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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상상력의 리더로서 장자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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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을 읽으면서 <장자>의 원전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중국현대사>와 <조조 사람혁명>을 통해 접해보았던 고전연구가 신동준의 고전에 관한 해석과 판단이 마음에 들었던지라 ,<장자>를 읽으면서도 흡족한 마음이 든다. 사실 공자나 맹자, 노자등은 많이 접해본 사상가이지만, 장자는 조금 모호한 느낌의 사상가이다. 그저 도가의 뿌리정도로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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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을 읽으면서 <장자>의 원전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중국현대사>와 <조조 사람혁명>을 통해 접해보았던 고전연구가 신동준의 고전에 관한 해석과 판단이 마음에 들었던지라 ,<장자>를 읽으면서도 흡족한 마음이 든다. 사실 공자나 맹자, 노자등은 많이 접해본 사상가이지만, 장자는 조금 모호한 느낌의 사상가이다. 그저 도가의 뿌리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장자에 대해서 모처럼 제대로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 든다.

 

21세기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사상가는 장자이다. 최근에 더욱 장자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기존에 장자에 대한 해석에 오류가 많았던 이유이지 싶다. 저자는 기존에 노장老壯 사상의 통칭으로 노자와 장자를 같이 보게 된 것에는 사마천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두 사람을 ‘무위’를 사용한 점만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탓이라고 한다. ‘무위 자체만을 놓고 볼 경우 한비자가 오히려 노자사상의 정곡을 꿰뚫었다고 평할 수 있다. 여기서 노자가 ’무위‘(無爲)를 주장했던 것은, 통치자가 ’무위‘에 도달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장자의 무위는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권력의 집중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장자는 여타 제자백가와 달리 ’무위자연‘을 역설하며 ’나‘를 중심으로 천지자연과의 합일을 주장했다. 반면 노자는 국가의 권위와 지배를 정당화한 반면 장자는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민중들의 연대를 추구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노장’도 ‘공맹’과 마찬가지로 무위를 전면에 내세운 장자의 주장에 현혹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맹자가 묵자사상의 계승자인 것처럼 장자 역시 노자가 아닌 양주학파의 일원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장자사상의 가장 큰 특징을 ‘무위’가 아닌 ‘자연’에서 찾는 이유다.

노자

인→지→천→무위의 도 =무위자연

장자

인→지→천→무위의 도→무위자연

이는 노자사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같은 도가 계열일지라도 노자사상을 유柔, 열자사상을 허虛, 장자사상을 무無,로 요약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장자는 삶과 죽음을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과정을 파악하였다. 이에 관한 장자의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일화이다. 장자가 말하는 만물의 변화 즉 물화는 ‘나’와 외물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된 일종의 무아지경無我之境에 해당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꼭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문 장자사상의 상징어가 바로 ‘호접몽’이라 볼 수 있다. 강신주의『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에서도 호접몽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보았는데 꿈에서 깨어나 ‘삶’의 세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장자 사상의 정점이다. 이렇게 장자는 ‘나’를 중심으로 생生의 문제를 해석했다. ‘나’와 외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바로 물아일체의 경지이다.

 

“원래 사람의 생명은 임시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이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고, 삶과 죽음 역시 낮과 밤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죽음에 대처하는 유형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첫째, 향락에 빠져 죽음을 잊는 유형.

둘째, 위대한 업적을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영원히 남기는 경우.

셋째, 종교에 귀의하는 유형.

장자는 이들 3가지 유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바로 죽음에 초연하는 것,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가지게 되면 세속적인 것에 초연하게 되고 , 유한한 삶 위에 권력과 재물 및 명예를 쌓기 위해 부질없이 남과 원한을 맺으며 정신없이 살아가느니 차라라 천지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맡겨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장자가 택한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우주를 품안에 껴안고 살아가게 되면 삶 자체를 관조할 줄 아는 안목이 생기며 이런 생각을 글과 언행으로 남기면 문예창작과 자연이치의 발견을 남긴다고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장자사상을 과학주의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견해가 점증하고 있는 것이 저간의 흐름이다. 특히 장자는 상대성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의 모든 물체는 상호 연결돼 생장소멸의 부단한 순환활동을 한다고 보았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내재해 있는 기계론적이면서도 원자론적인 세계관은 ‘인간소외’와 ‘비인간화’를 부추기는데 일조했다. 21세기의 기본과제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인간 삶의 회복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세속의 명리에 초월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 과거에 장자를 현세를 떠나 무위자연속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한 사상가로서 보았지만, 장자의 사상은 오히려 현실세계에서의 깨어남을 강조하였다.-[소요유]와 [덕층부]. [제물론]에서 나오는 꿈이야기로 보아도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꿈으로 비유하며, 꿈에서 깨어나서 ‘삶’의 세계를 회복해야함을 역설한다. 저자는 기존의 장자를 문예와 철학의 보고로만 보아오던 것을 장자의 사상안에는 리더십으로서도 훌륭한 보고가 있음을 명시한다. 실제로도 장자의 이야기는 동화같기도 하고, 이야기가 명확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전에도 장자를 몇 번 읽어보려 시도만 하고 다 읽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조금의 상상력과 해설자의 친절한 설명이 장자를 완독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스스로를 옳다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그르다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그러나 시비는 비록 다를지라도 ‘나’와 ‘너’는 원래 균등한 것이다. -160p

