로 따져 봐야 하는 수고가 그 연구에 더 추가됩니다. 

 

독일의 사학자 몸젠은 "중국은 처음으로 '세계'에서 '국가'로의 변신을 경험했다"고 평가한 적 있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조약은 아편전쟁으로부터 150여년 전 러시아 제국의 대리인들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이지만 이때에는 청조가 더 시급하고 중대한 관심사 여럿이 있었기에 먼 변경의 작은 소요에 관심을 두기 어려웠습니다. 

 

아편 전쟁에서 크게 진 후에도 프랑스가 장강 이남에서 이권을 두고 영국과 각축했고, 특히 베트남의 지배를 놓고 청 제국과 크게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런 한심한 상황이었기에 지식인들은 이른바 "반식민지" 상태라며 정부를 맹비난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구시대적 특권을 수중에서 놓기 싫었기에 국민 역량의 총결집을 거부하고 이화원 안에서 망상의 유희에만 몰입하다 개혁의 적기를 놓칩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생겼으니 중국의 근대화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없게 전개됩니다. 

v*****7 2022.04.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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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만을 커버한다 해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364쪽이라는 분량으로 가능할까 싶은 게 독자의 선입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중국사 전체를 다루는 책도 있고, 저자의 역량에 따라 너른 스케이프의 개관이 얼마든지 가능할 뿐 어떤 페이지 수라는 게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 싶습니다.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립하고, 경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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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만을 커버한다 해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364쪽이라는 분량으로 가능할까 싶은 게 독자의 선입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중국사 전체를 다루는 책도 있고, 저자의 역량에 따라 너른 스케이프의 개관이 얼마든지 가능할 뿐 어떤 페이지 수라는 게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 싶습니다.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립하고,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독특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다." 저자의 말입니다. 사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립이란, 그 말이 쉬울 뿐 현실에서 이의 믹싱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故 J K 갤브레이스가 양 체제의 수렴을 논한 적 있으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한쪽 체제가 붕괴한 적 있습니다. "경제와 정치"는 서로 "분리"되는 게 체제를 불문하고 바른 원칙이죠. 경제외 정치가 분리 안 되는 걸 두고 우리는 정경유착이라 일컫습니다. 중국은 과연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나라일까요? 오히려 그렇지가 않기에 "한한령" 등으로 한국인들 상당수가 고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재미있게도 공식적으로 "한한령" 같은 건 발동한 적 없다고 합니다. 역시 "경제와 정치가 분리 안 된 것"은 어느 체제에서도 창피하기는 한 일 같습니다.

 

과거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할 때 붙인 멸칭 중 하나가 프로테스탄트였으나 현재는 이에 자랑스러운 저항의 사연이 붙어 당당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신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도 마찬가지여서 한때는 말 자체가 배척의 뉘앙스를 띠었으나 지금은 그저 고유명사 비슷한 쓰임입니다. 만주족은 낙인이 아니라 아예 있지도 않은 명칭이었고 여진인이라는 호칭에 배척과 야만의 규정을 담았으나 이들이 정복자가 된 후로 지배인의 위상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래도 "여진"에 담긴 부정적 인상은 어쩔 수 없었는지 불교의 배경을 담아 민족의 개칭이 이뤄졌죠. 청 제국이야말로 한족 질서를 완전히 뒤집지 않고 "만한 병용"이라는 실용의 길을 택했는데 이것이 이전의 원대가 채택한 극단적인 민족우월주의와 달리 만주족의 세련된 정책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물론 청말에는 이런 동화의 제스처조차 무색하게 되어버렸습니다만.

 

청조가 만약 앞선 왕조처럼 정상적인(?) 패턴의 쇠망 경로를 밟았다면, 훨씬 노련하고 세련된 시스템을 정착시킨 제국이 선례들과는 무엇이 달랐을지 비교 검토하는 재미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청조는 천만뜻밖에도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아 이전 제국의 쇠망 코스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타격의 결과로 멸망했기에 단순 비교가 어렵습니다. 또 청조는 공식적으로 신해혁명이 원인이 되어 그 막을 내렸기에 혁명가와 민중의 역할을 사상 처음으로 따져 봐야 하는 수고가 그 연구에 더 추가됩니다. 

 

독일의 사학자 몸젠은 "중국은 처음으로 '세계'에서 '국가'로의 변신을 경험했다"고 평가한 적 있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조약은 아편전쟁으로부터 150여년 전 러시아 제국의 대리인들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이지만 이때에는 청조가 더 시급하고 중대한 관심사 여럿이 있었기에 먼 변경의 작은 소요에 관심을 두기 어려웠습니다. 

 

아편 전쟁에서 크게 진 후에도 프랑스가 장강 이남에서 이권을 두고 영국과 각축했고, 특히 베트남의 지배를 놓고 청 제국과 크게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런 한심한 상황이었기에 지식인들은 이른바 "반식민지" 상태라며 정부를 맹비난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구시대적 특권을 수중에서 놓기 싫었기에 국민 역량의 총결집을 거부하고 이화원 안에서 망상의 유희에만 몰입하다 개혁의 적기를 놓칩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생겼으니 중국의 근대화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없게 전개됩니다. 

v*****7 2021.02.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