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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이혼하고 다섯 살 된 딸을 키우는 프레드리크. 그는 어린 시절 군인인 아버지가 형을 때리는 것을 목격하며 자랐다. 자신도 많이 맞았지만 형이 있어 조금은 덜 맞았던 프레드리크. 하지만 어느 날 그 형은 자살을 하고 이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불행해서 그런지 그는 외동딸 마리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언제나 즐거운 프레드리크. 그러던 어느 날 연쇄 성폭행범 룬드(성폭행범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라는 소아성애자이다)가 탈주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프레드리크는 불안해진다. 마리를 유치원에 바래다주면서 인사를 했던 학부모가 룬드였던 것이다. 프레드리크는 유치원으로 향하지만 아이는 이미 룬드를 따라 간 상태.. 안절부절 못하던 프레드리크에게 들린 소식은 아이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하지만 경찰은 룬드를 잡아들이지 못하고 프레드리크는 자신이 직접 그를 찾아 나선다. 그들의 운명은 과연....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 작가가 쓴 책이 떠올랐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인데 그 이야기도 혼자서 딸을 키우는 가장이 잔인하게 성폭행 당하고 살해된 딸을 위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딸을 위한 복수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다. 딸을 죽인 아이가 청소년이어서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소년원에 들어갈지는 몰라도 나중에 시간이 흘러 다시 사회로 들어오는 것을 아버지는 참을 수 없다. 자신의 아이는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데 아이를 죽인 그 아이들은 이 도시를 걷고, 공기를 마시고, 웃고, 행복해 한다. 아버지의 입장에선 피눈물이 나는데 그들은 잠깐의 시간 동안 반성하는 척 하고는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조용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잃은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이 책에서도 아버지가 딸을 위해 혹은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폭행범을 죽인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놈이 마리에게 했던 짓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죽여야 한다는 생각” (307) 가끔 살인범의 인권을 위해 화면을 가린 범인의 얼굴이 나온다. 하지만 생각해 본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인권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왜 살인범의 인권을 생각해 줘야 하는 것인지... 남은 유가족을 생각한다면 살인범의 인권을 운운할 수는 없을 텐데... 물론.. 살인은 어떤 방법이든 사용해선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사회는 그런 흉악한 범인들에게 제대로 된 벌을 주고 있는 것일까?
마리의 아버지가 룬드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어린 여자아이들이 잔인하게 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룬드는 벌써 자신이 죽일 아이들을 골라 놨었으니까.. 하지만 검사는 프레드리크를 최소 10년 형에서 무기형으로 구형하려고 한다. 죄는 법에서 심판하는 것이지 개인이 심판할 수 없는 것이니까... 참 어렵다. 분명 죄는 법이 심판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법은 죄를 제대로 심판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살해할 권리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사형제도의 부활이 실행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도 경악할 만한 살인 사건이 일어날 때 마다 한바탕 난리를 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또 그렇게 조용하고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내가 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잔인한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이겠지? 다른 건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작고 여린 아이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모든 사람에겐 합당한 죄 값이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복수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픈 책을 읽었다. 아이를 상대로 하는 범죄만큼 아픈 건 없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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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라고 하면 요즘 「Fiction(=허구,소설)」 이라는 곡으로 한 참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이 먼저 떠오른다. 요즘 여자 아이돌 그룹의 대세가 쭉쭉 뻣은 긴 다리를 가진 갸냘픈 몸매에 청순한 외모라면, 남자 아이돌 그룹의 대세는 도회적이고 곱게 자란 듯한 귀여운 외모와는 다소 미스매치인 초콜릿 복근은 가진 근육질 몸매가 아마 대세이지 싶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부르는 시쳇말도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짐승 돌'. 그룹 이름이 「비스트」 로 지어진 것도 이런 연상을 이용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화려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들에게 「비스트(Beast,짐승)」 라니..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리 정감가는 이름은 어쩐지 아닌 것 같다. 물론 철저히 개인적인 중년 아저씨의 생각이긴 하지만.