  

YES마니아 : 로얄 k********2 2012.06.04. 신고 공감 16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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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으면서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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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제자백가의 저작들이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사서삼경 혹은 사서오경이라 불리는 중국의 고전 전적(前績)들은 교육목적이나, 통치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널리 보급되고 읽기를 장려하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주의 [장자]등이 새롭게 조명을 받는 것은, 아마 그들의 사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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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제자백가의 저작들이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사서삼경 혹은 사서오경이라 불리는 중국의 고전 전적(前績)들은 교육목적이나, 통치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널리 보급되고 읽기를 장려하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주의 [장자]등이 새롭게 조명을 받는 것은, 아마 그들의 사상이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흔히 도가의 저술로 불리는 [도덕경]이나 [장자]를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활발하게 읽고 연구하였으나,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기피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큰 틀에서 도가의 사상이 들어갈 곳이 없었고, 근대에 와서는 서구에서 전래한 사상 속에서 역시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파고들 틈이 없었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하나의 이념이 화석화되어 불문율처럼 통용된다면, 그 사회는 경색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장자]는 고래(古來) 이래로 문예사상의 보고로 통한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천공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장자의 상상력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인생전반에 대한 관조와 통찰로 얻는 지혜를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 또한 비록 해설서였지만 [장자]를 몇 권은 읽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장자]를 읽으려 한 것은, 이 책은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기존의 해설서와는 달리 1000쪽이 넘을까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중국고전 평론가인 신동준씨는 우리가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주의 저작인 [장자]뿐만 아니라, 장주라는 인물 자체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책을 크게 장주론과 장자론으로 나누었고, 장주론에서는 장주의 생장과 사상에 대해서, 그리고 장자론에서는 [장자]의 편제에 대한 설명과, [장자] 전편에 대한 주석과 해설을 달았다.

 

장자는 이름이 주이며, 전국시대 중기 송나라 사람으로 추정된다. 공자와 맹자가 주나라로 대표되는 북방문화권에 속했다면, 노자와 장자는 주나라가 멸망시킨 은나라 유민들이 세운 송나라로 상징되는 남방문화권에 속한다고 할수가 있다. 장자 또한 당시의 제자백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을 이끌고 천하주유를 하였지만, 그것은 현실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속의 가치에 얽매여 자신의 타고난 삶을 해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깨우쳐주기 위한것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공자처럼 탄식하지도 않았고, 맹자처럼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인 그에게, 세속의 가치는 한낱 부질없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노자와 장자의 사상체계를 묶어서 일반적으로 노장사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 사상을 도교와 연결 지어 생각하면서 현실도피적이고 염세주의적인 사상으로 알고 있다. 최근 들어 그들의 사상을 새롭게 조명한 책들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들의 오해였음을 이해했다고 하지만, 기존의 해설서들은 역시 노자와 장자를 묶어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그것을 장자의 무위(無爲)에 현혹되어, 노자의 그것과 동일시한 사마천의 책임이라고 못박는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노자와 장자를 하나로 묶어 통칭했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사상사적으로 볼 때,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은 열자이고, 장자는 노자사상의 외형만 좇았을 뿐, 양주학파의 일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이야기 한다. 노자가 무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 한 것은 무위지치(無爲之治)이고, 장자는 무위를 언급하였지만 이는 무위지치가 아니라 무위자연(無爲自然)이기 때문이다. , 노자사상의 본령은 통치에 있는 입세간(入世間)의 입장이라면, 장자의 사상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소요(逍遙) 할 것을 설파한 출세간(出世間)의 입장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은 전한제국 초기 도교로 전환되었으며, 또한 남북조시대 들어서는 인도에서 전래되어온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이론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결국 장자사상이 불교의 외피를 쓴 선종이론의 근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대승불교라 부르는 중국의 선종은 장자사상을 불교식으로 해석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결과 당시 도교는 불교와 혼동되기 일쑤였고, 이는 이후 사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백년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불교와 도교의 사상논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장자사상의 구성을 소요(逍遙), 무위(無爲) 그리고 무아(無我)에서 찾고 있다.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소요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무위를 통한 소극과 온건을 주장했다. 우리가 흔히 장자의 사상을 느림의 미학, 여백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위를 통해 소요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그는 무아의 개념을 통한 자유이념을 설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은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난세를 치세로 바꿀 수 있다는 다른 제자백가들의 사상과 구별되며, 이것이 염세주의에 입각한 패배자의 노선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무위와 무아 속에서 자연대로 산다는 것,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바로 진정성이 아닐까 싶다.

