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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조차 정의란 정의되지 않은 채 공동담론의 몫으로 남겨졌다.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삶에서 정의를 찾는일은 쉽지 않다. 자본주의 씨앗은 남의 것을 빼앗아 일궈낸 제국의 착취와 폭압으로 뿌려졌다. 그 가운데 정의란, 자본주의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동하였다. 정의는 나와 타인 사이를 이어주는 중심추 같은 것이다. 나의 아픔이 타인의 아픔이며 나의 슬픔이 타인의 슬픔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야만 정의는 실현되어질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했던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다. 타인의 이익은 나의 것이었으며 열등한 민족의 땅을 빼앗아도 정당한 것이었던 정복의 시대에는 포식자와 피식자만 존재하였다. 피식자에게 감정을 이입한다는 것은 포식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가상의 공포대상이 필요하였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정의는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야 했다. 이때의 정의로운 사람이란 야만인을 가장 많이 잡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이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제국주의자들의 가혹한 정치의 이야기이자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정의‘라는 톱니바퀴와 맞물려 돌아가며 진실을 파헤쳐가는 자기고백의 소설이다.
제국의 변경에서 최고 책임자로 근무 중인 치안판사는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가혹한 고문과 폭행을 하는 졸대령을 무척이나 혐오한다. 어린아이는 졸대령의 채찍에 실신하였고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들은 매 맞아 죽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치안판사는 고통과 연민,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이들은 ‘야만인’이라는 상상 속 괴물을 상대로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고 제국주의의 군인들은 유목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가혹한 폭행과 학대를 정당화하였다. 실체 없는 야만인은 상상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더욱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어갔다. 허나 야만인의 현실판 유목민들은 헐벗고 가난한 떠돌이 집단이었다. 치안판사는 야만인이라는 유목민을 잔인하게 대하는 제국 군인들을 경멸하지만, 차마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상처받은 인질들을 치료해주는 것으로 거리를 둔다. 이때까지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걸인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추하고 더럽고 앞을 보지 못했으며 다리를 절고 있는 불구의 여인.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고문을 받는 게 치욕적이라며 자살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본 후 고문을 받다 실명되고 다리 한 쪽이 기이하게 꺾여 있는 그녀는 감정이 없는 텅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추운 겨울을 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치안판사는 그녀에게 겨울을 나기까지 일자리를 주겠다며 데려온다. 밤마다 그는 그녀의 다친 발과 몸을 씻겨주는데, 성스러운 의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추하고 일그러진 얼굴의 그녀를 보며 모진 고문과 폭행으로 망가지기 이전의 삶을 상상하며 제국 군인들의 무자비함을 떠올리곤 한다. 그녀를 씻기는 과정은 후에 그가 고백하듯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손을 씻는 정화의 의식이다. 그는 그녀를 씻기며 그녀를 주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신이 모르는 평범한 모습의 그녀, 야만인 포로로 잡혀 오기 전의 행복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제국주의자들이 가한 폭행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되새기곤 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는 상상의 작업들은 욕망에 충실하며 아무 죄책감 없이 여자와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곤 하였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고 제국의 군인들과 다름없이 자신역시도 권력자로 그들 위에 군림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눈 먼 여자에게 한 것처럼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다친 곳을 치료해주며 일자리를 준다. 그의 이러한 행위들은 ‘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 관리’ 으로 보이게 하였고, 위험인물이라는 낙인을 찍게 하였다.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소. 이건 사형집행인들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 보고싶었던거요. 잠깐! 조금만 더 들어줘요. (중략)여하튼, 일이 끝나고 나서 음식을 먹는 게 쉬운 일이오?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손부터 씻고 싶어 할 것 같거든. 하지만 손을 씻는 것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소. 성직자가 끼어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거든. 일종의 정화시키는 의식 말이오.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소? 가령 식탁에 앉아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빵을 잘라 먹는 일 같은 일상적인 삶 말이오.”(p207)
눈 먼 여자를 사랑하면 할수록 치안판사는 그녀를 불구를 가진 한 야만인여성으로 대하기보다 같은 눈높이에서의 사랑, 즉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녀를 부족에게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산 넘고 물을 건너 모래 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건너는 힘든 여정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야만인들과 내통했다는 죄로 감옥에 가게 된다. 하루아침에 최고의 권력자에서 죄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물과 뒤섞인 방 안에 남겨진 바퀴벌레가 전부였다. 평화롭고 온화했던 변방의 도시는 치안판사가 구속된 이후로 전쟁에 휘말리고 야만인들에게 폭정을 가하는 나날이 지옥처럼 재연되곤 하였다.
