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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집 규수에서 독립투사로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의 모델이었다는 남자현(南慈賢, 1873~1933)은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열아홉 살에 부친의 제자였던 국오(菊塢) 김영주(金永周, 1862~1886)에 시집간다. 하지만 시대의 격랑은 그녀에게 평온한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편이 을미사변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했다가 1886년에 전사함으로써 불과 24살의 나이로 과부가 된다. 이 무렵의 그녀에 대해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은 <여협(女俠) 남자현전>(1934)에서 남편의 사후(死後) “스스로 의병대장을 맡아 적과 마주 싸워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의 적군들은 선생을 ‘한국의 여비장(女飛將)’이라 불렀다.1)”고 서술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이때의 일로 그녀의 아버지 운보(雲甫) 남정한(南珽漢, 1831~1887)은 고문을 받다가 죽고, 이어 오빠 남극창(南極昌, 1850~?)마저 실종되었다가 사망함으로써 그녀의 친정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렇게 친정과 시댁 모두 남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양잠 등을 하면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유복자인 아들 김성삼(金聖三)이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1919년에야 비로소 신변을 정리한 그녀는 만주로 떠난다. 47세의 늦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독립운동의 보조자에서 주역으로 처음 만주에 도착해서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인 정정화(鄭靖和, 1900~1991)처럼 뒤에서 말없이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면서 1920년과 1922년 2차례의 단지(斷指)를 통해 독립운동 단체간의 반목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단지(斷指)는 그녀에게 ‘세 손가락의 여장군’이라는 상처뿐인 명성만 안겨주었을 뿐 반목과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1926년 독립투쟁의 최전선에 투신하였다. 여기에는 “여성 또한 독립투쟁 활동을 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 ‘여의군(女義軍)’이 제대로 육성되어 직접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소신2)”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결과 1926년 남자현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1858~1936]를 암살하기 위해 경성(京城)으로 잠입한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이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최고의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기 위해 동지들과 만주에서 경성(京城)으로 넘어간 것처럼.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그들의 암살은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나게 된다. 순종(純宗, 1874~1926)의 조문을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송학선(宋學善, 1897~1927)이라는 독립운동가가 먼저 섣부르게 칼을 들고 엉뚱한 사람을 사이토 마코토로 착각, 암살을 시도하는 바람에 경비가 삼엄해져서 실패했다. 이후 좌우합작의 분위기 속에 대독립당을 추진하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이를 위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등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런데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조선총독부 경무국]측은 이 모임이 공산주의자 집회라는 거짓 첩보를 중국측에 제보하여 47명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검거되는 사태가 발생한다.[길림 사건] 이때 그녀는 자진해서 이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외국의 독립운동자들을 감금하고, 또 그들을 일제에 넘기는 것은 국가적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3)”라는 여론을 조성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 중국 북경 정부와 길림성 당국과 교섭하여 3주 만에 석방을 이끌어낸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리턴(V.A.G.R.Lytton) 경(卿)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또다시 단지(斷指)하여 그 손가락과 ‘조선여인한 조선독립원(朝鮮女人恨 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血書)를 조사단이 머무는 호텔로 보냈으나 검문과정에서 발각되어 전달되지 못했다. 1933년 재만(在滿) 전권대사인 부토 노부유시[武藤信義]를 암살하기 위한 무기를 건네 받으려 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이는 의열단원 행세하면서 250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악명 높았던 밀정, 이종형(李鍾馨, 1895~1954)의 밀고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잊으면 안돼. 그녀의 독립운동은 결과적으로 볼 때, 길림 사건에서 안창호 등을 석방한 것 외에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만으로 그녀의 행적(行跡)이 묻히는 것은 석연치 않다. 47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동지들간의 화합을 위해 단지(斷指)하고, 조국의 적을 처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화(散華)한다는 일이 쉽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의 악랄한 밀정인 이종형(李鍾馨, 1895~1954)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악질 친일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盧德述, 1899~1968)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역임하는 그런 비틀린 세상을 지나와서일까 영화 <암살>에서 영감으로 나온 오달수가 말한 “우리 잊으면 안돼.”라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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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심장을 겨눈 여성독립운동지사 남자현평전 <나는 조선의 총구다>를 읽고 우리에게 벌써 잊혀진 이름이 되고있는가? 남자현이란 이름은? 우리의 독립운동역사에 이런 강렬한 인물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이미지를 남긴 남자현의 이야기이다.
