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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스토리라인이 마치 배경처럼 희미하게 깔리는 소설이 있다. 마치 안개가 자욱했던 어느 날의 숲 속 풍경처럼 전체 숲의 모양은 가늠할 길 없고 키 큰 나무의 도드라진 우듬지만 듬성듬성 눈에 띄는 것처럼 소설에서 스토리라인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작가의 오랜 사유가 빚어낸 몇몇 문장만 겨우 눈에 띄는...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가 18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그런 소설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능력에 따라 분명한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소설 속 몇몇 문장들을 화두처럼 부여잡고 안개 자욱한 숲 속 산길을 겨우겨우 찾아가는 그런 소설. 깨침이 부족했던 탓인지 작가는 좀처럼 내게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기다' 싶어 찾아 들어가면 어느새 다시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나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작가의 사유 속에서 놀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도 결코 읽기를 끝낼 수 없는 책들이 있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같은 영원한 순환구조에 독자를 가두어버리는 책들. 언제나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어버리는 책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비유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책은, 독자로 하여금 너무 많은 출구를 가지게 하는 까닭에, 영원히 그 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p.211)
소설에서 나는, 10여 년 전의 봄, 아무런 기약도 없이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짐 가방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10여 권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 '노자', '장자', '우파니샤드', 스피노자와 카프카, 호메로스와 그리스 비극 작가들 등등의 책들이... 나는 완전한 고립 속에서 책 속에 담긴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스스로를 치유한다. '우리의 생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소설적인 이야기인 셈'(p.185)이라는 작가의 주장처럼 이 소설 또한 허구이되, 많은 부분이 에세이 양식과 실제 경험이 뒤섞인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실제 경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유배지이자 은둔의 공간인 제주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진다. 장 자크 루소가 그러했듯 자발적인 고독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여러 고전에 녹아든 삶의 진실들과 마주한다. 윤슬이 반짝이는 서귀포의 바닷가, 태고의 풍경을 간직한 산굼부리, 축구장처럼 작은 섬 마라도...
"반면에 사랑을 잃는 결별은, 역설적이게도 자기를 되찾아준다. 자기를 잃으면서 자기를 되찾기다. 자기를 되찾음 가운데서 자기는 소름 끼치는 자유를 발견한다. 그것은 너무 무한하기 때문에 오히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절대적 구속 상태와도 같다. 그것은 일종의 미로에서 길 잃기와도 같다. 때문에 거기서 또 다른 결별과 만나지 않으면 방황은 오래가고, 자아는 자기 없는 자유 속에서 사망한다." (p.245)
소설 속 내가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무작정 떠나기로 한 느닷없는 결정과 1년여의 제주 살이. 유배와 은둔의 시간 속으로 잠깐 끼어든 J. 그리고 그녀의 존재로 인해 사유의 폭은 넓어지고 고독은 깊어졌다.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미망에 휩싸였던 것처럼 작가와 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언감생심 공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작가가 사유했던 모든 것들을 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부드럽게 녹여내려 했던 애초의 목적은 자격도 없는 독자인 내게 이르러 무참히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비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다. 그 이름 속에, 한 인간의 전체 운명이, 아니 진정한 운명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최후의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의 참된 이름을 알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비밀스러운 참된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은 그저 햇빛이 드리우는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p.131)
