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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리토마토파이 】202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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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 내 이름은 잔이다. 나이는 아흔 살이다. 젊을 때는 키가 163센티미터였다. 우리는 섣불리 90대의 나이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는 무관할 것 같은 먼 미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90대의 나이를 가진 분을 접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나이는 분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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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 내 이름은 잔이다. 나이는 아흔 살이다. 젊을 때는 키가 163센티미터였다.



우리는 섣불리 90대의 나이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는 무관할 것 같은 먼 미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90대의 나이를 가진 분을 접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나이는 분명 아니다.


작가는 노년의 시간을 1년 단위가 아닌 계절로 나누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속도를 더 빠르게 느끼도록 하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속도는 내 나이가 갖는 숫자라고 농담을 한다. 20대까지는 시속20KM에 대한 강박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40이 넘어가면서는 시속40KM에 대한 부담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가 계절을 요란스럽게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소설 속에 프랑스의 시골 농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레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겨울이다라는 표현으로 이제 잔에게 생동하는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갖게 하기도 했다.


처음엔 이 소설의 소소한 일상들이 주는 편안함에 90대의 잔은 적어도 가을을 보낼 때까지는 우울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완독 후 책갈피를 다시 읽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사이사이 잔의 우울감이 보였고 앞으로 다가올 나의 90대에 대한 걱정들을 지레 짐작하도록 하고 있었다. 일기가 너무 일상적으로 흘러 그 당시에는 그 부분에 집중하지 못했었고 또 아직 그 나이가 되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었던듯하다.


지금까지의 나는 독신으로 골드미스로 살거나 자식없이 여유롭게 사는 것도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다른 가족들이 나의 미래에 무조건 힘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혼자 늙어가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고 혼자 남겨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니 늙어서 함께 한 추억들을 떠올리고 예전엔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얘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작가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소설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여운이 남는 것은 그닥 반가운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공감 능력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어도 그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91세의 잔이 결국 봄을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상쾌한 산들 바람을 느끼며 잠의 안개속에서 미소로 마중나온 남편을 맞이하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삶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렇게 수월하게 읽은 프랑스 문학은 몇 없었다. 올해의 독서의 시작으로 참 괜찮았다.





P33 나는 일단 의식을 놓은 후에 죽음을 맞는 편이 좋을 것 같다아무 자각도 없이 그냥 웃다가 혹은 잠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하면 좋겠다.

P47 내 나이쯤 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이제 육신을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리기 위해 옷을 입어야 한다.

P106 방송을 보면서 나는 조금 막막해졌다새로운 발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에게 점점 더 넓은 우주를 보여준다수십억 별과 행성이 쉬지 않고 도는 어둠의 세상우리의 지구는 그 세상에서 푸른 구슬 한 알에 불과할 뿐…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천국은 어디 있을까르네에드몽드르포르 부인은 어디에 있을까나는 어디로 갈까 

P151 희안하게도 세월이 갈수록 죽음 앞에서 초연해진다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조차 그렇다사별도 많이 겪어보면 익숙해지는 걸까.

P170 내가 그들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아오게 하면 스무 살 때처럼 기분이 좋다명줄이 얼마 안 남았어도 누군가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얼굴 붉어지는 나이가 따로 있지는 않더라.

P190 딸이 내 팔짱을 끼고 부축을 하면서 걷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미가 늙은 모습을 보기가 괴로웠던 모양이다하지만 저 애도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

P197 그리고 우편물이 하나도 없는 날은 슬플 것 같다아직까지는 아침에 아무것도 없는 현관 옆 탁자를 보느니 종이 쓰레기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다.

P236 매년 시월은 풍경을 새로 그린다매년 나는 이렇게 고운 색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P254 여의사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유방 촬영을 한 게 언제인지 물었다세상에이게 뭔 소리람평생 단 한 번도 유방 엑스레이를 찍은 적 없는데 굳이 아흔 살에 처음으로 찍을 필요가 있을까뭐에 써먹으려고설령 나에게 몹쓸 종양 같은 것이 있더라도 이 나이에 치료를 받는 게 옳을까장수의 복을 누리는 삶한테서는 그런 병이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그러니까 내 몸에도 어디 한두 군데쯤 암세포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 나이에는 병도 느릿느릿 진행되기에 큰 소란을 떨지 않고 화도 거의 끼치지 않는다.

