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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우타노 쇼고 ‘세상의 끝 혹은 시작’에서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세상은 험악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한 아이들이 넘쳐 난다고 하는데 어쩜... 아이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결국.... 그들의 부모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남들이 보았을 때는 완벽한 가정이다. 중산층의 아름다운 부인과 똑똑한 아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신뢰한다. 하나뿐인 아들은 머리가 좋고, 아버지와 대화도 곧잘 하는, 평범하지만 스스로 기품 있는 가정이라 느낀다. 그런 화목한 가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나뿐인 아들과 그 아들의 사촌이 노숙자를 구타해 죽인 것. 죽이는 과정이 동영상으로 촬영 돼, 인터넷으로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형의 가족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만나 의논하기 시작한다. 차기 총리 후보인 형은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 말하지만 남자는 그럴 수 없다. 남자와 아내 그리고 형수까지 똘똘 뭉쳐 사건을 감추려 하는데...
우리 아이만큼은 기죽일 수 없다 생각하는 부모가 많은 모양이다. 그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더 날뛰는 부모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이기적인 마음은 어쩜 그 부모한테서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백인 아이들. 인종 간의 갈등을 격화시키기 위해 자동차에 불을 지르는 그런 부류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고등 교육을 받은 부모를 가진 아이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들. 우리 조카나 아들 같은 아이들이었다. (155) 가끔 우리는 생각한다. 어떤 범죄를 지켜보면서 그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살펴본다. 혹 그 아이들이 문제가 많은 가정이라면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 우리 집은 중산층의, 그래도 배운 부모니까... 하지만 그게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생각인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 배웠다고 말하는, 중산층 이상이라 말하는 부모는 말한다. 우리 이쯤에서 이 일을 그냥 덮어 두는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안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니까 (170) 아이들에게 정직할 수 있는 시간마저 박탈하는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부모의 그늘 밑으로 숨어 버린다. 부모의 돈이든 부모의 권력이든 부모의 방패막을 이용해 잠시 숨어 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회에 복귀한다.
차기 총리 후보인 형의 인생을 보면서 남자는 순수하게 좋아하지 못한다. 심지어 형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의 역학관계를 보고 자랑스러워한다. 주동자는 자신의 아들이다. 즉 뭘 할지, 어떻게 할지를 결정 내리는 사람은 아들이고, 형의 아이는 용감하게 지시에 따른다. 자신의 아들은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일 없이 늘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과 친구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다. 자신의 인생은 그렇지 않지만 자신의 아들은 형의 아이보다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남자를 뿌듯하게 한다. 이런 아들이 자신의 아이라는 것에 감동하기까지 하는 남자는 아들의 사고 앞에 올바른 생각 자체를 잊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성,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부수지 못하고 그 성을 지키려 형의 입양한 아이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파렴치함을 서슴지 않는 모습에서 인간의 추악함을 본다.
아름다운 아내, 부드러운 아빠, 그리고 똑똑한 아들. 그 삼위일체로 구성된 가정이 깨져서는 안 된다. 그 삼위일체가 깨지지 않도록 아빠인 나는 가정이라는 비행기를 무사히 지상에 착륙시켜야 할 것이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 아이가 이 사회에서 어떤 꼬리표를 달지 않을 미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게 이기적이란 거요? 대체 당신이 사용하는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뭔지 알고 싶군.” “먼저 당신이 사용하는 미래라는 말의 의미부터 묻고 싶군요. 자식을 피고석에 앉히려는 아버지가 사용하는 미래라는 단어는 대체 무슨 뜻인가요? 아버지 때문에 자식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실에 대해서요.” (282) 아이의 잘못을 무시한 채 어떻게든 평범한 중산층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아버지.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총리 후보를 사퇴하려는 형을 저지하려는 동생과 아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쌓은 성은 영원히 견고할까 생각해 본다.
비단 네덜란드만 그럴까? 배웠다 생각하는 자존심 강한 우리네 부모들도 그런 모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다. 아들이 맞았다는 이유로 모 그룹 회장은 사람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쳐(?)들어간 사람도 있었으니까... 자신의 아이가 귀하다면 다른 이의 아이도 귀중하다는 것을 그들은 왜 모를까? 자신들이 지금 당장 돈이 있어서 귀한 것 아닐까? 돈으로 만들어진 귀함.. 그들은 말한다. 성폭행범과 연쇄 살인마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사회가 이상하다고... 그들을 특별 사면 같은 것으로 풀어주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노숙자를 죽인 아들을 감추고 침묵하는 부모 역시... 똑같은 잔인한 사람들 아닐까? 지적인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남편. 그 아내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입양한 사촌 형을 살해하려고 생각하는 아들의 의견을 침묵으로 동조한다. 모성이란 이렇게 대단하다고, 모성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상으로 돌아온 이들 가족을 보는 내 마음은 화가 나는 것을 넘어 울화가 치민다. 비단 이(네덜란드) 나라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나라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을 뿐, 이 사회에서 다른 일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에 씁쓸할 수밖에 없다. 돈으로 만들어진 왕국. 그들은 그 왕국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결말을 맺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런 결말이라면... 내 마음은 아플 것 같다.
네덜란드 작가를 처음 만났다. 사건으로 가는 길이 좀...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라면, 나라는 부모라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이를 위한다는 것. 탄탄대로를 만들어 주는 것만이 부모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깨지고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일어설 수 있는 아이로 자라게 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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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 나오는 가재 다리 때문에 얼른 보기엔 요리가 주가 되는 소설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은 정찬의 음미 보다는 내면의 여정에 가까운 작품이다. 물론 소설 자체가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렇게 독자는 그 화자의 눈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고 그의 기억을 통해 사건을 회상하며 그의 판단을 매개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석한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그 존 말코비치 안으로 들어간 존 쿠색과도 같다. 아니, 작가 헤르만 코흐는 정확히 당신이 바로 그 존 쿠색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금 소설에서 독자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진 내면의 풍경을 마음껏 음미하길 원한다. 이것이 바로 '디너'란 제목이 붙은 진짜 이유이다. 즉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등장인물들이 모여 식사하는 '디너'가 아니라 소설이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을 마치 풀 코스의 정찬처럼 맛볼 수 있기에 '디너'인 것이다.