 

또한 장자는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원인은 그것이 병과 함께 연관되고, 종교가 말하는 죽음 이후 받을 심판이나 응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허무, 마지막으로 살아있을 때의 소중했던 관계들이 없어지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목적은 이 현생을 똑바로 대면하기 위함이다. 장자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라고 한다. 삶은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 풍성해야 한다는 것, 집착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이자 무아가 아닐까 싶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 10여만 자로 된 책이라고 하며, 후한 초, 반고가 쓴 [예문지]에 의하면 총 5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장자] 6500여자 총 33편으로 되어있다. 이는 서진 때, 곽상이 전해 내려오던 책에 주석을 붙여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장자] 52편을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으로 나누었으며, 이중 내편은 장자사상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책 주석편에 [장자] 33편 전편을 싣고, 해석과 주석을 달아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다.

 

[장자]를 읽으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 속에 빠지길 반복한다. 아마 요즘 부쩍 늘어난 밥벌이에 대한 지겨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을 겪고, 좌절하고, 분노하지만 넓게 그리고 전체로 보면 꼭 그럴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 깨달음은 마음만 바꾼다고 해서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인생수양의 목적은 지혜의 깨달음도 있지만, 행위의 변화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문제를 처리할 때, 짧은 순간이나 좁은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전체를 보지 못하고 기쁨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곤경에 빠지지 않는다면, 나도 나를 잃어버릴 수(吾喪我) 있을 것 같다. 내가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면,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보는 것도 썩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참고로 [장자] 33편의 편명은 아래와 같다.

 

내편 7 :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인간세(人間世), 덕충부(德充符), 대종사(大宗師), 응제왕(應帝王)

 

외편 15 : 변무(駢拇), 마제(馬蹄), 거협(胠篋), 재유(在宥),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 각의(刻意), 선성(繕性), 추수(秋水), 지락(至樂), 달생(達生), 산목(山木), 전자방(田子方), 지북유(知北遊)

 

잡편 11 : 경상초(庚桑楚), 서무귀(徐无鬼), 즉양(則陽), 외물(外物), 우언(寓言), 양왕(讓王), 도척(盜跖), 설검(說劍), 어부(漁父), 열어구(列禦寇), 천하(天下)



k*****1 2012.06.12. 신고 공감 14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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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론은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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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변하던 서구의 가치들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사상사 도올 선생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총화되던 서구의 가치·이념·비젼·철학을 이제는 벗어날 때라 피력하면서 신작 「사랑하지 말자」를 표현했다. 20세기 초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발표한 이후 서구는 오히려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두 번의 참혹했던 전쟁을 치렀던 것 또한 이러한 경향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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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변하던 서구의 가치들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사상사 도올 선생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총화되던 서구의 가치·이념·비젼·철학을 이제는 벗어날 때라 피력하면서 신작 「사랑하지 말자」를 표현했다.

20세기 초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발표한 이후 서구는 오히려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두 번의 참혹했던 전쟁을 치렀던 것 또한 이러한 경향에 일조했다.

 

 

이책 신동준씨의 「장자」를 읽으며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과 동양은 달랐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로마는 정치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판이하게 달랐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것이나 책을 읽거나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지식과 정보 이상으로 완전하게 다르게 탄생했고 다른 방법으로 전해졌으며 다른 차원으로 계승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수천 년에 걸쳐 완전히 다른 양극을 이뤄왔던 서양과 동양의 조우가 철학적 암흑기이던 중세시대 제국주의 팽창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얼핏 모순적 상황이라 생각된다. 힘의 균형이라는 것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우연을 핑계로 하는 어떠한 만남도 허락되지 않을 때에야 가능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힘을 내재하고 있고 그 힘은 어떤 형태로든 발산되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양과 동양의 조우는 긍정적 결과뿐만 아니라 부정적 결과로도 반드시 귀결되어야 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중세를 대변하던 제국주의는 자신들은 제외한 모든 것들은 미개한 것으로 치부했다. 사람이든 생물이든 사상이든 언어든 철학이든 가리지 않고.

서양은 그들의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제국주의의 망령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개하다고 치부하던 동양의 사상에 매료됐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땠을까?

여기서 동양이라 함은 고대 중국과 현재 한국 정도를 함축한 의미다.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태동하고 발전되고 계승되었지만 대부분 통치이념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잘못 활용된 유교사상 같은 경우에도 도덕 시간과 윤리 시간에 배웠던 것은 고작 ‘삼강오륜’에 불과했다. ‘효’와 ‘충’을 통해 가정과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부속품에 충실해야 함을 세뇌되어 왔다. 하지만 동양사상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가장 핵심은 ‘인간에 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단순히 피통치자가 교육 받아야 하고 체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 자신이 어떤 군주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가 핵심이다.

