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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류열풍이 거세다.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와 춤이 세계 음악시장에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현재의 유행을 한류라고 칭하지만, 실상 이들이 부르는 노래와 춤은 한국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한국인에 의해 작사, 작곡이 되어 한국인 가수가 부른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오히려 음악적인 근원을 따지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한국적인 노래, 즉 한류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음악의 원천들이 어디이던 간에 한국가수가 부르기 때문에 우린 그런 유행의 한 조류를 한류라고 칭한다. 교통과 무역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1800년대처럼 자신들만의 문화의 특색을 지키며 살아가기기는 어렵다.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물건이 이동하면서 그에 따른 민족간의 이동도 빈번해지고, 문화적인 상호교류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서 문화적 교환등이 이루어지며, 이는 상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우리 시대는 갈수록 더 빈번해지고 강렬해지는 가지각색의 문화적 만남들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거 주한 미군의 주둔을 계기로 이루어진 서구문화의 유입과 그의 수용을 둘러싼 논쟁에서부터 다문화를 대표하는 최근 국회위원이 된 이자스민의 경우처럼 문화적 만남과 충돌은 우리에게도 문화적 충돌과 어울림이 오랜 기간 동안 첨예한 주제였던 것이다. 우리가 반대하든 찬성하든, 이제 전지구화 시대에 따른 문화 혼종화의 경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문화사학자 피터 버크가 쓴 이 책 『문화 혼종성-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는 이 시대의 필수적인 키워드인 문화 혼종성이란 무엇인가를 다룬 입문서이다. 글쓴이는 폭넓고도 생생한 시선과 풍부한 역사적, 이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최근의 문화혼종 현상을 사례에서부터 과정, 실천, 이론, 결과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게 논의한다. 또한 혼종화에 대한 편협한 비판과 무턱댄 낙관을 넘어선 글쓴이의 논의는 다문화주의 논쟁이 뜨거운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의미 있는 시점을 제시한다. 글쓴이 피터 버크는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종화의 다양한 현상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밀란 쿤데라나, 마르케스의 소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나 인도의 발리우드 영화 산업, 재즈, 보사노바, 플라맹코, 락 등의 음악 장르 같은 사례에서부터 기독교와 토착 종교의 결합이나 서구 정치 제도에 대한 모방과 변형에 이르는 다양한 혼종적 양상을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근현대의 사례에 그치지 않고, 혼종화의 역사적 기원까지 파고든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 국가 사이의, 혹은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의 문화 전파와 교류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문화 혼종화가 근현대에 시작된 현상이라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역사적 과정임을 밝힌다 외래 문화의 도입은 다양한 반응을 불러온다. 가장 극단적인 두 반응은 서양 문명에 대한 전적인 '수용'과 무조건적인 '배척'이다. 일본이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전자의 사례라면, 한국의 쇄국 정책은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외래 문명에 대응하는 다양한 반응은 용인, 거부, 분리, 적응의 형태로 나타난다. ‘용인’은 환영의 전략이다. 흔히 서구화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타 문화에 대한 수용이다. ‘거부’는 문화적 침략에 대항하여 문화적 경계를 사수하는 저항의 전략이다. ‘분리’는 영토 전체를 지키는 대신 문화내부에서 외국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오염되지 않는 영역을 지키는 노력을 말한다. ‘적응’은 점진적인 외래문물의 차용을 통하여 전통적인 구조를 통합하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피터 버크는 '어떤 반응은 긍정적이고 어떤 반응은 부정적이다'라는 식의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 반응을 보여주는 사례와 결과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초연'한 거리를 두고 지켜봄으로써, 이러한 반응이 가져오는 효과를 더욱 명징하게 드러낸다. 또한 글쓴이 피터 버크는 기본적으로 문화 혼종화의 흐름을 막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지구화가 문화의 '균질화'를 불러온다는 혼종화 비판자들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반박하고, 혼종화의 사례와 분석들이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세계의 크레올화를 예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말미의 해제에서 문화평론가 이택광은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가고 있는 '다문화주의' 논쟁을 되짚어본다. 그는 먼저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찰스 테일러의 논의와 슬라보이 지젝의 논의를 빌려 다문화주의가 오히려 세계화의 국면을 통해 발생하는 다양한 민족적 갈등을 보편성이라는 화합의 기표로 '억압'한다고 비판한다. 즉 다문화주의가 타자에 대한 '배제'를 '거리두기'로 바꾸는 전략에 지나지 않음에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대안인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택광의 해제는 피터 버크의 논의와 한국적 상황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다문화주의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는 비판적 시선을 보여준다. 한국은 언제나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보편적인 정서로 인해 최근의 이주노동자와 국제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문화 현상에 폐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문화의 흐름의 하나인 다문화에 의해 우리 곁에는 150만에 이르는 이주민이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린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들의 모국과 그들의 피부색, 그리고 그들 모국의 경제여건에 따른 편협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세계화의 추세와 다문화의 여건에 맞추어 그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학문적인 해답을 이 책은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문화적 충돌로 인한 사건들이 현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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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혼종성 | 피터 버크 | 강상우 | 이택광 |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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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지적 풍토를 나타내는 징후 중 하나로, 많은 종류의 논쟁에서 반대편을 비판하기 위해 ‘본질주의’ 개념을 점점 더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민족, 사회계급, 부족, 카스트는 그것이 허구적 실체를 묘사한다는 의미에서 모두 해체 됐다. 프랑스 인류학자 장-루 앙셀(Jean-Loup Amselle)의 책 <메스티소 논리>(1990)는 이러한 경향을 대단히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갈수록 더 빈번해지고 강렬해지는 가지각색의 문화적 만남들로 특징지을 수 있는 우리 시대에, 이러한 주제에 대한 몰두는 자연스럽다. 문화적 전 지구화의 결과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여전히 논쟁 중이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상관없이 이러한 전 지구적 경향은 피할 수 없다. 이는 서양식 감자튀김에 인도식 커리 소스를 얹은 커리 앤 칩스부터 태국식 사우나, 동양의 선(禪)적 요소가 들어간 선-가톨릭 혹은 선-유대교, 나이지리아 쿵푸, 인도 뭄바이에서 인도 전통의 노래와 춤을 할리우드적 관습과 혼합하여 제작된 ‘발리우드’ 영화까지 아우른다. 이러한 과정은 음악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재즈, 레게, 살사부터 최근의 플라멩코 록, 아프로-캘틱 록에 이르는 혼종 형식 및 장르가 그 예이다. 이름 자체가 이러한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믹서(mixer)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은 명백하게 이러한 종류의 혼종화를 촉진시킨다.