사람들은 말한다. 길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그러나 아주 가끔 우리는 길을 잃기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도 있다. 인생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따라 심하게 흔들리기도 한다는 걸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깨닫게 된다.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 존재와 삶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려는 작가적 열정이 가닿으려는 지대'가 '문학과 소설이 꿈꾸는 어떤 낯선 경이로움"이라고 말하는 작가. '순수 산문과 허구의 이야기 사이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다'는 이 소설은 나에게 삶의 길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때로 우리는 길을 잃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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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선로 위를 꾸준히 달린다. 북적대는 도시의 빌딩을, 논밭과 농장을, 산의 심장에 뚫린 터널을, 하늘길을 여행하는 태양과는 반대쪽으로. 마침내 기차는 나를 정동진역에 건네주고는 동해안을 따라 다른 도시로 떠난다. 신을 벗어 한 손에 들고 파도 소리를 따라 모래밭을 걸어 도착한 동해. 나는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흐릿한 경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슬픈 영혼을 대신해 끊임없이 바위에 투신하는 파도의 무심한 노래에 마음을 맡긴다. 하얀 거품으로 산산이 조각나고, 꿰맨 흔적도 없이 온전히 부활했다가, 또다시 자살을 반복하는 파도. 유쾌하고, 울적하고, 신선하고, 쿰쿰한, 지구의 끊기지 않는 배경음.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설 때마다 모래 위 내 발자국을 지워가며 다가오는 바다. 하늘이 바다에게 태양을 넘겨주는 분홍빛 의례가 끝나자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다시 청남색으로 그리고 먹빛으로 흐려진다. 나는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에 희미해진 내 고민과 슬픔을 밤의 베일로 덮은 후 바다를 떠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다는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겪었을 때, 인생의 향방을 가르는 결정이 필요할 때, ‘나’라는 걸 도통 찾을 수 없을 때, 삶이란 걸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그때마다 나는 바다로 갔다. 어느 바다든 상관없었다. 바다는 모두 서로 닮아있기에. 바닷가에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잠적한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매일 바닷가를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방이 바다로만 둘러싸인 섬에서 일 년을 보낸다면?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배경이 제주도다. 한국 최고의 인기 관광지. 섬 한가운데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한라산과 백록담이 있고, 바다에서 떠오르고 바다로 빠져드는 태양을 매일 감상할 수 있는 곳. 제주도에서 하룻밤 보내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겠지만, 몇 달을 살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작가는 제주에서 일 년 가까이 거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니 부러울 따름이다. 물빛 표지에 비정형으로 일렁이는 흰색 파동이 물 위에 떠다니듯 그려졌고, 오렌지색으로 강조된 네모 안에 제목이 적힌 책 표지는 저절로 손을 뻗게 만든다. 남해 바다색의 책장을 넘기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우선은 독특한 형식이 눈에 띈다. 흔히 우리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누가 무엇을 했는데 어떻게 되었다’는 서사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서울 사는 남성 화자가 책 열 권을 가지고 훌쩍 제주도에 와서, 제주 곳곳을 배경으로 온갖 사유를 하다가, 마라도에 한 번 들르고는 제주도를 떠난다. 그의 심장 속에 수선화, 오렌지색 파카, 바다, 동백꽃을 간직한 채로. 특별한 갈등구조나 사건은 없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미국의 송어낚시』처럼,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어렵고, 요약할 필요도 없는 형식. 저자는 전작 『137개의 미로카드』처럼 문단과 독자에게 질문하는 듯하다. “과연 소설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요?”라고. 소설 전체를 꿰뚫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주인공의 행위가 아니다. 길지 않은 장마다 현재의 사건보다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철학, 예술, 역사와 사유가 더 자주 표현되어 있다. 각 장의 연결은 갈등상황의 진행이라기보다는 감정과 생각의 흐름이다. 작가는 사유의 파편들을 소설에 흩뿌려두었다. 사건과 장소도 파편들 속에 숨어 있다. 모자이크나 퍼즐처럼, 작가의 생각은 책을 읽은 사람의 마음속에서야 비로소 맞춰진다. 독자마다 분명 조금씩은 다르게. 아마도 작가의 의도대로 말이다. “문학이 창조되는 것은 나의 글쓰기로부터가 아니라 어쩌면 독자들의 글읽기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137개의 미로 카드』, p66)
작가가 겪고 느낀 제주의 편린은 소설 곳곳에 흩뿌려져 있어, 책의 어느 부분을 읽든 독자는 제주도를 한 움큼 거머쥐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가, 산굼부리, 마라도, 추사의 유배지, 동백꽃. 그리고 예쁘고 아름답기만 한 자연이 아닌, 무시무시하고 가차 없는 자연의 모습과, 4·3 사건과 유배지로서의 역사까지도. 저자의 사유의 길을 따라 산책하다가 독자가 책 속에서 도착하는 곳은 제주일 수도, 제주가 아닐 수도, 어쩌면 마음의 고향일 것이다. 나는 무수히 많은 밑줄을 치며 읽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가장 깊게 박힌 문장들은 책 뒤표지에도 실린 문장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생은 가차 없는 것이다. 존재하기, 그것은 사라지는 방황이다. 사랑하기, 그것은 가혹한 고독의 내면성이다. 글쓰기, 그것은 무한히 길게 잡아 늘여진 불면의 밤들이다. 사막은 지나간 모든 발자국들의 흔적을 지운다. - 제2부 제16장 <가차 없는 생>
그뿐이랴. 책에서 여러 번 만나게 되는 카이로스의 시간과 운명에 관한 사유와 표현에 나는 공감하고 탄복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구분하던 두 가지 시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인생이 수평적이고 밋밋한 일상인 크로노스의 시간뿐이라면 아무리 장수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사는 풍요로운 30년보다는 내 마음먹은 대로의 단 3년을 원한다.