이 작품 「비스트」 에는 젊은 여자 아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한 '짐승 돌'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진짜 '짐승같은' 아니 어쩌면 '짐승만도 못한' 범죄자가 등장하고, 이 제목 역시 그런 거지같은, 역시 시쳇말로 'X물에 튀겨죽여도 시원찮을' 인간을 빗대어 붙여진 제목이다. 초등학교에도 취학 전인 어린 여자아이들을 밝힘증 '창녀'라 생각하며 사정없이 겁탈한 뒤 잔인하게 살해하는 '벤트 룬드'라는 범죄자의 호송 중 탈옥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의 탈옥으로 인해 다섯살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마리를 이혼 후 홀로 키워가는 프리렌서 작가 프레드리크에게 찾아온 비극은 그의 살아온 생애 전부의 기반을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으로 작용하고, 치밀한 수사망에도 불구하고 행적이 묘연한 미치광이 살인마 '룬드'의 존재는 그로 하여금 스스로 단죄를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작품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읽는 도중 독자가 생각한 예상을 가볍게 빗겨가는데, 그건 이쯤되면 작품의 스토리가 살인마이자 자신의 딸을 끔찍하게 강간 후 살해한 룬드의 도피와 그를 쫓는 프레드리크의 숨막히는 추격전으로 치닫을 것을 예상하게 마련이지만, 의외로 단순무식하고 빤히 읽히는 룬드의 동선으로 인해 복수는 결심 후 매우 간단하게 성사된다. 전체 스토리의 분량이 삼분의 일 이상 남은 상태에서 '어 이게 뭐야..?' 싶게 독자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킬 수 있는 소재를 작품은 간단하고 성의없게 털어버린다. 맥이 탁- 풀릴 정도로. 이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의외로 해당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사정이 작품 초반부에 나열되는데, 만일 작품이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독자의 의도대로 룬드와 프레드리크의 도주와 추적에 포커스가 맞추어졌다면, 그저 '사족'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 동떨어진 '그들만의 사정'은 스토리가 독자의 기대를 빗겨 엉뚱한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퍼즐조각처럼 하나하나 짜맞추어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짐승보다 못한 범죄자와 피해자의 아버지 간 숨막히는 추격전이라는 통상적이고 전형적인 틀을 넘어 소재의 진부함에도 신선함을 부여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치밀한 구성과 스토리 얼개가 그저 통속 미스터리 소설이라기엔 매우 뛰어난 작품. 이 작품은 결국 복수를 위해, 그리고 또 다른 유사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저지른 피해자 아버지의 처철한 응징을 놓고 벌이는 법과 도덕, 사회정의에 관한 딜레마를 다룬다. 그가 행한 단죄는 개인적인 복수였을까, 사회정의의 실천이었을까.. 법과 사회질서를 무시한 영웅주의의 발로인가, 무고한 희생자의 재발을 막은 정당방위였는가..개인, 또는 사회가 다른 한 개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경우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이 작품은 자신의 판단과 주장을 명확하게 하는 것을 피하고, 독자들 스스로가 그 문제에 대해 판단해볼 수 있는 여지는 남겨준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 스스로가 몰리면 당연히 많은 경우에 비슷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피력하면서도, 제3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 될 수 없는 이유 역시 보여주기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그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혼란스러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자신의 인상을 깊게 각인시키는 방법인 듯 싶다. 최근 북유럽 작가들의 작품들이 뜨고있는 듯하다. 이 작품 역시 스웨덴의 유망주 안데슈 루슬룬드가 버리에 헬스트럼이라는 과거 성폭력 피해자 겸 전과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KRIS'라는 사회운동 비영리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회운동가와 공동집필한 작품. 안데슈 루슬룬드의 경우 「밀레니엄 시리즈」 의 작가 스티그 라르손에 이어 사상 두번째로 2회 연속 글레스키 상 수상이 유력시되고 있으며, 스웨덴의 원로 여가수 시브 말름크비스트(Siw Malmkvist)의 옛노래를 즐겨듯은 노형사 에베트 그렌스를 등장시키는 「그렌스 형사 시리즈」 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구가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중 첫 작품. 우리나라에서도 성범죄자의 잔인한 범죄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살인이나 이에 준하는 강력범죄의 경우만 뉴스를 타고 널리 알려진다는 매스컴의 생리 상 이런 결과를 동반하지 않고 소소하게(?) 일어나는 성범죄의 실제 발생빈도는 실로 엄청나겠지 싶다. 얼마전 일류대 의대생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을 떠올려보면, 이런 범죄가 일부 특정 정신이상자들에 의해서만 상습적으로 저질러지는 '정신병리적 현상' 만도 아닌 듯 싶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해 타인의 인격이나 감정, 사생활에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이기주의적 사회풍토가 이런 범죄와 진정 무관하고, 그래서 평범한 이들은 누구나가 이것은 엄연히 '남의 일'일 뿐이라 생각해버려도 되는 일인걸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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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2일 영국 범죄소설 작가 협회, 즉 CWA에서 그 해의 비 영어권 최고 장편소설에 주는 THE INTERNATIONAL DAGGER가 발표되었다. 수상작은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그들의 세번째 작품 'THREE SECONDS'였다. 이미 수상 경력이 화려했던데다 뉴욕타임즈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제목이 '라르손이 지핀 불 더욱 타오르게 하다'였다)를 따로이 할 만큼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은데 이 수상으로 이제 그 평판은 결정적이 되었다. 놀랍게도 만켈과 라르손과 똑같이 스웨덴 작가다. 게다가 라르손이 밀레니엄 1부 '용문신을 한 소녀' 로 수상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자신들의 데뷔작으로 이미 그 '글래스키 상(북유럽 최고 장르문학상)'을 수상한 바도 있었다. 마치 스웨덴의 은둔 고수를 하나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흥미로웠다. 그런데 때마침 글래스키 상을 수상했던 바로 그 데뷔작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2005년에 나온 '비스트' 이다.
