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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를 통해 삶과 인간감정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접할 수 있다. 1부와 2부에 공히 등장하는 모티프는 사랑이다. 1부에서는 자극적이고 감각적이라면 2부에서는 성찰적이고 사색적이다. 1부에서는 극단적 사랑의 감정을, 2부에서는 환상과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자아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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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를 읽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 출판사별 번역이 어떻다 저렇다 말할 수도 없을 뿐 더러 옳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마디 하고 싶은 건 처음 읽는 희곡이지만, 번역이 옛스럽지 않고 눈에 잘 들어온다, 라는 것. 인용과 상징, 풍자 등 텍스트에 담긴 모든 의미를 파악하면서 읽기란 분명 초보자인 나에게 쉽지 않았지만, 그런 걸 배제하고서라도 읽어내리게 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그렇게 읽어내려가게 하는데에는 '줄거리'를 파악하며 읽는 것에 있다.
메피스토펠레스 저는 뭐든 늘 부정하는 정신이죠! 제 말이 맞아요. 태어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죽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죠. 당신들이 죄악이니 파괴라고 일컫는 것, 한 마디로 악이라 부르는 그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내 본질이지요.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을 이렇게 칭한다. 그리고 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걸고 계약을 맺는 파우스트. 그녀는 마녀의 물약으로 젊은 청년으로 회춘하여 처녀 그레트헨에게 열렬한 구애를 한다. 쾌락의 늪에 빠지게 만들려고 했던 메피스토펠레스의 의도와는 달리 파우스트가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되자 피스토는 그레트헨의 어머니를 죽이고 파우스트가 그녀의 친오빠를 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레트헨(마르가레테)를 그는 떠난다.
이렇게 이야기는 2부로 이어지는데, 사실 파우스트 한 번 읽어선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 읽고 나서도 줄거리나 간신히 파악했달까. 2권은 1권보다 유난히 더 힘들게 느껴지는게 그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메피스토펠레스 간단한 진실을 알려드릴게요. 바보 같은 인간들이야 소우주를 자처하며 대개 자기가 전체인 줄 알지만, 저야 부분 중의 부분이죠, 처음에는 이게 전체였지만. 저는 어둠의 일부죠, 이 어둠이 빛을 낳았지요. 이 빛은 거만해서 제 어머니인 밤을 상대로 밤의 옛 지위와 공간을 빼앗으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지요. 아무리 그래 봤자 빛은 물체에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빛은 물체로부터 흘러나오고 물체를 아름답게 해주지만, 물체는 빛이 가는 길을 막아서지요. 그래서 제 바람은 말입니다, 머지않아 빛이 물체와 함께 멸망하는 것이지요.
지옥은 이러하지 않을까. 물체도 빛도 없는 그런 곳.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듯, 빛과 어둠도 함께 존재하기에 그런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게다가 여기서 드러나는 저 구절. "바보 같은 인간들이야 소우주를 자처하며 대개 자기가 전체인 줄 알지만,"이라는 부분에서 밑줄 쫙쫙 그어놓은 자신을 발견했다. 인간이란 그렇지 않은가. 먼지 티끌에 불과한 인간이자 자기 자신이 마치 하나의 소우주인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가끔 그런 인간의 오만에 어이가 없다못해 질려버린다.
