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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책읽기《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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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텍스트를 읽고, 책을 읽고, 쓴다. 벌써 오랜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이다. 처음에는 ‘지知’ 의 호기심 충족으로 시작되었던 책읽기가 이제는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깊은 심연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책 읽지 말 것을 권유한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책 읽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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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텍스트를 읽고, 책을 읽고, 쓴다. 벌써 오랜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이다. 처음에는 ‘지知’ 의 호기심 충족으로 시작되었던 책읽기가 이제는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깊은 심연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책 읽지 말 것을 권유한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책 읽기의 끝에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가 자신과의 싸움이 되는 순간부터는 더욱더 외롭고 괴로워진다는 것, 따라서 책읽기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리우는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이런 책을 읽고 쓰는 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사사키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와 전문가들에게 다소 냉소적인 자신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책의 부제는 “책과 혁명에 대한 닷새 밤의 기록” 으로 책읽기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자신감도 넘치고 나름 타당한 느낌도 든다.  

 

 

우선 저자는 비평가와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류 - 한 가지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정보를 차단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으로 책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말하려는 ’비평가‘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는 ’모든 것‘을 둘러싼 ’향락‘에 취해 있음으로 이런 것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이런 것이다.

 

 

사실 자신만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고 꼴불견인게 어디 있겠습니까? (19쪽) 비록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무지한 상태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이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 라고 말했듯이 현재에 따라가다 보면 그 초조함으로 오히려 현재를 망치게 된다고 한다.

 

문학이야 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

 

 

저자는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한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대혁명은 성서를 읽는 것으로 비롯되었고, 대천사에게서 ‘읽어라’는 계시를 받았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거부했지만 신에게 선택되어 '읽으라'는 절대 명령을 받은 무함마드는  읽을 수 없는 것을 읽고 , 잉태한 것이 ‘코란’이다. 그리고 그 코란으로 이슬람 세계를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무함마드의 혁명이다. 

 

텍스트를 , 책을, 읽고 ,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 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저자는 이러한 혁명의 개념과 가장 근접하고도 현대와 연결되는 혁명을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고 명명하는데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유스티아누스의 법전의 발견으로 6세기부터 600년 가까이 묻혀있던 로마법을 바탕으로 로마법을 교회법으로 바꾸는 전재미문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라티아누스의 교령집이 성립하게 된다. 이 새로운 법의 탄생과정인 읽고 쓰고 , 고치고 , 다시 읽고 쓰는 작업을 하는 것을 저자는 ‘혁명의 본체’라고 하는 것이다.

  

종말 환상의 긴 역사

  

저자는 흔히들 말하는 종말론적 사고 , ‘현재’에서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병든 사고라고 한다. 가끔 우리가 접하는 말들 , 문학은 죽었다라든지, 예술이 끝났다라고든지 하는 사고의 발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특권적인 시작이나 끝이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동안 역사상 결정적인 일이 일어나야 하는다는 병든 사고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리고 이 말은 고래부터 한없이 반복되어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책을 읽는 한 그리고 책을 계속 읽어왔기 때문에 결코  문학에 종말은 오지 않으며, 이 행위자체가 혁명을 계속 불러왔음을 역설한다. 결국  문학은 살아남았고, 예술도 살아남았으며, 혁명은 계속되었으며 이렇게  인류는 살아남는다. 그럼으로 읽고 쓰는 한, 인류에게 종말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절대 !

 

제목을 본 순간 니체가 떠올랐다. “ 신은 죽었다” 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 신의 존재를 더 강하게 부연설명해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달콤한 말보다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말이기에 나는 오히려 신은 죽었다는 말에서 신의 존재를  느낀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엉뚱하게 학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는데 책읽기에 관한 이야기라 의외였다. 니체의 말처럼  이 책 역시 역설적이게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르라는 말이 아니라 책을 읽는 행위가 인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책에 관한 이야기는 유쾌하면서도 통쾌하다. 가끔 지인들에게 책 읽지마 ! 라고 하는 내 마음과 같다고 할까. 책읽기는 내게 한편으로는 강한 애증이다. 책에 갇힌 내 모습이 싫으면서도 책 읽는 행위를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학을 위해 , 예술을 위해, 혁명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YES마니아 : 로얄 k********2 2012.06.28. 신고 공감 15 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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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또 고쳐 읽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혁명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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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 모든 사람이 왜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을법하다. 나 역시, 끊임없는 물음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왜 책을 읽는지, 어떻게 읽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듯하면서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드러나지를 않는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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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 모든 사람이 왜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을법하다. 나 역시, 끊임없는 물음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왜 책을 읽는지, 어떻게 읽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듯하면서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드러나지를 않는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제목이 특이해서 잡은 책이었다. 그러나 첫째 밤의 기록을 읽는데 몇 날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다. 딱히 어려운 내용은 없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 읽는 중간에 관두기를 여러 번, 그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읽기를 하는 것이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읽고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저자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것은, 사실은 똑 같은 것이 쓰여있는 책들을 많이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축에 해당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다고 하는 것은, 다 읽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것임을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책 읽기도 저자의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래서 요즘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많이 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닷새 밤 동안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 즉 문학을 한다는 것이 혁명으로 연결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혁명의 계보를 살펴보면 12세기 교황혁명, 16세기 대혁명, 그리고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지지만, 그는 근대의 출발을 12세기 교황혁명에서 찾고 있다. 우리는 혁명이라고 하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폭력이 수반되고, 세상이 개벽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저자는 그런 폭력은 혁명의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보다 근원적인 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또 그 계기를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찬송가를 만들었으며, 당시 독일에서 발간된 책의 1/3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읽기 시작했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이 읽어주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즉 그것은 무엇보다도 책을 읽는 것,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 이야기를 둘러 싼 개혁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대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혁명의 본체는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의 변혁임을,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임을 루터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함마드의 경우에도 똑 같았다. 대천사 지브릴이 나타나 무함마드에게 한말은 읽으라, 그리고 붓으로 써라는 말이었다. 무함마드의 읽기가 없었다면 이슬람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이슬람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유럽은 지금의 유럽이 아니었을 것이기에 읽는다는 것은, 그리고 쓴다는 것은 당연히 혁명이 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모든 혁명의 시초를 12세기 교황혁명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이를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른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유스티아누스 법전이 발견된다. 로마시대의 법전인 유스티아누스 법전은 6세기 무렵 사라져, 다시 발견되는 11세기까지 600년 가까이 사람들의 망각 속에 묻혀있었다. 당시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법전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쳐 읽고, 고쳐 쓰기를 100여년 가까이 한끝에 그것은 비로소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으로 집대성되고, 이를 기반으로 교회공동체가 성립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원형이 되었다. 그렇기에 고쳐 읽고, 고쳐 쓰기를 반복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혁명일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상이 끝나고, 문학이 끝나고, 책이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렇지만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수백년 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끝나지 않는 한, 문학도 그리고 책도 사라지지 않는다. 종말, 역시 내가 사라지는 것이지 세상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종말을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라 라고 말하는 저자, 시대를 바꾼 혁명은 책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책을 계속 읽는다는 것은 혁명을 불러들이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읽고, 또 읽고 고쳐 읽으라. 쓰고, 또 쓰고 고쳐 쓰라. 지식과 깨달음이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사사키 아타루라는 생소한 비평가가 나에게 알려주는 책 읽는 목적이다. 읽고 잊기를 반복하면서, 그래도 부단히 읽는다는 것, 그런 책 읽기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k*****1 2012.10.01. 신고 공감 13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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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도 혁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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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제목과는 달리 우리에게 책을 읽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책 읽기가 인류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를 알려주는 글이다. 어떻게 보면 참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읽을수록 말이 되고 공감이 가는 글이다. 5일 밤의 사색이 펼치는 책 읽기, 우리에게 왜 책 읽기가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글이다. 당신은 왜 책을 읽는가? 정보를 얻기 위해, 재미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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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제목과는 달리 우리에게 책을 읽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책 읽기가 인류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를 알려주는 글이다. 어떻게 보면 참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읽을수록 말이 되고 공감이 가는 글이다. 5일 밤의 사색이 펼치는 책 읽기, 우리에게 왜 책 읽기가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글이다. 당신은 왜 책을 읽는가? 정보를 얻기 위해, 재미를 위해, 생각을 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자는 책 읽기가 혁명이라고 한다. 역사를 통해, 왜 혁명일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세상에 늘려있는 정보, 우리는 잠시의 순간에도 정보의 사슬에서 풀려날 수 없다. 이런 현상의 모든 것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실행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정보는 과연 존재할까? 이런 사회에서 소위 비평가와 전문가는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의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으로 제시하려는 향락”을 추구하는 이들로 자신들의 우월을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명령(정보)을 듣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따르면 좋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정보들이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읽는다는 의미는 무얼까? 그냥 정보로서 읽는 것일까? 우리는 지배하는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고 쓰고, 쓰고, 마구 써대고 있으면 뭔가 보이게 된다. 또한 정신분석은 일종의 문학운동으로 그리스도교의 영혼의 인도를 계승한 것이다. 문학은 문헌이자 서지였고, 성전을 읽고, 편찬하고,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었다. 이런 문학은 점점 혁명이 된다.