'비스트'는 표지에서 어느정도 추정되듯이 아동 성폭력을 주 테마로 하고 있다. 도입부 부터 아홉살 동갑내기 두 소녀를 유혹하여 무참하게 폭행 살인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범인은 이미 검거되어 재판까지 끝난 채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그러던 중 치료를 위해 밤에 호송 도중 그가 탈출한다. 뒤늦게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수색을 펼치지만 이미 그는 또 하나의 아이를 옛날과 똑같이 폭행하고 살해한 뒤이다. 아이의 이름은 '마리' 아이는 최근 이혼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빠 프레드리크는 오로지 딸 아이 하나만을 삶의 유일한 의미로 알고 살아가던 남자였다. 하지만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 앞에서 그에겐 이제 다른 하나가 오로지 그를 살아가게 해 줄 삶의 의지가 된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는 스스로 '마리'의 죄값을 묻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전직 저널리스트(만켈도 라르손도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루슬룬드는 스웨덴 국영방송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었다.) 출신과 전직 범죄자 출신의 의기 투합이라는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된 이 공동 작가의 데뷔작을 단순히 오로지 독자의 감각을 사로잡을 목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로만 버무린 비정한 복수극 정도로만 생각하면 정말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동 성폭력 살인이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것도 단순히 독자의 관심을 잡아두겠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아무튼 그 오해를 풀기 전에 일단 이 책의 독특한 서술 스타일에 대해 먼저 말해보려 한다. 이 소설의 스타일은 해닝 만켈과도 다르고 스티그 라르손과도 다르다. 아마도 같은 스웨덴 작가로서 '비스트'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한다면 '웃는 경관'으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마이 슈발과 펠 바르가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스웨덴 범죄소설의 신대륙을 열였던 그 전통에게로 회귀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이 '비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소설의 거대한 서사에 함몰되지 않은 채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세상이 그렇듯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고립된 인생 살이를 해 나가지만 결국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되듯이 '비스트'도 이와 똑같이 등장인물 각자의 생각과 행동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것이다. 즉 이것은 여러 가지 목소리가 각자의 색깔로서 한데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자이크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비스트'의 스타일은 모자이크적이다. 따라서 여기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주인공도 없고 조연도 없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흐름에 따라 주연도 되고 조연도 되는 것이다. '비스트'를 읽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마치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그 천사와 같은 것이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영해 다니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사람의 머리에 대면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우리 역시도 '비스트'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마치 손가락을 등장인물의 머리에 댄 것 처럼 그 생각들을 읽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스타일을 취하면서 굳이 그렇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를 사용해야 했던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범죄 소설이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 앞서 말했던 그 오해를 본격적으로 풀 시간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왜 이런 모자이크적 스타일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바로 그 이유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의 선택은 관계가 있다. 이 둘 모두가 사용된 이유는 '비스트'가 독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타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때문에 작가들은 가장 많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아동 성폭력 살인 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즉 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특히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자녀를 희생당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묻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의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부모라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소설 속 프레드리크 처럼 사적인 처벌도 얼마든지 수긍한다고. 사실 어느 부모가 희생당한 아이의 복수를 위해 범죄를 처단하는 아비를 욕할 것인가? 소설 속 한 형사마저(그 역시 똑같이 아버지이다.) 이렇게 울부짖는데 말이다.
이 일을 하면서 항상 저 자신이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아마 개중에는 잘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이지 아닙니다! (...)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선생을 감시하고, 선생이 10년 동안 수감될 곳으로 호송해가야 하는 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지는지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경찰치고 거의 욕을 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씨발,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경찰은 프레드리크가 그 범죄자를 처단한 것을 정의롭다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범죄자가 되어 처벌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 그야말로 부정의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는 법을 수호하는 경찰이지만 오히려 법이 전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는 것이다. 심판은 언제나 정의와 관계된 문제다. 우리는 타자를 심판할 때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비스트'에 그렇게 공분을 일으킬 자극적 소재를 사용한 것은 그 '심판의 즉각성'을 문제삼기 위함이다. 보통 그런 케이스의 경우 우리는 종종 너무도 쉽게 타자를 심판하지 않는가. 아마도 이러한 경향 때문에 비스트의 작가들은 일부러 가장 분노를 자아내고 바로 심판의 칼날이 날아드는 이런 소재를 택하여 그렇게 즉각적이고 단정적인 심판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케 만드는 것이리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일까? 행여 우리가 제대로 심판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수 많은 질문들이 '비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목소리들에서 흘러나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귓가로 스며든다. 읽으면서 우리들은 정말로 타자를 심판하는 것에 관하여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톨스토이가 한 단편의 제목으로 썼던 그 말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그러나 때를 기다리신다."