P274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이제 나는 나 아닌 사람들의 괴로움을 살피려고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아마 내게 남은 시간이 나한테 쏟기에도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이제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들이 많아졌음을 깨닫는다살날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 같다감정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닳아빠지고 무뎌진다분노는 꺾이고애정은 잠들고연민은 시든다소란스러운 세상사가 우리에게는 아주 먼 곳의 일이제 우리와 상관없는 생의 희미한 메아리 같기만 하다타인들의 슬픔이 우리네 연약한 생의 점점 더 짙어가는 안개 속에서 희석되기에 예전처럼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사람들이 죽고고통스러워하고눈물 흘린다우리는 우리 앞가림만 생각한다우리는 우리처럼 오래 살지 못한 이들이 일깨워주는 우리의 늙어빠진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보고 싶지 않다그래서 시선을 돌린 채 우리네 옹색한 삶을 영위하기에 힘쓰며 우리도 이제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한다.

P289 이 모든 일이 거의 60년 전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나는 현기증이 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어떤 추억들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옛날에는 그렇게 가까웠던 사람들의 얼굴이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심지어 우리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희미해져 가고 목소리도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나의 청춘이 흐려지고 색이 바랜다나의 지난날은 물이 쏟아진 수채화 같다그렇게 어떤 이름이 나에게서 도망가고 어떤 추억이 사라진다어떤 날짜어떤 나이… 바로 이런 순간에 세월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진다부모님삼촌이모사촌옛날 친구가 그립다이제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어떤 이미지어떤 이름어떤 말어떤 장소를 나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너도 기억나니?”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나 홀로 이 보잘것없는 기억력누렇게 변한 사진들을 붙잡고 있다망각과 함께 나 홀로 남았다.

P299 그런 편지를 받으면 정말로 기쁘다내가 아직도 조금은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우리 늙은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노인은 사회의 짐이다이런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른다그래서 내 딴에는 가급적 가벼운 짐이 되려고 애쓴다내가 만드는 일자리도 한두 개쯤은 있다우리 앙젤이나 정원사 같은 사람에게 작으나마 일거리를 주고 있으니까

P335 페르낭과 마르셀이 떠나는 날이 오면 내 인생에서도 한 부분이 완전히 멎어버릴 것이다삶은 죽음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멎어버리는 게 아니다삶은 훨씬 일찍부터 한 조각 한 조각씩 우리를 떠나간다.

P374 내가 이제 주님께 가까이 와 있는 걸까아침에 침대에서 기도를 했다아니기도문을 암송하는 것과는 다르다그냥 주님께 내 얘기를 했더니 묘하게 기분 좋은 느낌이 나를 감쌌다나는 그 초자연적인 평화에 젖어 잠시 가만히 있었다그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그 상태에서 조용히 떠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나를 이승에 잡아놓지 못할 성싶었다.

P391 몹시도 서글픈 2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던 마르셀이 그립고설탕 그릇을 보면 가슴이 아리고도망친 소가 우리 집 화단에 들어오거나 말을 탄 영감이라도 불쑥 나타났으면 좋겠다 아무라도 안녕하세요!”라고 말해주면 좋겠다아무 일이라도 일어났으면여기저기 전화를 돌릴 핑계라도 있었으면놀라운 모험담재미있는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하지만 상대가 없다.

P396 분발해야 한다어떻게 해서든 건강하게 버텨야 한다자식들이 요양원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피곤해서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에도 무리해서 조금이라도 산책을 한다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이 나이에 늘 하던 일을 중단하면 그 일은 영영 못하는 거다.

P427 어느새 나는 배에 올라와 있다아주 작은 돛단배다… 갑판에 누워 구름 없는 하늘로 솟은 돛대를 바라본다바람은 상쾌하고 소리 없이 서서히 움직인다나는 겨울과 함께나의 마지막 겨울과 함께 잠들리라계절의 끝에서햇살을 받으며종려나무 가지를 높이 든 채로르네가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



체리토마토파이 ? 우리 나라에서 방울토마토라고 부르는 것이 프랑스에서는 체리토마토라고 한다. 쟌이 실수로 체리대신 체리토마토로 파이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뭔가 다정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작 소설속에서는 이때만 언급되었을 뿐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e*******e 2020.04.07. 신고 공감 7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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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잔 할머니의 일기장_001 (체리토마토파이)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잔 할머니의 일기장_001 (체리토마토파이)" 내용보기
내 이름은 잔이다. 나이는 아흔 살이다. p.11   아흔 살의 잔 할머니의 일상은 어떨까?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에 살고 계시니 나와는 사는 곳도 또 환경도 달라 낯설지는 않을까? 책표지가 눈길을 끌어 구입하긴 했는데, 막상 400페이지가 넘는 할머니의 일기장을 받아들고 보니 조금 염려스러워졌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웬걸 잔 할머님 너무 귀여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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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잔이다. 나이는 아흔 살이다. p.11

 

아흔 살의 잔 할머니의 일상은 어떨까?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에 살고 계시니 나와는 사는 곳도 또 환경도 달라 낯설지는 않을까? 책표지가 눈길을 끌어 구입하긴 했는데, 막상 400페이지가 넘는 할머니의 일기장을 받아들고 보니 조금 염려스러워졌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웬걸 잔 할머님 너무 귀여우신거 아니야?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하나, 둘 떠나가는 사람들과 변해가는 환경을 마주하며 마음 아파하거나 새로운 기계들에 짜증을 내기도 하는, 또 그러다가도 어쩔 수 없지, 하며 하루를 씩씩하게 시작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만나니, 몇 해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도 나고, 또 신문물(!)에 종종 한숨을 내쉬시는 엄마도 떠올랐다.