 

루터의 대혁명은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당시 교회는 문중의 목회, 영혼의 안내의 독점, 수도원은 학문과 노동과 금욕과 명상의 장소에서 사교장으로 변했고, 성스러운 것의 독점 판매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런 시대에 루터는 성서를 계속 읽는다. ‘십계명을 지켜라는 있지만, 이 세계의 질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교황도 없었고, 수도원도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직자들이 독점한 성서를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혁명은 인쇄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신이 내려주신 최대의 은총이다.,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통해 퍼져나갔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문학 창시자이며 독일 코랄(찬송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칸트는 “법의 적용방법을 정한 법은 없다. 법의 기준은 양심, 상식이다.” 바야흐로 법치국가로 전환, 교회법 관할하의 사항(성스러운 법)에서 세속국가 법률관할 하(속된 법)로 바뀌었다.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했다. 루터는 텍스트를 바꿈으로써 변혁을 행하려고 한 사람이다. 혁명에서 새로운 텍스트를 통과시키기 위해 이차적인 수단으로 폭력이 휘둘러져 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다. 그래서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다. 이것은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집어 들고 읽어라. 인류에게 읽고 쓰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은 역사상 실로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혁명.

문맹자인 무함마드에게 지브랄(대천사)은 명령한다. 읽어라. 코란을, 어떻게 읽었을까? 하지만, 그는 해냈다. 최후의 예언자인 그는 자기 절대화 회피하였다. 그리고 시대에 드문 여성주의자로 “너희들의 아내, 누이, 딸들을 신으로부터 위탁 받은 자이므로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가르침이 현대 이슬람사회에서 잘 지켜지고 있는지는. 분명 이슬람시대는 사상 최대규모로 읽고 쓰는 고도의 문화를 꽃피운 시기였다. 신체로 살아있는 그가 죽건 죽음을 당하건 내려온 법은, 말은 불변한다. 폭력적인 원리주의는 무원리주의이며 의지하고 있는 텍스트에 전혀 근거를 두지 않는다. 원리주의자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모든 죽음이 일치하는, 절대적 향락의 순간, 이 결정적인 사랑의 종말의 순간에모든사람이하나가 되는 것이다.” 일신교들에서 세계의 종말은 천국의 도래기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결정적인 종말이고 시작이라는 사고도 실은 종말론이다.

 

우리에게는 보인다.

그것은 뭔가의 계속이고, 뭔가를 계속하는 일이다. 교황혁명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신성로마제국) 대립으로 개혁이 시작된다. 새로운 법을 주축으로 한유럽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교회가 성립한다. 교회는 근대국가의 원형이다. 그러나 내면의 신앙은 유럽적인 관념에 기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국가의 본질이란 재생산=번식을 보증하는 것,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 제도적, 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유엔에는 이런계보원리가 없어서 국가가 되지 못한다.

 

근대 관료제의 기원은 교황청이고 공의회는 최초의 입법의회로 근대 의회제도의 출발점이다. 12세기 혁명으로 법학은 유럽의 첫과학모든 과학의 원천이 된다. 중세의 해석자 혁명(단체, 법인이라는 관념의 발명)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으로 법학자의 텍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었다. 교회법과 로마법의 결합으로 근대법이 성립한다. 교황혁명=중세해석자혁명=정보기술혁명으로 이어진다. 정보혁명으로 실증주의의 탄생하고 세계는 데이터화 할 수 있는 세계로 바뀌었고, 텍스트는 정보, , 규범으로 정치는 정보와 폭력으로 통치의 정보화이다. 모든 것은 정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폭력이 된다. 주권(, 규범, 정치)=국가가 성립되고, 국가나 법의 본질은 폭력이다.

우리 세계는 세속화되어 근본적으로 비종교적이 되었다. 종교인가 세속화인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은 니힐리즘이고 뭔가를 믿는 것은 광신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정말진심으로믿고 있는가, 하는 물음 자체가 완전히 유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예술은 국가미학주의요, 안간의 통치로서의 예술, 인간의 제조란 하나의 예술, 잔혹한 훈련의 모든 것은 역시 예술 또한 의례란 근본적으로 훈련이다. 숭배와 컬트와 문화는 어원이 같다. 교육도 근본적으로 훈련 따라서 의례이다. 의례(예의범절)는 예술이고 예술은 수태의 예술이다.

 

문학과 예술이 끝났다는 자조 섞인 한탄에 380만년의 영원을 일깨운다.