심판의 쉽지 않음은 우리의 정보가 딱히 부족해서도 인식 능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거기엔 또 하나의 제약 사유가 있음을 작가들은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 자체가 가하는 제약이다. 과연 언제나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했던 스웨덴 작가 출신답게 그들은 하나의 심판이 그대로 행해졌을 경우 일으키게 될 예측 못할 사회 전체로 일어나는 파급효과가 어떻게 심판을 어렵게 만드는지 또한 잘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왜 스타일을 굳이 '모자이크적'으로 했는지 그 이유가 돌연 드러난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을 독자에게 들려 줌으로써 독자에게 보다 가능한 모든 견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이 그렇게 쉽지 않음이 바로 사람과 사람이 담쟁이 덩굴 처럼 얽혀 하나의 긴밀하게 짜여진 네트워크 같은 사회라서 어떤 하나의 결정이 마치 '나비효과' 처럼 사회 전체에 무시하지 못할 파급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쉽고도 간결한 문체에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 삶의 한 토막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보여주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이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는지라 조금은 가볍게 접근하려 했다가 큰 코 다쳤다. 데뷔작이지만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주제를 녹여내는 내공은 만만치 않았고 또한 은근히 깔려있는 주제가 진지하기 그지 없어 왠지 스릴러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회학 보고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주 소재인 아동 성폭력 말고도 동성애 같은 다른 사회 차별적 요소들도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보다 핵심적으로 비스트는 그 '심판'의 근저에 깔린 '차별'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이 너희는 우리보다 저열하다로 곧장 연결되는 그런 '차별' 말이다. 바로 그 차별이 파시즘의 토대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비스트'의 작가 루슬룬드와 헬스트럼이 파시즘과 작품을 통해 맞서 싸웠던 해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경향을 그들 역시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쉽게 읽히지만 만만치 않은 깊이와 여운을 맛보게 해 준 작품. 그들의 후속작이 정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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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아무런 이유 없이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어떤 방어의 여력도 갖고 있지 않은 여아 아동을 유괴하여, 잔인하게 성폭행 한 후 사지로 내몰아버린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는 마땅히 법에 의해 그에 맞는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일반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범죄자가 죄의 대가를 치루고 난 뒤에도 동일한 범행을 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 가능성이 현저해 보인다면 과연 이를 어떻게 판단하고 이해해야 할까. 이 작품은 파렴치한 유아아동 성폭행을 일삼는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범죄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고, 법에 근거한 범죄사실에 대한 단죄를 행함에 있어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사회적 가치관에 근원적인 질문까지를 던지는, 이전의 추리소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 전까지 작품의 결말을 쉽게 예측하거나 단정할 수 없기도 하지만, 전개되는 내용이 치밀한 구성아래 사실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어, 독자들의 입장에서 책 속으로의 몰입이 쉽고 중간에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 작품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부가적으로 연결된, 또 다른 사건과 등장인물들이 예고되어 있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한번 관심을 갖고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주인공 프레드리크는 어린 시절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의 형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수없는 폭행을 당해왔고, 그의 형은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선택했으며, 그는 그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심한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40대 중년 이혼남이다. 또한 그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지극히 사랑하는 마리라는 5살 여아를 키우고 있기도 하다. 한편 어린 여아들을 상대로 잔인한 성폭행을 일삼으며 살인을 즐기는 희대의 살인마 룬드는 한동안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뒤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교도소에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한다. 룬드는 탈출하자마자 이전부터 미리 물색해둔 성폭행 대상을 찾아 나서는데, 그 대상은 다름 아닌 프레드리크의 딸 마리였으며, 그녀의 싸늘한 시체는 다음날 어느 노부부에 의해 한적한 산책길에서 발견된다.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채 유유히 사라진 룬드는 다음 범행대상을 찾아 나서고 경찰은 그의 행방을 찾아 추적에 나서지만 실패하고 만다. 며칠 뒤 딸의 장례식을 마친 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프레드리크는 우연하게 경찰로부터 범인에 의해 조만간 또 다른 피해자가 등장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룬드를 잡기위해 스스로 직접 찾아 나서게 되는데, 문제는 그가 단순하게 범인을 잡는 것과는 별개로 교묘하게 숨겨진 또 다른 진실이 그를 향해 엄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우선 하나의 사건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어 결말을 짓지 않고, 이와 관련한 또 다른 내용을 연결시킴으로서 그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도록 치밀한 이중 장치를 설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을 만큼 궁금증과 의혹 그리고 알듯 말듯 묘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아내게 한다. 또 하나는 사건의 전개를 통해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결부시킴으로서 범죄에 대한 단죄의 방법을 놓고 이를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다는 것도 이 소설만이 갖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어두운 우리 사회의 일면을 부각시켜 작품을 통해 만약에 당신의 입장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은연 중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기존의 추리소설들이 대개 선과 악을 구분한 형사와 범인 간의 치열한 대결다툼을 통한 한정적인 부분에 머물렀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구도에서 벗어나 내용과 구성면에서 상당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스릴과 흥미의 요소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어서 독자의 입장에서 상당히 반갑게 느껴지는 소설로 여겨진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으레 그렇듯 간담을 서늘케 하는 서스펜스와 공포와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추리소설들을 많이 출간되는듯하다. 이 작품은 두 명의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사람은 과거 범죄자였다가 작가로 변신했고, 또 한사람은 국영방송 기자다. 두 작가의 콤비로 만들어져서인지 몰라도, 이 작품의 구성과 완성도면을 본다면 뛰어난 평가를 받기에 충분해보이지 않나 싶다. 따라서 어떤 소설을 읽을까 고민되는 독자들이 있다면 한번 선택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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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안데슈 루슬룬드, 버리에 헬스트럼
꽃을 든 소녀의 붉은 치맛자락 위로 적힌 ‘비스트’라는 하얀 색의 제목. 표지를 보는 순간 어떤 사건이 펼쳐질 것인지 감이 온다. 오동통한 소녀의 손을 보아하니,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얀 꽃. 붉은 치마. 흩뿌려진 글자들.
고를까 말까 고민을 했다. 어린아이가 희생되는 내용은 뒷맛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감히 집어 들었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느꼈다.
