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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장인어른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는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망극할 일이 잇달아 생기고 보니 요즘 젊은이들 말대로라면 정신줄을 놓게 생겼습니다. 사람이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세상을 뜨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태어나는 것과는 달리 순서가 따로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래 전부터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 역시 아직까지도 자신은 없습니다만 죽음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도 죽음에 대한 저의 앎을 더하기 위한 책읽기입니다. 보드리야르는 모든 사물의 죽음, 즉 사라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물이라 하면 생명을 가진 생물은 물론 유무형의 무생물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그의 지적 전통에 충실하였다고 하며, 시뮬라시옹(가장, 위장) 이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이론은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흔히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는 가상현실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역사책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더 실감하는 경향이 있다는평가를 들어 설명해보려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흥행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극적인 상황을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런 작업들이 때로는 역사를 왜곡한다는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젊은이들은 역사책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장면이 각인되면서 학습효과를 높이게 되고, 결국은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실재(實在)했던 과거가 실재(實在)하지 않은 가상의 과거로 대치되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론은 이렇게 현실과 가상의 관계가 전복된 현상에 주목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원본에 대한 복제를 의미하는 시뮬라크르와 그것을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시뮬라시옹의 두 가지 개념으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현실은 바로 시뮬라시옹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라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세계관입니다. <사라짐에 대하여>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100쪽이 채 안 되는 얇은 두께에다가 한쪽은 디지털 이미지를 나타내는 기호로 가득 차 있어서 금세 읽을 것 같지만, 막상 읽다보면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프랑수와 리보네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마태복음 25장 2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공허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보드리야르가 말하려는 ‘사라짐이란 결국 사라져 비어버림’이란 공허라는 개념을 새롭게 하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드리야르는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을 두고, “내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아직 없으며 / 한 장소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라져 버렸고 / 한 인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미 사망했으며 / 시절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3쪽)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보드리야르가 공허의 한계를 더 멀리 밀어내고 공허의 실체를 밝히면서 공허가 인생에서 본질이라고 한 것을 리보네는 지적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허’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반야심경에 나오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이 구절은 ‘사리불이여! 물질적 형상으로 나타나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텅 빈 본질세계와 다르지 않고, 텅 빈 그 본질 세계 또한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물질적 형상의 세계는 곧 텅 빈 본질세계이며, 텅 빈 본질세계는 곧 물질적 형상의 세계인 것이다.’라고 새기는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본질이 비어있는 듯 채워져 있다는 불교의 인식이 최근 들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중생은 끊임없이 삼계 육도(三界六道)를 돌고 돌며 생사를 거듭한다’라고 보는 윤회사상(輪廻思想)은 우리는 어느 한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삶을 돌아가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생명체는 종에 따른 특별한 유전자 구성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죽은 다음에는 그 생명체의 특징이 발현되도록 했던 유전자 역시 단위 원소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간 원소들은 다른 생명체를 규정하는 유전자를 구성하는 요소로 재조합되는 것이니 바로 결국 윤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과학에서는 불교의 윤회사상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업(業)의 본질을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이 사라져 버린 세상을 예언합니다. 