세계는 늙었다.’ 정말 그럴까? 물론 지구의 역사가 약 50억년이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고 그 중에서 문화는 더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서구문명의 초석인 그리스문화는 이슬람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다. 문맹의 시대에서 15세기 이후 종이, 인쇄술, 안경 그리고 달력과 수첩 등의 발명으로 이제는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시작하면서 문학 등 꽃을 피우고 문학과 예술 그리고 혁명은 살아남다. 문학은 젊은 예술로 5천년이 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죽었다는 행위는 그 결말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사람은 죽을 수 없다. 그러나 변혁은 이루어질 것이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본질적으로 그 과정만이 중요하다.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거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말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380만년의 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인간에게 문자와 기록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연결시켜 주는 걸까? 원시인들의 벽화 그리고 현대인들의 텍스트, 우리의 배움이 기반이 아닐까? 점점 다양한 매체가 생겨나지만 근본적으로 문자에 기인하는 것이 인간의 문화인 것 같다. 문자가 없었다면, 예술이 없는 우리 인간의 사회를 상상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문자는 예술이 점점 사라지고 단순화되고 획일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수많은 방언과 문자는 사라졌기에 그들의 지혜나 삶과 역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런 문화도 생명체와 같은 존재기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안타깝다.

 

우리는 글을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또 읽고 다시 의미를 파악한다. 한번 읽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되풀이 할수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기에 배움은 계속될 것이고, 배움의 목적은 변혁이 아닐까 좀 더 나은 사회와 문화 우리의 앞날을 위한 그 혁명이 아닐까? 우리는 오늘도 이 작은 혁명을 위해 깊은 밤 책을 앞에 두고 있다. 더불어 문학은 끝나지 않았다.

 

* 이런 전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며 저자에 대한 부러움이 피어난다. 언어가 밑받침 되는 해석과 역사와 상황을 연결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괜찮은 책인 것 같다. 저자의 다른 책이 보고 싶어진다.

 



p*******t 2012.06.25. 신고 공감 8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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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라... 써라... 혁명이 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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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게 느껴지는 제목. '기도하는'이라는 단어에서 종교와 결부된 내용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도하는 두 손을 자르라는 표현이 종말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뱉은 일갈은 맞지만,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종교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다만, 역사적인 큰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참화의 역사에서 종교가 결부되거나 원인이 되었던 적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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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게 느껴지는 제목. '기도하는'이라는 단어에서 종교와 결부된 내용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도하는 두 손을 자르라는 표현이 종말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뱉은 일갈은 맞지만,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종교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다만, 역사적인 큰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참화의 역사에서 종교가 결부되거나 원인이 되었던 적이 많기에 대부분의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은 크게 5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책과 혁명이라는 것, 기도하는 손을 자르라는 것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에 시작된 독서는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니체'에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되는 저자의 내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철학을 잘 모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는 것이 많았더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책은 읽을 수 없다. 읽을 수 있다면 미쳐버리는 것'이라는 독특한 메세지로 시작되어 이어지는

저자의 철학들은 다 읽고 나서야 그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된다.


-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게 아니다. -


저자는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며, 자신의 무의식에 쉽게 문득 닿는 책들만을 대량으로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실 똑같은 것이 쓰여진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정보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는 괜찮지만, 읽는다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류라고 불리우는 책들을 읽는다는 것은, 난해하며 지루한 것이 정상이며, 독자는 본능적인 자기 방어가

일어나게 되는데, 역으로 생각하면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책은 일류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통용되는 아름답거나  오락을 위한 언어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학의 의미는 18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난

것이고, 문학이라는 의미는 범과 규범, 제도와 관련된 텍스트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과 같은 다양한 

행위, 성서를 쓰는 것, 법을 쓰는 것과 같은 일들까지 포함한 광의의 의미임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 혁명은 읽는 것에서 비롯된다. - 


루터의 종교혁명은 "읽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루터는 성서를 수 없이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과정에서,

그 시대 종교의 부패와 부조리함을 깨닫게 되었다. 성서를 근거로 존립하는 종교라는 것. 그 종교에서

행하는 행위들이 성서 어디를 뒤져봐도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어찌 했을까?

"쓰기" 시작했다. 95개조의 의견서를 내고, 그 의견서들은 인쇄술의 발달과 맞물려 종교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또한,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는데, 40년간 독일에서 출판된 책의 3분의 1을

써내는 등, 독일 문학과 철학의 창시자 역할을 한다. 또한, 법의 혁명을 이끌어 낸다. 


이슬람을 정초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혁명 역시도 읽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다. 문맹이었던 그는 대천사

지브릴과의 만남에서 "읽어라"라는 계시를 받아 신의 말을 전해 듣고, "써라"라는 계시를 받아 <코란>을

쓰게 된다. 이로 인해 이슬람의 서예문화가 발달되었고, 사상 최대의 읽고 쓰는 고도의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 그래서? - 


공통적으로 읽는 것에서 시작하여 쓰는 것을 통하여 혁명이 일어난다. 

<문학이야 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라는 결론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춤, 음악, 노래, 복식, 시, 영화 등

온갖 예술 역시도 그 대상에 포함되므로, 이들 역시도 혁명 발생의 근원이 된다. 문학과 예술과 혁명은

끝을 모르며, 끝날 수도 없다. 세상에 대한 종말, 종교, 철학, 문학은 죽었다라는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자들은 읽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작가가 옆에서 직접 말을 하는 듯한, 독특한 문체.. 옮긴이는 술술 읽힌다라고 표현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난해했던 책이다. 큰 흐름만 맛보기 했을 뿐, 전체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 무료함은 아니지만 기묘한 

난해함과 동시에 저자 의견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책임에...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류" 책인 듯 

하고, 되풀이해서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나 독서법 자체에 대한 관심도 

무척이나 많았던지라, 이 책은 내게 있어 독서 행위의 변곡점으로서 그려질 것 같다.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책 리뷰를 쓰는 것 자체가 누가 되는 행동인 것 같다.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정리하고 내 생각을 보탠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에.. 다시 한번 펴보려 한다.

읽고 쓰고 미쳐버릴 수 있도록..... 




d******4 2012.07.01. 신고 공감 5 댓글 13
리뷰 총점 종이책
인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학도……
"인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학도……" 내용보기
책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하는 말은 좀 무시무시하게 들립니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으로 한 것일까 했습니다. 책을 읽어라 하는 말이 있어서 기도하는 손을 풀고(기도할 때는 두 손을 모으죠) 책을 펴라 인가보다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한 것이고, 조금 다른 말이더군요. 세상이 끝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손이더군요. 제가 생각한 것도 아주 틀리지는 않겠죠.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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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하는 말은 좀 무시무시하게 들립니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으로 한 것일까 했습니다. 책을 읽어라 하는 말이 있어서 기도하는 손을 풀고(기도할 때는 두 손을 모으죠) 책을 펴라 인가보다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한 것이고, 조금 다른 말이더군요. 세상이 끝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손이더군요. 제가 생각한 것도 아주 틀리지는 않겠죠. 또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것을 가장 먼저 말했군요. ‘세상의 끝’ 말입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써서 혁명을 한 사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보다 먼저 이 말을 했군요. 책을 읽고 쓰는 것은 혁명이다(혁명은 문학에서 온다), 는. 읽는 게 그냥 읽는 것은 아니군요. 되풀이해서 읽고 쓰고 고쳐쓰기예요. 이 말 듣는 것만으로도 어려워보입니다. 아니 책속에서 이 글을 읽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렇게 쓰니까 어려워보이는군요. 저는 책을 잘 못 읽으니까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어려운 것은 잘 모른다는 겁니다. 저는 글은 쉽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구요, 이 책은 쉽게 잘 읽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을 잃게 만듭니다. 쉬워도 복잡하기도 하군요.