 

   나의 작은 세상은 서서히 횅해진다. 주의 사람들이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나고 빈집이 늘어난다..(중략)..몇 년 전에 영감들이 하나둘 먼저 떠났다. 이제 혼자 살던 노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한다. p.33

 

   페르낭과 마르셀이 떠나는 날이 오면 내 인생에서도 한 부분이 완전히 멎어버릴 것이다. 삶은 죽음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멎어버리는 게 아니다. 삶은 훨씬 일찍부터 한 조각 한 조각씩 우리를 떠나간다. p.335

 

   우리는 마치 두 갈래 강 사이에 사는 것 같다. 산 자들의 강이 한 갈래, 죽은 자들의 강이 또 한 갈래. 어쩌면 떠나간 사람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저 멀리 어딘가에 그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주 멀지만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도 차례가 오면 그 사람에게로 갈 것이다. pp.151-152

 

   나의 청춘이 흐려지고 색이 바랜다. 나의 지난날은 물이 쏟아진 수채화 같다. 그렇게 어떤 이름이 나에게서 도망가고 어떤 추억이 사라진다. 어떤 날짜, 어떤 나이...... 바로 이런 순간에 세월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진다. p.289

 

   미치겠다. 오븐이 작동이 안 된다..(중략)..나는 버튼이란 버튼을 죄다 눌러본다. 삐삐삐 소리는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속 0000만 깜박거리고 작동은 안 된다..(중략)..바보 같지만 울고 싶다. 그래서 주방 식탁 앞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어버렸다. pp.42- 43

 

그렇게 잔 할머니가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어내려간 일상을 읽으며,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공존하고 있는지 또 그렇기에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어찌보면 작년 이맘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새해 첫날도, 봄이 와서 꽃망울을 터트리는 들꽃들도 그리고 알록달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물들인 단풍과 또다시 시간이 지나 만날 첫눈까지, 매년 반복되는 듯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자갈들은 아직 낮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바람이 한결 상쾌했다. 나는 6월의 기나긴 저녁을 좋아한다. 낮이 길어서 하늘이 아직 환한데도 첫 별이 보이곤 하는 저녁. p.114

 

   늘 보는 경치인데도 지팡이를 짚고 주위를 둘러보면 경치에 싫증 날 틈이 없다. 바다처럼 새파란 하늘 아래 자연이 불타오르는 것 같다. 이 아름다운 광경도 오래가지 않을 테니 지금 즐겨야 한다. p.235

 

   매년 시월은 풍경을 새로 그린다. 매년 나는 이렇게 고운 색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p.236

 

어느밤 운전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속상해 하면서도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십자말 풀이를 좋아하는 잔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잔잔한 여운으로 한동안 내게 남을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체리토마토파이가 되었는지 갸웃거리던 나의 궁금증을 풀어준 할머니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 이건 스포일 수 있으니, 이 책을 읽으실 분이라면 눈을 감아주세요^^)

 

   파이는 금갈색으로 잘 구워졌고 체리도 탱글탱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늘 하는 대로 조심해서들 먹어, 혹시 체리씨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라면서 파이를 내놓았다. 모두들 큼지막하게 한 조각씩 가져갔다. 우리는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표정이 확 변했다. 아주 희한했다. 사실, 파이는 전혀 맛있지 않았다. 내가 냉동실에서 토마토를 체리로 착각하고 꺼낸 것이었다. 우리 정원에서 자라는 알이 아주 작은 토마토, 일명 체리토마토 말이다. p.252

 

그렇게 체리와 체리토마토를 헷갈린 잔 할머니이시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인 한마디가 나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래본다. 어차피 옛날에도 없던 정신, 이제 와 잃을 일은 없겠구나. p.252

 


 

*기억에 남는 문장

우리 나이가 되면 사람이 고목(古木) 같다. 노인네들도 날씨가 좋으면 슬슬 되살아나고 조금은 푸릇해진다. 한 해 한 해가 예전 같지 않지만 말이다. pp.20-21

 