자연의 고갈, 종의 멸종은 물리적 과정이거나 자연적 현상일 따름이기에 인간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생각에는 인류의 폭발적 증가로 인하여 지구의 부존자원의 고갈이나, 혹은 지구환경의 오염 때문일 것이라는 환경보호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치 이런 운명(인류의 잠재적 사라짐)이 어딘가에 프로그램화 되어 있고, 우리는 이 프로그램의 장기적 집행자에 불과한 것(23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세포가 자체 파괴를 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된 과정, 즉 아포토시스를 떠올리게 한다’라고 는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보면 인류의 사라짐 역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이상 짊어져야 할 숙명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만 그 설명으로 가져온 아포토시스는 개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개체의 특성을 인류라고 하는 거대한 생물종의 집단의 특성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라져야 할 인간의 숙명은 인간이 세상을 분석하고 변형하려고 하면서 세상과 작별하고 동시에 세상에 현실성의 힘을 주기 시작한 것이라고 저자는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류는 자연법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특별한 사라짐의 방식을 새롭게 승화시킨 유일한 종이라고 규정합니다. 역설적으로 세상이 존재함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세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언젠가 미래에는 인간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인간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무엇 때문일 수밖에 없기 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사라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라짐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술을 비롯하여 제도, 가치, 금기, 이데올로기, 신념 등은 사라졌으면서도 암암리에 남아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이르게 되면 앞서 말씀드린 시뮬라시옹을 행할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시뮬라크르는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실재가 실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원성을 얻은 시뮬라크르에게 과연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어서 사라질 운명을 가진 인간이 창조해낸 예술 역시 사라진다는 숙명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예술 자체도 현대에는 그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한다.(29쪽)”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예술은 사라진 다음에도 살아있는 모든 것의 패러다임이 되는데, 예술의 사라짐을 연기하는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론에 따르면 온갖 형태의 가상현실 뒤로 현실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형태로서의 사라짐에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부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시뮬라크르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실제적인 것과 그 사라짐과 우리의 관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운명으로 주제를 옮깁니다. 아날로그적 이미지가 디지털 기술로 대치되면서 놀랍도록 간편하게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는 영원하게 파멸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필름, 즉 사물이 음화로 기입되던 그 민감한 표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미지를 촬영하고 재생하고 합성할 수 있는 이미지 소프트웨어 패키지만 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사진을 잘 모릅니다만, 사진에 조예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날로그 사진은 분명 디지털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장을 가지고 있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아날로그 방식을 결코 버릴 수는 없다고 합니다. 간편성이나 시간적 요소에서는 강점이 있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를 비롯하여 정밀성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방식이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이미지 기술이 가져온 폭력성의 하나로 저자는 컴퓨터 합성 이미지의 폐해를 들었습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원본적 매체로서의 사진을 사라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로그 이미지가 음화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디지털 이미지의 원본이란 쉽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자매체를 통하여 광속도로 확산될 수 도 있어 원본을 확인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지털 이미지가 엄청난 자가증식을 통해 확산되면 그것은 더 이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미지 죽이기의 일부가 되어 정보적 가치가 전혀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는 주인이어야 하고, 고유의 상징적 공간을 가져야 하는 이미지의 주권에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적 행위의 디지털 자유화 속에 기술적 중재 이외에 아무런 다른 중재행위가 없는 탈인간화가 가속되다보면, 적어도 이미지의 영역에서는 인공 지능과 등가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저자는 인간이 이룩한 기술적 발전은 궁극적으로 기술적 헤게모니의 전이를 예견했습니다. “인간 본연의 의미가 자신의 가능성의 극단에까지 가지 않는 것이라면, 기술의 본질은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하고 훨씬 멀리까지 간다. 따라서 기술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구분선을 긋고, 결국에는 인간에게 반대하는 끝없는 가능성을 전개하고, 조만간 인간의 사라짐을 초래할 것이다.(21쪽)” 인간의 지능과 비교될 수 있는 인공지능의 탄생을 예견한 듯합니다. 