어쨌거나 텍스트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보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텍스트에서 찾아내고 보고 해석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 나는 자유롭게 파우스트를 내 시선으로 보기로 했다. 갖은 해설을 보는 건 그 이후의 일. 일단 내 마음으로, 나만의 언어로 녹여내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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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오라, 너희 떠도는 형상들아. 지난 날 이 침침한 눈길에 보였던 너희, 이번엔 정말 한번 붙잡아 볼까? 이 마음 다시 공상에 젖어보고 싶어. 그래, 어서 몰려와 마음껏 놀아봐아. 희뿌연 안개 헤치며 여기서 떠돌아라, 너희의 숨결과 마법의 바람을 쐬어 이 가슴 한결 젊게 쿵쿵 요동친다. 너희가 옛 행복했던 시절을 데려와 내 사랑했던 숱한 그림자들 떠오른다. 이제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옛 전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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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적 허영심과 무력감에 빠진 노쇠한 지식인이 있다.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젊은이로 다시 태어나자마자 순진한 처녀를 꼬셔내 성욕을 분출한 뒤 무책임하게 도망친다. 그녀는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파우스트는 최악의 인간이다. 평소 현학적인 미사여구로 존재의 고뇌를 늘어놓더니 회춘하자 끓어오르는 정욕을 주체하지 못해 처녀와의 하룻밤을 악마에게 앙탈부리고, 결국 그레트헨을 파멸로 몬다. 그녀의 어머나에 대한 살인은 실수라 하더라도 오빠에 대한 살인은 책임을 면할 길 없으며 그녀와 함께 도망칠 수 없었다면 의연하게 죽음을 같이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였다. 비루한 지식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야 원래 위선과 위악으로 점철됐다 하더라도 신은 왜 그리 인간에 대해 무지하단 말인가? 파우스트에 대한 무모한 신뢰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메피스토펠레스로부터 인간에 대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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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우스트>를 처음 만난 것은 7년 전. 갓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강독수업 자료로 봐야했던 한 남자의 기괴한 여행. 온갖 마법의 요소와 비틀어진 인생의 편린들로 가득 차 있던 작품은, 막 스무 살에 접어든 내겐 신비로움을 안겨줌과 동시에 무겁고 낡은 느낌도 함께 주는 작품이었다. 아니, 그 당시에는 무겁고 낡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을 인정하고 넘어가야겠다.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알 것 같았지만. 대체 뭔가? 이 고리타분함은? 종교적인 숭고함은? 이 늙은 비장함은? 2. 그 당시 이 작품이 낡았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원인은 마지막장, 그 비장하고 고귀한 결말에 있었다. 파우스트 박사로 대변되는 인간은 과연 이런 구원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외경과 성경, 마법과 학문, 그 이분법적인 것들이 한데 어울러져 만들어낸 환상 교향곡이 결국은 저 숭고한 결말을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게 공들여 조사하고, 면밀하게 파헤쳐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너무도 마땅히 가야할 길로 가버리지 않았나. 이 작품 하나를 위해 성경과 외경을 연구하고, 학문을 파헤치고, 마법적인 요소들을 찾기 위해 한 모든 노력의 해답이 구원이라니. 운율과 낭독의 하모니가 구원을 위한 장치였을 뿐이라니. 이게 대관절 무슨 경우냔 말이다. 뭔가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철저하게 속아 넘어간 기분이었다. 화가 나서 책장을 덮었고, 그길로 다시는 <파우스트>를 보지 않았다. 뭐가 고전이고, 뭐가 위대한 작품이란 말인가. 그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이름을 대중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을 뿐. 이제와 이런 이야기는 낡았다. 낡았다고 되뇌었다. 3. 그로부터 7년 만에 집어든 <파우스트>의 결말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릴 적 치기로 읽었을 때와는 또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파우스트의 위험한 여정의 원인이 되는 권태감. 이 권태감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혼합되어있다. 어느 날 세월이 문득 던지는 무상함과 회의감, 그리고 그로인한 피로감과 분노. 그 질문은 한 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파우스트가 자신의 영혼을 내던지게 만드는 그 질문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이제껏 그 모든 학문과 인생의 진리를 알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학자로써의 명성? 