이 책은 후반부를 위해 전반부가 존재하는구나.
대개의 복수극은, 복수를 완성하는 순간 끝이 난다. 가족이 납치당하거나 살해당하는 등등의 사건을 해결하는 가족을 다룬 작품들은 많다. 영화도 있고 소설도 있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범인을 단죄하는 부분에서 독자나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면서 권선징악적으로 결말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렇지가 않았다. 탈옥한 소아 성애자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어린 딸 마리. 아버지 프레데리크는 복수를 꿈꾼다. 범인이 또 다시 감옥에 갔다가 재판을 받고 형기를 마치고 나오거나, 탈옥을 꿈꿀 수 없게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범인을 사살한다. 여론은 그를 영웅으로 추대한다.
여기까지가 전반부이다. 당연히 나쁜 놈은 벌을 받아야 하고, 그는 살인을 저지를 충분한 동기가 있었고, 면죄부를 받을 정황도 충분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공권력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으면, 그의 딸이 죽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흉악한 범죄자를 멍청하게 탈옥시킨 게 문제였으니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개 영화나 소설은 여기서 끝이 난다.
하지만 이 글은 후반부가 기다리고 있다. 전반부가 감성에 호소한다면, 후반부는 이성에 호소하는 느낌. 즉, 개나 소나 개인적인 복수를 해대면 법은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이다.
프레데리크가 영웅 취급을 받으며 풀려날 때, 그의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소아 성애자들은 죽이거나 괴롭혀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래서 모방 범죄가 일어났다.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
이제부터 독자들은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과연 프레데리크의 행동이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느냐? 그를 따라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한 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로 낙인을 찍는 것이 당연하냐? 개선의 여지가 있는 범죄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어떻게 구별을 할 수 있는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국민이 스스로 보호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은 프레데리크의 행동이 나쁘다고도 옳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권력도, 검사도, 변호사도 기자도, 심지어 재소자들도 누가 나쁘다 맞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서술할 뿐이다. 그의 뒤를 따른 사람들의 행위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역시 당하는 입장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작가의 입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그냥 독자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은, 이런 책을 읽음으로 사법체계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고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이해까지는 않지만 수용하면서, 사회의 제도적 모순을 같이 해결해보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러기에 피지도 못한 꽃, 어린 마리의 죽음은 너무도 슬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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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소설이고... 제목은 <비스트> ... 그리고 표지는 꽃을 들고 있는 통통한 여자아이의 일부분... 그리고 각중 수상경력과... 두꺼운 책의 분량.. 궁금하고 호기심을 유발하기에는 정말이지 충분했던 이야기이다.. 거기에 공동저자인 안데스 루슬룬드는 사회부 기자이며 버리에 헬스트럼은 과거 전과자였고 지금은 범죄자들의 교화를 돕는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 정말이지 리얼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호기심까지 ...
비스트(Beast:짐승) .. 성범죄들을 수감하고 있는 감옥의 교도관인 렌나트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짐-승... 9살의 어린 소녀들에게 성폭행을 가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를 저지르는 '벤드 룬드' 그는 사형제도가 철폐된 나라에서 최고형을 받고 수감도중, 정신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이송중 탈옥을 감행하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희생되는 어린 소녀 마리... 그 소녀의 아버지 프레드리크는 자신이 직접 그 짐승을 단죄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눈 앞에서 딸을 잃어버린... 그것도 짐승만도 못한 놈에서 처참하게 생명을 짓밟혀버린 아버지의 마음... 아마 나 같아도 바로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죄인들을 단죄하기 위해 법이 존재하고 그 법과 절차에 따라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뜨뜻미지근한 수사진행, 잡히지 않는 범인, 잡히더라도 정신적인 치료를 운운하며 집행되는 몇년의 수감생활,, 그리고 사회로의 복귀.. 다시 일어나는 같은 범죄... .. 이러한 현실에 대항하며 직접 단죄를 자초하고 나선 아버지에 의해 그 짐승은 목숨을 잃게 된다.
딸을 죽인 범인과 그 범인을 쫒는 아버지... 손에 땀을 쥐는 극적인 순간도 없이,,, 범인은 한순간에 아버지 프레드리크에 의해 목숨을 잃게된다.. 그저 총을 쏴버린 그 즉시 모든 사건은 일단락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들은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져주는 듯 하다.. 영웅시 되어버리는 프레드리크.,, 그의 행위가 정당방위이고 인정에 호소한 행위가 되는 동시에 많은 유사범죄를 일으키게 된다.. 인정에는 호소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그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해줄 수는 없는 현실...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는 범죄를 미리 방지하겠다는 정의감... 이 모든 것들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게 정당화 될 수 있는지...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언급과 논의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바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생각도 하지 싫은 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프레드리크의 입장을 공감할 것이고 그러한 행위에 대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말을 하겠지만 그렇다면 이 사회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는 기준은 또 어떻게 적용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을 주고 있는 듯 하다..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등장... 그리고 그들의 입장.. 리얼한 교도소안의 묘사... 그리고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의 전개...' 북유럽 소설이었던 <밀레니엄>과는 좀 다른 성격의 소설인 듯 하다.. 범인과 그 범인 쫒는 자들의 뒤를 쫒아가는 숨막히는 미스테리물도 좋지만 사회적인 현상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이러한 미스테리물도 좋은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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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하면 짐승이다. 짐승. 그냥 이렇게 쓰면 될것을 굳이 원단어인 그대로 '비스트'라고 쓴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짐승. 이라고 하면 약간은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의 인식탓도 있을것이고 본문에서 그렇게 써온 그 어감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 그 단어를 쓴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어찌했건 간에 '짐승'이라는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그 의미 그대로 처음 부터 끝까지 그 내용이 그대로 이어진다.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죽이는 그런 남자. 그런 남자를 짐승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이라고 생각한다.