 

이것은 서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피통치자인 백성의 입장에서는 늘 나를 가두고 옭아매고 다스리는 수단으로만 교육받고 강요되다 보니 지난 20세기 초 이후부터는 동양사상을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터부시했다. ‘낡은 것’, ‘구린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서양의 그것에 빠져들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레토릭에 열광했다. 이것은 단순히 사상사적인 부분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양이 이룬 찬란한 문명에 탐닉하고 희구했다. 힘의 균형이 완전히 저쪽으로 기울어졌다.

 

100여 년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서양이다 동양이다 선을 확연하게 그을 수 없을 만큼 미디어와 기술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힘의 균형 차원에서는 논의를 확장할 수 없다. 다만 서구가 대변하던 많은 가치와 이념, 철학과 사조, 기술과 과학 등이 결코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다는 것은 확인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일부 국가들의 무기력한 경제 붕괴, 인종주의·극우주의로의 회귀 등은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서양의 속살이다.

근래 국내에서 일어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와 잔인한 소아성폭력 등은 어떠한 조향장치 하나 없이 깜깜한 산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은 현대 한국인의 상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라 생각한다.

무언가 붙잡을 수 있는 것 하나 조차 없는 것이다. 기댈 수 있는 것 하나 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이든 가족이든 사회보장정책이든지 간에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날로 심각해져가는 현대인들의 [의미상실]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심각한 위기의 동인이 되리라 생각한다. 경제위기·정치위기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상실해 버리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보다 더 처절하고 을씨년스러운 결과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의 고전들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내용을 나와 같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번역서가 적었던 것도 있다. 하지만 이전까지 핏줄의 피와 같이 이어지고 체화되어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아 퇴화되었던 동양적인 것의 총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동양 고전을 읽으면 내용은 어렵고 분량은 방대하지만 읽는 순간에는 다 아는 내용 같다. ‘아~ 이 말이 이 말이지~’, ‘음~ 맞아~~ 이렇게 해야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1세기 전 서양이 동양의 고전을 보고 열광했던 이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것에 매료된 것이고 내가 이 책 「장자」를 읽으며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인 건 내가 동양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문제이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장주론에는 장자사상의 특징과 구성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장자의 내편과 외편 잡편 총 33장의 내용을 소개한다. ‘장자’라고 하면 흔히 노장사상으로만 인식되어 왔었다. 하지만 노자의 사상과는 많이 다른 것이 장자의 사상이고 일부 교집합에 포함되는 부분도 있지만 완전히 다르고 상충되기 까지 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장자는 비록 노자처럼 무위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아예 무와 유의 구분조차 거부한 점에서 노자보다는 오히려 색과 공의 경계를 허문 불교에 가깝다.” (p.36, 제1편 사상론)

  “장자가 볼 때 천당과 극락 등의 사후세계는 속세의 욕망을 재현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과정으로 파악한 결과다.” (p.61, 자연주의)

 

무위자연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는데 장자사상은 많이 다르고 매력적이었다. 한국과 중국의 대승불교가 장자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복적 형태로 발전된 불교의 극락·사바의 개념과는 차별성을 두고 있다.

 

“10여 만 자에 달하는 저서는 거의 대부분 우화로 채워져 있다.” (p.15, 제1편 생장론)

 

동양고전의 특징을 하나만 얘기해 보라고 하면 나는 ‘이야기꾼’이라고 대답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헤겔과 칸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무너졌던 나의 자아상과 한탄과 한숨을 기억한다. 어려워도 너~무 어려우니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동양의 고전은 대부분 우화로 채워져 있다. 장자 또한 마찬가지다.

굳이 어렵고 현학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굉장히 쉽게 표현했다. 어차피 장자가 일반 백성이나 천민에게 읽혀졌을 리는 만무하고 문자를 이해하고 일정 수준의 지적수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우화의 형식을 사용한 것일까? 고담준론을 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궁금했다.

 

 

“세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사정없이 조롱하고 비웃었다. 조롱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인간세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연민이 짙게 깔려 있다.” (p.30, 제1편 생장론)

 

장자를 포함한 동양의 사상가들은 책을 읽는 대상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달하는 방식과 방법 또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 보는 산과 안개,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에서부터 밤에 잠들기 전 들리는 풀벌레소리, 달과 별 등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군자, 군주 얘기를 한다고 해서 꼭 어려운 말을 하고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임금~ 당신 이렇게 저렇게 잘못했으니 좀 똑바로 하시오.’ 직접적으로 말하면 잡혀가서 죽임 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개가 어떻고 두꺼비가 어떻고 물고기가 어떻고’ 아닌 척 하며 빙 둘러 조롱하고 풍자하면 더 재미있고 고소하기도 하니까.