‘나는 여자 속옷을 입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던 날, 마지막 남은 권위의 흔적마저 잃어버리고 늙다리 광대가 되어버린 상태다. 게다가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이나 바닥에 놓은 음식을 개처럼 지저분하게 핥아먹어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감금당하지도 않는다.’
나는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불쌍한 죄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건 차선의 세계다.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말이다.” -p229
법은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어왔던 판사에게 비치는 모순덩어리와 비합리적인 현실에서 법이 아무쓸모가 없을 정도로 인간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자라는 포식자에 의해 가혹하게 착취를 받는 피식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자본주의 세계는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차 있다. 자본주의가 그런 착취와 모순 위에 세워진 것임을 이해한다면 현재라는 혼돈의 시대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정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도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 야만인이라는 가상의 적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생산하며 착취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비단 가상의 적은 제국주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은 또다른 형태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며 공감을 하지 못하는 이들 역시도 또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자다. 이 시대의 혼돈과 불안의 원류를 거슬러가다보면 현대의 모순과 부조리된 세상이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치안판사가 그러한 것처럼. 정의란 시대마다 다르게 규정되어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나, 정의를 타고난 인간의 천성은 정의롭지 못한 정의를 보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정상이다. 치안판사의 고통과 괴로움의 원천은 바로 제국주의의 시스템이 가혹한 착취와 억압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규정된 시대의 정의 ‘야만인을 가장 많이 죽이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야만인들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였던 것은 평생 법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의 양심이 곧 정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정의는 무엇일까.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정의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의의 얼굴을 하고 있는 수많은 위선속에서 진짜를 찾는 일은 자본주의가 남긴 숙제나 다름없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믿을 수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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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어둠의땅을 첫 작품으로 으로 나라의 심장부에서, 페터르부르크의 대가, 어느 운나쁜 해의 일기 등을 집필하고 cna상, 부커상,에드랑제 페미나상, 아이리스 타임즈 국제소설상등 많은 상을 거머쥔 j.m.쿳시 작가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작가로서 제국주의와 제국군에 대해서 작가의 식민지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서의 참신한 비판이 녹아있는 재미있는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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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인터넷서점에서 진행한 리뷰대회에 응모하기 위해 구입한 책이다. 마음과 달리 좀처럼 읽히지 않아 결국 기한을 넘기고 오늘에야 다 읽었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읽기 시작했고 정작 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책 자체는 열심히 읽은 보람이 있다고 자부할 만큼 좋았다. 이 책을 쓴 작가는 J.M.쿳시다. 194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난 쿳시는 케이프타운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를 하다 1972년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1974년 <어둠의 땅>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쿳시는 <야만인을 기다리며>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쿳시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백인우월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어느 제국의 변경 도시를 통치하는 치안판사다. 어느 날 평화로운 그곳에 수도의 제3국 소속 경찰들이 파견되어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을 잡아들이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이 벌어진다. 치안판사인 '나'는 죄없는 야만인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짓지도 않은 죄를 자백해 목숨을 잃는 걸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수도에서 온 제3국 경찰들에게 항의를 해보지만 그들은 '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에게 홀딱 반한다.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끔찍한 일들을 당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나'는 일견 '졸 대령'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에 항거하고 야만인들을 보호하는 선한 인물로 그려진다. '눈 먼 여인'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다르다. '나'는 '눈 먼 여인'을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 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낮에는 집안일을 시키고 밤에는 잠자리를 강요한다. 매일 밤 '눈 먼 여인'을 씻기고 어루만지면서 그러한 행위가 여인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자신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군다. 식민주의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반짝 하고 등장한 것이 절대 아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식민지로 삼았다. 