식사란 독서와 같다. 포크와 나이프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요리란 이를테면 책과 같은 텍스트이다. 식당에서 주인공과 같이 식사를 하는 주인공의 형이자 네델란드의 유력한 차기 수상 후보 세르게는 그 자리에서 자주 요리나 와인에 대한 얘기를 즐겨 하는데 바로 이 장면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요리라는 것도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의 전반부는 많은 텍스트들로 채워진다. 바로 뒤이어 세르게는 우디 알렌의 영화를 얘기하고 주인공은 이미 본 그 영화에 대해 형이 가진 속물적 취향과 자신의 고상한 취향이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반박할 거리를 찾는다. 즉 형이 가진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음미하고 그에 따라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행위는 그가 프랑스의 별장에서 세르게 부부와 같이 보내면서 그들 부부가 가진 프랑스의 무분별한 추종을 그가 직접 본 것들을 텍스트화 시켜 그것들을 토대 삼아 해석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렇게 코흐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주어지기 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요리도 텍스트가 되고 한 개인의 내면 또한 텍스트가 된다.
이 소설에선 이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헤르만 코흐는 '디너'라는 소설이 가진 이야기를 음미시키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가 정말 주의깊게 조리하고 제대로 맛보게 하려는 것은 주인공 '파울'의 내면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도 같이 주인공의 내면을 어느 것 하나 빼거나 덜어내지 않고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세세하게 보여준다. 말 그대로 제대로 음미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음미란 따지고 보면 '객관화'의 과정이다. '맛'이 감각이라면 그 맛을 분석하고 나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음미의 과정이다.
즉 코흐가 이 소설에서 우리들에게 진짜로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 파울의 내면을 객관화하고 '맛이 어떻다.'라고 말하듯 스스로 평가내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현명한 요리사가 먹는 이가 어떤 맛을 느꼈든 상관하지 않듯이 그 역시 우리들이 거기서 어떤 정답을 구했든 괘념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체험하는 것이다. 사유를 촉발시킬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쟁반 위에 놓여진 요리가 그러하듯이. 코흐는 그렇게 스스로 설정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주인공 파울의 내면만은 정말 마치 정말 먹는 듯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자, 그럼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왜, 코흐는 굳이 이러한 방식을 택하는 것인가? 아니, 왜 이런 소설을 쓴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하나...
아무튼, 이 '디너'란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질문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코흐의 이 소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소설이 쓰여진 당시의 네델란드의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의 도표를 가져와 본다.
이 그래프는 2003년 현재 네델란드 청소년들의 폭력 범죄 증가율을 나타낸 것이다. 소설 '디너'에서 주인공 형제가 만나게 된 진짜 이유도 이와 같은 자기 자녀들의 폭력 범죄 때문이었다. 주인공들의 자녀들은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으러 갔다가 실내에 가로누운 노숙자에게 한 마디 욕을 듣게되자 구타를 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들이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이 그 곳에 있던 CCTV에 찍혀 전국적으로 방송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촬영 각도상 부모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인지 알기란 불가능 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사후대책을 의논하고자 소원하던 형제가 다시 만나 '디너'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프에서 보듯이 청소년들의 이러한 이유없는 범죄는 그저 픽션만은 아니었다. 90년대 초 부터 꾸준히 증가한 청소년 폭력 범죄에 있어 흔히 벌어지고 있던 범죄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이 소설의 범죄는 현실 사회의 반영인데 '디너'란 소설은 2009년에 발간되었다. 왜 굳이 코흐는 이 시점에 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여기에 주목할만한 네델란드 발 보도가 하나 눈에 띈다. 2009년 한 범죄연구율 학자가 여기에 대해 의미심장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지금까지 네델란드에서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분석해보니 그 중 3분의 2가 바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청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외국인 혐오증에 기름을 부운 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연구결과는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만 해왔던 것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델란드 국민들은 이민자 자녀들을 의혹의 눈으로 보아왔고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결국 코흐로 하여금 이 '디너'란 소설을 쓰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읽어보면 바로 알아차리겠지만 이 소설은 기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분명 위쪽을 걸어갔는데도 결국 다다르는 곳은 아래쪽인 것이다. 그렇게 표면과 이면이 전복적으로 뒤바뀌는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이 충실히 담아내는 것은 주인공의 내면이므로 여기서 전복적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주인공에 대한 시각이 그렇게 바뀐다는 의미가 되겠다. 다시 말해 초반에 그리도 합리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나중에 가면 그야말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비합리주의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코흐의 능수능란함이 작열하는 땡볕처럼 눈부시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표면 아래에 놓여있는 이면의 진실을 목도하게 한다.
그런데 그 진실이란 그저 주인공 개인만의 진실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이다. 그러니까 그 주인공의 내면을 근본부터 구축하고 있는 서양 정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냉혹한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은 바로 '디너' 맨 앞 부분에 인용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코흐는 하필이면 자기는 팁 같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팁을 주지 않겠다는 대사를 인용한다. 왜 하필이면 이 대사일까? '팁'이라는 것은 서양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일종의 교양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그런 규범말이다. 사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하려는 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팁'이라는 것은 서양 문명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그러니까 '팁'이라는 것이 교양을 갖춘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으례히 행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기 때문에 코흐는 일부러 인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아마도' 이지만 분명 코흐는 이 말을 인용할 때 어떤 학자의 이론을 떠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때문에 일부러 '디너', 즉 '정찬'이라는 '팁'처럼 '예법'이란 이름으로 규격화된 규범의 지배를 받는 형식을 구태여 가져왔을 것이다. 코흐는 초반에 지배인과 웨이터들의 규격화된 서비스 모습들을 세밀히 묘사하는데 이 또한 '디너'를 이루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디너'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문명의 소산임을 알리는 것이다.