 

 

1. 장자가 보는 인간

 

“무릇 사람의 마음은 산천보다 험하고, 하늘을 알기보다 어렵다. 하늘은 오히려 춘하추동과 아침저녁의 주기라도 있지만 사람은 표정을 두텁게 꾸미고 속셈을 깊이 감춘다.” (p.1012, 잡편 제10장 열어구)

“명예의 주인도, 모략의 창고도, 일의 책임자도, 지혜의 주인도 되지 말라. 그보다는 무궁한 도를 완전치 체득해 흔적이 없는 무위자연의 세계에서 노닐도록 하라. 하늘에서 받은 육신과 정신을 극진히 하면서 삶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등 이익을 탐하지 않으니 오직 마음을 비울 따름이다.” (p.396, 내편 제7장 응제왕)

 

인간에 대한 장자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제발 그만 좀 해라.’

로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이치와 자연에 어긋나려 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라고 말한다. 마음을 비우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마음을 비우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빚어 낸 일들이 허다한 역사적 교훈을 생각하면 가슴에 담을 가르침이다.

 

 

 

2. 장자가 보는 군주

 

“군주가 앞서면 신하가 뒤따르고, 아비가 앞서면 자식이 뒤따르고, 형이 앞서면 아우가 뒤따르고, 어른이 앞서면 젊은이가 뒤따르고,” (p.533, 외편 제6장 천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궁색한 백성을 버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부모 없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과부를 애처롭게 여긴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마음을 쓰는 일이다.” (p.540, 외편 제6장 천도)

 

지금 시대에는 참으로 맞는 말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군주가 바뀌고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하던 때에 군주에게 모범을 보이고 과부와 궁핍한 백성을 돌보라고 얘기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각국에서 장자를 영입하려 애쓴 것을 보면 장자의 가르침과 지적이 꽤나 먹혀들었던 것 같다.

 

 

 

3, 장자의 도(道)

 

“장자가 임종할 즈음 제자들이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천지를 관곽으로 사고, 일월을 한 쌍의 구슬로 삼고, 하늘의 별들로 둥근 옥이나 모난 옥으로 삼고, 만물을 저승길의 선물로 삼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 장례에 필요한 도구가 어찌 다 갖춰진 게 아니겠는가? 무엇을 더하려 하는 것인가!’ (p.1018, 잡편 제10장 열어구)

 

장자의 사상은 어디에,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경멸한다. 잡편 열어구에 등장하는 장자 자신의 이야기는 집약적으로 그의 사상을 압축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둘 것을 내내 강조한다. 자연도, 인간도, 도(道)도 [있는 그대로]둬야 한다고 했다. 애써서 뭘 하려고 하고 만들려고 하며 가르치려 하는 것 모두를 경계한다. 힘의 균형의 대척점에서 세상을 인식하지 않는다.

 

“제11편 「재유」는 사물을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어 본성을 보존케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라살이 말한 ‘자유방임주의’ 차원을 넘어 크로포트킨 등이 역설한 ‘무정부주의’를 방불케 하는 대목이다. 후쿠나가는 ‘정치 없는 정치’로 표현했다. 이는 무치(無治)의 또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p.163)

 

이러한 장자의 사상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제도와 구조에 갇힌 채 수십 세기를 살아온 동양과 서양의 그것에 지치고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는 청량제와 같은 북돋움이 될 것도 같다.

장자는 그냥 ‘다 벗어던져라.’라고만 말하지 않고 방법 또한 제시한다.

 

“자연의 ‘도’에 몸을 의탁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천지변환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투쟁’ 및 ‘발전’ 개념 대신 ‘조화’와 ‘순환’ 개념.” (p.150, 장자사상의 전개)

“외발 짐승인 기(蘷)는 발이 많은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노래기는 발이 없는 뱀을 부러워하고, 뱀은 모습이 없는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움직이지 않고도 작용하는 눈을 부러워하고, 눈은 사물을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마음을 부러워했다.” (p.636, 외편 제10장 추수)

 

천지변환의 흐름.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으로의 회귀다. 그것으로의 복귀다.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구체적 제시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황당하기도 하지만 외발짐승이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노래기가 뱀을, 뱀이 바람을, 바람이 눈을, 눈이 마음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뱀은 뱀대로 노래기는 노래기대로 자연으로부터 부여된 천기(天機)를 그저 움직이며 살 뿐이라는 것이다.

욕심내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면 조바심 낼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다른 집의 아이들이 가기 때문에 내 아이도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는 어불성설은 장자형님이 들으시면 싸대기를 올릴 말이다.