이로부터 저자는 그 기계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만 존재하게 될 수도 있음을 이끌어내고 우려합니다. 즉, “기계 속에 인간의 모든 지능이 탑재되고, 그 기계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인간은 오직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만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오직 기술적 사라짐의 대가로만, 디지털 질서 속에 새겨지는 대가로만 불사(不死)가 된다(81쪽)”라고 하였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영생을 얻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역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가?’라는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피하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인류적 혁명을 통하여 현재의 ‘디지털 혁명’과는 정확히 반대의 것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이와 같은 혁명이 고려된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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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ː인간 고유의 이중성에 의한 우리의 사라짐은 당연하다 '사라짐', 특히 '인간의 사라짐'에 대한 사색이 담긴 장 보드리야르의 책<사라짐에 대하여>는 '인류의 사라짐은 자연 법칙과는 무관한 하나의 예술이며 불가피하다'는 명제 하에서 쓰여졌다. 이 책은 인간이기에 지닌 원초적인 면, 진화에 대한 욕망,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완벽을 추구하려는) 기계화와 디지털화되어가는, 그것들로 하여금 원래 그대로의 실재를 거스르게 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특히, 보드리야르가 이 책에서 중점을 둔 소재는 '이미지'다. 그 중에서도 '기술적(디지털) 이미지'.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모호한(시뮬라크라), 실재와 가상세계의 경계가 사라진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라짐은 어쩌면 우리가 자초한 것이며, 달리 표현해 '우리가 추구하는(욕망하는)' 것들이라 정리한다. 가령, 1차 이라크 전쟁에 대해 우리는 실재를 느낀 것이 아닌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화된 것을 보았고 그것을 우리는 우리 주변의 실재가 아닌 화면 너머의 시뮬레이션 정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대의 이미지를 지적하는 보드리야르는 재미있게도 디지털 사진이 아닌 사진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펼쳐낸다. 비록, 사진기의 셔터가 작동될 때에는 실재와 분리될지언정 실재하는 빛, 그림자, 풍경 등은 고유한 것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기술적 이미지가 아닌 '인간의 손이 개입되지 않은). 하지만, 기술적 이미지는 복제되고 재생산, 과잉생산 되면서 실재와의 괴리를 선언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럼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사라지기를 자초하고 초래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바다. 극단적으로 그는 디지털 이미지를 '작은 죽음'이라고도 일컫는다. 우리가 자꾸 진화를 욕망하면서, 세상을 분석하고 변형하려 하면서 이 세상은 사라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 고유의 이중성 때문에 우리는 '공허'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 사물에 대해 개념을 주입시키면서 실재의 주체 자체는 에너지를 상실하기 시작한다는 것 또한 남다른 통찰력이다(그러니까 실재는 개념 속에서 사그라진다. 그러나 그 반대의 움직임은 더욱 역설적이어서, 개념과 생각도(물론 환상, 유토피아, 꿈과 욕망도) 그 실현 속에서 사그라진다. p.19). 결국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역량을 최대로 표출하고자 하기 때문에 사라짐의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라짐은 슬픈 것'일까? 보드리야르는 사라짐은 우리 없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을 펼친다. 또한, 사라짐은 간단하지 않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사라진 모든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미세하게 스며들어 있기에, 흔히는 드러내 놓고 우리를 지배했던 권위보다 더 위험스럽다. p.33). 비록, 주체는 사라지지만(사실 모든 주체는 사라짐의 운명을 타고났다), 나르시스적 복사판을 남겨두기 때문에 우리는 사라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편, 우리의 사라짐(=죽음, 형태로서의 사라짐)은 널리 편재된 차원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나는 존재의 필수적 차원이라고까지 말할 참이다. 자신의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 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만약 사물을 정말 명료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라짐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 그보다 더 나은 분석틀은 없다. p.39). 보드리야르가 <사라짐에 대하여>를 통해 경고하는 것은 '지나친 디지털(기술)화'일 것이다. (기계 속에 인간의 모든 지능이 탑재되고, 그 기계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인간은 오직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만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오직 기술적 사라짐의 대가로만, 디지털 질서 속에 새겨지는 대가로만 불사가 된다. p.81) 다시 말해 우리는, 세상이 디지털화, 기술화될수록 우리는 '체계적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기술화되면서 우리의 주체가 사라짐은 당연한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욕망하는 것 또한 사라짐이다. 결국 '공허와 함께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진화할수록 당연시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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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보다 개인정보가 중시되고 있다. 