코흐는 그렇게 문명, 또 문명을 가져온다. 그럴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학자는 노베르트 엘리아스이다. 엘리아스는 서양 문명이 인위적인 발명품임을 증명하여 유명해진 역사학자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문명화과정'이다. 제목 그대로 지금 우리들에게 자리잡은 지배적 서양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는 책인데 그는 문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단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차별'을 위해서라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양 레스토랑에서 지켜야 할 그 많은 식사 규범들, 그렇게 '디너'를 형성하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은 모두 왕이 귀족을, 귀족이 평민을 차별화하고자 만들어낸 전략적 결실에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서양의 식사 예법이 너무도 복잡한 것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 어이없어 한다. 그저 입에 넣으면 되는 것을 뭐 그리 복잡하게 절차를 따지냐고! 그런데 그래야 했었다. 규칙이 복잡해져야 했었다. 그래야 먹고 사는데 바쁘고 지친 평민들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흔히 '에티켓'이라 말하는 그 복잡한 예절 규칙들은 모두 구별짓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감히 귀족이 왕고 맞먹으려고!', '감히 평민주제에 귀족과 맞먹으려고!' 이런 생각 끝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엘리아스는 분명히 보여주었다. 문명이란 타자를 배제하는데서 탄생했다고. 그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명은 일부러 필요하지도 않은 그 많은 규칙들을 만들고 그것에 인위적 진리를 부여하여 단지 지키고 못 지키느냐만 가지고 단죄하더라도 아무런 양심상 가책을 받지 않게 하였다고.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 수록 인간의 감각 중 시각이 특권화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이 그것을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를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보이는 외양만이 전부이고 그 안데 깃든 보이지 않는 내면은 가치없어 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인종주의는 날로 극심해지고 가진 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은 더욱 깊어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므로 또한 보이는 것의 진실은 오로지 보는 자만이 판단하는 것이므로 배제된 자, 차별받는 자들의 저항과 호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코흐는 놀랍게도 주인공 내면에 이 서양 문명이 가진 특성들을 그대로 버무려 넣는다. 마치 서양 문명이 그대로 인격화한 것 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앞에서 말한 세르게를 더없이 경멸하게 되었던 프랑스 체류 경험도 사실 알고 보면 오로지 그의 시각에 기초한 판단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그 시각이야말로 사실을 전혀 보증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개인 편견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코흐는 이런 식으로 서양 문명이 가진 근본적 문제를 주인공의 내면을 통하여 드러낸다. 그래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코흐가 초대한 이 '디너'에 참여하여 음미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서양 문명' 자체라고 할 수있다.
물론 그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뿌리 깊이 주관화 시켜버린 '서양 문명'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는 것은 2009년 범죄율 조사 보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외국인 혐오증을 온전히 합리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덮어놓고 범죄의 3분의 2가 이민자 가정 출신 청소년이 저질렀다고 말하는 그 이면에 바로 오로지 차별과 배제 위에 형성되었던 그 서양 문명이 가진 '나 밖에 없다' '나만 괜찮으면 만사 OK!'라는 오만과 이기심은 없는지 스스로 돌이켜 헤아려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소설에서 바로 입증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거기서 이민자를 대표하는 존재가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배제되어 버리는 것이다.
소설 자체로도 '디너'는 정말 재미있고 사실 주인공의 개인적 의견도 흥미로운 것이 많다. 이야기를 자유자대로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가는 코흐의 눈부신 필력 덕분에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디너'는 보여지는 것을 너머 더 많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책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그 사유의 촉발을 위해 나타난 작품이다. 보다 정확히는 근자에 범람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그것을 서양 문명이라는 가장 근본으로 부터 따져보려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걸 전혀 어렵지 않게 자연스럽게 음미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더욱 놀랍게 한다.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 식당'에서 느낀 것이지만 정말 좋은 요리사란 단순한 재료를 가지고도 마음을 울릴만한 깊은 맛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디너'를 읽고난 지금 헤르만 코흐야 말로 그런 요리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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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이기심, 폭력의 행사를 내면의 소리에 충실했다는 진솔함만으로 정당화하고, 그리고 도덕적 동의를 구하는 메스꺼운 얘기다. 더구나 자의식에 대한 도전과 자기 불편을 야기하는 대상에 대해 참지 못하는 기형화된 현대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도덕적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넘기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인지, 개인의 생명과 자유 등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최후의 가치와 같은 본질을 생각지 않는다.
왜 노숙자가 존재하고, 왜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저개발국이 있는지, 유색인종에 대한 왜곡된 학습이 근절되지 않는지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저 불쾌하고 거북하며 자신들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고 싶은 대상일 뿐이라는 천박한 주류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놓고 마치 가족의 연대와 공공의 정의가 갈등하는 냥 그 본질을 희석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도 타인의 생명을 자기이해만으로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양보할 수 없는 도덕적 진리이다. 이것을 훼손하는 논리는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1. 타락하는 현대의 가족이기주의
아이가 축구공으로 상점의 유리를 깼다. 이때 부모의 행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상점으로 달려가 깨진 유리 값을 내던지며 대가를 치렀으니 정당하다고 상점주인에게 큰소리치는 부모여야 할까? 아니면 정중하게 깨진 유리의 문제를 넘어서 아이의 부주의한 행동과 생업에 불편을 끼친 점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부모여야 할까? 소설의 화자인 열다섯 살 사내아이의 아비인‘파울’은 돈을 내던지며 아이의 부주의를 항변하는 상점주인에게 폭력의 위협을 가하면서 그것이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자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모들로 넘쳐나고 있다. 세상에는 물질이외에 어떠한 것도 보상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고. 상처받는 마음도,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신도 없다고 말이다. 아이의 도덕성은 일차적으로 부모로부터 학습된다.