여자를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노동을 대신 하는 노예로 간주했고, 여자의 몸에서 난 아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어떤 남자도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제에 헌신하는 한 식민주의자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여자도 마찬가지다). 이 점을 암시한 것이 이 작품의, 그리고 J.M.쿳시의 대단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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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다른 작품 소년 시절 청년 시절 서머타임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철의 시대 # 읽고 나서. 시대도 공간도 불확실한 어느 시/지점에, 제국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부족을 점령하고 자신들을 그들로부터 지키며 살아가는 도시의 치안판사가 이야기를 끌어간다. 쳐들어온 쪽은 분명 '제국'일 테지만, 제국은 졸대령과 군인들로 하여금, 쳐들어올 '야만인'을 저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고문한다. 오랫동안 도시에 머문 치안판사는 제국의 행위에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고문으로 가족을 잃고 몸도 만신창이가 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 그녀를 그의 방법대로 '보살피기' 시작한다. 그 방법은 작가 혹은 인물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와 상관없이 늙은 변태를 연상시킨다. 그녀의 몸을 닦으며 '정화' 의식을 거치고, 그녀를 만지고 애무하지만 그녀와 교감 없이 그녀 안에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치안판사의 모습은, 그녀를 배려하는 듯, 자기가 좋을 만큼만 딱 죄책감을 더는 듯 보이기도 한다. 자신만의 제국에 대한 반항으로 그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한다. 춥고 먼 길을 가 그녀를 부족에게 보낸다. 그리고 돌아온 곳에서 그는 배신자의 타이틀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그들은 한동안 그를 방치한다. 당당하게 재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치안판사는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도망치지만 다시 돌아와 그렇고 그런 삶을 계속 이어간다. 그는 영웅은 아니었다. 갑자기 마음을 180도 돌릴 수 있는 위치나 나이, 세월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의 안전한 존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왔다는 데에는 틀림없다. 명백히 틀리다고 해서 누구나 그 틀을 깨고 나올 용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뭐 이런 변태가 있어, 했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더 잘할 자신은 없다. 그는 그들의 고대 유물들을 파내고, 그들의 글자를 해독하고 싶어 한다. 여자의 몸에 난 표시들을 해독하고 싶어 한다. 끝내 위아래도 구분하지 못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아마 그는 시간이 지난 후에 야만인들을 이해하고 포용했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나와 남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한다. 나와 다르면 '야만인'이 되어버린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가진 게 좋은 거니까 내 문명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야만인'들에게는 아마도 '제국'이 그들의 '야만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뛰어난 문명, 체제와 상관없이 그들이 하는 짐승 같은 행동은 더더욱 이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누가 진짜 '야만인'일까. 해설을 보니 일부러 시간과 장소를 모호하게 지정했다 한다. 제국주의 침략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명시하기 위해서. 조금은 완화된 방법일지 모르나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에 동의한다. *밑줄 "특정한 말투가 있습니다." 졸은 말한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그걸 알고 있죠." 처음에는 거짓말을 합니다. 아시죠 -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 처음엔 거짓말이죠. 그리고 압력이 가해지면 더 거짓말을 하죠. 거기에 압력이 더 가해지면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다 압력이 더 가해지면 그때에야 진실을 얘기합니다. 그게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 공간은 공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어디를 가나 똑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노고로 편하게 먹고사는 나에게는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한가하고 잘못된 짓이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잠은 더 이상 고단함을 풀어주는 목욕이거나 원기회복이 아니라 망각이며, 밤마다 소멸 상태와 맞닥뜨리는 일이다. 이 여자의 몸에 난 표시들을 해독하고 이해할 때까지 그녀를 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내가 말한다. "아주 귀여운 동물이야." 그녀가 어깨를 으쓱한다. "동물은 밖에서 살아야 해요."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와 고문자들, 딱정벌레처럼 어두운 지하실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어떻게 내가 침대는 결코 침대가 아니고 여자의 몸은 결코 쾌락의 장소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나와 졸대령은 다르다고 나는 주장해야 한다! 그가 저지른 범죄 때문에 고통을 받지는 않겠다! 내가 지난 이십 년 동안 치안판사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열한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야만인들을 상대로 보여준 모욕과 경멸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게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면, 그 경멸을 어떻게 근절할 수 있겠소? 이 여정이 끝나면 우리는 모두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질려 있다. 짐승처럼 살다 보니 진짜 짐승이 돼가고 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이토록 사소한데, 어떻게 내가 박해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고통은 사소하기 때문에 훨씬 더 수치스럽다. 그들을 짓밟았던 그 짐승이 나도 짓밟으리라고 왜 상상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정말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내가 피하고 싶은 건 현재의 나처럼 어리석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모욕적인 죽임을 당하는 일이다. 