인터넷 곳곳에 나도 모르게 남겼을 많은 흔적들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다. ‘잊혀질 권리’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하면서 본인의 요청에 따라 데이터를 삭제해주는 업종도 생겨났다고 들었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정보를 생성해내고 있다. 이 즈음 되면 우리가 정보인지 정보가 우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가 아닌 것들이 나를 대체하고 나인 양 군림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유는 독특했다. 생전 그는 엄연히 존재했던 걸프전마저도 부인했다. 이리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걸프전에서 가장 중점이 됐던 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였다. 직접 무기를 들고 전장에 뛰어든 사람들도 물론 많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안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으로 파괴의 현장을 목도했다. 참으로 안전한 환경에놓인 이들이 삶과 죽음이 극적으로 갈리는 현장을 너무도 생생하게 접하면서 전쟁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실재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서의 이미지가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지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과거에는 제 아무리 사진이라 하여도 여러 장을 인쇄하는 일이 버거웠다. 기술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못하다보니 오로지 충분한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만이 사진을 독점했다. 그렇게 탄생한 사진은 일종의 사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사진 속 담긴 유명인사들의 모습은 모두의 주목을 받고도 남았다. 지금은 사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 버렸다. 굳이 사진관을 가지 않더라도 찍을 수 있는 게 사진이다. 비싼 돈을 들여 카메라를 구입하지 않더라도 휴대폰 버튼 몇 개만 누르면 사진이 찍힌다. 사라지기는커녕 인터넷 상의 각종 포털이나 SNS를 통해 무한히 재생산되고, 심지어 변형되기까지 한다. 실재 아닌 것들이 실재보다 더 막강한 생존력과 번식력을 자랑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나에 대한 것들이 유통되고 있을 것이며, 그것들이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은 채 사라진 나를 대체할지 모른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며 생을 갈망했던 여러 인물들조차도 결국에는 죽었다. 인류에게 있어서 죽음은 해소하고픈 과제와도 같았다. 비록 나는 아니지만 나와 꼭 닮은 무언가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은 그러나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난감하다. 그것이 내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이미 내 통제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멈추어야 할 때를 알고 멈출 수 있다면 그와 같은 번식조차도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속성은 가히 도가 지나치다. 이미지가 범람하다 못해 현실마저 잠식하고야 마는,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이미지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차라리 그것은 이미지 죽이기로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영혼 없는 이미지에는 의미가 담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아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기기는 괴물로 돌변하고야 만다. 진정 의미있는 것만이 살아남아야 하는데 아무도 이를 걸러내지 못함에 따라 무의미가 암 덩어리처럼 무한증식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무의미에 둘러싸인 의미는 질식해버리고, 무의미만이 끊임없이 퍼져나간다. 급기야 종말조차도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일부 포기해야만 하는데 이젠 그게 불가능해진다. 달갑지 않은 포화상태 속에서 원치 않는 영생을 얻은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사라져야 할 껍질은 계속해서 겹겹이 쌓여만 가고, 공기와 단절된 본질만이 영생에 반해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운이 좋았던 걸까. 장 보드리야르는 모두가 사라지지 않는 시대에 사라지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책은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으며, 약간의 수고만 보태면 그의 사진 역시 어렵잖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 그가 떠난 빈 자리를 채운 무언가가 시뮬라시옹이 아닌 게 어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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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텍스트를 원래의 의도를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고정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텍스트라는 것이 데리다에게는 대화의 상대인 것이다.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풍요롭게 다양한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의 폭을 넓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텍스트의 고정된 관념을 부숴버린다.
이렇게 데리다를 빌려 독후감의 첫 부분을 시작하는 것은 순전히 오독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빌려 오기 위해서다. 다양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만큼 독서력이 뛰어나지 않기에, 오독도 하나의 창조행위가 될 수 있다고 우기기 위해서다. 한 마디로 잘못 읽어도 어쩔래, 배째라!
보드리야르는 논술교재의 제시문이나 주요 논제 분석의 자료로 읽은 것이 전부다. 영화에 취미를 가지면서 점점 영상 이미지에 매혹되는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미지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알아보고 싶었다. 이런 이유와 내가 얻은 정보가 다행히 잘 맞물렸다.