십대들의 파티가 끝나고 귀가하던 중 사촌지간인 세 명의 아이들은 맥주파티를 더 즐기기 위한 현금 인출을 위해 심야에 무인현금출납기가 있는 부스에 들어서려하지만 혐오스런 악취를 풍기며 부스를 차지하고 잠든 노숙자를 발견한다. 강제로 끌어내려다 노숙자의 욕설과 저항을 받은 두 소년은 쓰레기 덩어리와 석유통을 던지는 등 폭력을 가하고 마침내 불을 질러 살해한다. 노숙자의 사망을 확인한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인출기 사용에 장애가 된 노숙자, 즉 자신들의 쾌락을 방해하는 존재는 생명의 가치가 없는 것이고, 이를 처단한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노숙자 살해에 가담했던 사촌형제인 중산계층의 두 백인 아이와 이들의 행위를 거절한 사촌이 된 아프리카에서 입양된 흑인 아이 부모들의 의식과 행위를 통해 도덕적 정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소설은 모두(冒頭)에서 지적하였듯이 가족연대와 공공선의 충돌이란 딜레마의 장으로 얘기를 이끈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란 불가침의 권리를 은폐하는 그릇된 담론이다. 내 편의와 욕구에 방해가 되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면 이 사회란 것이 과연 존재 가능할까? 아마 서로 죽이고 죽이는 보복의 연속으로 오래전에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이것은 가족과 사회가 벌이는 도덕 갈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이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가르치는 부모. 자신들에게 불편과 불이익의 환경을 제공하는 대상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것인데, 타인의 신체와 생명 보호라는 최우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강화로 인해 법률에서조차 사력구제(私力救濟)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임에도 이보다 더 나아가 자기쾌락을 위해 타인을 향한 자의적인 폭력의 행사를 말하는 것은 도덕적 퇴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노숙자를 살해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두고 벌이는 두 가족의 부모들이 보이는 가치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소위 주류의 대열에서 이탈한 존재인 노숙자의 죽음은 사회가 주목하는 사건이 아니니 잊혀질 것이라는 전제와 아이에 대한 사랑이란 명분하에 은폐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에 진실을 밝히고 아이들에게 타인의 살해라는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끊임없이 가족연대의 가치우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책무를 말하는 인물에게 수상 당선을 앞둔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정치적 이해를 위해 벌이는 쇼라고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반대의견을 호도한다고 자신의 말이 진실이 된다는 논리인데 이처럼 터무니없는 몰지각과 무지, 부도덕함을 대면하는 것은 이만저만 곤혹스런 것이 아니다.
2. 도덕성을 희석시키는 인종주의와 계급주의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케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입양한 흑인아이에 대한 인식이다. 입양을 박애주의와 도덕성을 입증하는 과시적인 쇼맨십으로 격하시키고, 피부색의 다름과 빈곤국 출신이라는 것이 곧 도덕성의 결여라고 연결하는 편견이다. 중산층과 노숙자가 동등한 생명으로서 부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종 또한 도덕적, 문화적, 지적 수준에서 다르다는 인식을 배경으로 한다. 즉 19세기 유럽의 우생학에 의한 서구백인의 극단적인 편협성으로의 퇴행인 인종주의가 부활되고, 물신에 의한 화폐적 계급주의로 변질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도덕적 이슈가 되는 문제에 인종주의와 계급주의의 편견을 덧씌워 상황논리를 조작하는 것이 지배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보이는 일반적 성향이다. 아마 이것이 지금의 유럽 주류사회의 내면에 잠복하고 있는 실체인지 모르겠다. 이 소설이 유럽 독서시장의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일종의 묵시적 동의와 공감의 표시라해도 그리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두 백인 아이가 사람을 살해하고 어떠한 죄의식도 없는 본질적 문제보다는 이 아이들이 노숙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아이들을 협박한 입양된 흑인아이의 부도덕성을 오히려 중대한 부도덕이라 비난하는 파울과 그의 아내의 주장이 바로 그러함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급기야 수상 입후보를 포기하는 기자회견을 자처하면서까지 자신의 아들이 살해 공범임을 밝히고 도덕적 책무를 다하려는 사람을 급습하여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파울내외의 행위는 오늘의 붕괴된 도덕성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로서 일종의 도덕 고백을 저지한 이후에 파울의 사건 해석은 더욱 자기변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고착화한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한 상처를 안은 수상 입후보자의 인기하락으로 낙선 된 것을 정의의 귀결인 냥, 가족 연대의 승리인 냥, 이것이 도덕적 딜레마의 궁극적 해결이자 진리인 냥 말하는 것인데, 어느덧 타인의 생명에 대한 본원적 가치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잘못된 물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물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의 불가침적 가치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것이다. 결코 가족연대와 공공선, 사회정의 대결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늘의 주류 유럽인들의 도덕인식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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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겋게 익은 가재의 집게가 허브 한 잎을 쥐고 있는 표지의 헤르만 코흐 [디너] 음,, 요리관련 소설인가? 아님, 요리평론가의 일상? 그리고 눈에 들어온 문구 “밤을 지새우게 하는 놀라운 소설!” 전 유럽 백만 부 돌파 화제의 베스트셀러,,, 흥미롭다. 저자 헤르만 코흐는 칼럼니스트, 희곡작가이며 TV 프로그램 제작자 그리고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계의 만능 엔터테이넌가효 특히 장편소설 <디너>는 네덜란드에서만 42만 부 이상 판매됐고,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던 작품이었는데요. 2009년 한 해 동안 백만 부 이상 판매되어 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7위, 그리고 독자들이 뽑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고 세계 14개국에서 번역돼 독자와 언론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은 작품이라고 한다. 음,, 네델란드의 국민작가시구나~ 출간하는 작품마다 긴장감 넘치며, 유쾌하고, 현실적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데,,, <디너> 역시 그의 이러한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소설의 진행은 저녁 풀코스인 아페리티프(서양 요리의 정찬에서 식욕증진을 위하여 식전에 마시는 술),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 소화제, 팁 순서로 진행되는데,,, 소설의 도입부는 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읽는 속도가 더디게 흘러간다.