몇년 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실례가 있었고 굳이 아이들은 아니어도 청소년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하는 짐승들이 너무나도 늘어나고 있다. 그냥 짐승이 한명이어도 세상이 살기 힘들고 모든 사람을 의심해봐야 할 판인데 이런 짐승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면 다 의심해야 하고 아니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족조차도 믿을수가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이혼하고 딸 하나를 키우며 평화롭게 살던 작가인 주인공. 어느날 딸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와보니 텔레비젼에서 탈옥한 유아강간살해범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은 방금 전 딸아이의 유치원에서 인사까지 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 와중에 딸아이가 없어졌다는 유치원 선생이자 자신의 애인의 전화를 받는다. 분명 그 짐승이 아이를 데려간 것이다. 아이를 찾아야 한다. 찾을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짐승을 죽이고 자수를 하고 무죄판결을 받고 다시 자유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계획한 대로만 되는 일이란 없다. 그가 짐승을 못찾을수도 있고 못 죽일수도 있으며 설령 죽인다하더라도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을수도 있다. 이 책은 마지막 몇장 아니 두장을 남겨놓고 정말 획기적인 반전을 꾀한다. 작가 두명의 생각이 딱 맞아 떨어져서 계획한 줄거리라 할지라도 그 생각은 놀랍다. 생각지 못한 반전이다. 또한 그럼으로 인해서 마음이 아프다.
이 모든 일이 소설속에서만 일어났음 좋겠는데 비단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 슬프다. 사람의 겉모습만 하고 있는 짐승들이 없어졌음 좋겠다. 모두가 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만이라도 그런 짓을 하는 짐승들이 없음 좋겠다 하는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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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최고의 스릴러라는 문구에 설마설마했다. 비스트를 읽은지금 머리가 멍하다 너무 많은 생각에 혼란스럽다 처음든 생각은 분노 왜~~ 라는 단어를 계속 되네인다. 다음은 인간과 인권에대한 생각이다. 그들을 인간으로 봐야하느냐 인간으로 본다면 그들에게도 인권이 주어져야 하느냐다. 수많은 범죄인과 살인자들중에 성범죄인 그것도 아동성범죄자에대하 어떤 판단을해야 가장 적절한가에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책을 읽으면서 단숨에 읽고싶다는 충동중에 글에 몰입도가 너무강해 쉬는 시간을 억지로 가지면 읽었다. 그렇지 않고는 분노를 다스를수가 없었다. 이글은 공저다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르트럼 루슬룬드는 기자로 교도소 갱생프로그램을 취재하던중 헬스트럼을 만나게되고 그의 도움으로 취재를하고 비스트의 아이디어를 얻고 같이 작업을하게 되었단다. 헬르트럼은 범죄자 출신으로 자신의 경험을토대로 갱생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있다. 두사람은 비스트를 기점으로 작가로 등단한후 활발한 활동을 평고있다고한다. 그들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고 싶다.
벤트 룬드는 금발머리의 작은소녀를 눈여겨보고있다. 소녀는 수동적이지만 룬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소녀들이 겁먹지않도록 최대한 선한모습을 접근한뒤 자신의 목적을이룬다. 룬드는 아침에 자위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충동을 참을수 없었다. 몇일뒤 소녀들이 발견되고 룬드는 수감되었다. 세상이 룬드를 잊을만 했을때 그가 탈출했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그는 또다른 소녀를 물색했고 경찰은 그를막지 못했다 또한면의 소녀가 희생되었다.
프래드리크 스테판손은 이혼남으로 딸과 살고있다. 그날 마리는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프래드리크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다 요즘 쓰고있는 글이 풀리지 않아 몇일째 힘든상황이다. 이혼남이 딸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뒷말을 할것이기 때문이다. 프래드리크는 마리를 사랑한다. 어릴때 끔찍한 기억을 갖은 프래드리크는 자신같이 불행한 어린시절을 마리는 겪게하고 싶지 않아 최선을 다했다 그날도 사랑하는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한참을 보다 뒤돌아봤다 그리고 그남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온다. 탈주범방송을통해서 남자를본 프래드리크는 미친듯 달린다. 경찰에도 알리지만 룬드가 한발앞섰다 마리가 사라진것이다.