불현듯 내 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kairos들, 황홀했던 ‘때’들을 떠올려 본다; 한 권의 책에서 심장을 전율케 하는 하나의 경이로운 시구를 만나던 순간; 활짝 열린 그녀의 흰 두 다리 사이로 내 영혼이 빠져들고,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전율하며 내 몸을 힘껏 끌어당기던 순간; (중략) 길고 고통스러운 갈망과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하나의 문장을 백지 위에 옮겨 적기 시작하던 순간; (중략) 나는 이런 순간들에서만 얼핏, 영원의 빛이 내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곤 했다. (중략) 이런 순간들이 가져다주는 순수한 기쁨을 제외한다면, 단순히 지속일 뿐인 생의 시간은 얼마나 지루하고 궁핍한가, 동시에 그런 궁핍이 부재하다면, 영원의 순간들은 또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 제1부 제2장 <단 하룻밤 머물렀다 가는 나그네의 추억>
나는 동의한다. 고작 한 줌에 지나지 않을 특별한 순간들만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에는 오직 그뿐임을. 단테가 『신곡』에서 보여주었듯 인생이란 한 줄로, 혹은 몇 단어로도 충분히 요약된다. ‘영원한 순간’이라 부를 수 있는, 카이로스로. 나의 카이로스는 언제였고, 언제일까? 그렇다. 결코 미리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다.
나도 제주도에 간 적이 있다. 내게는 제주도가 어떻게 기억될까? 아니, 그보다 먼저, 기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두 사람이 함께 있었지만 서로 다른 장면을 기억하는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연인 J의 목소리로 기억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내가 있던 곳엔 네가 없고 네가 있던 곳엔 내가 없다면, 우린 과연 어디에 있었던 걸까?” (제1부 제14장 <한 장면>) 내가 기억하는 제주도는, 바다는, 고민은, 무엇보다도 ‘나’는 과연 무엇일까. 오랜 고민 끝에 알게 되었다며 화자가 고백한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닳고 낡아 간다. 사라지고, 변형되고, 증발해버린다. 기억된 경험은 순수경험과는 다른 것, 편집되고 채색된, 허구와 뒤섞인 무엇일 뿐이다. ... 나는 지금,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가 아닌 타인들의 기억과 행위, 사건들을 조각보처럼 이어붙이고 있다. ... 나는 타자들이고, 소설 속의 ‘나’ 역시 실은 ‘그들’ 혹은 ‘누군가’라고 써야만 옳다. 즉, ‘나’는 허구이고, 복수이며, 지시 대상을 잘못 찾은, 길을 잃어버린 기호인 것이다. - 제1부 제14장 <한 장면>
소설가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머릿속에 소설을 써가며 그 소설 속에 사는 주인공들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이 소설의 형식처럼, 우리의 실제 삶도 파편적 사건의 나열일 뿐이고, 머릿속에서 애써 의미라는 실로 꿰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게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잠깐. 이 장의 시작은 화자가 평생 ‘제주도의 색깔’로 마음에 새길 오렌지색 파카를 입은 J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누던 말 없는 대화, 이별을 예견한 연인들의 바닷가에서의 추억이었다. 드디어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이 시작되는구나, 싶었건만 어느새 여주인공은 사라져 버리고 수화기를 통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야 만 것이었다. 애독자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김운하 작가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나고 말았기 때문에.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김운하 작가의 팬이다. 