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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는 탁란하는 새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개개비나 붉은머리오목눈이, 딱새처럼 몸집이 작은 새 둥지에 알을 낳는다. 알을 많이 낳고 새끼를 잘 키우는 작은 새가 자리를 비울 때 알을 낳는다. 둥지에 있는 알과 크기, 생김새가 비슷한 알을 낳아 어미가 뻐꾸기 알인 줄 모른다. 뻐꾸기 새끼가 원래 있던 알보다 먼저 알을 깨고 나와 둥지 속 알과 새끼를 밖으로 밀어낸다. 숙주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자신의 둥지 안에 있는 알이 뻐꾸기알이라는 것을 알면 이내 제거해 버리거나 둥지를 포기하고 떠나가 버린다. 탁란하였다 하더라도 전부 부화하지 않고 아주 일부만 부화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미 뻐꾸기는 탁란한 뒤에도 자기가 낳은 알이 있는 둥지 둘레에서 자주 소리를 낸다. 알을 자신보다 더 잘 키울 다른 어미에게 맡겼지만 자신이 영영 떠난 것은 아니라고, 직접 키우지 못하지만 낳은 어미는 자신이라고, 끊임없이 소리를 낸다. 텃세를 부리는 까치 무리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둥지 둘레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꼬리를 좌우로 흔들고 빙글빙글 돌리며 소리를 낸다. 뻐꾸기 소리는 맑고 그윽하지만 이때 들으면 어쩐지 슬픈 느낌이 든다. ‘새가 운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때는 ‘운다’는 말에 수긍할 수 있다. 어쨌거나 뻐꾸기 탁란을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깊은 세계가 있는 듯하다.
소설은 자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뻐꾸기를 기른 붉은머리오목눈이 ‘육분의’가 화자로 나온다. 태어날 때 서쪽 하늘 전체를 지배하듯 자리 잡은 사자자리와 뱀자리가 보이지 않고 작은 육분의만 보여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로 태어나 비록 몸집은 작아도 저 하늘의 육분의처럼 세상 곳곳을 잘 살피고 자기가 앉은 자리도 잘 살피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육분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누군가에게 쫓기듯 살며 수명까지 왜 이렇게 짧을까. 짧은 가운데서도 왜 남의 알까지 받아 키울까.” 자신의 존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자신을 성찰하고 고민하며 대화하고 경험하는 가운데 자신을 직시하려고 노력한다.
육분의는 마침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기꺼이 먼 아프리카까지 찾아간다. 자기가 낳은 알을 없앤 뻐꾸기 새끼 ‘앵두’를 성공적으로 키웠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한 까닭이다. 텃새이고 자그마한 자기가 바다를 건너기는 너무 어려워 육지를 통해 간 아프리카까지는 무려 1만 9천 킬로미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날아간 육분의는 끝내 하고 싶었던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말과 함께 “꼭 엄마 둥지로 날아와. 엄마가 네가 낳은 알을 품어 줄 테니까”라고 말한다. 비극과도 같은 자기 존재 상황을 적극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자세이거니와 다른 종까지 끌어안는 품 넓은 모성애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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