다소 거만한 듯한 현재 차기 수상이 유력한 유명정치인 형 내외 세르게 로만과 바베테, 한 때 교직에 몸담았지만 지금은 휴직 상태인 동생 내외 파울 로만과 클레르의 저녁식사는 편안하고 가벼운 주제로 시작되지만,, 그들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조성돼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파울 혼자의 생각이지만,,, 소설은 파울의 시선을 통해 묘사돼 있다. 한 끼의 디너지만 그 속엔 파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잘난 형에 대한 자격지심, 가족에게 느끼는 소외감, 자신의 생각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 뭔가 억압적이고 파괴적이며 부정적인 근원은 모두 그에게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밝혀지면서 점차 이 소설의 핵심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두 부부의 아들이자 열다섯 살짜리 동갑내기 사촌 형제인 릭과 미헬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만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그 범죄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된 것이다. 물론 범인이 누구인지는 부모들 외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상황이지만, 세르게가 이 사건으로 수상 후보를 사퇴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갖겠단 말을 뱉음과 동시에 문제가 불거지면서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부모의 행동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사실,,, 초반부터 꾸준히 사회적 권위, 가식, 허영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던 파울이 문제가 불거지면서, 번 아웃 증후군을 앓고 있던 파울은 폭력적 성향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자신의 자식인 미헬의 범죄를 두둔하기 시작한다. 그건 너무나도 이성적으로 보였던 그의 아내 클레르도 마찬가지, 아니,, 어쩌면 가장 무서운 사람은 클레르였는지도 모르겠다. 폭력적인 남편의 폭력을 부추기고, 폭력으로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아이를 감싸고, 어쩌면,, 그녀가 가장 폭력적인 인간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소름이,,, <디너>가 스릴러 소설로 분류된 이유였음이다. 범죄를 저지른 아들에 대한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 인종이나 극빈자에 대한 편견, 입양문제, 청소년 폭력 문제,,,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인간 이면에 감춰진 모순을 통해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흥미진진하게 그려가고 있는 소설 [디너]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깊고, 진하고, 넓을 것이다. 문득,,,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 아들 폭행 사건이 떠오르면서 한동안 혀를 끌끌 거렸던 기억이 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한대일 수밖에 없겠지만,, 과연 그 사랑이 옳은 것이기만 할까? “부모니까,,,” 옳지 않은 일, 그릇된 일에 대한 자식 옹호는 변명이 될 수 없음이다. 그래서 그들이 과연 행복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로지 그들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늘 그렇듯이 그 사건에 대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한테서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 비밀이었다. 둘이서만 알고 있는 비밀. 망각은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가 큰 법이다.” - 헤르만 코흐 [디너] 17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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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물며 사람의 자식 사랑은 두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런 부모의 자식 사랑이 도를 넘어 아이를 아예 망치는 사례가 허다한데 특히 학교에서 그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학교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는데, 최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사연인즉슨 학교에서 문제아로 소문났던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선생님이 말리는 데도 반 친구를 의자에 묶어 놓고 우산으로 때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결국 선생님들 회의가 열려 그 학생에게 최고 수준의 벌점을 부여하자 아이의 아버지가 득달같이 달려와 담임인 여선생님 멱살을 잡고 당신 때문에 아이 인생이 망쳤다며 폭언을 퍼부어 교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이 사실을 알려질까 봐 쉬쉬하고 아이를 전학하는 정도로 마무리했다는 데, 그 일을 당한 선생님은 며칠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내에게 사실이냐고 몇 번을 되물었을 정도로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들리는 것을 보면 하루 이틀 일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를 찾자면 열 페이지가 부족할 정도로 복잡다단 - 신문과 방송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분석 기사들이 넘쳐난다 - 할 텐 데 부모의 그릇된 자식 사랑 - 엄밀하게는 아이에 대한 지나친 보호와 관심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인식의 문제 - 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그릇된 자식 사랑 세태 또한 그 이유를 따지자면 마찬가지로 차고 넘칠 테니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런 일이 비단 우리나라 문제만은 아닌가 보다. 2009년 한 해 네덜란드에서만 42만 부가 판매되었고 네덜란드 독자들이 선정한 ‘2009년 가장 좋은 책’에 선정되었다는 “헤르만 코흐”의 소설 <디너(원제 Het Diner / 은행나무 / 2012년 5월)>을 보니 말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식의 잘못을 덮으려는 부모의 그릇된 선택
차기 유력한 수상 후보인 정치인 “세르게” 부부와 세르게의 동생이자 전직 학교 선생님인 “나(話者)”의 부부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최고급 요리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두 부부는 영화 이야기와 휴가 계획 등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그런데 어딘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들은 단순한 가족 모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뭔가 끔찍한 일이 그들 아이들에게 벌어졌기 때문에 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 레스토랑에 모인 것이다. 그건 바로 두 부부의 아들이자 열다섯 동갑내기 사촌 형제들이 은행 현금 인출기에 잠들어 있던 여자 노숙자를 구타하고 불을 질러 끔찍하게 살해한 일 때문이다. 이들이 저지른 이 끔찍한 사건의 동영상이 TV 고발 프로그램에 소개되고, 그 방송을 시청하던 나의 부부는 비록 인상착의가 들어나지 않았지만 한 눈에 자신의 아들인 “미헬” 임을 알아본다. 동영상은 인터넷에까지 퍼져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두 아이들은 세르게 부부가 입양한 아프리카 출신 아이에게 협박당해 돈을 갈취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이런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두 부부, 드디어 입을 연다. 형인 세르게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정계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 - 언제고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이 사건을 사전에 털고 가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하지만 세르게의 아내와 내 아내는 그런 형을 극렬하게 말린다. 하잘 것 없는 노숙자 하나 죽인 일로 아이의 장래를 망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과연 무엇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까? 과연 부모의 사랑은 도덕이나 양심보다 우선일까? 두 부부는 절대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한다.
