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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스 페르민의 <눈>은 한 권의 소설인 동시에 시집이며 시집인 동시에 소설이다. 이와 같은 구성을 통하여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목표는 분명한 듯 보인다. 궁극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은 '시'이며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결국 소설에서 집약되는 '눈'이라는 것이다. '눈(雪)'은 백색인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無)이며 '눈멂'을 통한 흑색 공간과도 맞닿아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한 편의 꿈인 동시에 어느 날 꿈속에서 보았던 아련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생일날 아침 유코는 은빛 강가에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승려의 미간이 깊은 실망을 나타내며 찌푸려졌다. 태양이 물결무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개복치 한 마리가 자작나무들 사이를 지나 나무다리 아래에서 사라졌다. "시는 직업이 아니야.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흘러가는 물이다. 이 강물처럼 말이다." 유코는 고요하게 흘러 사라지는 강을 깊이 바라보았다." (p.11)
신도 승려였던 유코의 아버지는 아들 유코가 승려 혹은 군인이 되길 바랐다. 유코는 결국 아버지와의 타협책으로 겨울에만 77편의 시를 쓰기로 한다. 눈에 매료되었고, 7을 숭배하는 시인이었던 까닭이다. 유코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이 또한 의미가 있어서 유코가 쓰는 하이쿠 역시 열일곱 음절로 구성되는(5-7-5) 짧은 시로 한 음절도 더할 수 없다. 눈과 하이쿠에 매료되었던 유코의 시는 외부의 주목을 받게 되고, 궁정 시인이 방문하기에 이른다. 궁정 시인은 유코의 시에 색이 결여된 것을 지적하면서 소세키 선생에게서 배움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소세키 선생을 찾아 나섰던 유코는 도중에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유코를 구원한 것은 이미지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세키를 구원한 것도 하나의 이미지였다. 주인공 유코와 스승 소세키의 삶이 젊은 여인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로 엮인다. 다만 유코가 보았던 것은 죽어 있는 여인이었고, 무사였던 소세키가 본 것은 '직선의 단 한 줄에 삶과 생명이 걸린' 곡예사, 즉 프랑스 파리에서 온 네에주(눈)였다.
"소세키의 눈에 그녀는 한 편의 시였다. 한 폭의 그림이었고 서예였다. 춤이었고 음악이었다. 그녀는 네에주였다. 눈. 예술의 모든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p.78)
네에주와 소세키는 결혼하여 딸(봄눈송이)을 낳고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네에주가 마지막 줄타기 공연을 시도하기 전까지. 네에주의 공연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사함들. 너무도 높은 곳에서 하얀 점처럼 나아가던 그녀는 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추락하여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소세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딸의 교육과 예술에 전념한다. 밤낮으로 자신의 아내를 그리며 눈을 혹사하던 소세키는 실명하고 만다. 유코는 자신이 보았던 네에주의 시신을 소세키에게 알린다. 유코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지만 소세키는 네에주를 보러 가자는 유코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자신이 갈고닦은 예술을 유코에게 가르친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사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p.100)
8,90년대를 지나쳐 온 사람들은 시에 대한 막연한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력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제도적 자유를 꿈꾸던 그 시절에 시는 곧 영혼의 탈출구였고, 욕망의 해방구였으며, 궁극의 아름다움이었다. 시는 작가가 정의하지 않은 무한의 아름다움이었으며, 구석구석 묘사하지 않은 상상의 공간이었으며, 흰 여백에 그려진 나만의 꿈이었다. 수많은 '계절들이 시간의 모래시계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시간이 되면 언젠가 시를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움켜쥔 손 안에서 화석처럼 구르고 있었다. 앤 카슨의 소설 <빨강의 자서전>을 떠올리게 하는 막상스 페르민의 <눈>. <눈>을 읽는다는 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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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몰랐으면 어땠을까? 앞도, 뒤도, 옆도 바라보지 않는 시에 대한 궁극을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의 즐거움이 곧 삶의 행복이며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삶을 나는 견딜 수 없었고 방황의 그림자를 끝내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행히 고통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시의 의지가 있었기에 이 세계를 단단히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시가 우리 몸 밖으로 내 몰린 삭막한 풍경에서 막상스 페르민의『눈』에는 하염없이 시를 쓰는 남자, 유코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삶을 본능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시인이 하나의 직업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삶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였으니까.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그는 마음속에 눈을 품고 사는 존재였다. 눈은 시이며, 시는 눈이었다.