 

얼마나 바쁘고 각박한 현재인가. 일상의 모든 순간과 찰나에 자유로울 수없다. 아주 어려서부터 비교되고 경쟁의 부추김을 받아왔다. 니가 아니면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아니더라도 너는 아니어야 하는 분위기 속에 천착해 살아왔다.

 

도(道)는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에 모든 역량을 투입해도 될까 말까한 세상에 무슨 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하지만 리뷰의 앞부분에서도 말했지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워낙 관심이 없고 등한하다 보니 이제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무엇인지 조차 가늠할 길이 없다. 떠다니는 봉지처럼 표류하고 있다.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표류하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학원·과외에 둘러싸여 있지만 표류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하고 예술을 하지만 표류하는 것이다.

 

가치는 투영하는 대상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특히 당장 돈이 되거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거나 취직이 되는 추상적 가치는 아주 낮은 수준의 정도에 머물러 있다. 대학에서 순수학문을 공부하는 전공들이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것은 이것의 한 결과다.

대중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극이 필요한데 동양사상, 특히 장자의 사상은 그것을 가능케 할 매력과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현학적이지 않다. 레토릭이 아니라 다층의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우화로 채워져 있다.

장자사상을 담은 동화책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금 쉽게 번역한 책이 나온다면 장자를 읽는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이 지금의 아이들과 청소년들보다는 마음을 잘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도 충분한 매력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치열한 삶과의 투쟁을 겪어 온 그들에게 ‘조화와 순환’을 설명하는 장자의 사상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변할 수 있을 만하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양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번역서를 낸다면 될 텐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제 나라 역사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 장자가 가당키나 할지 말이다.

 

“도는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소.”

“어찌 더욱 낮아지는 것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기왓장이나 벽돌에 있소.”

“어찌 더욱 심해지는 것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똥과 오줌 속에 있소.”

장자가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어떤 것이라고 고집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오. 그래야만 도가 어떤 물건에서든 떠나지 않고 두루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오. 지극한 도는 바로 이와 같소.” (p.760, 외편 제15장 지북유)

 

장자가 말하는 도(道)에 이르는 길이 쉽지 만은 않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도에 이르러 군자가 되지 않더라도 장자를 통해 정신수양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낫고 더 안정된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인 신동준씨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일본과 중국에 비해 장자 연구가 너무나도 부족한 국내 현실에서 일본과 중국의 장자학 권위자들의 많은 책들을 쉽게 인용하고 풀어낸 것은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자를 한글로 풀어 해석해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적합한 형태의 단어와 문장을 담아내는 작업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참고 서적만 봐도 알 수 있다. 분량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책들이 많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l****h 2012.09.04. 신고 공감 10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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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장자(莊子) 바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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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노자(老子)의 계승자?   흔히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합쳐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장자(莊子)를 노자(老子) 사상의 계승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해자(註解者)인 신동준은 장자(莊子)가 아닌 열자(列子)라고 불리는 열어구(列禦寇; B.C. 475~221)가 노자(老子) 사상의 계승자라고 주장1)한다. 단지 사마천(司馬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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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노자(老子)의 계승자?

 

히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합쳐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장자(莊子)를 노자(老子) 사상의 계승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해자(註解者)인 신동준은 장자(莊子)가 아닌 열자(列子)라고 불리는 열어구(列禦寇; B.C. 475~221)가 노자(老子) 사상의 계승자라고 주장1)한다.

단지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노자(老子)에 대한 부전(附傳) 형식으로 장자(莊子)에 대해 서술했고, 두 사람 모두 무위(無爲)”를 전면에 내세웠기에 후대인들이 장자(莊子)를 노자(老子) 사상의 계승자로 착각하여 노장(老莊)’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렇다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老子)가 이상으로 삼았던 사회를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고 하여, 마치 원시공동체 사회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처럼 여기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신동준은 여기에 대해 노자가 복고적인 원시공산사회를 이상적인 국가모형으로 상정한 것이 아니라 ~ 모든 사람이 주어진 자신의 삶에 만족해 나와 남을 비교할 필요가 없는 국가. , 모든 국가공동체의 성원이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일체가 되어 더 이상 통치자의 인위적인 개입이 필요 없는 상황 (이상국가인) ‘소국과민(小國寡民) 2)라고 반박하고 있다.

, 노자(老子)의 사상은 신동준이 무위(無爲)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 한 것은 무불치(無不治) ~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 3)라는 언급한 것에 나와있듯이 국가와 군주의 존재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자(老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정치는 격양가(擊壤歌)가 불려졌다는 요()임금 때의 정치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전한(前漢) 초기 통치를 상징하는 황제(黃帝) 숭배와 노자(老子) 사상이 결합한 황로학(黃老學) 혹은 황로학파(黃老學派)()나라 때 학자들은 도가라고 칭(하였던 것이다).4)

 

, 장자(莊子)는 노자(老子)와 달리 언급한 무위(無爲)’를 대부분 무불치(無不治)’가 아닌 무불위(無不爲)’, 무치(無治)로 설명5)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국가와 군주의 존재를 배제한 원시공동체 사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6)

나아가 이는 개인의 해탈차원에서 불생불멸의 무아지경을 추구7)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노자(老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위지치(無爲之治)’라는 세상을 다스리는 법, 즉 정치(政治) 혹은 통치(統治)인 셈이고, 장자(莊子)는 국가로 대표되는 인위적인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였으니 노자(老子)의 사상과는 달리 종교(宗敎)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

 

, 그럼 장자(莊子) 혹은 장자(莊子)로 대표되는 학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살펴보자.