다른 사람이 쓴 책은 읽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답니다. 그것을 읽으려고 하면 미쳐버린다고 합니다(가끔 책을 너무 많이 봐서 미쳐버렸다고 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군요). 그 책을 쓴 사람 꿈을 볼 수 없다면서(책은 그 사람이 꾼 꿈과 같다는 말이죠). 정말 다른 사람 꿈을 보면 미칠까요. 꿈을 영상으로 바꿔서 보여주는 기계가 나온 이야기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니까 꿈이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볼 때는 자신이 걸러내죠. 그렇다고 그게 나쁜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책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아주 잘못 보면 문제지만. 자기한테만 좋게 해석하는 거죠. 그런 일이 없게 되풀이해서 보라는 걸까요. 더 잘 알기 위해 되풀이해서 읽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는 책은 아무거나는 아닌 듯합니다. 이 말이 맞다 틀리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책이라고 해서 다 좋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세상이 끝나는 일, 혁명이라는 말은 꺼내놓기만 했군요. 루터 혁명, 무함마드와 하디자 혁명, 중세 해석자 혁명 이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혁명의 공통점은 읽고 썼다는 겁니다. 혁명은 폭력으로 하는 게 아니고 글로 하는 것이다는 것도, 여기에 폭력이 뒤따를 수 있다고 하네요. 루터가 읽은 것은 성서예요. 그것도 여러나라 말로 된. 이때 성직자 가운데 성서를 읽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돈을 받기 위해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힘들어지는 것은 백성입니다. 루터는 성서에 나온 것을 그대로 해야 한다고 한 거죠. 지금도 종교인 안 좋은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데, 어쩌면 그 사람들도 성서는 거의 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읽지도 않고 자기 좋을대로 말하는 사람 많겠지요. 성서에 있는 말을 따른다면 종교인이 그 안에서 힘과 돈을 바라지 않을 텐데요. 중세 해석자 혁명은 로마법전을 읽고 새로 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때 사람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고 살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국가, 주권, 법, 정치, 자본제는 그때 거의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때와 지금 아주 똑같지 않겠지만 뿌리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 있는 거죠.

나치, 옴진리교 같은 말은 어떻게 이어야 할지.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위험합니다. 폭력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고, 누구나 죽으니 지금 모두 죽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좋은 시대가 오는 것을 억울해하게 생각하면 안 되죠. 역사에 남을 큰일이 일어나야 그때가 뜻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야 역사가 되는 거잖아요. 한 사람이 아주 작다 해도 그 한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군요.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을 아주 넓다고 말했습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모두를 문학이라고. 문학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은 창피하니 하지 마라 하더군요. 인류가 앞으로 살아갈 날은 380만 년쯤 남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379만 년을 빼도 1만 년입니다. 이것도 사사키 아타루가 한 말입니다. 저도 가끔 인류, 지구는 언젠가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무섭지는 않습니다. 그냥 살아갈 뿐이죠. 좀더 뜻있게 살고 싶다 생각하지만. 뜻은 이루는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이라는 말은 참 좋네요. 행하는 것 자체에 벌써 뜻이 있는 거예요.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씁시다. 이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제가 이 말을 알고 한 건지 잘 모르겠군요. 사실은 ‘그런가 보다’에 가깝습니다. 아직은 제가 느끼지 못하고 있군요. 책을 보고 쓴다 해도 얕은 것뿐이라서. 앞으로 그만두지 않고 하다보면 무엇인가 보일까요. 그렇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읽기만 하는 것도 괜찮지만 쓰기도 하는 게 낫겠지요. 읽기에는 쓰기가 따라붙기는 합니다.



희선




☆―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닿는 그 맑고 깨끗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고른 책을 되풀이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41쪽)


우리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입니다. 만약 우리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곧 우리는 엄청나게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52쪽)


n***8 2014.08.10. 신고 공감 4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치열한 읽기를 되새기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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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철학/사상을 다루는 현대 사상가들의 책은 늘 넘친다. 하지만 막상 읽기 저어되는 경우도 여러 번인 이유는 기존 철학/사상 저서가 먼저인지 해설서가 먼저인지도 중요하지만 원 텍스트를 얼마나 제대로 들여다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는가 하는 점에서 볼 때 일반 독자에게 주어진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해설서가 넘쳐나는 현대에 마르크스 저작이 아니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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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철학/사상을 다루는 현대 사상가들의 책은 늘 넘친다. 하지만 막상 읽기 저어되는 경우도 여러 번인 이유는 기존 철학/사상 저서가 먼저인지 해설서가 먼저인지도 중요하지만 원 텍스트를 얼마나 제대로 들여다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는가 하는 점에서 볼 때 일반 독자에게 주어진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해설서가 넘쳐나는 현대에 마르크스 저작이 아니라 해설서를 읽는 게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상징하는가.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을 선뜻 주문한 이유는 단 하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서술이 가진 서정성과 조근조근함이 참 좋기 때문이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두꺼운 『야전과 영원』이 오히려 사사키 아타루의 이전 저작이라는 것도 받은 책을 펼친 다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으로 돌아가 찬찬히 다시 읽었다. 아주 여러 번 『야전과 영원』이 언급되었다. 그의 주장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행위는 혁명이며, 책은 반복해 읽어야 한다. 또한 매순간 책은 다시 읽힌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야전과 영원』으로 돌아갔지만 푸코, 라캉, 르장드르 때문인지 생각 외로 잘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역시 처음부터 읽고 쓰는 일의 거룩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푸코와 라캉과 르장드르를 해석하는 이 책을 뒤로 미룬 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다시 읽는 일과는 관계 없는 일이다. 독서로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지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두번째 그 책을 놨다. '일단 읽고 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사키 아타루의 혁명 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위해.