이 책, 지루하다.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설정인데다가 주인공이 속 시원히 터놓기 어려운 “사건”이라 말끝을 흐리고 주저주저하게 되는 상황임은 이해하지만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한정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레스토랑 상황이나 등장인물의 과거 이야기 등 군더더기의 상황 묘사가 많아 이야기 전개가 영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지루함에 레스토랑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 중반까지는 쉽게 몰입할 수 가 없었는데, 중후반 이후 두 부부가 만나게 된 이유가 비로소 불거지면서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지고 책 첫머리에서 주인공이 자신보다 현명하고 지적이라고 평가했던 아내가 아들의 죄를 덮으려고 자기합리화 - 결국 그릇된 현명함과 지적임인 셈이다 - 하는 대목에서는 의외의 재미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쉽게 예측 가능한 과정과 결말은 역시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불편하다
열 다섯 살 나이의 아이들이 은행 현금 인출기 부스에서 잠들어 있는 여자 노숙자를 악취나고 더럽다는 이유로 구타하고, 기름까지 끼얹어 불태워 죽인다는 사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들은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들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일어난다고 해도 말이다. 또한 거리를 떠도는 하잘 것 없는 노숙자의 생명보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 그리고 중산층인 자신의 아들의 미래가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며 아들의 죄를 덮어 버리는, 심지어 자신들의 두 아들을 협박한 입양아의 실종을 나몰라라 하는 두 부모의 파렴치한 행동도 영 불편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이런 주 사건의 불편함 외에도 레스토랑에서 새끼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키며 설명해대는 지배인이나 유명 정치인과 사진을 찍기 위해 주변을 맴도는 이웃 테이블 손님들도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이처럼 책에는 불편한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내가 책속의 두 부부였다면 어떡했을까? 남의 일로만 여긴다면 두 부부를 비난하는 게 당연할 텐데 내 일이라면 하는 생각에 머뭇해진다. 이성적으로야 결코 할 수 없겠지만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나 또한 두 부부처럼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우는 다르지만 최근 모 드라마에서 뺑소니 사고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부를 총동원해서 사건을 무마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저게 바로 사회 현실이라고 비난하지만 나라도 그런 위치에 있다면 그런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자식의 일에 사회 도덕과 규범을 앞세울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랑이 분명 그릇되고 결코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게 나라면 이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부부의 가족들은 그 후로 행복했을까? 결말에서 세르게는 선거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사건은 특별한 문제 - 입양 아들이 모종의 이유로 실종되긴 했지만 그다지 슬퍼하진 않는다 - 없이 마무리된 걸로 그려진다. 사건의 앙금 때문에 당분간은 심적으로 괴로울지 모르지만 어차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처음의 죄의식과 자책감은 시간은 갈수록 옅어지고 언젠가는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테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늘 그렇듯이 그 사건에 대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한테서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 비밀이었다. 둘이서만 알고 있는 비밀. 망각은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가 큰 법이다. - P.179
이렇게 책에서처럼 나중에라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만 않는다는 믿음 또는 보장만 있다면 어떻게든 덮어두려는 마음을 결코 거스르기가 어려울 것이다. 자동차 뺑소니 사고처럼 머리(이성)로는 분명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심정)으로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자리만 모면하면 된다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참 이율배반적인 상황 말이다. 그러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과연 무엇이 옳은가 하는 생각을 쉽게 떨쳐지지가 않았다. 아마 작가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논란꺼리, 즉 화제성과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 말이다.
그래서 이 책, 지루하고 불편했지만 꽤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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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교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엘리베이터 안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는 사진이 공개되었습니다. 아마 그 사진을 본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그 전으로 되돌리고 싶다고 수없이 생각했을 겁니다. 대체 우리 아이들은 어느 선 위에 서있는 걸까요? 아이들이 왜 이러는 걸까요?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독, 인터넷과 스마트폰 속 게임중독으로 인한 폭력에 대한 무절제, 많은 이유들이 점철되어 거대한 결과를 낳은 것이겠지만 그 이유들 중 '혼나야 될 때 혼나지 않아서'도 빼놓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디너]는 어느 날의 저녁식사 시간을 둘러싼 한 남자의 갈등을 보여주는 심리소설입니다. 학교폭력은 아니나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정서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믿었던 행크 로만. 그러나 그의 가정은 아들 미헬이 거리의 노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적인 장면이 TV에 비춰지면서 위기를 맞이하죠. 화면에 비친 저 아이들이 정말 내 아들과 조카인가. 끊임없이 자문하고 의심하지만 진실은 하나. 결국 아들 미헬의 휴대폰까지 훔쳐보게된 행크는 또다른 폭력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과 조카의 거취를 의논하기 위해 모인 행크 부부와 형 세르게 부부.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 앞서 아페리티프(서양 요리의 정찬에서 식욕증진을 위하여 식전에 마시는 술)와 에피타이저를 통해 분위기는 고조되고 드디어 문제가 물 위로 떠올랐을 때 갈등은 폭발합니다.
이 작품은 범죄를 저지른 아들에 대한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 뿐 아니라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흑인과 빈곤자들에 대한 편견, 폭력적 성향의 유전적 원인, 선과 악의 경계 등에 대해서요. 폭력적 성향의 유전적 원인-에 관한 부분은 설득력이 조금 빈약했지만 흑인에 대한 편견, 선과 악의 경계 등에 대한 묘사는 놀랍습니다. 행크는 형 세르게 부부가 입양한 흑인 아이 베아우에 대해 공공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아내 끌레르는 그런 행크를 오히려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아들이 궁지에 몰리자 그녀의 본성이 일시에 드러나죠. 인종에 관한 편견을 숨기고 착한 백인 역할을 연기했던 끌레르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변화하는 모습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고 할까요.
오히려 저는 행크의 형인 세르게에게서 반전의 묘미를 느꼈습니다. 세르게는 차기 수상 자리를 노리는 유명한 정치가입니다. 인격적으로 고매하다기보다 속물 근성에 짐승적인 본능이 강한 남자죠. 그런 세르게가 오히려 기자회견을 열어 선거를 포기하겠다 합니다. 가족으로서 아들의 죄를 아버지인 자신이 속죄하겠다는 것이었죠. 그런 그의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한 것은 각자의 아들들의 엄마, 끌레르와 세르게의 아내 베르테입니다. 가족만 알고, 가족이니까 덮어줘야 할 일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아무 일 없이 시간만 지나면 해결될 거라 믿으며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내죠.