상이한 문화들 속에서 겪은 개인적 삶의 경험, 혹은 상이한 문화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분명히 그들의 혼종성에 대한 문제의식의 바탕을 이룬다. 혼종성 개념을 사용하는 작가들은 라틴 아메리카 문화를 혼종성으로 동일화하고 라틴아메리카의 각기 다른 지역들 간의 차이점을 불명확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문화라는 개념은 태도, 사고방식, 가치와 이런 것들의 표현, 혹은 인공물, 실천, 재현을 보여주는 전형이나 상징화를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범위로 정의된다. 또한 혼종성 개념은 명백히 분리되어 있고 대립적인 것들의 조화로운 이미지를 제공하여 문화적 사회적 차별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인간 집단 간의 지속된 만남이 많은 갈등을 수반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충돌과 그 충돌의 의도치않은 장기적인 결과를 구분하는 것은 유용한 일일 것이다.
"공동체와 그 경계의 상징적 표현의 중요성은 해당 공동체의 실제적인 지리적 경계가 훼손되거나 불명확해지고 약화될수록 증가한다.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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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문화라고 하는 것은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그 나라만의 특징을 나타내는 사회 현상들일 것이다. 대한민국에도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이 나라 고유의 문화가 존재한다. 유교에 뿌리를 둔 예법, 한옥으로 대변되는 건축구조, 민족의 정서를 반영하는 민요 등 현재에는 문화재로만 남아 있는 것들 역시도 대한민국만의 문화이다. 과거 대한민국이 쇄국정책을 펴고, 그로 인해 늦어진 근대화로 인해 사회 발전이 더디게 진행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라는 아픔을 겪게 되었지만, 반면에, 우리들 만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민족 문화들이 많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문화의 우위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봐도 그 나라만의 고유한 문화가 존재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이 발발과 그로 인한 환경의 변화들은 각 민족들의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예컨대, 개방으로 인한 서구 문물의 침투는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과 갈등을 빚어내었지만, 현대 시대의 우리네 삶에 이미 동화되어 녹아 있다. 일제 시대에 그 암울한 시기에도 시대 환경의 부조리에 대항하고, 나라를 잃은 슬픔을 발산하기 위한 매개체로써 이용되던 다양한 문화들 역시, 환경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지금은 또 어떤가, 외국의 영화들이 상시 상영되고 있고, 가까운 일본의 다양한 미디어(만화, 애니메이션) 를 필두로 하여, 이름도 생소한 나라들의 문화들까지도 간접적이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다. <문화혼종성>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이런 문화의 뒤섞임과 갈림, 조화와 융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의 문화가 발생하고 전해지어 다른 문화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기 까지의 단계별 과정에 대한 내용이 사례와 함께 설명되고 있고, 각기 다른 학계, 국가, 민족 등에서 타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방식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이런 문화의 발생과 전이, 혼합의 과정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 유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K-POP의 전파 역시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음악과 종교, 건축물, 미술, 생활 양식, 언어, 요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뒤섞임 되고 있다. 어떤 것이 오리지널이냐 하는 문제도 애매해진 상황이며, 그 섞임의 속도는 날이 갈수록 가속화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의 상호작용은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모방과 전유, 포용과 협상, 혼합과 혼합주의 혹은 혼종성, 크레올화 와 같은 다양한 개념들이 각기 다른 계층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크레올화라는 용어는 최근들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써, 기존의 문화 형태들로부터 혼합으로 인해 새로이 발생되는 문화형태를 의미한다. 또, 이런 문화의 상호작용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반응들은 어떨까? 타 문화에의 저항, 적응, 문화적 정화, 문화적 분리, 문화의 순환 등이 있을 수 있다. 위와 같은 문화의 발생과 타문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친 결과로, 이종 문화간의 균질화, 특정한 문화의 반-전지구화, 세계의 크레올화가 발생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간단히 한번 생각해 보면,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문화)에서는 타 민족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적인 사고방식은 외부 문화에 대한 저항을 이끌어 낸다. 문화적 분리 현상도 발생한다. 서로의 문화가 너무 이질적인 경우 극단적인 마찰까지 발생할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그런 부분이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양 극단의 중간에 위치하는 문화도 발생할 수 있다. 서로 간의 문화에 적응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의 흐름은 양 문화간의 크레올화를 이끌게 된다. 이 시기의 문화는 대한민국 고유의 문화인가 아님 섞여 들어온 이민자들의 문화인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의식하지 않고 지내왔던 문제인지라, 이런 것에 대해 무슨 연구가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실제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짧지만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몇 세기가 지난 이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문화들 하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도 전통을 지켜가는 분들이 계시는 것처럼) 어떠한 문화들이 통합되고 새로 발생되고 어떤 영향을 주면서 전파 될런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크레올화를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디딤돌 역할을 해 줄 수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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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다. 이 책은 문화혼종성이 작금의 전지구화 시대를 정의하는 핵심이라 말하는 책이다. 문화혼종은 더 이상 수용과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관점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다보니 참고서적 분위기가 물씬이다. 저자는 건축, 음악, 종교, 문학 등 다양한 혼종화의 영역을 소개하며 모든 문화들은 서로 관련이 되어 있으며 어떤 것도 단일하거나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이며 서로 자기 살을 내어주고 남의 살을 빌려온 역사이다. 우리는 살을 섞었을 때 반드시 새로운 생명을 기대한다. 저자의 최종적인 결론은 이러한 문화혼종화가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세계의 크레올화를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짧게 핵심만 정리한 책이라 할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량이다. 개념정리에 딱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보이다.