 

저자는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중요한 혁명을 루터에게서 찾는다. 기독교리의 지류이자 출발점인 루터의 거부와 수용을 예로 들며, 읽고 쓰고 설교하고 기도하는 원천의 상징으로 성경을 든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대혁명'으로 언급하며 성경의 등장과 읽기의 혁명을 치밀하게 거듭 추적해나간다. 루터는 성경의 내용을 부정하거나 재해석하면서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고 한다. 온 우주에 단 하나로 취급되던 성경을 반박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자 목숨과 바꿀 죄. 루터가 누린 영광과 박해를 혁명의 부유물로서 높게 취급하고 있다. 법전을 다시 쓰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상기하고, 독서의 혁명을 강조하면서도 정보의 양에 집착하는 행위의 천박함을 지적한다. 양보다 질, 로 단정할 수만은 없지만 읽고 쓰는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진정한 지성의 회복이다. 그렇다, 사사키 아타루의 읽고 쓰는 일은 결국 지성의 회복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피로 싸우는 투쟁보다 먼저 법을 다시 쓰는 일이 혁명이며, 누군가 완벽히 설명(해석)을 했기 때문에 더이상 새로 고칠 것이 없다고 손 놓고 있는 건 혁명이 아니다. 역사는 늘 같은 동시에 다르다. 익숙한 동시에 새로 쓰여진다. 자르고 붙이고 새로 자르고 붙여서 세계와 우주의 중심축을 옮기는 일, 바로 읽고 쓰는 일이다. 루터와 마호메트가 그랬듯, 니체, 프로이트,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고전을 남김으로써 영원히 불멸하는 작가들처럼 우리 역시 이런 방식으로 뜨겁거나 차갑게 살아야 한다, 진지하고 어렵고 뜨겁게 읽어야 한다.  

s*****d 2016.02.28.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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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세헤라자드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세헤라자드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내용보기
태초에 텍스트가 있었다.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역사의 시작은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바로, '빛이 있으라'하는 명령문이다. 그리고 그 말에 따라 빛이 생긴다.  그렇게 성경의 창세기는 텍스트가 실체화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말이 세계를 만든다. 과거의 역사엔 말이 중요했다. 왕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 따로 있었고 왕의 이름은 백셩들이 쓸 수 없는 글자로만 지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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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에 텍스트가 있었다.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역사의 시작은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바로, '빛이 있으라'하는 명령문이다. 그리고 그 말에 따라 빛이 생긴다.

 그렇게 성경의 창세기는 텍스트가 실체화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말이 세계를 만든다. 과거의 역사엔 말이 중요했다. 왕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 따로 있었고 왕의 이름은 백셩들이 쓸 수 없는 글자로만 지어져야 했다. 글의 중요성은 얼마전 방영했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거기를 보면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사람답게 사느냐 못 사느냐를 결정한다. 그래서 그 능력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왕마저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까지 한다. 당시 왕이 세계의 중심임을 생각할 때 이 역시 텍스트가 세계를 바꾸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텍스트라는 것에 어떤 마력이 있기에 이러는 것일까?

 

 사사키 아타루의 파울 첼란의 시구를 차용한 제목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바로 여기에 대답을 하는 책이다. 그는 단적으로 말한다.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다. 읽고 쓰는 것, 그 자체다.'라고...

 

 읽는 게 혁명이다. 쓰는 게 혁명이다. 그는 내내 반복적으로 말한다.

 문학이 혁명이다. 그래서 문학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다. 이렇게도 말한다. 성급히 종말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그렇게 그는 현재적 세상을 긍정한다.

 

 혁명과 긍정이 그의 책에서는 하나로 수렴된다. 어쩐지 이율배반적이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혁명이란 세상의 부정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지 않은가? 혁명을 뜻하는 REVOLUTION은 반복을 뜻하는 접두어 RE와 나선 모양을 뜻하는 VOLUTION의 합성어이다. 원래 VOLUTION은 조개 껍질 무늬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그렇게 껍질을 깬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므로 혁명이란 반복적으로 껍질을 깨는 행위이다. 껍질을 깬다는 말 자체에 세상의 부정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루의 책에선 이 둘은 하나로 연결되는 말이다.

 

 어떻게?

 

 먼저 그가 바라보는 종말의 의미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는 것.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는 것.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병들어 있는 것이라고 첫날 밤에 얘기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 추구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의 죽음이 '모든 세계'의 죽음과 일치하는 것. '모든' 사람의 죽음이 '한' 종말의 죽음으로 실현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결정적인 종말의 순간에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P.156)

 

 이게 핵심이다. 그가 종말을 운운하는 것을 싫어하는 건 그 언급 자체가 전체주의적 욕망의 발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종말은 전체주의적이다. 경계를 지우고 타자를 지워 모든 게 무정형과 무채색의 하나로 뭉뜽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음이 혁명이 된다. 그 바로 다음의 글에서 그는 이것을 밝힌다.

 

 보세요. 자신과 세계가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한 사람의 죽음과 모든 세계의 죽음이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밖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한 것 처럼 "책을 읽을 수 없음을, 그래도 읽는다."는 문학과 혁명의 고난, 이 책의 타자성 에서 유래하는 위대한 싸움은 자신과 세계와 텍스트가 따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입니다. (P.157)

 

 그가 읽음을 혁명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읽음 자체가 나를 세계로 부터 떼어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세계 그리고 텍스트 라는 분리를 향한 삼위일체를 가져온다. 굳이 이런 '델타'가 나오는 것은 텍스트가 자기 자신 역시 분리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읽으면서 혹은 쓰면서 우리 자신에게사도 분리된다. 말하자면 읽음과 씀은 무한한 분리 혹은 격리의 과정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분열이며 변화무상한 파동의 창출이며 그래서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RHIZOME)'이다. 영원한 도주 혹은 머무를 수 없는 유랑. 그것이 바로 읽는 것과 쓴다는 것의 본질이다.

 

 그래서 혁명인 것이다. 지속적으로 나의 껍질을 깨어버리기 때문이다. 읽고 난 뒤엔 이미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미 달라져 버린 내가 바라보는 그 시각의 차이가 또 세계 역시도 예전의 세계가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여기에 대해선 쇼펜하우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본다. 즉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있기 전에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죽은 후에도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로 인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사실 종말을 섣불리 말하는 것에 대한 아타루의 비판의 근저엔 바로 이러한 쇼펜하우어 식의 세계 인식이 자라잡고 있다. 모른다고 해서 부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오히려 많이 모르기 때문에 그 남은 여백들을 긍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아타루가 가진 긍정의 모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아타루는 니체와 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표지의 '감히 니체라고 부를만한'이란 말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텍스트 자체가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그런 말이다. 성경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 자체도 사실은 이것을 말함이다. 어둠 가운데 빛이 생기면 홀연히 경계가 나타난다. 그렇게 분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창세기는 텍스트가 가져오는 궁극적인 힘을 시적 은유로 말한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분리. 나를 영원히 탈주시키고 유동적으로 만들며 배척않고 받아들이기에 무수한 곳에서 뻗어 들어오는 수많은 흐름들의 관통 가운데 나를 빚어가는 것. 바로 이러한 혁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과 긍정은 행복하게 조우하는 것이다. 나 자체가 아무런 뚜렷한 경계를 가지지 않으므로 내가 미처 다다르지 못한 세계의 여백을 부정적으로 바라 볼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굳이 그 여백을 내 임의대로 해석해서 내 식대로 영토화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그건 그저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기에...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부단한 혁명이 타자 자체의 긍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읽어라! 써라!

 혁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소하다고 보이는 그 행위 자체 하나하나가

 모두 혁명인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줄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읽고 쓰는 것에 심취하라.