장자> 1소요유(逍遙遊) 편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소요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된 사고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천지자연의 위대한 이치를 인간의 삶에 적극 적용할 것을 주문8)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장자(莊子) 사상의 요체는 (무위(無爲)가 아니라)자연(自然)’ 9)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기에 더해 2장 제물론(齊物論) 편의 마지막 이야기인 호접몽(胡蝶夢)’에서 와 외물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된 일종의 무아지경(無我之境)10)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모든 인위적인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유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1장 지락(至樂) 편에 언급된 장자(莊子)가 그의 부인이 죽었을 때 곡()을 하는 대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던 이야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교의 열반이나 해탈과 비슷한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될 수는 없었다. 심지어 도교를 체계화한 갈홍(葛洪; 283? ~ 343)에 의해 도교 내에서 장자(莊子)사상이 배제 당할 뻔까지 하였다.11)

 

러한 장자의 사상은 제자백가(諸子百家)가 하나같이 치자와 피치자 간의 조화와 공평무사한 통치를 역설12)한 것과 구별된다. 이는 그가 현실정치의 개선 가능성에 회의하고 있었고, 나아가 국가와 군주(=치자)의 존재가 불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그는 당시 대다수의 제자백가(諸子百家) 난세의 해법을 폭력을 제거하고 인민을 구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에서 찾(은 것과 달리)13)”, ‘제폭구민(除暴救民)’의 본질이 성공한 쿠데타를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 말로만 위민(爲民)’을 떠드는 위정자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사상은 어떤 면에서는 고해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에게 해탈의 길을 일러준 석가의 가르침과 사뭇 닮았다. (그렇기에) 난세를 헤쳐나갈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이면서 온화한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염세주의에 입각한 패배자의 노선으로 비난 받을 여지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14)

 

동준의 장자(莊子) 읽기가 완벽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장자(莊子)에 대한 연구가 빈약한 현실을 감안할 때, 유럽의 그리스 신화처럼 아시아 문학, 철학 등의 원형을 이루는 고전을 충실하게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이를 바탕으로 좀더장자의 원음(原音)에 가까운 소리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1) 신동준, <장자>, (인간사랑, 2012), p. 38

2) 신동준, <열자론>, (인간사랑, 2009), pp. 59~60

3) 신동준, <장자>, p. 36

4) 郭沫若, <중국고대사상사[十批判書]>, 조성을 옮김, (까치, 1991), p. 179

5) 신동준, <장자>, p. 45

6) 신동준, <장자>, p. 107

7) 신동준, <장자>, p. 37

8) 신동준, <장자>, p. 52

9) 신동준, <장자>, p. 60

10) 신동준, <장자>, p. 61

11) 신동준, <장자>, pp. 122~124

12) 신동준, <장자>, p. 150

13) 신동준, <장자>, p. 60

14) 신동준, <장자>, p. 114

w******f 2012.10.18. 신고 공감 5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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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더 쉽고 재미나게 읽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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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서를 즐겨 읽을 깜냥은 못 되지만, 그래도 틈틈히 읽으려고 꽤나 노력하는 편이다. 이렇게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까닭은 물론 배우고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인문서들이 대개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풀어놓기 일쑤인 까닭에 나와 같이 무식한 읽는이(독자)들을 골탕 먹이기 십상이다. 그렇게 매번 골탕을 먹으면서도 인문서 읽기를 멈추지 않은 결과, 나름 '좋은 인문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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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서를 즐겨 읽을 깜냥은 못 되지만, 그래도 틈틈히 읽으려고 꽤나 노력하는 편이다. 이렇게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까닭은 물론 배우고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인문서들이 대개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풀어놓기 일쑤인 까닭에 나와 같이 무식한 읽는이(독자)들을 골탕 먹이기 십상이다. 그렇게 매번 골탕을 먹으면서도 인문서 읽기를 멈추지 않은 결과, 나름 '좋은 인문서'와 '나쁜 인문서'를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근래에 생겨서 남들이 보지 않는 구석에 숨어들어 자축하곤 한다.