사실 한국에서 다문화란 여러 나라의 문화양식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소수문화를 상징하는 느낌이 많다. 수는 적고 힘은 작은, 완전한 역설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과 똘레랑스를 의미한다기 보단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환기하는 힌트로 기능한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가 된 것은 아무래도 농촌으로 시집오는 동남아 여성들과 이주노동자들 덕택이 아닐까. 2007년도에 이미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수가 백 만 명이 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이 늘어날수록 한국인 남편의 학대나 폭력, 노동자의 인권 및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많이 접하게 된다. 새로 출연한 언어의 개념은 자주 노출되는 사건과 기사로 재정립되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지금보다 더 현명한 지혜가 요구되는 필수적인 미래지향적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보편적 결론보다는 글 말미의 이택광의 해제가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택광은 지젝의 논의를 빌어 다문화주의에 대한 옹호적인 시선이 외려 정치적인 억압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다문화주의라는 전략적 선택과 관리 방안이 마치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것처럼 운명화되는 것에 비판을 가한 것이다. 모든 문화는 모든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이택광의 시선은 문화혼종성이 가지는 지구적 보편성 위에 한국적 특수성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은 사실 우리에게 다문화가 무슨 의미이냐가 아니고 우리가 다문화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어떤 마음인가, 어떻게, 진정으로, 인 것이다. 오랜 세월 단일민족, 하나 된 국민이라는 가치를 선호해온 입장에서 한국인은 다문화 수용에 있어 그다지 개방적이지 못하다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으면서 퍼뜩 지난 2011년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고가 떠올랐다. 관용과 평화의 나라인 노르웨이에서 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많은 인명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했다. 바로 인구의 95%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에서 인종과 이민을 이유로 벌어진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테러범은 단일문화 국가이면서 살기 좋은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다시 말해 테러범이 인식하기에 한국은 다문화를 수용하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로 본 것이다. 왜 하필 우리나라였는지 왜 우리나라가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나라의 모델이 되었는지 그것이 단지 피상적인 오해라 할지라도 늘 단일민족의 정통성을 외쳐온 과거를 돌아볼 때 테러범의 언급은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우리는 입으로는 다문화에 개방적이라 떠들면서 속으로는 폐쇄적인 속성을 버리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문화를 포용한다는 의미가 추상이 아닌 정책적으로 실행되면 바로 일자리, 교육 및 의료, 복지 등의 혜택을 나누어야 할 경쟁 프레임으로 이동한다. 또 과거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을 향한 문화박탈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서 다문화에 포함되는 대상을 계급의식 구조 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농후하다 할 수 있다. 민족적,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은 마치 지난시절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에 느꼈던 박탈감, 열등의식을 보상하는 차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냉정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문화혼종성의 그 인정 너머에 다가가야 할 메시지로서 어쩌면 역사와 시대의 필연으로 도래하고 있는 다문화국가를 맞이해 한국인이 가져야 할 용서와 관용, 배려의 정신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에 성과의 목표를 두었을 땐 아주 빠른 시간에 도달하는 민족이었지만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을 땐 상당히 변화가 느린 민족이다. 좋은 말로 주체적이고 반대로는 고집이 센 민족인 것이다. 노르웨이는 상상할 수 없는 참극을 당하고도 여전히 다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며 테러범에 대해 관용적이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 한명이 살인사건을 일으키면 당장 그 나라를 쳐들어갈 것처럼 흥분하고 평소 숨겨왔던 적대심이나 분노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그럴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살인자와 그의 국가를 매도하고 복수의 방법을 의논하기 까지 한다. 지난 9.11 테러 후 미국이 보여준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관용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보기에 좋아 보이고 이익이 되는 것만 발췌, 선별해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경제무역에나 가능한 것이지 생활방식, 나아가 삶의 방식을 주고 받는 일엔 적절치 못한 듯하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이 사실은 서양의 문화적 산물을 매우 수월하게 차용해 온, 전유의 전통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서 한자와 불교를, 영국에서 국회체계를, 독일에서 대학과 군사체계를, 미국에서 물질문화 대부분을 차용해 왔다. 그러면서도 일본 고유의 문화는 어느 나라보다 차별화된다. 일본의 박물관과 전시관에 가보면 항시 유럽과 미국의 장점을 잘 믹스해 일본만의 개성을 살리는 쪽으로 공간을 연출한다. 좋은 것을 모방하고 가져오되 궁극에 자신들의 조건과 능력에 맞게끔 다시 재창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반면에 우리는 독창성에 대한 아집과 잘못된 자존심, 괜한 자격지심으로 쓸데없이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거나 베껴도 꼭 재창조하지 않고 부분 이식하듯 물리적으로만 따라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행히 요즘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K-pop을 보면 이러한 국수적인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든다. 또한 첨단 IT기술을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전략들을 보면 문화수용과 전파에 있어 상당한 개방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건 기술적 발전과 성장이 아닌 정신적 성숙과 그에 따른 실천인 듯 하다. 미혼모의 혼혈 아동문제, 이주노동자의 빈곤문제, 다문화 가정의 교육문제, 최근 탈북자의 문제까지 문화혼종성을 근간으로 하는 여러 사회문제는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이 확실하다. 다문화주의 자체를 자유주의적 환상이자 기만이라 비판한 지젝을 존중한다. 그러나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들이 섬처럼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저자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의 ‘눈과 뇌, 그리고 문화는 함께 작동한다’는 말씀을 떠올린다.