 왜냐하면 이미 읽고 쓰는 가운데 자신이 변할 것이니 그 전에 생각했던 목적이나 쓸모는 더 이상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읽는 것. 쓰는 것. 그 자체가 주는 것에 흠뻑 빠질 것.

 사사키 아타루는 다섯 번의 밤에 걸쳐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세헤라자드가 된다.

 밤이라는 형식도 그의 문체도 스스로 세헤라자드라 생각하고 써 내려간 것이 틀림없음을 느끼게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천일 하고도 하루를 더한 밤 동안 내내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드. 그녀는 왕이 여자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로 첫날밤을 보내자마자 신부를 죽여버리는 일을 계속하자 자기 나라의 수많은 여성들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의 신부가 된다. 그리고 그 첫날 밤부터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헤라자드의 신비한 이야기는 왕을 매혹시키고 그녀가 꼭 재미있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멈추기 때문에 그녀를 죽이는 일을 계속 미룬다. 그러다 어느덧 굳이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결국 세헤라자드의 텍스트는 자신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여성 모두의 목숨마저 구해내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요. 텍스트의 힘이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왕에게서 보듯이 텍스트 자체가 혁명이요 또 그것이 타자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세계 역시 구원을 얻는다는 것도... 

 

 

  그래서 아타루는 세헤라자드의 외양을 취한다.

  그리고 당신도 이 책을 읽게 되면 그 왕처럼 분명 변하게 될 것이다.

 

 

 



l****1 2012.06.30. 신고 공감 3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인류의 3대 혁명은‘문학혁명’이다?
"인류의 3대 혁명은‘문학혁명’이다?" 내용보기
책은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이 빈번하다. 그리고 왜 쓰는가? 라는 의문도. 그래서 당연히 어떤 의지가 작동하고 목적이 분명하며, 가능한 답변이 있으리라는 명령에 굴복해 이러저러한 답변들을 쏟아내고, 그것들이 그럴듯한 의미로 포장되어 ‘책 읽는 법’, ‘책 쓰는 법’ 따위의 제목을 달고 마치 다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냥 뱉어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
"인류의 3대 혁명은‘문학혁명’이다?" 내용보기

책은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이 빈번하다. 그리고 왜 쓰는가? 라는 의문도. 그래서 당연히 어떤 의지가 작동하고 목적이 분명하며, 가능한 답변이 있으리라는 명령에 굴복해 이러저러한 답변들을 쏟아내고, 그것들이 그럴듯한 의미로 포장되어 ‘책 읽는 법’, ‘책 쓰는 법’ 따위의 제목을 달고 마치 다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냥 뱉어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에 딱히 대답할 무엇이 없었고 제아무리 구실을 찾으려 해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소음과 차단되어 평온해졌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다.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목적 자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고 있지 않다.”라고 자유로운 정신의 실천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즉 외부의 기준이 아무것도 없는 발가벗은 형태의 읽기를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오직 자신의 무의식을,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고독한 읽기를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자체인 즐거움을 누리면서. 이렇게 해서 그가 체득한 것은 무엇일까? “읽고 쓰는데 필요한 모든 문학적 학식 일반”이 바로 넓은 의미의‘문학’이요, 그 문학이 세상을 변혁시켜왔다는 주장이다. 분명 책이 세상의 형식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자가 지적하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는 12세기 르네상스나, ‘대혁명’이라 지칭하는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이 바로 문학, 책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책을 읽고 쓰는 것, 문득 펼쳐본 미미한 책 한 줄이, 누군가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문학과 혁명’에 관한 얘기이다. 여기서의 문학은 오늘의 소설이나 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의 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문학이란 텍스트 일반, 성서, 법률서, 협의의 문학, 철학을 포함하는 총체이다. 이것들이 인간의 사고와 습속, 문명적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의 예가 교황혁명 또는 중세해석자 혁명이요, 종교개혁이요 대혁명이다. 이 혁명이 지금 우리들이 체감하는 문명의 전환이자 초석이 되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폭력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이처럼 다른 형식, 문학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만들어낸 이들 혁명이 문학혁명이 우선이고 폭력은 보충적이거나 사후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인 동의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혁명을 완성하는 것, 즉 이전의 사회적 인식과 질서를 새로운 인식과 질서로 바꾸는 힘에 있어서 과연 폭력이 항상 후발적이고 보완적 역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구구절절한 사실(史實)의 나열에 불구하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비로소 실현시킨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의 폭력행사 없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저자는 이와는 달리 이 역시 선행한 법률과 철학, 소설 등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을 과연 누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저자의 자유정신은 모순에 들어간다. 세계에 대한 전문가, 지식인들의 이론을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비참한 팔루스(Phallus)적 향락”이라고 비판하던 저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향락이 없는 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잘 난체 하는 것, 내가 깨우친 것, 내가 발견 한 것을 쓰는 것이 비록 동의 받지 못하거나 허접 쓰레기에 불과한 들 그것들은 나쁜 지(知)요, 내 문학만이 좋은 지(知)라고 하는 것은 독선이 되고 만다.

 

다만, 문학과 혁명에 대한 저자의 관점만큼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한다. 루터의 소위 종교혁명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측면에서 민중의 졸렬한 언어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어를 근대 독일어로 정착시키고 확산시킨 성서의 해석, 다시 말해 성스러운 법을 속된 법으로 이관시키기 위한 무수한 번역작업과 세속화 작업이라는 대대적인 출판행위를 포착한 것이다. 루터 이전의 세상을 지배하던 성(聖)의 속(俗)으로의 변화는 이렇게 텍스트의 확산이 이루어낸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저자는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을 가진 자만의 의지로 되는 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역시 많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루터만큼 강력한 권력으로서의 폭력을 가진 자가 있었을까라고 묻는다면 텍스트의 선행과 폭력의 후행은 단언하기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고 만다. 지나치게 나아간 것 아닐까? 문학이, 책이 혁명의 저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의 다른 형식이 바로 문학이라 말하는 것은 미흡하다.

 

중세 해석자 혁명(12세기 르네상스) 역시 문학이라는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를 갱신하고 체계를 이루어 근대국가의 원형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복됨으로써 인간의 신체에 각인되고 주입되는 것의 기반이 문학이라고 만 말하는 것은 과도한 도약이 아닐까? 폭력은 인간에게 그보다 오래되고 근본적인 의례가 아닌가? 아무튼 텍스트가 인류의 문명을 뒤바꾼 대혁명의 결정적인 토대였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의 초석이 되고, 세상의 문제와 결별하고 변혁될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힘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래서 어설픈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는“철학이 끝났다!”, “문학이 끝났다!”라고 하는 단언의 목소리는 맹랑하고 터무니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마냥 낭만적인 것일 수는 없다. 누구나 죽음으로 끝내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즉 자신이 죽었다는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해서, 병든 세상에 종말론적 시각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만큼 오늘의 세상은 병들었다. 볼 수 없다고 해서, 알 수 없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질병적 세상바라보기에 대해 지극히 혐오감을 가진 낭만적 미래관을 가진 저자의 또 하나의 편협한 독단론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시간이 아니다. 이웃 나라의 젊은 철학자의 독선에 쓴 웃음을 짓게 된다.