작품 속에서 거리의 노숙자를 죽인 행크의 아들 미헬과 그의 조카 릭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대신 그 장면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후 많은 돈을 요구(했다고 여겨지는) 한 베아우가 실종되죠. 그리고 끝. 작품은 이렇게 끝나지만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미헬과 릭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저는 아직 미혼이고 아이가 없어서인지 몰라도,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그 사람이 미성년자이든 가족이든 상관없이요. 과거를 책임지지 않으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믿어요. 정당한 처벌, 정당한 속죄. 그것만이 마음 속 짐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발걸음을 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요. 그리고 그러면서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찾아내고 성장하며 자신의 아픔까지 치료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니까, 사랑의 이름으로 죄를 덮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워서 그냥 눈을 감아버리는 거잖아요. 감싸는 게 능사는 아니죠. 그런데 언제까지 부모가 자식의 일을 대신 해결할 수 있을까요. 자연적인 순서라면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죽고 자식들은 부모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요. 홀로 남겨진 그 세상에서 자식이 굳건히 두 발로 서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려면 결과에 대한 책임, 죄에 대한 속죄 등 인간으로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면, 상대가 귀할수록, 꾸짖어야 할 때 꾸짖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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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히 만나 의논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형 세르게의 호출에 파울은 마지못해 아내 끌레르를 데리고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석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세르게라면, 현재 네델란드에서 가장 핫한 남자중 하나인 그라면 당일치기의 예약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형을 멍청하고 섬세하지 못하며 지적으로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파울은 그가 그렇게 성공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 무대위에서의 세르게의 카리스마만큼은 파울 자신도 인정하는 바, 질투와 아니꼬움과 냉소로 무장한 채 그는 형 내외를 기다린다. 그가 그 저녁에 그렇게 꼬여 있었던 것은 비단 성공한 형을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외아들인 미헬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파울은 아내 모르게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 거린다. 가뜩이나 심사가 사나운 가운데, 마침내 세르게와 그의 아내인 바베테가 나타난다. 드디어 한 자리에 앉게 된 두 쌍의 로만 부부는 고급 레스토랑 특유의 섬세하기 짝이 없는 시중을 받으면서 식사를 시작한다. 아페리티프에서 시작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 그리고 입가심용 에스프레소까지, 풀 코스의 디너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모여야 했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충돌에 이르게 되는데... 신경질적이고 무척이나 지적이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주인공 파울은 그만의 목소리로 현재를 중계한다. 속물인 정치가 형을 미워하고,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면 식사를 못하는 형의 허영을 비웃으며, 아프리카 흑인 아이를 입양하고는 생색을 내는 형 내외의 위선을 비아냥대는 파울에게 독자들은 곧 동화가 된다. 우리는 곧장 파울의 입장에 서서 인공 미소를 띄워대며 가짜 공약을 남발하던 정치가에 대한 혐오를 가공의 매력을 지닌 세르게에게 퍼붓게 된다. 그래, 속물인 정치가가 언제나 문제지, 그들이 아무런 노력없이 성공을 하고, 아무런 노고 없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바라본다는건 얼마나 좌절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단박에 파울의 편이 되어 버린 독자들은 그를 괴롭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것이 비단 형만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다. 그의 외아들이 사촌인 세르게의 아들과 사고를 쳤다. 열 다섯에 불과한 녀석들이 술에 취해 노숙자를 태워 죽인 것이다. CCTV에 잡힌 그들의 영상은 네델란드 전역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경찰에선 그들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문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몰라봐도, 자기 자식을 몰라 볼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알아본다. 흐릿한 영상속에서 노숙자를 비웃고 때리고 불을 붙이는 아이들이 자기 자식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형과 정신적인 문제로 교사직을 그만 둔 동생은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앙금을 뒤로 하고 모였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처음 이 책의 인상은 단단하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톤이나 묘사하는 어조가 단단하기 이를데 없다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논리 자체에 헛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리곤 중반을 넘어가면서 알게 된다. 저자의 그 단단하고 헛점이 보이지 않는 논리가 바로 함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조금씩 드러나는 파울의 과거와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된 독자들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과연 그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라는...그가 우리와 똑같은 루저에 보통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동질감 내진 공감을 해도 되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그리곤 좀더 읽고 나니 그에게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뜨악한 심정으로 말이다. 내가 당신을 알았던가요 라고 질문하고 싶어진다.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착하고 지적이며 정직한 사람이라는 뉘앙스에 반박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인공에 대해 마지막 믿음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잘못을 한 아들 때문에 고민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적어도 자신의 아들이 커다란 잘못을 했다는 것을 자각한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아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그런 그의 양심에 마지막 희망을 걸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너무도 논리 정연하게, 그 희망이 어떻게 배반되어 가는 지를 독자들에게 보여 주는데... 탄탄한 논리 전개, 개연성 있게 전개되어 가는 사건들, 두 쌍의 부부간의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 각자의 이익을 두고 벌어지는 살벌한 종횡연합, 우아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단 하루 저녁의 식사 시간 동안 누구보다 지적이고 고상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위선의 가면이 벗겨져 나간다. 결국 독자들은 추악한 그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책을 덮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 도무지 헛점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헛점을 찾고 있을 여지도 없이 스피드하게 사건이 전개되어 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각자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따른 행동 하나 하나가 섬뜩할만큼 논리적이라는 점에서도 반박거릴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덧붙일만한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심리 묘사, 압권이었다. 흡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책을 일단 들기 시작하면 결론을 알기 전엔 내려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부들의 이야기가 하도 수상해서 말이다. 그들이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냈을때 우리는 비로서 깨닫게 된다. 논리나 이성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유대인 학살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2급 인종들은 말살해도 된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었으며, 카톨릭 이하 독일 국민들이 그에 동조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논리의 씨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설, 어떤 추리 소설보다 섬뜩했던 책이 되겠다. 근래 읽었던 소설중에서 가장 완벽했던 작품중 하나, 품격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지적이고 냉정하며 이기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과 옹졸함이 연결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지적이고 논리적이면서 포용력이 있을 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 그것이 가능한 조합이 아닐려나? 만약 우리가 한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걸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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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인 아주 유명한 레스토랑인데도 차기 수상이 유력한 형의 유명세 덕분에 형이 예약하면 단 번에 자리가 나기 때문일까 파울 로만은 형 세르게 로만과 식사하는 것이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것도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되지만 오늘 파울 로만은 형 부부와 함께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기엔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하다. 노숙자를 구타해 죽인 열다섯 살 소년이 그의 아들 미헬이 아닐까 생각될정도로 그는 가족 모임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에 대한 걱정, 소소한 행복과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라기 보단 이 사건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내 끌레르가 이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등을 헤아리느라 정작 중요한 문제는 고민하지 않는다. 미헬의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분명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모른척 했었으니까.
차기 수상이 유력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아들의 죄를 알리려는 세르게 로만의 행동은 그 나름대로 고민하고 내릴 결론이었다. 아들 릭이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릭이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자신의 정치 생명까지 포기하면서까지 아들의 미래만을 생각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세르게의 말이 맞다. 그러나 끌레르의 생각은 다르다. 용의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스스로 나서서 노숙자를 죽였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다. 끌레르는 아들 미헬의 미래가 걱정되어 세르게가 기자회견을 열지 못하게 하는 데 필사적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기자회견을 열지 못하게 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저자 헤르만 코흐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노숙자를 구타해 죽인 열다섯 살 소년,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라고. 처음에는 끌레르가 미헬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때문에 이 책이 블랙유머, 심리스릴러에서 공포소설로 변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끌레르가 만들어 놓은 결말은 독자들의 생각을 차단시켜 버린다. 그런데 잠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끌레르와 파울은 미헬을 위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구나, 하고.