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이 우리 삶이 되는 것이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을 재구축 하기 위한 초석으로 이 책은 미약하나마 기본지식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 이전에 마음을 여는 오늘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로 모아지는 동일한 가치를 더 선호해 왔다. 이는 조직과 학교에서도 왕따를 배출해내는 사고체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며 무리에서 배척하고 싶은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문화는 타자성에 대한 인정을 그 초석으로 한다.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혹 자신에 대한 집착은 아닐까. 이것은 꼭 한국인이 보는 외국인을 말하진 않는다. 불교에선 수십 수백 수천가지를 모아서 자기로 삼고 있을 뿐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기에는 나라고 할 어떠한 실체도 없다고 말한다. 나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실체가 있다고 확신하니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타자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문화의 문제는 결국 다양한 문화, 즉 그 문화를 생성해낸 수많은 타자가 아닌 나의 우리 문화가 따로 있으며 그것을 만든 우리와 내가 문화의 주체자라는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문화에도 정답은 없다. 삶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문화는 그 다양한 삶이 모여들어 하나의 풍경과 내면을 창조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삶은 마주치게 되었고 그러하기에 문화는 섞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섞이지 않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문화혼종이란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다음 세대의 새로운 문화를 위해 소화되는 생태적 과정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애써 성공하기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일들은 삶의 위대한 생태계를 과소평가하는 일일수도 있겠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에서 삶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기 마련이니까. 문화가 섞이건 그렇지 않건 인간은 자기 삶의 방식을 긍정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니까. 다문화 국가를 맞이할 우리나라가 어떻게 당면한 문제들을 헤쳐 나갈지 무척 궁금하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 마음을 먼저 열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은 억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 하나도 꿈쩍도 않았으면서 마음을 움직인 척 당연히 열은 척 한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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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혼종성(Cultural Hybridity)라는 단어는 낯설다. 하지만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 혼종성은 상존하고 있다.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분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내가 가진 의식 구조 안에서는 혼종성이 다문화주의의 하위개념인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문화혼종성」에서는 분명히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별 짓는다. 다문화주의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하나의 퍼즐판 안에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조화의 개념’이라면 혼종성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한쪽으로 흡수·통합·모방·적응하면서 계속해서 진행되는 보편적인 문화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책을 두 번 읽으며 나름 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혼종성’이라는 용어는 ‘미친 듯이 유연하다.’고 평가받아 왔다.” (p.59) “혼종화 과정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문화적 경향에만 한정했다.” (p.17)
다문화주의 나의 이전 리뷰나 포스트에서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깝게 지내는 몽골가족이 있다. 부부인 민데형과 디마누나, 딸 너모 이렇게 세 가족이다.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8년 몽골여행 때 민데형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부터이다. 그때의 여행 중 가장 놀랐던 것은 민데형의 외모였다. 몽골여행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중 봤던 몽골 남성의 일반적인 외모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일단 체격도 좀 왜소하고 눈도 크게 쌍꺼풀도 짙어서 동남아 남성의 외모와 비슷했다. 다음 번 여행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는데, 민데형의 고향은 몽골의 서북쪽 카자흐스탄 국경 인근이었다. 그 곳에는 지리적인 특성 상 카자크족이 많은 데 자신이 카자크족 혈통이라는 것이었다.
반만년 단일민족의 역사만을 배워온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몽골이라는 한 나라 안에서도 수많은 종족이 상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울란바타르 시내를 가보면 외모가 많이 다른 몽골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여러 민족이 한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문화주의다. 단지 혈통·인종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우 한 국가 안에 극좌인 공산당부터 극우인 파시스트당까지 국회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 다문화주의의 개념이다.
혼종성 혼종성도 다문화주의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는 사례는 많다. 먼저 책에 소개된 것은 “대중음악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유럽과 아프리카 전통 요소의 조합이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재즈이고, 브라질 음악 역시 잘 알려진 사례이다.” (p.43)
음악이다. 이 책에서는 혼종성의 여러 하위개념 중 문화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재즈의 근원은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재즈의 근원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음악과 부딪히고 협상하면서 “문화적 혼성”을 일으킨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태동된 그 음악과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태동된 그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만들어 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계속 진행되며 새롭게 혼종된 재즈라는 음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형·발전 되는 것이다.