 

  좋고 나쁜 인문서란 별 것 아니다. 나처럼 무식한 이도 얼마든지 읽고 이해할 수 있어 능히 아둔한 머리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주는 책은 좋고, 그렇지 못하고 이해 못할 소리만 잔뜩 늘어놓고서 글쓴이 스스로만 잘났다고 끄적여 놓은 책은 나쁜 것이다. 쉽게 말해, <현자가 달을 가리키면 바보는 손가락만 쳐다 본다>는 말이 있는데, 좋은 책은 바보조차도 현자가 가리키는 달을 바라볼 수 있게 쓴 책이고, 나쁜 책은 현자 홀로 잘난 체하면서 바보더러 손가락만 쳐다 본다고 꾸중하는 책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가? 감히 평가를 내릴 깜냥은 못 되나, 꽤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다른 사상가도 그렇지만, <장자>는 유독 내놓은 책이 많기에 고르기가 참 힘든 책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방대한 내용을 다루었으면서도 동시에 다방면으로 널리 이롭게 하는 뜻풀이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만큼 처음 접하는 인문서가 참 중요하다. 자칫 내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어렵디 어렵고 지루하며 난해한 책을 맞이하고 나면 두 번 다시는 거들떠보기도 싫어지니 말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할 지라도.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방대한 장자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음과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의 지침'을 조목조목 주석 달아놓으며 풀어놓았기 때문에, 비록 1000쪽이 넘는 방대하고 두꺼운 책이지만 '인문학 초보자'도 얼마든지 쉽게 읽고 '장자'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정도라면, 다른 책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장점이다. 허나 대개 <장자>의 '원본'을 곧이 곧대로 뒤침(번역)하는 식이거나 얼마간 딱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원본'의 목차 그대로 뒤쳐놓은 책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 책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또다시 물론, 이 책도 '원본'에 실린 순서에 따라 '원문'을 싣고, 거기에 주석을 달아놓은 형식은 같다. 허나 <풀이>가 남다르다. 이게 아주 쉽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풍성한 비유와 예를 들며 이해를 한껏 돕는 구성으로 되어 있어 다른 <장자>에 비해 이해하기 더 쉬웠다. 또 <장자의 생애편>을 맨 앞에 실어놓았기에 '장자가 이런 사람이었구나.'하고 머릿속에 연상을 하며 읽어갈 수 있어서 한편으로 편함을 느꼈다.

 

  아직 <장자>를 읽기 전이라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두께가 얇은 책보다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래도 <장자>인데, 적어도 <장자>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읊어보아야 겠지만, 내 부족한 깜냥 탓에 <장자>를 한 마디로 설명하다가 책 한 권 쓸지도 몰라 섣불리 풀이를 하지 못하겠다. 또 그렇다고 일부분만 보여주기에는 '장님 코끼리 만지 듯' 할까 싶어서 자제를 하고 싶다.

 

  허나 이 책에 따르니, 흔히 '노자'와 '장자'를 묶어 <노장사상>이라고 일컫기 십상인데, 엄연히 가르면 '노자'와 '장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노자'는 일체의 무위자연을 내세웠으나, '장자'는 똑같이 무위자연을 주장했으나 이보다 더 명확하게 유와 무를 갈라놓았기에 오히려 불교의 '색과 공'에 더 가깝다고 한다. 한편 '노자'는 한비자에 더 가깝고 말이다. 이렇듯 이 책은 기존에 나온 수많은 책들을 글쓴이가 비교분석하여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였기에, 어찌하여 그리 풀어 놓았는가에 대한 근거도 꽤나 탄탄한 편이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쉬운 편이고...

 

  시간과 깜냥이 허락한다면 이 책에 대한 '독자주석'을 달아 놓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흡족한 책이었다. 물론 그럴 맘도 없고, 그럴 실력도 없으니 하는 변명이고 핑계다(--)뻔뻔..그래도 '좋은 책'인 까닭은 이해하셨을 게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12.06.15.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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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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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이 먼저 오고 가을과 겨울이 뒤에 오는 것은 사계의 순서이다. 만물이 생겨나고 죽을 때 초목의 싹에도 갖가지 모습이 있고 번성하고나 시드는 단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런 변화의 흐름이다. 천지는 가장 영특한 것이지만 그래도 존귀하고 비천함, 앞서고 뒤짐의 서열이 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의 서열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종묘에서는 가까운 친척이 귀히 여겨지고,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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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이 먼저 오고 가을과 겨울이 뒤에 오는 것은 사계의 순서이다. 만물이 생겨나고 죽을 때 초목의 싹에도 갖가지 모습이 있고 번성하고나 시드는 단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런 변화의 흐름이다. 천지는 가장 영특한 것이지만 그래도 존귀하고 비천함, 앞서고 뒤짐의 서열이 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의 서열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종묘에서는 가까운 친척이 귀히 여겨지고, 조정에서는 지위 높은 자가 귀히 여겨진다.

s*******i 2017.02.1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