비스트에서 주목할것 프래드리크의 복수도 아니요 룬드의 미친짓도 아니다. 범죄와 인권사이에 줄타기같다. 사형제도를 주장하는건 아니다. 다만 성범죄자는 나같은 전문가가아닌 사람이 생각해도 재발확률이 가장높은 범죄다 그것도 힘없는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범죄자에게 인권을 줘야하느냐다 룬드같은 인물은 사이코패스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다. 감옥에 수감하고 시간이 흐르면 출소해 또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우리는 그들을 먹여살려서 또다시 죄를 짖는걸 봐야하는 아이러니 기회를 줘야한다는 말에 나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화가난다. 법이라는 테두리에서 생쥐처럼 요리조리 빠저나가는 범죄인과 그들을돕는 법조인들 그들에게 피해자가 당신들의 가족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헬스트럼의 경험을 토대로 교도소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인지 그안의 모습이 생생하다. 추상적인 교도소가아닌 현실의 교도소안쪽을 잠시잠깐 들여다 본 기분은 그들도 인간이고 죄는 밉지만 인간은 불쌍이 여기라는 말을 되세겨본다. 그래도 룬드같은 범죄자에게까지 이말을 적용하고 싶지않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목숨을 마음대로할 권한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인간이 하지 않아야할 짓을했다 신이아니라는 이유로 용서를 해야하는가 뭍고싶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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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수심(人面獸心). 그러나 <비스트>에 등장하는 '벤트 룬드'를 설명하기에는 이 말로는 부족한 듯 하다. 그가 저지른 잔혹한 범죄 행각들은 짐승들조차 저지르지 않을 법한 일이다. 그의 범행 대상은 10세 미만의 소녀들 심지어 어린이집에 다니는 어린이까지 예외가 아니다. 치밀하게 관찰하고 계획한 후 아이들은 유인해 성폭행과 살인을 일삼는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스웨덴은 사형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국가로서 룬드는 죽음 대신 정신과 치료와 교도소 수감생활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교도소로 송치되던 중 탈옥에 성공하고 만다.
룬드의 범행에 대한 세밀한 묘사로 서문을 여는 <비스트>는 드러내 놓고 스웨덴 사법제도의 한계와 교도당국 및 경찰 수사의 허술함을 꼬집는다. 그리고 탈옥 후 룬드가 한 일은 다섯 살의 소녀 마리를 그가 저지른 범행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게 성폭행 후 살해하는 것이었다. 이혼 후 그에게 피붙이란 하나 뿐인 딸 마리가 전부였던 프레드리크. 그런 그가 방금 전 마리를 데려다 주러 유치원 앞을 오가며 마주친 남자가 희대의 소아성범죄자인 룬드임을 깨닫게 됐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고 프레드리크를 덮친다.
햇살보다 환하게 웃던 아이가 상처 가득한 몸으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부검대 위에 누워 있다.
"아이는 없다. 마리는 이 세상에 없다. 그의 딸은 더 이상 존재하는 않는다." P.244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결코 해서는 안되는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룬드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물며 수많은 가능성들로 가득한 내일을 살아야 할 이 아이에게 그는 미래를 앗아갔고, 그 부모에게는 평생 암흑 속을 살아야 하는 형벌까지 내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그가 말이다. 모두가 이렇게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무렵 프레드리크는 결심을 한다. 법이 그를 죽일 수 없고, 교도당국이 그를 온전히 가둬둘 수 없으며, 경찰이 한시 바삐 그를 잡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의 손으로 룬드를 찾아 처단해 제2의 마리와 같은 희생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이야기가 이 정도 전개되자 앞으로 프레드리크가 어떤 방법으로 룬드에게 복수를 가할 지 은근히 기대감을 갖고 읽어 나가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비스트>는 독자들에게 직구가 아닌 변화구를 던지며 또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당한 만큼 되갚아 주리라 믿었던 프레드리크의 복수는 두 발의 총격으로 마무리 되고 살인모의 및 고의 살인 혐의로 프레드리크는 재판에 회부된다. 문제는 그 이후 '탈바카'라는 마을에서 벌어지게 되는 사건에 있다.
"법원이 집행하는 정의와 시민들의 자의적 해석을 통해 똑같은 이름의 정의가 얼마나 큰 간극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의 상징." P. 310
처음에는 잔인한 범죄로 소중한 딸을 잃은 아버지의 핏빛 복수극 정도로 생각했던 <비스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중반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드리크의 복수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국가의 법을 무시한 채 자의적인 정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죽어 마땅한 범인이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안타까운 희생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국가의 법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는 대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수긍하는 프레드리크의 복수는 결국 재판을 담당하는 사법권까지 압박을 가한다. 그리고 프레드리크의 재판을 계기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애꿎은 희생이 잇따른다.