“마테오리치는 그가 전파하려는 종교 사상이 중국인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유교 학자의 복장을 입었고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 제사 관습을 종교 의식이 아닌 사회 풍습으로 해석함으로써 개종자들이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p.71)
유명한 마테오리치는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중국의 문화와 혼종된 것이다. 그래서 혼종성의 개념이 갖는 주요한 특징은 ‘제국주의적 지배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에의 동화’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마테오리치의 행위는 책에서 분석하는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하지만 직접 그들의 복장을 입고 그들의 고유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모방해 적응하는 것은 분명한 ‘혼종성’의 개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단순한 용어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콜럼버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p.68) 사고의 구조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맥도널드는 우루과이에서[달걀을 깨어 삶아서 얹은] 맥우에보(McHuwvo)를, 멕시코에서는 맥브리토(McBurrito)를, 인도에서는[소고기를 양고기로 대체한] 마하라자 맥(Maharaja Mac)을 판매한다.” (p.83)
몽골과 네팔, 체코의 프라하, 독일의 드레스덴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어 보았다. 전 세계 매장에 공통적으로 있는 세트메뉴를 시켜 먹었기 때문에 책에서 소개된 맥우에보나 맥브리토 같은 그 나라 고유의 혼종된 맥도널드는 먹어보지 못했다. 메뉴에 있었으나 내가 찾지 못했던 것인지 지금에 와서 확인해 볼 길은 없지만 우루과이와 멕시코, 인도의 혼종된 맥도널드 메뉴는 또 하나 ‘문화혼종성’을 이해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제공한다. 맥도널드라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음과 동시에 각국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 또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문화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p.154)
우리가 사는 현재는 이미 전 지구화된 사회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들었던 것이 ‘글보벌화, 세계화’라는 단어들이다.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은 문명의 고도화와 첨단화를 가져왔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지 않아도 내 손안에서 뉴욕을 검색할 수 있고 런던의 뉴스를 볼 수 있다. 내 책장에는 한국의 작가가 쓴 책만큼 외국 작가가 쓴 책이 꽂혀 있다. 미국, 폴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웨덴, 일본, 스페인, 터키, 이집트, 독일 등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기 때문에 한국어로 그들의 책을 읽을 수 있다.
먹고, 입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 단일한 한국만의 것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은 미래에 더 심화될 것임도 분명하다. 반 만 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 엄청난 숫자의 결혼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 존재하고 외국인 근로자도 많은 숫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라고 얘기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각 문화가 경계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언제든지 혼종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내포되어 있다. 그 경계가 급격히 무너질 것인지, 서서히 무너질 것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미래의 지구 문화에 대한 주요한 가능성 혹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문화적 균질화’ 이다. 두 번째는 저항 혹은 ‘반(反)-전지구화’ 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국가 단위의 지역역사수업, 아일랜드어나 바스크어 의무 수업 등 지역 문화와 지역정체성에 대한 강조와 교육이 실시되고 있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앞서 말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문화적 양층언어’ 이다. 이것은 전 지구적 문화와 지역 문화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전 지구적 문화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이중 문화권 내지는 복수의 다중문화권에 속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비극으로 끝맺지 않도록 여전히 우리(자신)만의 지역 언어를 유지함으로써, 세계 문화에 참여하는 동시에 지역 문화를 보존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 번째는 ‘새로운 혼합체의 등장’ 이다.
요약하자면, 지금 현재 경계의 영역에 있는 각 문화 간 혼종이 점진적으로 계속되고 이 혼종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 간 배치는 결국 재배치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혼합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크레올’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원래 ‘크레올’은 [신대륙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과 프랑스인의 자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수세기에 걸친 문화 혼종화를 대체하는 개념이 ‘크레올’이었다면 미래의 그것은 ‘새로운 혼합체’ 즉, ‘새로운 크레올의 등장’이다.
“새로운 질서의 탄생,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p.172)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화적 현상을 예견한다. 가시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등장했었다. 분명 ‘다문화주의’의 개념과는 다른, 그 개념을 탈피한 ‘혼종성’의 개념일 것이라 주장한다.
“콘비벤시아(convivencia) ‘공존’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동안 이슬람교도, 유대인, 기독교도는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호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통치가 시작되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스페인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이 성공을 거두어 1492년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보루였던 그러나다까지 탈환하면서 이 시기는 막을 내리며, 이때부터 대대적인 이슬람교도·유대인 박해와 추방이 이루어졌다.” (p.123) 지금은 극도로 대치되어 갈등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기독교도가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일정 지역에서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평화롭게 공존했던 문화사적 배치가 존재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문화적 혼합체는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으로 새로운 문화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7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미래에 펼쳐질 다변적인 문화의 양태가 저자의 주장처럼 ‘혼종성’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저자가 비판하는 ‘다문화주의’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미래’라는 것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도 하나의 학설일 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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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버크의 '문화혼종성'의 부제는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는 가이드'다. 부제가 적절하게 이 책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말 그대로 이 책은 가이드다. 혼종성을 지향하거나 그 이유를 설명함이 아니다. 그 보다는 먼저 혼종성이 문화의 자연스런 경향임을 일단 인정하고 곳곳에서 드러나는 혼종성의 증거들을 낱낱이 보여주는데 주력하는 책이다. 혼종이란 말 그대로 뒤섞임이다. 거기엔 뚜렷한 목표도 없으며 이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 영역에 겹쳐지면 자연스럽게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뒤섞여 버리는 것이다. 너무도 자연스런 흐름인지라 막을 수도 없다. 아무리 억죄고 있어도 기필코 그 틈을 찾아낸다. 이를테면 중국의 원나라가 그랬다. 초기에는 한족의 문화에 유화정책을 취했던 원나라는 오히려 자신들의 문화가 더 우수한 한족의 문화에 흡수되어 버리자 나중에 가서는 한족의 문화에 대한 철저한 억압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아무리 한족의 문화를 억압하고 차별해도 자신들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로 흡수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문화는 자연스레 뒤섞이고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은 바뀌어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문화라는 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는 고정적이고 항구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뚜렷한 경계나 실체가 없는 유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혼종은 유동적일 수 밖에 없는 문화의 지극히 당연한 경향인 것이다. 피터 버크의 이 책은 그 경향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총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구성이 인간이 사물을 지각하는 과정과 그대로 닮아있어 흥미롭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의 사물을 지각하는 과정을 세부적으로 묘사하자면 일단 사물이 있고 그것의 이름이 있고 그리고 그것이 자리잡은 공간이 있으며 그걸 전체로서 지각하는 가운데 우리에게서 나오는 반응이 있을 것이며 그 반응으로 산출되는 결과가 있을 것인데 이 책의 전개 과정이 바로 그대로다.