영화와 철학에 박식한 매니저로부터 구걸하다시피 얻은 정보가 바로 <사라짐에 대하여>이다. 얇은 두께와 제목, 그리고 첫 장의 문장에 끌려서 덥석 집어들었다. 철학의 언어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암호로 가득 차서 국내 철학자가 쓴 안내서를 주로 읽는다. 그래 봤자 그것의 반의반도 이해 못 한다.
이 책은 보드리야르의 유고집이다. 죽음을 앞둔 노 철학자가 쓴 글이 바로 <사라짐에 대하여>이다. 저자 자신이 사라짐을 목전에 두고 쓴 책이란 사실을 알게 되니 <사라짐>의 울림이 훨씬 깊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느낌은 ‘무서움’이었다. 그가 얘기하는 ‘사라짐’과 시뮬라르크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그에게 있어 ‘사라짐’은 기술문명의 발달에 따른 자연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라짐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뮬라르크는 ‘현실을 복제한 복제의 복제’, 제어할 수 없는 자본의 증식처럼 이미지가 끝없이 복제되는 세상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거기는 원형이 무의미해지고, 원본이 무엇인지 모르는 복제품이 진품이 되는 전도된 세상일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사랑을 카피하다>가 떠오른다. 젠장, 나는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인증된 복제품> 부부를 진품 부부로 여기며 봤다.
저자는 현실성의 사라짐은 근대 과학의 탄생에서 시작한다고 밝혔다. 근대 과학은 데카르트의 이성이 선두에 서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도 대상화하는 객관성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때 과학은 ‘세상을 분석하고 변형하려고 하면서 세상과 작별하고 동시에 세상에 현실성의 힘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역설적으로 세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언어가 생기고 개념이 생긴 그 순간에도 사라짐은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의 이미지가 넘치는 세상의 기원은 엄밀하게 따지면 근대과학과 자본주의의 태동일 것이다.
그러나 사라짐은 다르게 생각될 수 있다. 사라짐은 ‘우리 없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의 <사라짐>이 가장 잘 나타난 것으로 저자는 예술과 사진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카피라이터 저스틴은 과학을 맹신하는 형부 마이클과 언니 클레어의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의 세계는 앞에서 저자가 말한 인간이 사라지고 실재가 사라진 질서정연한 상징적 질서의 세계일 것이다. 이미지의 세계에 발생하는 균열은 저자가 말하는 ‘사라짐’이 존재하는 공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예민한 예술가 저스틴은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무력감에 맥없이 침잠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사라짐의 기초 위해서’ 살고 있다. ‘사물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사라짐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
현실성이 체계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가 처한 현재의 운명일 것이다. 즉,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혹하게 이동하면서 사라지는 이미지의 운명일 것이다.
원본이 죽은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는 매트릭스를 실재로 인식하는 인간을 양산한다. 그리고 인간은 ‘기술적 조작에 의해 단순해졌다.’
그렇다면 “왜 모든 것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증된 복제품> 부부를 보면서 “두 사람 진짜 부부예요?”라고 묻다가 끝날 것인가? 아니면 저스틴처럼 예민한 감각을 저주하며 파멸의 순간을 기다릴 것인가
역사에 화폐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실재가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선 전도된 힘을 갖고 있다. 이미지의 끝없는 복제증식으로 사실이 전도되고 지젝의 표현처럼 ‘실재가 사라진 사막’이 되었다. 나는 사라짐과 사라짐이 겹쳐지고, 이미지의 질서가 흐트러진 공간, 거기를 주시하고, 그것을 다시 뒤집는 사유를 하고 싶다. 그리고 사유 속에서 이미지의 허구를 깨트리고 싶다. 어쩌면 광기에 빠질 지 모르는 그것이 내가 사라짐을 대하는 자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