사랑? 인생의 득도? 어느 것도, 어느 것도. 결국 말로에 가진 것은 늙고 힘없는 육신뿐이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참 진리를, 그 쾌락을 알려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누가 감히 그 유혹을 거부하겠는가.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하고 스스로의 자존감과 존재의 이유를 잊은 인간은 언제나 공허하다.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언제나 욕망한다. 정도를 지나쳐버린 욕망의 끝자락에는 언제나 파멸이 아가리를 벌리고 서있다. 하지만 결과를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4. 마지막 순간, 파우스트는 “내가 궁극적으로 얻은 지혜는 바로 이것,/ 날마다 새로이 싸워 얻어내는 자만이/ 자유와 생명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365p) 라는 말로 대전(對戰)하는 존재로써의 인격을 자각한다. 궁극적으로 파우스트를 숭고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의 자아를 자각한 순간 그는 구원을 얻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다. 파우스트는, 우리 인간은 정말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물론 ‘파우스트가 한 게 아니잖아!’로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일은 파우스트가 욕망한 것이다. 그에게 욕망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날 이유는 없다.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악의 본성은,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있던 ‘욕망하는 자아’가 주체할 수 없이 커질 때 나타난다. 결국 이 모든 일은 파우스트의 욕망이 뒤틀려 표현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런 변명도 가능하다는 얘기지. “왼손은 거들뿐.” 5.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은 신성한 여성성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끝난다. 신성한 어머니, 모든 것을 품어주고 용서하는 어머니.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는 존재로 인한 완벽한 구원의 여지라는 것은 얼마나 신성한지. 그래서 나는 이 결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철저하게 파멸 당했어야 더 드라마틱 할텐데. 이런 아름답고 숭고한 결말이라니. 좋다. 그가 내재된 선과 표출되는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인물임은 충분히 알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남성적인 세계가 바라는 최후의 구원과 희망의 상징이 ‘숭고한 어머니’로 표출된다는 것이 못내 씁쓸하다. 그리고 묻고 싶어진다. 고민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궁극적으로 깨닫는 것으로 용서가 된다고? 그리고 이 순간, 가엾은 여인 마르가레테를 떠올린다. 도대체 그녀는 대관절 무슨 죄인가.
(+point) <파우스트>는 극의 형식에 시의 운율이 가미된 작품이니 만큼,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소리내 읽어보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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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한 달 내내 파우스트를 붙잡고 있었다. 이번에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파우스트는 독일에서 원전을 새롭게 복각한 1994년의 알브레히트 쇠네 판본을 고려대 독문과 김재혁 교수께서 두 권으로 옮긴 것이다. 극중극의 바깥 구조를 담당하는 헌시, 무대에서의 서곡, 천상의 서곡과 비극 제1부까지가 첫째 권에 실려있고, 둘째 권에는 비극 제2부 전체가 실려있다. 비극 1부와 2극은 전혀 다른 느낌이기에, 열린책들이나 문학동네같이 한 권에 비극 두 개를 모두 실은 판본보다는 이렇게 나뉘어져 나오는 편이 접근하기에 좀 더 수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1부는 순식간에 읽었는데, 2부는 약간 지지부진하게 읽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1부와 2부는 감상포인트 자체가 달라서 읽는 법도 다르게 접근해야 했을텐데, 그만 1부를 읽듯 2부를 읽어내리느라 독서가 좀 쳐졌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다르며, 어떤 접근법이 필요했다는 것일까. 다 읽고 난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은, 내가 좀 더 유연하게 접근했어야 한다는 것. 1부는 전형적인 시민비극의 형태를 띄고 있다. 18세기 이후에 나타난 소설 형태로, 기본적으로 오늘날 소설에 전형을 제공한 양식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기승전결과 명확한 테마, 제한된 등장인물 등으로 속도감 있게 읽힌다. 반면 2부는 괴테의 전 인생이 집대성된 지식의 보고이다. 1부가 집필되고 나서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완성된 것이니만큼 1부와는 문체와 내용상의 차이가 있다. 