그렇게 먼저 건축이나 가구 혹은 이미지 같은 인공물이나 문학 같은 텍스트, 혹은 음악이나 미술 또는 종교 같은 문화적 실천 거기다 그 실천을 통해 결국 다다르게 되는 아니면 타국에 이민한 자와도 같은 상황으로 가지게 된 정체성 같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혼종적 사물을 다루고 그 뒤에 그러한 혼종적 현상들을 개념화할 용어들을 설명하며 그리고 그 혼종이 어떠한 상황들을 유발하는지 고찰하며 그 뒤 혼종적 상황에 처한 이들의 반응을 살펴본 뒤 마지막으로 그러한 문화적 혼종이 어떠한 결과들을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문화적 혼종의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그것을 인간이 행하는 가장 근본적인 지각 과정에 발맞추어 그렇게 쉽게 이해하도록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사회가 다문화로 나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여기에 사실은 주의를 요한다.
그러니까 다문화에로의 지향은 막을 수 없지만 과연 어떤 다문화인가 그것을 가져오는 주체는 누구인가와 관련하여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피터 버크는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마지막 5장, '각양각색의 결과'에서 이러한 혼종성 때문에 사무엘 헌팅턴 등이 말했던 대로 문화가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별성에 더욱 몰두할 것이라 보지만 혼종성은 문화의 본질과도 같기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 정도로 그친다. 하지만 자연스런 경향이라 하여 그저 놓아두고만 있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얼마전 파리에서 일어난 이민자들의 폭동이요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전무후무한 이민자 자녀들 학살 사건 때문이다.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에 다문화를 받아들여온 나라들에서 이런 비극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문화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과연 어떤 다문화가 그러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만드는지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해제에 실린 이택광의 글 역시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보자면 역시 가장 중요해지는 것은 다문화로 나아가게 하는 주체들이다.
주체의 문제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문화엔 또 다른 은폐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다문화는 정부 주도적이다. 얼마전 비례 대표로 당선된 이자스민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정책적으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국민들이 그렇게 다른 나라의 이민자들과 잘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홍보에도 적극적이다. 물론 정부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피터 버크가 하듯이 바람직한 현상이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인구 격감에 따르는 노동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다. 다시 말 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에도 나왔듯이 아주 값싼 임금으로 많은 노동력을 부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의 양성을 위해서이다. 자본가에게는 산업예비군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내려가듯이 일자리를 찾는 자들이 많으면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얼마든지 원하는 사람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바로 이와 같은 자본의 노동 착취 메커니즘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국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농경사회를 파괴시키고 그렇게 집과 땅을 떠난 주민들을 산업예비군으로 흡수하여 그들을 값싼 임금의 노동자로 만들어 자본가에게 예속시키는지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를 통하여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포도는 노동자들에게 그야말로 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가들은 다문화를 환영한다. 그것이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하여 고용에 따르는 비용을 절감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의 효과는 비단 이민 노동자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자국의 노동자들에게도 미치게 된다. 즉 그들의 임금마저 깎아먹게 되는 것이다. 이민 노동자들에게 산업 교육을 시키는 것도 그들의 고용과 자활을 돕자는 순수한 목적이 아니다. 보다 더 1차적인 목적은 그 이민 노동자들을 빨리 숙련 노동자들로 만들어서 노조도 만들 수 있고 임금도 비싼 본국의 노동자들을 대체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니 자국의 노동자들은 보다 저임금이 되거나 아예 해고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이전만큼 제대로 자본가들에게 대항할 수도 없게 된다. 나 말고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기에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 나왔던 나사의 비유처럼 말이다. 바로 이러한 자국 노동자들의 이민 노동자들에 대한 불만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북구 유럽 사회조차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척을 기저로 하는 네오 파시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날로 확대되고 있는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다문화는 자본가에게 이로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자국의 노동자들이 자기들과 같은 노동자인 이민자들을 적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게함으로써 정작 진짜 적대의 대상은 바로 자본가들임을 잊게 만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이 뭉쳐야 할 서로에 대한 질시과 적의로 그냥 공기중으로 휘발되어 버린다는 게 정부나 자본 주도의, 그렇게 위로 부터의 다문화가 가져오는 중대한 해악인 것이다. 사실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문화로 인한 갈등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민 노동자의 값싼 노동력과 대체 가능성 때문에 노동자로 누려야 할 권익의 축소와 복지 혜택의 감소가 그 주 원인인 것이다. 그렇게 사실은 자본가들 앞에 세워야 할 목의 핏대가 이민 노동자들을 향해 세우다보니 결국 그 차별과 적대로 참지못한 이민자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단순한 상황적 혼종성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본 주도의 다문화가 명백히 세계 곳곳에서 갈등을 조장하고 그 폐해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그 구체적인 것을 해독하고 다문화가 본래 추구하는 가치인 공존과 포용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형성할 수 있는지 보다 제대로 된 깊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나면 우리는 건너 뛰어야 할 다음의 징검다리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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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불상에 대해 본 적이 있는가? 