그는 내게 눈빛이 부딪힌 찰나의 순간 영혼을 빼앗겼다는 흔한 로맨스(인지 판타지인지)처럼, 단 한 권의 책으로 톨스토이를 이기고 나라는 독자의 사랑을 모두 강탈해 간 작가다. 독자 인생에서 생존 작가, 게다가 같은 모국어를 쓰는 작가에게 마음이 뺏기기는 처음이었다. 단숨에 내 최애 작가가 된 그분은 김운하 작가, 문제작은 바로 『137개의 미로카드』였다. 뇌의 잠잠하던 영역들까지 반짝반짝 활성화되는 유쾌한 경험을,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는 처음으로 겪었다. 소설이 그렇게까지 재미있을 수 있다니! 여러 번 읽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었다. 나는 지인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동의를 구했지만 재미있다는 동의는 얻지 못했다. 『137개의 미로카드』를 읽은 후로 나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입니까?”라는, 독서가 취미인 사람들끼리 서로 취향을 알아보는 흔한 질문에, 늘 “김운하 소설가”라고 대답해 왔다. 그러면 다음 질문은 으레 “외국 작가 중에서는요?”가 되곤 했다. 왜 꼭 외국인이어야 하며, 누가 있을까? 사춘기 때는 단연 헤르만 헤세, 그 후에 톨스토이, 하루키, 쿤데라를 거쳤으며, 지금도 종, 로스, 마라이 등을 섭렵하고 있다. 요컨대, 때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유독 내 최애 국내 작가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내가 국내소설을 열심히 읽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김운하 작가는 완벽하리만치 내 맞춤 취향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매우 아쉬운 점이 있었으니, 가장 최근 출판된 장편소설 『137개의 미로카드』는 십 년도 더 전인 2001년 출판이라는 점이었다. 작가의 소설과 인문서, 심지어 공저를 모두 읽고 나서도 만족할 수 없던 독자 나. 심지어 블로그 글까지 모두 읽고는 이젠 스토커 독자로 전락해서 작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서 기회 될 때마다 차기 소설을 요구했다. 햇수가 넘도록, 끈질기게. 내게 이번 소설『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팬으로서의 성과물인 셈이다.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던가. 최애작가가 18년 만에 출판한 장편소설, 그것도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가득한 작품을 새로 읽은 지가 아직 반년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최애작가께 팬으로서의 다음 소원을 전하고 싶다. 많지는 않다. 단지 두 가지뿐. 첫 번째 소원은 다음 소설을 얼른 읽고 싶다는 것이다. 에로틱하면서도 지적이고, 농밀한 사유가 가득하면서도 노골적이고 파격적인 사랑이 상세히 그려진 장편소설로. 오직 지적이기만 했던 김운하 작가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되리라. 정말이지 기대된다! 두 번째 소원은 빨리 이뤄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젠가는 읽고 싶은 김운하 작가의 소설이다. 어감을 살려가며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한국적인 작품을! 작년에 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 『미친 노인의 일기』, 『열쇠』, 『치인의 사랑』를 읽으며, ‘일본 작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렇게 쓸 수 없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꿈꾸기 시작했다. 나의 최애작가라면 ‘오직 한국 작가만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멋진 장편소설을 써서 하드디스크에 저장해 두셨을지 모른다!(라고 열혈팬은 자유로운 몽상에 빠진다.)
다시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로 돌아와 보자. 화자는 제주의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서 나르키소스의 수선화와 물거울을 들여다보는 자들인 예술가를 떠올린다.
