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을 모두 읽고 나면 그 중 몇 편을 추려 옮겨 적는다. 그리고 그렇게 옮겨 적은 시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앞에서 뒤로 읽기도 하고 뒤에서 앞으로 읽기도 한다. 시에서 시로 건너뛰기도 하고 시에서 시 아닌 것으로 널뛰기도 한다. 이미 알고 있는 단어가 아닌 단어들은 몇 차례 소리 내어 발음해 본다. 어떤 단어들을 혀에 추가한다. 고양이는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력이 있다는데, 나는 내 혀가 시를 기억하면 좋겠다. 아직 별의 울음소리는 도착하지 않았다
꽃차례처럼 별이 운다 밤이니까 더 가까이 운다 별보다 더 맑은 소리는 별들 사이에 있다 거울도 어둠도 견디지 못하면서 금 가도록 운다 되돌아오지 않는 소리를 머금고 운다 맨살과 맨살이 부딪치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울고 있다 하지만 창백한 별빛만 지상에 왔다 별의 울음 소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별의 거처를 아니까 날이 밝아도 이별은 아니겠지만, 별도 꽃도 서로 갈피가 없다 녹슬지 않는 소리는 없기에 별빛은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담았다 별의 눈매는 가벼워서 별빛은 벌써 떠나고 눈물의 시늉만 저 별에 남았다 오, 우리가 방금 지켜본 별은 비문碑文이 있다
몇 편의 시인가에서 별이 발견되고 나서야 오랜만에 별을 떠올린다. 별을 혀에 올려놓는다. 별을 혀의 여기저기로 옮겨 맛본다.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으로 별의 맛을 대체해본다. 그것이 반짝이는 점이 아니라 번쩍이는 구가 아니라 평면이 될 때까지 입을 앙다문다. 거기에서 살아보지 못하고도 거기에서 살아간다. 별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마음이 세를 내고 잠시 머물기도 한다.
별과 별의 직선
별이 잠드는 곳은 별들의 숫자만큼 물웅덩이가 널렸다는 서쪽 밤하늘에 별보다 더 많은 손금을 남기는 별의 잔상은 지상에서 건너간다는데 그게 위독인가 싶어 별과 별 사이 가장 빠른 직선을 그어보았다
나는 홀로 별에 머물며 먼 곳에 남아 있는 고양이의 송곳니에 몇 번이고 손가락을 내어준다. 작은 구멍이 뚫릴 때도 피가 맺힐 때도 가만히 버틴다. 작은 피가 둥둥 떠올라 별을 벗어나도 가만히 바라본다. 별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지 못한다.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것은 빛뿐이다. 피는 이제 핏빛이 되어 날아간다. 내가 혀로 손가락을 지혈하는 동안 먼 곳에 남아 있는 고양이의 송곳니에 핏빛이 도착한다.
민박
툇마루의 놋요강에 오줌발을 내린다 막 개칠을 시작하는 소나기는 미닫이부터 적신다 비안개의 아가미를 숨겨왔던 새벽이다
추녀의 숫자만큼 뒹구는 빗방울 느린 시간의 뒤에 좀벌레처럼 머무는 빗방울 머위잎을 기어이 구부리는 빗방울
빨랫줄의 참새가 방금 몸살을 터는 중이다 자주달개비 혀에 보랏빛이 번지는 중이다 질펀해질 마당이 막 소란해지는 중이다
자세히 보니 모두 알몸이어라
별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들은 제각각 별이 되어 분가한다. 일가를 이룬 소문들이 별에 찾아올 때마다 송곳니로 손가락을 깨문다. 저마다 손가락을 깨물고 핏빛은 어깨를 걸고 먼 곳을 향해 길을 나선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으며, 고르게 빛을 내어 수다한 이야기가 되고자 한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빛이 조용히 별로 향해 돌아설 때 모두는 측은한 마음이 되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젊은 날의 내 물고기는 신호등 앞에서 다시 나타난다
비 오는 저녁의 네거리에서 내 차는 잠시 미끄러지면서 중력을 잃었다 마찰음 탓에 길은 귀를 달고 나는 길을 닮으며 짐짓 외톨이가 되었다 여기서도 한 뼘의 고요는 뭉클하다 신호등의 불빛이 외눈박이에 박힌 것처럼 빗줄기마다 불빛을 골라 숙명을 떠올리는 중이다 초록색은 없지만, 방금 붉은색 신호등은 뚱뚱하고 오래된 나의 기록에 빗금을 친다 옆 차선으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젊은 날의 내가 도착했다 키릴 문자의 육체를 더듬는 서른 살, 붉은 신호등이 만들어내는 물고기 때문에 아가미로 숨쉬곤 했다 아가미 호흡은 비늘이 생기는 젊은 사람의 모국어이다 모든 발언권을 얻었기에 흐느끼던 그림자 속에서 질감을 찾아내려는 젊은 날의 복제가 여기 있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다시 생을 되풀이하는 거지 저녁이라는 입술이 닫히고 초록빛의 동공이 커졌다 내가 통과한 네거리는 젊은 날의 내부, 한때 이 거리의 가장 흉흉한 전류가 지나가는 지점이다
이번 송재학의 시집에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시집의 제목인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은 딱지본 (1900년대 초부터 활판 인쇄기로 찍어 발행한 국문 소설류를 이르는 말로, 구활자본이라고도 한다) 옛 소설에서 따온 것이다. 표지가 아이들의 딱지처럼 울긋불긋 하여 딱지본이라 부른다고 한다. 시집의 3부는 온전히 이 옛 소설들에 할애되어 있다. 시이면서 먼 곳에서 날아온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송재학 / 슬프다 풀 끗혜 이슬 / 문학과지성사 / 130쪽 / 2019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