리뷰 총점 종이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내용보기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 놀라움으로 가득한 책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그리고 그걸 읽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충분히 만족감을 갖게 되지만 이런 책을 알게 되고 읽게 되었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는 기쁨도 누리고 싶기에 부족함으로 가득한 글을 쓰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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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 놀라움으로 가득한 책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걸 읽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갖게 되지만 이런 책을 알게 되고 읽게 되었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는 기쁨도 누리고 싶기에 부족함으로 가득한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알게 되고 읽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미 충분히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이처럼 소중한 책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욕심을 비울 수 없으니.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되고 읽음의 과정을 그리고 읽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무언가를 써보려는 욕망을 이처럼 감탄하도록 옹호해주는 책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그저 고맙고 기쁠 뿐이다.

 

어쭙잖고 하찮은 글이라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며 그 떠올려진 생각들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에 항상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그럼에도 읽고 생각하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차마 지울 수 없었는데,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옹호를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당연히, 저자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저자가 언급하는 위대한 선인들을 따르기에는 부족함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조금이라도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조금은 과격한 느낌이 들게 되는 제목이고, 책과 혁명에 관한 기록이라는 부제 덕분에 뭔가 쎄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정작 내용을 읽어 본다면 무척 친근한 방식의 글로 수다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생각들을 알게 될 것 같다.

 

저자인 사사키 이타루는 최근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학자라고 하는데, 그의 저서를 읽게 된 것이 ‘잘라라...’가 처음이기 때문에 어떤 성향이라고 말하기가 쉽진 않지만 충분히 존중하고 그의 생각을 경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될 정도로 무언가에 대해서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관심을 갖게 된다.

 

저자가 ‘잘라라...’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의외로 무척 단순하다. 물론, 그 단순함 속에 감춰진 어려움과 어쩔 수 없음 그리고 곤혹스러움을 생각한다면 그리 단순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입장은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온갖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비평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어떤 영역에 한정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려는 전문가가 되기도 피하기를 바라며 어리석음을 선택하기를 저자의 말처럼 전체주의적 환상에서 벗어나 다시금 읽는 것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해서 읽어내고 그 읽음과 생각을 글로 써내고 실제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독과 광기를 찬미하며 읽는 것을 그리고 생각하고 쓰는 것을, 읽게 되어버림으로써 그걸 읽어버렸음을 외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는 실천의 놀라움을 우리에게 말해주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본다면 무척 간단하고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것을 무척 진지하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저자의 논의를 계속해서 따르게 된다면 읽음과 실천의 과정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변화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서 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저자는 자신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사례로 마르틴 루터, 무함마드, 중세 해석자 혁명을 말하고 있는데, 혁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폭력을 동반한 피로 얼룩진 과정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은 조그마한 변화들이 쌓여지며 엄청난-근본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라며 급격하고 격렬한 변화를 동반한 혁명에 대한 우리들의 환상을 그리고 낭만을 조금은 바로잡아주며 읽음을 통해서 그리고 써내려가는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혁명이 일어났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마르틴 루터가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는 과정을

그리고 그것을 베껴 쓰고 번역하면서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읽고 쓰는 과정을

저자의 표현처럼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수준의 읽음을 통해서 어떤 혁명-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아가면서 글이 갖고 있는 힘, 읽고 쓰고 그대로 행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함을 통해서 어떤 거대한 혁명-전환이 일어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여러 근대적인 발상-생각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파헤치며 혁명의 본질을 그리고 근대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글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다시 써내는 과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저자는 단순히 읽는 것이 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 읽음이 단순히 글만이 아닌 수많은 의미에서의 읽음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를 깎아내릴 생각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무함마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고, 그 논의의 과정 속에서 지금 시대의 유행병처럼 퍼져 있는 종말론에 대해서 수없이 끝과 최후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하며 그 열망이 병든 생각임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을 좀 더 길게 바라보고 그런 관점 속에서 이해를 해야만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그런 관점 속에서 생각하기가 생각처럼 쉽지도 않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지금 시대의 시대정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럽게 떠올려지게 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읽기와 관련해서 가장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중세 해석자 혁명을 통해서 어떻게 사회가 재구성되는지를, 읽고-고쳐 읽고-고쳐 쓰고-실천하고 그리고 그걸 다시금 반복하는 그 지난한 과정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뒤바꿨는지 알려주며 중세 해석자 혁명이 갖고 있는 본질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식으로 모든 것이 변화되었고 그 변화를 명확하게 파악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어떤 식으로 모색해야 할지를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만들어낸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 인간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가능할 터입니다.

반드시, 반드시요.

 

 

저자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무척 새로운 방식으로 읽음을 생각함을 씀을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행함을 얘기해주고 있고, 안이한 방식으로 비극과 끝을 말하는 이들을 비난하며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유치한 감수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읽음을 글을 피하지 않고 글과 마주하며 고독한 싸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를, 우리들에게 자신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

 

이렇게 충격을 받을 정도로 글을 읽고 생각하고 쓰고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알게 만들어줘서 고맙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참고 : 저자는 피에르 르장드르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국내에는 번역된 책이 없어서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웠다. 물론, 어차피 페르낭 브로델의 책도 전혀 읽은 것이 없으니... 할 말이 없다.

y*******o 2014.10.2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당신은 왜 책을 읽고 글을 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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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기 싫었습니다. 글도 쓰기 싫었습니다. 신기한 건 단지 일상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하기 싫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제겐 다른 일을 하고 말고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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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기 싫었습니다. 글도 쓰기 싫었습니다.

신기한 건 단지 일상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하기 싫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제겐 다른 일을 하고 말고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꼭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매번 희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사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처럼 습관이 되어버린 일이 어쩌면 하루를 좌우하고 나아가 계절을, 한 해를, 인생을 지배하는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이미 책 읽고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왜 책을 읽고 글을 쓰세요, 물어 본다면 근사하게 답해줄 대답도 없습니다. 목적이 사라진 것이죠. 아무런 목적 없이 좋아서 하는 단계도 지나고 그냥 해오던 것이니까 관성에 의해 책을 펼칩니다. 그래도 자꾸 모자란 것만 같아 다른 책을 펼치게 되고 그것도 부족한 것만 같아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글은 같이 모자라거나 더 넘치기만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만 확인하게 될 뿐이죠, 아마 이 비슷한 답이 가장 적절해 보이네요. 세상엔 책을 펼칠수록 아직 펼치지 않은 책들이 넘쳐나고 글을 써 나갈수록 잊혀지는 문자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책과 글의 바다, 거기서 허우적 대는 나날들. 이 시간들이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에 이일이 허무해지기 시작한 건 책에서 구한 지혜는 그다지 현실 속에서의 실천과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과 한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요. 읽었다고 떠드는 것도 마찬가지. 쓴다는 것과 산다는 것 역시 다른 문제입니다. 알지만 하지 않고 썼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것.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 느꼈지만 말하지 않고 말했지만 다시 잊어버리는 것. 물론 책은 책이고 글은 글이며 생각은 생각, 생활은 생활이니 매번 일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니까요. 결국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심인 것이지 내가 그리 살겠다는 의지와는 괴리감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대표적인 위선을 실천하는 행위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위선을 견디기 위해 또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위선이 사라지지는 않더군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기에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밖에 더 굴었을까요. 책을 읽었다고 그것을 이해했다고 내가 무엇을 안다고 믿는 것. 심지어는 이해했다고 버젓이 쓰고 말하고 다른 이에게 아느냐 묻기까지 하는 것... 다른 이의 생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무엇을 안다고 아느냐고 알아야 한다고 묻지도 답하지도 않더군요.