나르키소스는 호수의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졌다. 예술가들은 물거울에서 세계의 고뇌를 보는 자, 거울에 비친 환영을 꿈으로 꾸는 자, 혹은 자신이 세계의 거울임을 깨닫는 자들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들의 운명이다. 제1부 제8장 <물거울>
작가의 오랜 사유 주제 중 하나는 예술이었다. 중편소설 『자살금지법』에서도 예술의 위치와 예술가의 운명을 이야기했다. “만약 이 세계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눈을 돌릴 수 있는 예술이란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환한 대낮에 지쳐 빠져드는 공허한 낮꿈에 불과할 것이다. 예술이란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 그 시선을 현실로 향하고 있는 자의 깊은 고뇌일 터이니.” (『자살금지법』(김운하), 2부 7장)라고. 예술과 사회의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예술이 사회 문제에 밀착해 버리면 자칫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도구, 그것도 썩 쓸모 있지 못한 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반대로 사회로부터 시선을 완전히 돌려버린다면 소위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되어 의미 없기는 매한가지다. 숭고미는 사라진 지 오래고 상업적 가치와 예술적 의미가 동의어라도 되는 양 혼용되는 오늘날, 예술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물거울>이라는 제목은 물속에 들어서서는 물거울을 바라볼 수 없듯이, 예술이란 세계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예술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닐까. 추사는 육지에서 귀한 수선화가 제주에서는 잡초처럼 취급되어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그는 9년간의 혹독한 제주 유배 생활 중에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남겼다. 내게 추사 김정희는 유학자보다는 예술가다. 내가 처음으로 벽에 전시된 <세한도>를 보았을 때, 나는 크지도 않은 이 작품에 압도되고 말았다. 제주에서 그려졌지만, <세한도>는 제주 풍경화가 아니라 선비의 절개를 그린 추상화였다. 권세와 이익이 다해 목숨이 보장되지 못하는 제주로 귀양살이 중인 자신에게 결코 변치 않고 귀한 책을 보내준 벗 이상적을 생각하며 추사는 붓을 들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논어>의 발문으로 시작되는 <세한도>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그림이었다. 길이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만상’ 인장에는 추사와 이상적, 공자까지도 함께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추운 겨울을 그렸다지만 들여다보고 있을수록 가슴과 눈시울이 뜨거워지고야 마는 묘한 작품. 추사 김정희의 삶은 <세한도>로 불멸에 이르렀다. 제주 <추사관>에 가서 다시 한번 <세한도>를 볼 수 있다면!
화자는 소설 마지막 장 <마라도>에서 약 일 년간의 제주도 여행의 의미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계속 존재해 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말없이 순환하는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바다에서 건너와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생명으로, 혼자이면서도 결코 혼자가 아닌 누군가로, 누군가도 아닌 어떤 누군가로, 언어의 안과 밖에서, 춤을 추듯이 그렇게 살며 사랑하며, 내가 예감하고 수락한 운명을 부둥켜안고 계속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혹은 작은 병 속에 담긴 채 바다를 떠도는 수신인 없는 편지처럼 떠돌면서. - 제2부 제20장 <마라도>
수신인에게 도달할 수 없는 편지인 ‘나’들과 살아가는 나는 과연 어떤 운명을 수락했는가. 혹시 나는 그저 부유하고 있을 뿐은 아닌가. <세한도>와 수선화, 제주 바다는 내게 답해줄지도 모른다. 제주 바다를 바라보며 나도 저자가 걸었던 사유의 길을 걷고 싶다. 사랑하는 책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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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소요유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꼭 읽고 난 후 봤으면 좋겠더라. 이 소설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 소설의 시선 자체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삶의 철학에서 좀 많이 벗어난 영화다. 이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 이 자체를 '불면'이라는 부분에서 생각을 더 하여 심층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 감탄을 자아냈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는 불면으로 뒤척인 밤의 수척함이 있다. 