방금 1부를 덮으며 그레트헨과의 결말에 눈물을 줄줄 흘린 독자라면 2부가 시작되자마자 헬레네와 꽁냥꽁냥하는 파우스트를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스케일은 또 얼마나 어마무려하게 커지는지. 5막극 안에 괴테가 고대비극과 디오니소스극, 중세 신비극과 독일 민간신앙 등을 연구한 결과가 응축돼있고 그만큼 방대한 기본지식이 필요하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앞뒤로 통달하고 호메로스의 소설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킬로스의 비극들을 한번씩 읽어본 경험이 있는 자가 아니고서야 뒤에 달린 주석을 그때그때 참고하지 않은 채로 2부를 한번에 읽어 내리긴 힘들 것이다. 독일 문학의 심장이라 할만한 괴테의 대작을 입문이나마 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일단 수월하게 읽히는 1부부터 접근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중엔 좀 더 풍부하게 파우스트에 접근하고 싶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같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2부는 고시생이 법전 읽듯 억지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읽히지 않는 내용을 억지로 꾸역꾸역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막힐 때는 잠시 그 책을 내려놓고 다른 그리스비극들을 탐독하다가 돌아와도 괜찮지 않을까. 연애할 때 한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두고두고 생각하고 배우며 이런 상황, 저런 장소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두루 함께 데이트하듯 고전도 서로 사귀어 나가는 것이 가치있는 접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수준이 아직 그 책을 감당할 정도가 되지도 않는 주제에 주마간산 보듯 띄엄띄엄 억지로 끝까지 읽고서는 '더럽게 재미없군' 하고 밀쳐버리는 것은 책으로써도, 독자로써도 아까운 시간낭비일 뿐이지 않은가. 사귐에 있어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고, 그걸 공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을 할애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만이 책의 수준과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독서라는 건 결국엔 자신만이 그 가치를 판단하는 철저히 자기만족적인 취미일 뿐이니까. 2부를 읽던 5월 하반기는, 마침 내가 니체를 달달 공부하고 있던 때였다. 독일적인 모든 것을 혐오했던 니체가 존경한 단 한명의 독일인으로 괴테를 꼽았다는 건 잘 알려져 있는 바, 니체와 괴테의 교집합을 잘 알 수 있어 흥미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니체를 통해 괴테를 읽을 때, <파우스트>의 규모는 더욱 완전하게 파악될 수 있다. 말하자면 독일에게 바쳐지는 하나의 새로운 전사(前史)이자 유럽적 가치의 정수인 그리스와 게르만적 가치를 가진 독일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파우스트>는 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타락한 독일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으로 고대 그리스적 가치를 꼽는데, 바로 그러한 방향을 괴테는 자신의 소설인 파우스트 제2부에서 실체적으로 구현해 보여준다. 그리스의 원형적 가치들은 새로운 독일에서 부활해 독일적 가치들과 결합한다. 독일시에 대한 헬레네의 감탄이나 트로이전쟁을 파우스트의 전쟁으로 완전히 다시 교체한 부분에서 우리는 괴테의 의중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설적 시도는 결국 근대 시민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며, 전인적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완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로 이행되면서 괴테의 원대한 근대적 구상이 드러난다. 프랑스전쟁에 대한 괴테의 비관적 견해나 시민사회에 대한 그의 코멘트들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보다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랫만에 그리스 비극으로 돌아가 볼까한다. 각론에도 세심히 집중하지 못하는 정신에게는 총론도 무의미하리라. 덧말) 김재혁 교수의 번역이 내게는 다소 파격적이었다. 아무리 시대에 맞게 번역은 재탄생되는 것이라지만(또한 역자후기에 그러한 의도로 번역하였다는 심중을 털어놓으셨다지만), 고전은 또한 수십년이 흐른 뒤에 읽어도 여전히 가치를 더하는 것이기에 세월의 때를 타지 않을 번역어를 고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현대적으로 번역한다고 한들 메피스토펠레스가 '섹시하다' '꼴린다'는 단어를 쓴다거나,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을 현 시대의 은어를 고대정령들이 사용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대단히 '과한' 해석이었다. 기본적으로 당대의 소설이었던 <파우스트>의 번역이 성서처럼 경건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건 넌센스고, 번역은 원작의 아우라를 걷어내고 시대상에 부합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나치게 파격적이어서 천박해지기 전에 중용이 필요한 것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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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츠에 나오는 고양이들 중에 내가 가장 귀여워하는 애는 럼 텀 터거이다. 