바로 간다라 불상이다. 간다라 불상은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혼합되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문화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난 결과물을 볼 수 있다. 필리핀하면, 스페인과 토종의 문화가 혼합된 문화를 떠올리고, 미국하면, 유럽과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문화가 혼합된 나라를 떠올리곤 한다. 그에 반해, 한국을 떠올릴때, 우리는 여러 문화가 혼합된 나라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로 발전해 왔다는 식으로 인식한다. '문화 혼종성'은 서문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말을 적어놓으며 책의 주제를 적나라 하게 설파한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이다' . 한국과 같이 민족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런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테제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주의라는 감정을 빼고 이성을 사용하여 다시금 이런 주장을 살펴본다면, 받아들이기 그리 힘든 테제가 아니다. 사실 독자적으로 탄생하고, 생장하는 문화가 어디있겠는가? 모두가 주변의 문화들과 상호작용해 낸 결과가 지금의 문화일 것이다. 책은 이러한 주제를 잘 드러낸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즐겨먹는 김치만 하더라도,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고춧가루에 의해서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한국인의 식문화 역시 다른 문화와 식료품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가 과거보다 현저히 두드러진 요즘은 사실 문화의 독자성보다 혼합성이 훨씬 우세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의 말은 현대사회에 보다 유효한 테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책은 모든 문화가 상호작용의 결과, 혹은 혼합의 결과로 보여주는 적절한 예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여러 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을 차용한다. 그들의 사유를 통해서, 과연 문화 독자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문화적 독자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운동들, 반 세계화 운동은 그것이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운동들은 결국 이룰 수 없는 목표들로 인해 사장될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한다. 기존에 가지던 통념을 배반하는 책이라 더 훌륭하게 느껴졌다. 한국문화의 독자성이라는 것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탓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이 제시하는 견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교조화 한다면, 우리가 타자와 구분되는 지점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몰개성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고, 개성을 상실한 사회일 것이다. 독자성에 대한 환상을 버리되, 결국 우리만의 개성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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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은 그닥 어렵지 않다. 비교적 얇은책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수월한 편이다. 그런데 책 내용이 다분히 이상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고,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비판에 너무도 쉽게 반박 당하기 십상일 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아닌 게 아니라 글쓴이의 주장에 대해 '해제'를 달아놓은 이가 옹호하는 주장과 비판하는 주장을 함께 실어놓아 '균형'을 잡아줄 지경이다.
내용인즉슨, 사람이 만들어놓은 '문화'라는 것이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민족적 영향을 받아 각각 '고유성'을 띠기 마련이지만, 이젠 그 경계를 가르는 것들이 애매해지고 모호해졌기 때문에 섞이고 또 섞여 '잡종'이 만들어졌다는 게다. 허나 잡종이라는 말이 욕설을 뜻하기도 하니 '혼종'이라는 말로 순화하여 뒤쳐(번역)놓은 듯 싶다. 그리고서 글쓴이는 이 '잡종'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꼭 문화가 아니더라도 '면역'이라는 점으로 보았을 때도 '순수한 혈통'보다 '혼합된 혈통'이 더 많은 면역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하다는 의학적 견해가 상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터부'라는 관습도 근친교배를 하면 할수록 번식에 불리하다는 것에서 출발하기에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한 나라의 문화도 경계를 넘어 다양한 문화와 섞이면 더욱 다양하고, 더욱 큰 장점을 갖춘 '보편문화'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섞이고 또 섞이면 그만큼 유리해지고, 이전 보다 발전된 문화양상을 선보이니 좋다는 이야기다.
또 글쓴이는 이런 현상이 인위적이기보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하였다. 인종이 섞이고, 민족이 섞이고, 더불어 고유한 문화가 한데 뒤섞여서 또 다른 문화를 낳고, 그 문화가 처음에는 이질적이라 거부감을 갖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보편적인 문화로 발달해 또 다시 고유문화가 되는 등등...그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일일이 예를 들 수조차 없는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 가운데 맥도날드 햄버거를 살펴보면, 미국적인 음식문화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전통음식과 결합해 새로운 햄버거가 등장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김치버거, 라이스버거 등이 있을 테다.
이렇듯 '문화 혼종성'이란 이미 대세이며, 자연발생적인 면까지 갖추었기에 먼 미래에는 모두가 '잡종'일 테고, 이미 우리 모두는 '잡종'일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가능해진다. 헌데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마냥 달갑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로 '지젝'이 지적한 것과 같이 '문화 혼종성'이 '정치성'과 만나면 극렬한 반응을 보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민족말살정책'을 펼친 것을 '문화 혼종성'의 예로 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또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제 것이라고 우기며 '문화 혼종성' 어쩌구를 나불댄다면 그 긍정적 시너지 효과를 찾아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섞이고 또 섞이면 나중엔 '고유문화'라는 것이 사라지게 된다. 결국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진다는 얘기인데...이게 마냥 장점이기만 할까? '다름'이 사라진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할 것인데 말이다.