 

그래서 빛 좋은 위선만 배양하는 생활을 이만 멈추어야 겠다 생각했는데, 이 저자는 그래도 계속 읽어야 한다 말하네요. 달리 방법은 없다고 충고하네요. 책 읽기가 혁명이라 말하네요. 아...혁명하려고 책 읽어온 것은 아닌데 말이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이 여름밤의 궤변도 아름답구나, 아니 참 서정적이며 인간적인 논리구나, 아니야, 내가 몰랐던 진실이구나...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이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 질 정도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은 말처럼 결코 쉽거나 당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책을 읽은 최후에 이르게 되는 ‘고독의 싸움’이란 아마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렵고도 쓸쓸한 결정의 순간은 아닐까요. 미쳐버리고 싶다는 것은 사실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 일 수 있겠어요. 자신의 무의식을 목격하는 일은 미쳐야 가능한 일이라는 뜻도 되겠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책에 미치면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 버린 것인데 내 속에 책이 들어온 것인지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하여튼 어느 지점에서 내 무의식과 만나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어요. 결정해야 합니다. 들어와 버린 책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을 뚫고서 원래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허나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다른 책을 읽습니다. 보류하는 것이죠. 그러니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이 과정은 다음 책에서도 똑같고 그렇기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겁한 자가 왜 혁명을 이루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나요? 이런 - 저같은 - 사람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방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덜 미친 방황의 시간. 고독한 싸움의 맛보기 과정. 열정과 공포의 적당한 반복. 이런 힘겨운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을 사실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괴로움도 중독된다고 그래요, 이 전 책의 스님은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진부합니다.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건 책을 읽는 내가, 책을 읽었다면 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미쳐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제대로 읽었다면 미칠 수밖에 없다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책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으로 책 처럼 산다는 건 책 읽기 전의 삶을 버리는 일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자는 40년간 독일어로 나온 책의 3분의 1을 썼던 루터를 예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고 설교하는 ‘문학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땐 그것이 가능했죠. 그래서 혁명의 본체는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문학이 혁명의 근원이며 본질이며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저자가 부르짖는 핵심입니다.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웃기지 않나요? 저자가 문학을 과대평가 한 것인지 제가 문학을 과소평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거죠. 이해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읽고 쓰는 것을 목숨 걸고 해야 한다 설파하기엔 우린 다들 순수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기엔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로 먹고 살만큼의 당면한 문제이거든요. 먹고 사는 방법은 문학 말고도 너무나 많은 오늘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읽고 써야 한다면 그건 비참하고 슬픈 일이거든요. 예, 그래서 저는 보다 넓고 큰 바다처럼 존재하는 문학이 혁명의 본질이라는 것에 감동적이라든지 신선하다라든지 놀랍다든지 하지는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혁명에 대한 오래된 불감이, 그리하여 문학에 대한 강렬한 불신이 더 팽배한 상태니까요. 읽고 쓰고 노래하는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지금 내 삶과 너무 멀어서요... 단지 문학과 책, 글의 의미를 더 절실하게 설득해준 저자의 논리가 고맙긴 합니다. 어찌되었건 저자는 계속 읽고 써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으니까요. 저자는 저 같이 문학에 비관적인 사람에게 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문학을 하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이른 바 사임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겁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p226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저자는 계속하려 설득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요. 인류가 생겨난 건 20만 년 전이고 그중에 문학은 50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아주 젊은 예술에 불과하다고요. 어느 시대건 자기 사는 시대가 암담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던가 봅니다. 니체는 살아 생전엔 니체만큼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술가는 문학 말고도 발에 치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오늘 밤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세상은 변혁이 가능해질지 모를 일이죠. 그러니 니체가, 그를 읽은 우리가 하는 일은 절대로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이죠.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기만 한데 왜 굳이 종말을 걱정하고 절망을 택하는 것인지 저자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웃고 있어요.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책은 저자만의 독특한 에너지가 있어요. 문체도 그렇고 근거 있는 자신감도 매력적입니다. 논리나 내용은 모두 동감하지 못했지만 그냥 심정적으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잖아요. 말하는 구석은 기분 나빠도 그냥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요. 꼭 이 책이 그렇습니다. 저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은 재미가 없어요. 기분도 나빠집니다. 맞기만 하면 다인 줄 알잖아요. 이 책을 옮긴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장하고 떠들어대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싫어서 ‘논리적이고 개방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역겨워서 스스로를 편파적이라 말해요. 자신은 편식과 편견에 빠진 사람이라 부르죠. 좋고 싫은 것이 먼저고 다음이 논리라 말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왠지 끌리는 책이 있다고 고백하죠. 문체나 행간의 분위기, 비유한 표현, 분노의 에너지 등 이런 점들이 책 전체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말합니다.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공감하진 않았지만 읽다보면 사람에 빠지듯이 점점 홀리는 느낌이 들어서요. 후반부 루터의 혁명부터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근대의 근원을 밝히면서 읽고 쓴다는 것의 혁명성을 체계화하는 통찰은 사상가로서의 자기 주장의 확고함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충분합니다.

 

희망을 전달하는 방법이 새로운 책이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으로 시달린지 오랩니다. 그랬기에 책으로 희망을 발견하고 글로 치유해 나가는 것도 익숙합니다. 허나 어줍짢게 이 책을 통해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에 대한 공감을 널리 유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제넘은 추천이나 권유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기 전보다는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그렇게는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 비록 일 퍼센트라도 그건 큰 확률이라고요. 저자는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는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이라죠. 모두 사라지고 그만큼만 남은 텍스트들의 위대함을 상상해 봅시다. 그러니 만약 적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책이 있다면 그건 승리이며 환희이며 혁명입니다. 살아 남아 또 다른 새로운 혁명을 유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혁명을 이어지게 하는 인류의 끈질긴 과업인 게죠. 이런 깨달음은 평범해 보여도 난해한 실천이 과제로 남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읍시다. 일단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읍시다. 그리고, 글을 씁시다. 멈추는 건 대안이 아닌 듯 합니다.

 

글쎄, 달리 방법은 없지 않겠어요?

 

 

j***o 2012.06.24. 신고 공감 2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