당신이 적이란 말이야! 당신이 전쟁을 했고, 당신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순교자들을 만들어줬소. 그것도 지금 시작된 게 아니고 당신이 더럽고 야만스러운 짓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던 일 년 전부터 이미 시작된 거요.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해줄 거요! " 죽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소.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내 입에서 역겹게도 비겁한 말이 나온다. "나는 살고 싶소. 모든 인간이 살고 싶어 하듯 말이오. 살고 살고 또 살고 싶소. 무슨 일이 있어도." 일종의 정화 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영혼을 정화시키는 의식 말이오.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소? 가령 식탁에 앉아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빵을 잘라먹는 일 같은 일상적인 삶 말이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나는 얘기한다. 나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거듭 끄덕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내 가슴과 그의 가슴을 가리키며 그 말을 반복한다. 나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그곳을 떠난다.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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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본 미드 《모던 패밀리》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던피 부부와 그 이웃이 동네에 있는 흉물스러운 동상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겠냐며 의기투합한다. 던피와 저녁을 함께 먹는 부부는 레드넥처럼 보이는데, 전형적인 중산층 던피는 이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로프를 가져와서 그 동상을 끌어내자는 말에 클레어는 이렇게 반응한다. “We live in a civilized society.” 바로 돌아오는 말씀이, “까베르네와 생선을 함께 드시는 사람이 하는 말씀이군요.”다. 한방 먹은 클레어는 머쓱해진다. 비싼 와인을 대접받으면서 제법인데? 생각했던 이웃을 내심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Civilization, Enlightenment 이런 단어들은 원뜻을 밝혀가며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로 묶이게 되면 기본적으로 우월과 열등이 있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우월한 면에는 문명이 설 것이고, 열등한 면에는 야만이 설 것이다. 어둠과 빛이 서로의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쿳시는 이 작품 내에서 문명(제국)과 야만이 그러한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대를 고문하고 깎아내어 내가 의도한 말을 하게하여 역사를 쓰는 것, 그러한 폭력의 역사가 바로 제국이고 그 제국을 넓히기 위해 오늘도 피를 흘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말을 하는 화자가 제국주의의 품 안에 젖어있는 관리라는 점이다. 영토를 넓히고 일부 구역을 자치화시켜 파견되는 치안 판사. 제국의 끝에서 제국의 철학으로 제국의 이름을 지키는 이다. 그가 야만의 세계로 넘어온 지는 오래 되었다. 이제 그는 어부와 전사의 차이를 알고, 이른바 '문명'의 문화에 무지한 이들이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아 왔다. 그렇기에 자신이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가졌음을 내심 자부하고 있다. 말하자면 온정한 제국주의자인 셈이다. 비정한 제국주의자는 졸 대령이다. 치안 판사의 따뜻한 눈길이 머물던 곳을 군화로 짓밟아 버리고 평화로이 살던 이들의 볼에 철사를 꿰어 짐승처럼 끌고 와 전리품을 전시하는, 제국주의의 나쁜 얼굴인 것이다. 온정한 제국주의, 비정한 제국주의... 누가 더 정의로운가는 논할 가치가 없지만 적어도 쿳시가 다른 점은 그러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또 낱낱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언젠가 록산 게이가 『헬프』를 가리켜 혹평을 한 적이 있다. 어째서 흑인들은 어리숙하지만 정의감을 지닌 어린 백인 여성의 도움으로 새로운 운동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타자화되는 것은 언제쯤이면 없어지려나,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도 비슷하다. 하지만 두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 차이가 있고, 또 그러한 선민의식이 약간은 다르게 발휘된다는 점도 다르다 할 수 있겠다... 온정한 제국주의자에게 비정한 제국주의자가 말한다. 그런 알량한 정의감으로 자신은 다르다고 하고 싶은가? 치안 판사의 외침,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라는 말은 광인의 외침처럼 보일 뿐이다. 물론 흑백논리의 세계에서, 동조의 세계에서 이질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알량한 정의감'이란 것은 치안 판사의 속내를 꿰뚫는 통찰이기도 하다. 치안 판사와 눈 먼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치안 판사의 생각과 위로, 행동들이 마냥 선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결한 선의만이 가치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는 점이 바로 도덕의 어려움이다... 그래서 칸트가 정언 명령을 이야기한 걸까? 그가 눈 먼 여인을 가두어 수탈하고 농락했던 것을 생각하면... 치안 판사가 이야기하는 도덕은 어쩌면 개인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에 국한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치안 판사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의로움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미물마저도 옳음과 그름을 알고 태어나리라 생각했다는 점... 그런 모순이 어쩌면 인간이 아닐까? 군홧발이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간 도시는 이제 폐허처럼 변해간다. 그리고 죄수였던 이는 다시 행정일을 시작한다. 그가 스스로 관심을 기울이던 '제국이 침범한' 땅 아래에 묻힌 문명처럼... 어쩌면 제국의 문명도 그런 먼지처럼 바스러질 지 모르는 일이다. |
| J.M 쿳시 작가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후기입니다. 2003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밌고 묵직한 작품이었네요. 작중 배경이 정확히 나와 있지 않아 더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치안판사인 주인공의 눈을 통해 책 속 세상을 보면서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문명인지 생각해보게끔 만듭니다. 자신들과 생김새가 다르다고, 문화가 다르다고, 통치를 편하게 하기 위해 가상의 적으로 이용하는 게 문명인지 야만인지…….최근에 영화로도 나왔던데 꼭 보고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