무엇이 과연 옳은 것일까?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개인의 정의는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충분히 정의 실현에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도 없다. 역자의 말에서처럼 법과 정의가 빠진 이 딜레마에 뾰족한 해답은 찾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비스트>는 전반부까지는 프레드리크의 편에 서 있는 듯 보였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과연 개인의 자의적인 정의 실현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었나 의문을 던진다. 결국 법이 아닌 개인에게는 그 누구의 생사여탈권도 없음을 일련의 사건과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거듭 말한다. 프레드리크에게 닥쳤던 비극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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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편안함을 안겨주던 익숙한 풍경이 슬픔이 되어 숨통을 조이게 될 수도 있고, 어딜 가도 내 집 같던 동네가 더 이상 그런 느낌이 들진 않게 될 수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 편안하고 익숙하던 공간이 아픔의 시작이 되는 공간으로 바뀐 탓이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로 삶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사건 역시 한순간에 누군가의 삶 전부를 바꿔버리는 예상치 못했던 사고였다. 전혀 흔하지 않은, 아니 흔할 수 없는… 그것도 아주 끔찍한 사고였다. 더군다나 어린 여자 아이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이혼을 하고 혼자서 어린 딸을 키우는 ‘프레드리크’는 나름의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발생하게 된다. 어린이집에 딸 ‘마리’를 데려다주고 작업실을 찾은 그가 마주한 것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그는 다수의 미성년 성폭행 및 강간 혐의로 수감되어 있던 ‘벤트 룬드’라는 인물로, 정신감정과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호송되던 도중 호송차량을 탈취해 어디론가 도주한 상태였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마리가 다니는 어린이집 정문 앞 벤치에서 프레드리크와 두 번씩이나 인사를 주고받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찾아간 어린이집에서 마리나 벤트 룬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마리는 끔찍한 상태로 발견되게 된다.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정의는 꼭 실현되어야 하니까. -P287
지금까지의 내용은 범죄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에서 이미 많이 접했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잔혹함의 강도는 다르겠지만… 평범하던 일상에 예상치 못했던 사건 속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하지 못하리라 생각되는 사랑하는 사람, 나의 전부였던 사람을 잃게 된 상실감,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 자책 등의 감정과 여전히 어딘가에서 또 다른 어린 아이들을 노리며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범죄자에 대한 분노, 그것을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라는 감정들 사이에서의 혼란, 그리고 어떤 선택에 놓이게 된다. 물론 이 외에도 사고 이후의 상황들에 대한 이런저런 많은 생각들이 더해지지만, 『비스트』는 독자들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민다. 나를 원망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만든 범죄자나 사회에 맞설 것인가, 사이에서 선택을 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비스트』는 친절하게도 그 어려운 문제에 대한 보기를 보다 자세하게 제시한다. 사회도 막지 못하는 범죄를 향해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그 상대에게 죽음을 남겨주는 ‘프레드리크’라는 보기와 아무리 짐승 같은 놈이더라도 법은 지켜야 하는,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감히 생사여탈권이 주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보기를 말이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좀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쉬어가자. 보통 ‘비스트(The Beast)’라는 단어는 덩치가 크고 위험한 짐승이나 야수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비스트(The Beast)』는 범죄자 중 성폭행범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짐승만도 못한’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스웨덴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을 쓴다고 한다. 그렇다. 『비스트(The Beast)』는 스웨덴 소설이다. 출간되자마자 14주간 베스트셀러를 차지했으며, 유럽에서만 26만 부가 팔렸고, 세계적으로는 20개국에 판권이 판매된 작품이라고 한다. 또한 북유럽 최고의 장르문학에 수여하는 글래스키(Glass Key) 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스웨덴 공영방송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소설로 만나는 스웨덴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이 이미 스웨덴만의 작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보면 그리 낯설게 느껴질 것만도 아닌 듯하다.
쉬는 김에, 『비스트』의 작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의 작가는 , 10세가 되기 전 세 차례 성폭행을 당하고 범죄의 길로 빠져 전과자가 된 ‘버리에 헬스트럼’ 과 스웨덴 공영방송 사회부 기자로 활약하면서 시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안데슈 루슬룬드’로 모두 두 명이다. 그들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찌되었든 범죄에 대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나서 범죄를 이야기하고, 사회를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지 못할 세밀한 부분들을 담아서 이야기 한다. 혹시나 해서 미리 밝혀두는데, 이미 『비스트』외에 다른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들이니만큼 오직 그들의 독특한 이력에만 눈길을 던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흠… 한 숨 돌렸으니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딸아이를 잃은 아버지가 그 살인범에게 복수를 감행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복수로 비쳤겠지만, 그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 살인범은 이미 또 다른 아이들을 노리고 있었다는 증거까지 발견되었다. 뭐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사람들은 딸의 복수를 하고, 사회의 쓰레기인 짐승을 없앤 이 남자를 영웅으로 대접한다. 옳은 일을 했다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상대가 누가 되었든 그 역시도 또 다른 살인을 한 것뿐이다. 법이 있는 사회에서 자의적으로 사건을 구성하고,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의되어야할 이야기들이다. 어린이집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생명과 교도소에서 탈옥한 뒤 어린아이를 강간하고 잔인하게 살해할 계획을 가진 변태의 목숨이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저들도 만약 스테판손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방아쇠를 당겼을까? 누군가의 생명이 다른 누군가의 생명보다 값어치 있다고 여기고 있을까? -P399
그 어느 것도 명확한 정답은 없는 듯 보인다. 결국 판단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다만, 그 판단에 다양한 보기와 생각들을 전해주는 『비스트』가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한 상황 속에서, ‘만약 당신이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져주며 다양한 생각들을 스스로 해보게끔 하는 소설… 끔찍하고 역겹게만 느껴지는 사건에서 시작해 마찬가지일지 모르는 사회에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풀어야만 하는 어려운 숙제… 우리는 이제 이 문제는 어떻게 풀면서 이 세상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일까?! 뭔가 큰 돌덩이가 내 마음 속에 내려앉은 기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