그는 눈의 깃든 아름다움을 말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최고의 시인이었다.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시인의 길을 걸어가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의 시에 색(色)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생겨났다. 순백색이라고 믿었던 눈의 아름다움은 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빛과 색을 똑같이 받아들이지만 놀랍게도 빛이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라면 색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가 빛난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은 일이고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망적으로 하얗기만” 하는 절망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어쩌면 한 편의 시에 색이 있다면 그 색이 시가 될 것이라는 자각은 눈의 여섯 가지 특징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은 색채의 대가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통해 가능해졌다. 이제까지 무채색이었던 그의 순백의 시는 무지개 색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막싱스 페르민의『눈』은 ‘한 편의 소설이면서 한 편의 시’가 되는 이야기라 쉽게 읽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소세키 선생이 예상과는 달리 눈먼 화가여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강도는 오히려 낮은 편이다. 그 보다는 “사랑이란 가장 어려운 예술”은 매우 친숙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소세키 선생과 곡예사의 사랑은 내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가는 낭만적인 보통의 시간에다 죽음으로 슬픔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나 멈추지 않고 사랑을 확장시킨다. 글을 쓰는 것, 춤을 추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들의 결정적인 진실은 사랑의 투사라는 것. 그러면서 예술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둘러싼 비밀 하나를 펼쳐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곡예사의 예술’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100p)
돌이켜보면, 예술가들은 특별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특별한 운명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 있듯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곡예사처럼 아름다움의 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만 한다.
시를 몰랐으면 좋았을까? 아니다. 시를 몰랐으면 아름다움을 끝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이며 꿈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팽팽한 줄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과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사랑과 예술은 닮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눈부시게 빛나는 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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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어젯밤에 눈이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고 살포시 내려앉은 정도다. 겨울이니 눈이 오는 건 당연하지만 눈에 대한 감각은 저마다 다르다. 내게 눈은 어린 시절 사춘기의 치기로 시작된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그 즈음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가출은 생각조차 못 했는데 눈이 내리던 겨울에는 이상하게 눈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건 지금 그때의 나를 포장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십 대의 시골 촌 아이가 어디를 갈 수 있었을까. 용돈의 개념도 없이 그냥 학용품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타 쓰던 아이. 엄마에게 참고서 가격을 부풀리는 대범함은 잃지 않았다. 혼이 난 기억은 많지 않으나 괜히 뾰로통해서 집 박을 서성이곤 했다.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눈』 을 읽으면서 왜 과거의 나를 찾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부모는 내가 무엇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고 내가 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한 기억도 없다. 시인이 되겠다는 유코에게 승려인 아버지는 시는 직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며 흘러가는 강물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유코의 재능은 뛰어났고 그는 시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시인의 생을 택했다.
눈은 시이다. 눈부신 흰빛의 시. (16쪽)
열일곱 소년이었던 유코에게 눈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그것은 시가 되었다. 시를 탐닉하던 그에게 세상은 단 하나의 시였다. 그 중심에 눈이 있었다. 그러니 겨울에만 시를 쓸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퍼지고 원한다면 궁정시인이 될 수도 있었다. 유코는 7년 후에 왕을 뵙기로 한다. 유코는 천재였을지도 모른다. 눈을 바라보며 눈을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눈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눈을 지닌 천재 소년. 그만의 감성은 모두를 감탄하게 했으니까. 그러니까 소설이 발표된 1999년이라면 이 아름다운 소설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나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할 수가 없다. 왜일까. 1999년의 나라고 가정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눈은 현실의 더러움과 추함을 감추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이미지로 제격이다. 찰나의 아름다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마는 환상의 빛, 백색이 주는 황홀감, 그것을 사랑의 순수로 연결 짓는 탁월함을 막상스 페르민는 알고 있었다. 미소년 유코를 통해 아름다움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는 잘 표현했다. 성장과 동시에 욕망의 크기에 따라 배움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시에 색채를 더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유코 내면의 욕망을 일으켜 세웠고 동력으로 작동한다. 스승을 찾아 떠난 유코는 일본 알프스를 지날 때 눈 속의 한 여인을 마주한다. 수정처럼 투명한 관 속에 있던 죽은 여자. 눈 속에 갇힌 여자,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이 더해진 것이다. 영민한 독자는 알게 된다. 그 죽은 여인이 유코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말이다.
