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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소외를 주제로 한 학기동안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공이 공학이면서도 제 관심은 주로 인문/사회과학쪽에 있었습니다. 과에서 필수로 들어야 한다고 정해 준 과목도 뿌리치고, 전공과 거의 관련이 없는 강의를 몇 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이해가 어려웠고, 낯선 용어였던 소외를, '내가 주체가 되어 만들었으나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했었습니다. 근대 이후 우리의 육체가 자본에 포섭되어 노동하는 육체로 살아가면서 느껴야 했던 소외의 개념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집으로 들고 왔습니다. 소외를 말하기 이전에 노동이 인간에게 적합한 활동인가? 를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이 된 이후에 인간은 자유를 잃고 노동하는 기계로 전락합니다. 그 이전의 시대 어디에서도 인간은 노동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 자본주의 초기에 시작된 노동운동의 목표는 단연 '노동해방'이었습니다. 인간은 노동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는 선언인 셈입니다. 하지만, 자본의 집요한 공격 앞에 인간은 노동해방을 포기하고 임금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얻었습니다. 너무 달콤하여 해방을 잊은지 오래고, 끊임없이 그 달콤함에 탐닉하는 동안 점점 더 자본에 속박되었습니다. 노동해방을 외치던 입에서, '일자리를 달라' 거나 '8시간 노동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가 터져 나옵니다. 점점 더 자본이 쳐 놓은 덫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삶이 빨려 들어가는 형국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동없이, 아니 그 노동이 댓가로 주어지는 임금이 없이는 살아나갈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그 덫이 너무 강력하여 빠져나갈 생각도 못할 뿐더러, 그 밖으로 나가는 순간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생각마저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경쟁을 포기하거나 상품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소비로부터 탈출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자본을 떠나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 역으로 자본에서 탈락한 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처참한 모습 역시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자본의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참하다고 느끼도록 자본에 의해 조작된 화면을 우리가 보고 있다는 사실 말이죠. 공장에 얽매어 8시간을 육체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게, 영혼은 노동에서 자유로운 영역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내 영혼에게 노동하라고 강요할 수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내 노동에 얽매어 쉬지 못하는 영혼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영혼마저 노동에 포섭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이 우울증입니다. 즐겁고 자유로운 상태에 있지 않고, 늘 일에, 노동에 시달리는 우리의 영혼은 휴식도 없이 일을 생각하느라 점점 소진되고 있습니다. 처음에 강제로 주어지던 일도, 이제는 자발적인 중독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은 점점 많아지고 인간은 그 일에 점점 얽매어 가고, 그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우울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변화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 자연과의 교감 등을 부의 원천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면, 자본 축적을 위해 더 많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이 쉴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쉼 속에서 자본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회사로부터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 저는, 8시간의 노동 이후에 정시퇴근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급부로 상사에 의한 평가를 포기합니다. 평가에 의해 주어지는 성과급 혹은 급여의 삭감 역시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대신에 퇴근 후에 주어지는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남들처럼 일에 시달리거나 우울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일부는 저당을 잡혔으되, 많은 부분 제 삶에서 제가 주인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다른 이들과의 경쟁을 거부하고, 더 많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제 삶이 자본을 넘어서는, 자본에 미세한 균열을 내게 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