남자현은 의병대장을 하다가 일제의 총칼에 의해 돌아가신 영양의 의병대장 김영주와 결혼하여 영양에 정착하게 된다. 그녀는 선친이 들려주는 논어와 근사록을 어렸을 때부터 되세겼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점차 일제의 조국침탈이 노골화되는 암울한 조선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실시로 인해 일어난 전국적인 의병운동이 경북 영양에서도 일어나게 되고 남자현은 자신의 남편으로 하여금 의병운동에 전적으로 활동할 것을 권유하고 자신도 의병을 돕는 일에 나서게 된다. 대부분의 내자가 집안을 보살폈지만 남자현은 적극적인 참여를 더 하게되며 이러한 계기가 평생을 독립을 위한 삶으로 바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헌병들의 간계에 빠져 김영주가 이끄는 의병들이 몰살하면서 이때 김영주도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후 남자현은 가세를 살리기 위해 양잠사업 등 새로운 일에 힘쓰는 한편 어린이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23년간의 주로 가세의 안정을 꾀하던 시절에도 의병활동 지원 등을 아끼지 않았다. 아들이 어느정도 성장하자 그녀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고자 만주로 이동하게 된다. 만주로 간 그녀는 나중에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은 이성룡과 만주독립군을 이끌던 김동삼을 만나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주로 그녀가 관심을 가진 것은 교육과 그당시 분파로 인한 독립운동의 분열에 대한 통합에 힘을 ?㎢?. 그녀가 두번의 단지(斷指)를 통한 열변을 통해 통합을 말했던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볼 때 그녀의 기개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녀는 1926년 몰래 경성을 방문하게 된다. 이유는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더 노골화되는 일제의 통치를 이끄는 일본 총독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단독으로 사이토를 암살할 것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경비가 삼엄해져서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중단하게 된다. 그 이유는 송학선이란 청년이 사이토를 죽이러 테러를 먼저 시도했으나 실패한 때문이었다. 이후 민족유일당운동을 이끌던 안창호선생이 중국당국에 구속되었을 때 일본에 넘기기 직전 여론을 이용하여 석방을 이끌어내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61세, 그녀는 차가운 이국땅 하얼빈에서 잡히게된다. 만주의 전권대사 무등신의를 암살하기 위해 단독으로 잠입을 했다가 밀정들에게 정보가 누출되어 잡히게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하얼빈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게 된다. 일제도 너무 몸이 쇠약해져서 투옥이 힘들다는 판단을 하게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나면서 남자현은 아들과 손자가 지켜보는 하얼빈의 여관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남자현은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게된다. 여성으로는 남자현이 유일한 수상자이며 유관순보다 더 큰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자현이 많이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관심이 그만큰 적었다 하겠다. 남자현을 교과서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의견이 언제부터인지 사라진 것도 아쉽다 할 수 있다.
남자현지사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본채 세워진 추모각. 이런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현실은 어떻게든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너무 일찍 잊고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녀가 살았던 영양의 집을 복원하였으나 현재 지자체의 지원부족으로 그냥 방치하는 현실은 우리의 정신을 우리 스스로가 잊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된다. 물론 이런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작은 것부터 보전하려는 노력이 후손들에게 남겨진 의무라 생각한다. 남자현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아울러 시대정신으로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일들이 자꾸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훌륭한 분들을 우리는 너무 잊고 산다는 반성을 하게 되는 하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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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총구다 일제의 심장을 겨눈 독립투사 '만주의 여호' 빈섬 이상국 지음 세창미디어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중학생 딸아이가 남자현이 누구냐고 묻는다. 독립운동가라고 답해줬더니, 전혀 모르겠는데? 라며 의아해한다. 독립운동을 한 여성이 많지 않은데, 어찌 전혀 생소한 인물을 두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느냐는 듯한 얼굴이다. 그래! 그래서 내가 이제 읽어보려 하는 거란다. 어렵게 찾아본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편에는 주시경, 신채호, 정약용, 고판례, 정종명, 남자현의 순으로 34인의 인물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었다.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은 1891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열 살이나 위인 의성김씨 전서공후 매은공의 12대손인 김영주(1862~1896)와 혼인한다. 그러나 영양 땅에서 일어난 의병 김도현에 합류하여 의병 활동을 하던 김영주는 5년 후에 남자현에게 유복자만을 남겨둔 채 의병전투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 때 남자현의 나이는 24세. 