유코가 만난 소세키 선생은 눈이 먼 장님이었다. 눈이 먼 사람이 색을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빛은 내부에 있고 자신 속에 있다는 스승의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파랑새가 바로 곁에 있다는 걸 모르고 평생 찾아다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처럼. 유코는 스승의 예술이 단 하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럽에서 온 줄타기 곡예사 여인 네에주(neige 눈)을 어떻게 만나 사랑했고 어떻게 잃게 되었는가를. 눈 속에 잃어버린 스승 소세키의 사랑을 제자인 유코가 찾게 되는 과정은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다. 눈으로 시작된 인연, 유코의 시에 이제 색채가 입혀질 것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100쪽)
눈(雪)이라는 아름다운 소설을 쓰기 위해 프랑스 작가는 일본의 하이쿠를 접목시킨 시도는 훌륭하다. 막상스 페르민는 결국 사랑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 시의 형식과 눈의 이미지를 데려왔다. 사랑은 눈처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라는 걸 짧은 소설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사랑을 하는 건 시를 쓰는 것처럼 어렵고 영원한 사랑은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을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이라는걸. 사랑과 시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서로 사랑했다. 줄 위에 머물러 있었다. 눈으로 지어진. (124쪽)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오래 갇힐 수 있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내가 메마른 감성의 독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십 대의 순수했던 소녀 감정을 불러오기에 지금의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눈을 바라본다. 헤어 나올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슬프다. 너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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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를 그릴 때 흰색과 검정색은 쓰지 않는다. 물로 색의 농도를 조절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내기 위해서다. 터치감이 보여야 하기 때문에 흰색은 기본 바탕인 종이를 이용하고 검정색은 세 가지 색을 섞어 만든다. 2019년에 발행된 막상스 페르민 저자의 <눈>을 읽고 어렴풋한 이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인 유코가 하얗기만 한 자신의 시에 색을 더하는 과정이 수채화 같았기 때문이다. 흰빛과 흰색은 자연에서 준 빛깔과 색채라 인간이 만들어내기는 어렵구나. 그러면 어떤 색이든 흡수가 가능하겠구나 하는 ‘흰’의 멋을 알게 된 책이었다. 여러 색을 칠해도 밑의 색을 덮지 않고 빛과 결이 드러나 매력적인. 하이쿠와 눈雪에 매료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 유코 아키타. 그의 습작을 본 한 궁정 시인은 유코에게 조언하고, 이를 따라 시라는 예술에 도달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 120쪽 정도의 짧은 이야기지만 여기서 전달하는 ‘눈’은 확실하다. 하얗다. 자연을 얼려서 보존한다. 계속 변한다. 표면이 미끄럽다. 물이 된다. 그래서 그림이고 서예이고 춤이며 음악이다. 얼음 아래 잠들어 있는 네에주(눈)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코는 소세끼 대가를 찾아가는 길에 거센 눈보라를 만나지만 아름다운 백색의 이미지로부터 구원받는다. 한순간도 줄에서 내려오지 않고 머무른다. 색채 3부작에 대해 쓰고 싶었다던 작가 막상스 페르민은, 1부작인 <눈>을 통해 좋아하는 행복의 색 중 흰색을 먼저 얘기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한 본질은 다채롭게 살아 있는 삶이다. 시간과 존재의 흐름을 알게 되는, '결코 싫증내지 않을 반짝이는 삶'이 될 수도 있겠다. 이를 위해서는 묵묵히 하던 것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함을 알려주었다. 사실 어찌 보면 지극히 익숙한 내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가장 어려운 길을 거쳐야 자신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 위안을 얻고 간다. 물론 작가가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네에주와 소세키의 삶보다 봄눈송이와 유코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진정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소설의 끝에 다다라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데 이보다는 네에주와 소세키에게 초점을 맞췄다. 안타까움이 동반되었지만 그마저도 다채롭고 반짝였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