정리하면 '잡종의 우수성'은 인정하는 바다. 허나 좋으니 모두모두 섞어보세~는 아니올시다란 말이다. 그래서 글쓴이의 주장에 일면 공감하는 바가 크지만 '정치성'은 쏙 빼고, '고유성'도 웬만큼 피하고서 섞으면 좋을 듯 싶다. 암튼 문화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유동하는 요즘 세상에 섞이는 것은 대세이니 거기서 장점을 찾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글쓴이의 주장에 십분 공감을 표하며 살짝 비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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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혼종성, 세계화를 막을 수 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러한 제목과 논의가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그것을 너무 당연한 현실로 여겼기에 오히려 그것에 관한 진지한 통찰이 부족했음을 느꼈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이다.’, ‘모든 문화의 역사는 문화적 차용의 역사이다.’, ‘오늘날, 모든 문화는 경계의 문화이다.’ 라는 책의 서문을 여는 문구는 책에서 논의되는 문화라는 것에 대한 기본 전제를 보여준다. 순수한 그 자체의 문화란 허상이며, 문화란 이미 혼종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또는 그것이 늘상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첫 장에서는 각양각색의 사물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혼종성의 실례를 살펴본다. 이 후 둘째 장에서는 논의에서 등장한 혼종성에 관련된 용어의 의미를 짚어본다. 셋째 장에서는 혼종성으로 빚어지는 각양각색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서 이에 따른 반응과 그 결과들을 각각 분류해본다.
저자에 따르면 혼종성으로 빚어지는 결과의 시나리오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다양성이 줄어드는 문화적 균질화를 이루거나, 전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반발로서 반지구화 행태가 드러나거나, 상층과 하층의 문화로 공존하는 문화적 양층언어를 나타내기도 하며, 끝으로 전통과 병합되어 새로운 질서를 나타내는 ‘크레올화’로 나타난다. 다만 이런 네 가지의 시나리오는 항상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나리오로 변경되기도 하며 또한 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함께 진행되기도 한다.
책에서 논의되는 문화 혼종성이란 무조건으로 지향할 긍정적 가치라기보다 문화의 본질을 이루는 하나의 특징에 가깝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외치는 다원화, 다문화주의는 주로 이민자를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많이 이용됨으로써, 늘 추구되어야 할 진보적 가치로만 여기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한 결과는 늘 좋고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며 그 상황에 따라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문화의 혼종성이 과거보다 가속화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러한 본질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각 민족과 각국의 상황에 맞게 대응하고 적응하는 해야 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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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치솟는 기름값 덕분에 귀에 익은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하이브리드(hybrid)인데, 원래는 동물이나 식물의 잡종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문화 혼종성(cultual hybridity)'란 제목에서 내용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아 보였습니다.
자신을 유럽인이 중동 혹은 극동이라 부르는 곳에 매료된 라틴 문화에 항상 관심 있는 북유럽인이라 소개한 저자는 ‘문화’라는 개념은 태도, 사고방식, 가치와 이런 것들의 표현 혹은 인공물, 실천, 재현을 보여주는 전령이나 상징화를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범위로 정의하면서, 혼종성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은유적이고, 묘사적이면서도 설명적인, 파악하기 힘든 불명확한 용어(p. 86)이기에 이것을 분석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각양각색의 사물, 각양각색의 용어, 각양각색의 상황, 각양각색의 반응, 각양각색의 결과”이렇게 총 5장으로 이루어진 문화 혼종성은 먼저 혼종성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인공물, 실천, 인간과 관련된 세 가지 혼종화 과정에 대한 논의로 시작합니다. 특히, 16, 17세기 유럽의 용병부대가 국제적이고 다국어를 사용하면서 유동적인 조직이어서 근대 언어사회의 언어 혼합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 인상깊었습니다. 또한, 문화적 만남의 장소도 중요하다고 언급하는데, 특히 저자는 항구와 경계지역이 교류와 혼종화를 선호한다고 설명합니다. 베니스, 리스본, 암스테르담 등의 항구와 동유럽의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간 국경지대를 예로 들면서 문화간 교차로를 뜻하는 ‘상호 문화’ 개념을 설명합니다.
그 뒤로 문화적 교류로 인하여 나타나는 반응으로 외래 문화의 유행으로 대표되는 용인 혹은 환영, 문화적 침략에 대항하여 문화적 경계를 사수하는 저항, 외국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정화, 분리, 적응의 반응에 대해 분석하며 각각의 반응을 나타내는 많은 역사적 사례를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사례 및 혼종성의 결과를 분석하면서 저자는 이 세상에선 어떠한 문화도 섬이 될 수 없으며 족립적인 문화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즉, 전통에 참여하는 개인과 집단은 모를 수 있겠지만, 전통을 끊임없이 건립 중이거나 재개방 되는 건축 공사지역에 비유하면서 모든 문화적 전통은 이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안적인 전통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미래의 문화에 대한 가능성으로 전지구화의 결과인 균질화, 저항 혹은 반전지구화, 전지구적 문화와 지역 문화의 결합을 의미하는 문화적 양층 언어, 마지막으로 새로운 혼합체의 등장 이렇게 4가지의 결론으로 문화 혼종성에 대한 논의를 매듭짓습니다.
최근 외국 출신의 인물이 국화의원이 되는 등 다문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다문화 주의에 관한 이택광 교수의 해제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다문화 주의를 근대성에 내장되어 있는 기본 원리라고 파악한 찰스 테일러와 다문화 주의 자체를 자유주의적 환상이자 기만으로 인식하면서 비판을 제기한 슬라보이 지젝의 견해를 소개하는데, 다문화 주의에 관해서 다시금 생각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화라고 하면 그냥 K-POP, 한류 등으로만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문화의 교류 및 섞임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배울 수 있었지만, 저자의 관심 있는 라틴문화와 중동 중심의 사례와 물론 우리나라보다는 많은 교류가 있었고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과 일본에 한정된 동양 문화에 대한 언급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