이후로 23년 간을 '보통 여인'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 수발을 들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친정에 돌아와 친정 식솔을 건사하며 살아간다. 1919년 47세가 된 남자현은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안동사람 이상룡(1858~1932)과 김동삼1878~1937)을 통해서 아들 김성삼을 데리고 만주로 진출한다. 만주에서 남자현이 행한 주된 일은 교육사업이었다. 1921년 액목, 화전, 반석에 20개가 넘는 여성 교육기관을 만들고 북만주 12곳에 교회를 세우기도 한다. 1926년 4월 남자현은 길림에서 박청산, 이청수, 김문거와 함께 일본총독 사이토 마코토(1858~1936, 일본의 군국주의자. 조선총독 취임 시 식민지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했다. 그러나 헌병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병력을 증가했고 많은 지식인을 변절시켰으며 위장된 자치론을 이용해 독립운동 방향에 혼선을 빚게 했다.)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도 하고, 1927년 안창호,김동삼, 오동진, 고할신 등이 검거된 길림 사건에 뛰어들어 '안창호를 구한 숨은 공로자'로 꼽히고, 1931년 만보산 사건과 김동삼 구출작전을 펼치기도 하고,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인 리턴조사단에 단지한 손가락을 보내 일본의 만행을 알리려고 하였으나 실패한다. 1933년 하얼빈에서 일본 전권대사 무등을 암살하려다 붙잡혀 투옥되고, 봄과 여름을 보낸 후 사망하고 만다. 단지한 사건으로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남자현은 1962년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는다. 이 책의 저자는 시인으로 남자현의 생애를 그린 『암살의 새벽』 ,『목없는 남편에게, 1896년 7월』 ,『단지』 ,『하얼빈 사진관』 등의 시를 같이 소개하고 있으며, 남편을 잃은 24세의 남자현과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하는 47세의 남자현, 죽음을 앞둔 61세의 남자현과의 가상 인터뷰를 실어 남자현과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부록Ⅰ에는 친손자 김시련, 친정 손자인 남재각(오빠 남극차의 외아들 남훈오의 외아들)과의 인터뷰와 남자현의 아들 김성삼의 회고담을 싣고 있다. 또한 부록Ⅱ에는 '조선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과 '이등박문의 양딸이 된 흑치마' 배정자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느니, 참고하여 볼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점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관순 이외에는 전혀 알려진 인물이 없는데,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유가 무었일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는 여성이 남자에게 묻혀서, 조용히 내조하는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뭍 남성들의 이기심 때문은 아닐까? 싶다. 참고로 나는 페미니즘에 사로잡힌 여성해방론자는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2012.6.1. 독립운동을 펼친 여성들에 대해 공부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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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관심사는 근현대사에 있다. 근현대사는 너무나 왜곡이 많이 되어 있는 느낌이고 바로 서 있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를 바른 시각에서 바로 알자는 생각에서 근 현대사를 다룬 책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고 있다. 그런 취지를 가지고 손에 든 책이 [나는 조선의 총구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이라는 인물의 존재조차 몰랐다. 남자현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생소했다. 역사에 관심이 꽤 많아서 두루 책을 보아온 터라 그래도 내가 제법 많이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일제 강점기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교과서에서 다룬 인물 외에 내가 개인적으로 찾아 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나라가 남북으로 나눠지면서 애국지사에 관해서도 쪼개어지고 숨겨지고 만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남자현]은 1962년에 정부로부터 유관순 보다 더 높은 직급의 훈장이 추서 되었다는데 왜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더구나 여성 독립투사가 아닌가! 그녀의 남편은 의병으로 출전했다가 전사하고 스물네살에 혼자되어 유복자 아들이 성인이 된 후에야 본격적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선다. 어머니로써 자신의 할 일을 다 해 놓고 나라를 위해서 한 몸을 다바쳤던 것이다. 그녀는 어릴때 아버지의 교육 덕택에 사서 삼경은 물론 시에도 능했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한글도 스스로 깨쳤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문하에 있던 제자들이 의병을 조직해 일제에 대항했고 그의 남편도 의병으로 나갔다가 전사하는 등 그녀의 심장에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투지가 자연스럽게 싹터서 무럭무럭 자랐던 것이다. 마흔 넷이라는 나이가 되었을때 만주로 가서 우리 독립군의 어머니가 되어주고 투사로써 직쩝 일제에 맞서다 잡혀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여인이다.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유관순 만큼 존경 그녀의 뜻을 기렸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첫째 남자현이라는 독립투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하나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그런데 이 책이 남자현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책 치고는 좀 가벼워 보인다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도 그녀에 관한 기록을 찾기가 워낙 어렵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해서 일 것이다. 거기다가 여러 곳에서 다르게 기록 된 사항들까지 겹쳐서 글을 쓰면서 추론하고 추측하기에는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남자현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이 다소 미흡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이것은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다. 