아득한 모든 것들에는 망실된 중력의 연대기가 적혀 있다." 다음 구절만 보더라도, 이 소설에 대한 깊이를 조금이나마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철학에 대한 깊이를 깨닫고 싶다면, 지금까지 조금 다른 김운하 소설가님의 여운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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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실로 오랜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문학과 지성사의 ‘137개의 미로카드’ 이후 18년 만에 나온 소설이라고. 일반적인 소설을 생각하고 읽는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형식에 당황할 수 있다. 이 책은 인문학적, 철학적 색채가 짙은 에세이, 산문에 더 가깝다. 황혼이 온몸을 적시는 시간이 지나고, 밤이 주는 어둠 속 제주에서의 기억을 끌어올린다.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동서양을 막론한 인문학적 깊이에 당황했다. 이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알아 각오하고 있었지만 각오로 될 수준이 아니어서 한 장, 아니 한 문단 걸러 모르는 이들의 이름이 나오고 모르는 개념이 나올 때마다 당황했다. 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신화도 별로 읽은 적 없는 내게 너무 고난도였다. 신화와 철학 용어, 단어의 근원 들이 방대해서 조금 버겁게 울컥하고 넘어오는 기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매끄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읽기에 좋았다. 이 책 한 권을 읽었으나, 수십 권의 책을 읽은 기분이다. 모르는 부분들의 상당수를 찾아가며 읽어 더뎠으나 해당 개념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앎에서 오는 희열을 맛봤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봤다. 은둔을 통한 고독으로 자신을 찾는, 모든 외적인 것을 차단하고 내면의 바닥을 향한 여정이었다. 삶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의 조각들이다. 삶에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진실로 알기 위해 많은 걸 찾아 읽고 생각했을 작가가 보인다. 그와 동시에 고독이 갖는 성격의 우울이 책에 묻어있다. ‘사랑해보지 않은 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의 사랑은 어땠을까. 삶을 향한 사랑은 고뇌와 사색으로 이어졌고, 작가의 생각과 노력이 이 책이 되어 엮였다. 다른 무엇보다 작가의 내공은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지던 책이었다. - 그런 운명의 섬광을 제외한다면, 살고 죽는 모든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무다. 그렇게 본다면, 생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향해 닫혀 있는 것이다. 미래란, 끊임없이 과거를 되찾으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절박한 몸짓에 불과하다. 비록 그 과거의 한순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할지라도.[p16-17] - 사랑으로 수줍게 붉어진 뺨처럼 아름다운, 다만 몇 개의 추억을 갖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낮과 밤들을 고되고 헛된 미망 속에서 흘려보내는가?[p17] - 이런 순간들이 가져다주는 순수한 기쁨을 제외한다면, 단순히 지속일 뿐인 생의 시간은 얼마나 지루하고 궁핍한가, 동시에 그런 궁핍이 부재한다면, 영원의 순간들은 또 얼마나 보잘것없는가.[p18] - 롤랑 바르트는, 이런 강력하며 고양된 환희에 찬 느낌을 <미묘한 도취>라고 불렀다. 가볍고 섬세한 황홀을 불러일으키는 도취. (중략) 나는 어떤 종류의 타인과 나누는 교감이나 독서, 글쓰기 혹은 고독에서도 그와 비슷한 미묘한 도취를 이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만 그런 도취의 현실성이 점점 더 희귀해진다는 것, 거기에 미묘한 비애가 뒤따를 뿐.[p73-74] - 태양을 잘 견디는 선인장처럼, 열정은 시간을 방어한다. 괴테의 말처럼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한다. 책장엔 책이 쌓이고 나무들은 쑥쑥 자란다. 밤은 어둠을 결박하지만, 언어는 제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생이 얼마든지 부당할 수 있지만 삶이길 포기하지 않듯이. 나는 나의 밤을 되찾는다.[p80] - 기억은 시간과 함께 닳고 낡아 간다. 사라지고, 변형되고, 증발해버린다. 기억된 경험은 순수경험과는 다른 것, 편집되고 채색된, 허구와 뒤섞인 무엇일 뿐이다.[p84] -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과 한 번도 결별해보지 않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중략) 사랑할 수 있으려면 결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것은 자기와의 절대적인 결별이다.[p24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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