거침 없이 행동하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낸 규율 따위는 가볍게 비웃어 버리는 모습이 되게 매력적이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그 당당함! 자기 잘났다는 걸, 그리고 그걸 자기도 안다는 걸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어필하는 게 그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는 젤리클 사회에 속하면서도 여전히 독보적인 개성을 뽐내는 존재감이 있고 또 뮤지컬 내에서 항상 방방 뛰는 것도 아니라 때론 무대 한 켠에서 사태를 관망하다 한마디 씩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참 어렸을 때부터 난 이런 당당한 사람이 좋았다. 스스로에 대해서 솔직하고 고민하지 않는 캐릭터가 좋았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걱정하고 불안해하기보다 타고난 자신의 성격을 어쨌든지 사랑하고 인정하는 모습은 보는 내가 해방감을 느낄 만 했다. 파우스트 안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악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악마이다. 하지만 나는 파우스트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훨씬 좋다. 왜냐하면 메피스토는 스스로가 악한 녀석임을 인정하고, 세상 모든 이를 속일 지라도 스스로를 속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파우스트가 도덕성과 진리에 관한 추구와 욕망에 사로잡혔으면서 그 욕망에 있어서 100퍼센트 솔직해지지도 못하면서 메피스토의 탓을 하는 게 보는 내내 심기에 거슬렸다. 어쨌든 메피스토는 길을 제시했고, 유혹했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은 파우스트 자신이 했으면서. 악마의 유혹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표상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자유의지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오히려 세상을 잘 아는 것 같은 것도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이다. 메피스토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멍청한 본성까지 꿰뚫어본다. 그러한 측면을 억누르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파우스트에게 상기시킨다. 그가 스스로를 악마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도 하나의 인간 본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본성은 사회 안에서 억제되고 조절되어야 할 지라도 퇴치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을 부정하는 일이 되버리니까. 그렇기에 여전히 메피스토는 세상에서 소멸 당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에게 자신의 먹이를 빼앗기는 정도로 반대편으로부터 응징받을 뿐이다. 메피스토라는 악마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세상도 현실이고, 또 그의 말에 넘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메피스토의 악독함을 보여주기보다 파우스트로 대변되는 고고한 삶이라고 하는 허울 좋은 막 아래의 또다른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메피스토의 대사들이었다. 그는 화도 잘 내고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골려주기도 하고 낄낄대기도 한다. 그랬기에 사실 파우스트나 다른 캐릭터들보다 훨씬 더 생동감 있다. 그의 말투와 언어가 오히려 진짜 인간에 가까운 건 나만의 독서실감은 아닐 거라고 본다. 게다가 욕설을 마구잡이로 하고 섹시하다느니 성적인 표현도 거침 없이 하는 모습에서 나는 내가 럼 텀 터거에게 느낀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랬기에 파우스트를 읽는 내내, 나는 메피스토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가 등장해서 산통을 깨고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시커먼 속내를 시원하게 까발리는 모습을 기대하고 또 거기에 속 시원해하면서 읽었다. 번역이 시대에 따라 달리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시대에 따라 다른 독서가 가능하기 때문일 거다.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파우스트가 아닌 메피스토를 좋아하면서 읽게 될 줄 괴테가 알고 있었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발칙한 독서실감일지도 모르지만 이게 내 솔직한 감상평이다. 메피스토처럼 그냥 솔직하게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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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전 생을 통해서 완성하는 걸작으로 한편의 진한 뮤지컬 공연을 본듯한 느낌이다..사랑엔 나이도 국경을 초월한다. 악마와 사랑을 찾아 그리스를 떠나고 한 나라를 전쟁으로 가짜 돈으로 뒤흔들고. 기독교적인 시적인 표현이 인상적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