베아우는 세르게와 바베테가 입양한 아이다. 릭과 미헬과 혈연관계에 있었다면 베아우가 협박을 했을 것인가에 대해 끌레르의 생각은 분명하다. 파울이 베아우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때 그를 비난했던 끌레르가 미헬의 문제에 이르자 냉혹하게 베아우를 배제시켜 버린다. "가족이라면 그런 협박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렇지 않니? 베아우" 뭐 그런 얘기다. 동영상을 세상에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는 베아우, 기자회견을 열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세르게, 두 사람 모두 끌레르에게는 미헬의 미래를 위협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끌레르와 파울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끌레르는 유전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미헬을 낳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미헬의 삶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문제로 들어가보면 미헬을 이렇게 만든데에는 끌레르와 파울의 책임이 크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밖으로 분출시키는 파울의 모습은 노숙자를 죽인 미헬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해결방법을 제시한 이가 끌레르였기에 두 사람은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미 이 사건은 해결이 되었으니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한 마디쯤 하자면 또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이번에는 끌레르와 파울이 누구를 희생시킬지 무섭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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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맛있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은 책이다. 표지도 그렇고 제목도 그렇고 처음부터 진행되는 이야기 또한 일반사람들은 출입하기도 힘든 고급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요리와 함께 한다. 차기 수상이 거의 확실시 되어 있는 세르게 형부부의 연락으로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된 파울부부. 만나기 전부터 형 세르게에 대한 파울의 감정은 여실히 드러난다. 형이 아프리카아이를 입양한 것도 겉으로 보이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고급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서빙을 받으며, 알지도 못하는 와인에 대해 시음까지 해보이는 겉멋들인 모습에 대한 불쾌감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러한 형과의 식사시간이 유쾌할 리가 없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이 유쾌하지 않은 만남에 또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여느 소설에 비해 이러한 본격적인 사건이 아주 느리게 나타난다. 거의 1/3 쯤 까지는 식당에서 형내외에 대한 생각, 형의 태도, 그리고 아들과 아내에 대한 파울의 생각..뭐 대충 이러한 분위기로만 봐서는 이 소설을 스릴러라고 생각하기에는 웬지 부족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보다는 맛잇는 요리를 앞에 두고 가정사 내지는 형제와의 불화 같은 내용을 다룬 소설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 게다가 사춘기 아들을 둔 아빠 입장에서, 방을 들어가는 것부터 아들의 핸드폰, 컴퓨터 등 사적인 생활에 대해 철저히 인정해주고자 하는 파울의 모습은 여느 아빠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고 자상한 아빠의 모습이다. 아내에 대한 파울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파울의 아내는 굉장히 현명하고, 아들과의 관계도 아주 돈독한...현명하기 그지 없는 여성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뒤로 갈수록 굉장히 흥미롭게 연결된다. 드디어, 반정도 지나면서 문제의 그 사건이 터지게 된다. 사실 터지고 나서 생각해보니 앞의 파울의 행동들이 다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지만.. 노숙자 폭행살해사건..단어만 들어도 웬지 섬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범인은 바로 파울과 세르게의 아들들이다. 충동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사건의 진행과정을 동영상으로 찍고 그 순간까지도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지 못하는 아이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그 동영상은 유트브에 실리면서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각종 뉴스에서 이 사건을 다루지만 다행히 깊숙히 모자를 쓴 아이들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긴 힘들다. 그러나...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끼어 있어도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마련이다. 파울부부도 TV에서의 모습을 보고 바로 자신의 아들과 조카임을 알게 되고, 그 순간부터 부모로써의 맹목적인 행동이 드러나게 되는데..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과연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정말 많이 생각해보았다. 열다섯 살 된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이 사건을 덮어둬야 하는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죄를 받고 당당하게 미래를 살게 해야 하는걸까.. 정말로 어려운 문제이다. 그런데...이 소설이 참 재미있는 것이, 사건 이후 전혀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사실과 함께, 보통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주인공들의 성향이 완전 뒤집어진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스릴러라는 성격에는 약간 부족할 수도 있겠는데, 일반적인 소설에서 느끼기 힘든 묘한 반전이 새롭고, 무거운 소재를 결코 무겁게 다루지 않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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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녀들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옳고 그름을 알고 있으면서 자녀를 위한 다는 명목으로 옳지 않은 일을 덥어 준다면 과연 사회의 정의는 실현될까? 이것은 나의 이성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막상 내 자녀가 옳지 못한 일에 연류되어 미래가 흔들린다면 나또한 파울과 끌레르 같은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자식에 관한한 부모는 거의 이성이 마비될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기 수상을 꿈꾸는 세르게, 그는 수상직을 포기하면서까지 진실을 말하고 싶어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조용한 식사를 나누며 세르게 부부와 파울부부는 각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차분하게 풀어간다. 어느날 현금지금기에서 잠을 자던 여성노숙자가 10대들에게 살해되는 장면이 뉴스에 나오게 된다. 그들은 연약한 여성을 발로 차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폭행하고 급기야 불을 지르게 된다. 그 장면은 고스란히 cctv에 찍히게 된다. 뉴스에서 여성노숙자 살해 사건이 방송되면서 그들의 가정에는 불안이 감돌게 되고 행복한 가정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은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의논하기로 한것이다. 그들이 지켜내려고 하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과연 옳은 것일까? 아이들의 미래는 부모가 생각했던 것 처럼 발게 펼쳐질 것인가?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결론은 낼릴 수 없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면 최대한 침착하게 일을 해결해 나가는 그들은 진정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것일까? 결국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타인을 생각하며 봉사와 희생으로 관계를 이끌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자녀를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많은 사람들은 이기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과, 욕망,위선들이 잔잔하고 심도깊게 펼쳐지는 '디너'는 불편한 자리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돌아나오는 기분으로 책장을 덮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