남자현 투사의 후손이나 친지들은 이렇게라도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서 알려 주어서 고마워 하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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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그녀는 누구인가 ..그 궁금 함에 이 책을 들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던 독자에게 그녀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름마저 생소한 그녀...정말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 시키는 책이었습니다. 그녀의 사진을 보고 서늘한 그녀의 눈빛에 '아~~독종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 시대가 그러했듯이 그녀의 삶 또한 평탄치 않았고 흡사 고행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의병으로 활동했던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이 차례로 죽자 그녀는 23년 간을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 수발을 들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친정에 돌아와 친정 식솔을 건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나마 그녀의 인생 중에 평범한 순간이었지요. 그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에서 교육 사업을 하기도 하고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지만 그녀의 우국 충정 또한 너무나 대단한 것이었기에 눈시울을 붉히게 하였습니다. 유관순에 가려 그녀의 업적은 빛나지 못했을지라고 지금이라도 그녀가 재조명되는 일에 반가웠고 '여자 안중근' 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나는 그 시대에 살아가면서 나라를 위한 고행의 길을 갈수 있었을까?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공의공도의 길을 갈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생각 되네요. 그냥 소인배처럼 일본이 무서워 아첨하는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녀의 시도 소개되어 그 시대의 생생한 상황을 느낄 수 있어서 독특했고 그녀와의 가상인터뷰 또한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자들과의 인터뷰 그녀의 아들 김성삼의 회고록을 싣고 있어서 생생한 그녀의 기록이 되살아 나는 듯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녀에 대해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고 역사 속에 숨어있던 그녀를 다시 발견해낸 기분이 보석을 찾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애국충정에 박수를 보내며 그 시대에 독립운동에 자신의 삶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있어서 우리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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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총구다> 사실 남자현이라는 인물은 이제까까 수십 년의 교육을 받았지만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독립군으로 직접 현장에서 활약했다하니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처지가 일본군과 대치하면서 수많은 전투를 주로 남자들이 했고 여자들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도로 알려져 있기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이 동정대부 직첩을 받았고 그 문하에 70여명의 제자를 두고 가르친 지역의 이름난 학자로 그의 제자중하나인 김영주와 그 당시에는 보통인 18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의 언니는 대부호가문과 결혼을 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이 풍전등화와 같아서 김영주 또한 결혼을 했지만 의병활동으로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현의 나이 24살, 지아비인 김영주는 34살에 의병활동으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되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려 여자 혼자의 몸으로 모든 살림을 꾸리고 아이들을 보살펴야했기에 그 상황만으로도 몹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나이 무려 45에 아들 장남인 김성삼과 독립군이 되기 위해 과감히 만주로 떠났습니다. 만주에서 5,6년 동안 싸움터로 떠돌면서 뜻있는 망명객들을 독립군으로 조직했습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건립되어 남자현은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여성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만들었기에 모두 그녀의 뜻을 따랐습니다. 남자현은 지금도 그 나이면 원로로서 대접을 받고 편히 지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1928년 4월쯤에 암살단을 조직하여 몸소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지니고 조선 총독 사이토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하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남녀 600여명을 조직하여 더욱 항전을 펼쳤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적군과 항전을 벌였다는 게 납득하기 힘들것 같습니다. 또한 안중군의사또한 손가락을 절단하여 혈서를 썼듯이 그녀 또한 식지를 잘라 서사구국이라는 혈서로 그녀의 기개를 자랑하였습니다. 대단하기도 하지만 적들의 간담을 싸늘하게 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관순열사가 그녀보다 훨씬 유명하고 보훈의 격이 높을 것 같지만 남자현선생이 훨씬 높은 보훈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 실감이 가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직접 폭탄을 들고 하얼빈을 통과하다 옥중에서 단식투쟁으로 62세의 나이에 순국을 했다고 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바입니다. 이제라도 남자현선생의 높은 뜻을 살려 앞으로의 후세들에게 알리고 보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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