나는 의식을 일단 놓아버린 후에 죽음을 맞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무 자각도 없이 그냥 웃다가 혹은 잠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하면 좋겠다. p.33

 

질베르트와 나는 모든 것을 함께 했다..(중략)..이 친구도 에드몽드처럼 나보다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나? 나에게 그런 몹쓸 운명을 남기고 간다면? 60년 추억이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그 어마어마한 빈자리를 어찌하라고  p.39

 

남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p.153

 

아름다운 음악이 있는 장례 미사였으면 좋겠다. 슬프고 처지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바이올린보다는 첼로가 듣기 좋으면서도 약간 진중함이 느껴질 것 같다. 오르간만 아니면 된다. 오르간은 소리가 침울해서 싫다..(중략)..관은 뭘 쓰든 상관없다. 외장재는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생각해 너무 조악하지 않은 목재를 쓰더라도 안쪽을 누가 들여다보겠는가? 안쪽에 호박단을 대든, 새틴이나 면을 대든, 무에 그리 중요하랴. 좋은 천을 푹신하게 대어봤자 내가 아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낭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p.154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이 없으면 애거서 크리스티를 다시 펼쳐든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늘 범인 이름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시 읽어도 괜찮다. 가끔은 막바지로 갈수록 범인이 생각나지만 그래도 긴박감은 어디 가지 않는다. pp.175-176

 

별을 쳐다볼수록 마치 허공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스르르 풀어지고 정신이 빠져나가 저 혼자 방황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중략)..막막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비워진다. 흡사 내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이제 시간도, 공간도, 두려움도 없다. 접이의자에 누워 여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처럼 내가 거대한 전체에 속해 있음을 절감한 적은 없었다. p.180

 

나는 여기 시골 생활이 여름은 여름답고 겨울은 겨울다워서 좋다. 아들은 낯익은 풍광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갈수록 낯선 곳이 싫어진다. 나에게는 내게 익숙한 지표들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장소를 알아보고,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게 마음 편하다. p.182

 

휴대전화가 없던 옛날에도 다들 잘만 살았다. 지금은 언제 어느 때고, 아무 데서나, 전화 건 사람이 누구든, 당장 전화를 받아야만 한다. 이 빌어먹을 휴대 장치 때문에 우리는 이제 자유롭지 않다. 우리의 자취가 언제라도 추적당할 수 있다니 끔찍하다. p.243

 

이따금 저녁에 불을 끄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 밤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내일은 내가 세상에 없는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p.298

 

나는 소액이나마 매년 빈민 구제, 학술 연구, 기아 문제에 힘쓰는 단체나 재단에 기부를 하고 있다...... 영원히 만날 일은 없겠지만 지구 반대편에 내가 후원하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은 내 덕분에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편지를 보내곤 한다. 그런 편지를 받으면 정말로 기쁘다. 내가 아직도 조금은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늙은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노인은 사회의 짐이다, 이런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 딴에는 가급적 가벼운 짐이 되려고 애쓴다. p.299

 

파리에는 계절이 없다. 그들은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출하고, 모임에 초대하고, 쇼핑하고, 공연을 관람한다. 하지만 시골 사람들은 낙엽이 떨어질 때부터 봄에 새싹이 돋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p.316

 

아무라도 안녕하세요!”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아무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릴 핑계라도 있었으면. 놀라운 모험담, 재미있는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상대가 없다. p.391

 

나는 결국 생드니 성당을 보지 못할 것 같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너무 많이 흘려보냈다. p.397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간다. 창문을 열어두었나 보다. 눈을 감는다. 잠의 안개가 나를 감싸기 싲가한다. 나를 맡긴다. 어느새 나는 배에 올라와 있다. 아주 작은 돛단배다...... 갑판에 누워 구름 없는 하늘로 솟은 돛대를 바라본다. 바람은 상쾌하고 소리 없이 서서히 움직인다. 나는 겨울과 함께, 나의 마지막 겨울과 함께 잠들리라. 계절의 끝에서, 햇살을 받으며, 종려나무 가지를 높이 든 채로. 르네가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 p.427

 
YES마니아 : 로얄 w*****y 2022.01.01. 신고 공감 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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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토마토파이 - 베로니크 드 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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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 일곱 번째베로니크 드 뷔르 "체리토마토파이" 아흔살의 잔이 시골 외딴 농가에서 혼자 살면서 써 내려간 아흔 살의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지나간 세월의 회한과 소소한 삶의 행복,피할 수 없는 현실등을 잔잔한 이야기로 들려주는 따뜻한 이야기.'나는 왜 이 기나긴 생의 끝자락에서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생활을 글로 적어두는가? 마지막으로눈을 감은 후에도 완전히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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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 일곱 번째
베로니크 드 뷔르 "체리토마토파이"

 

아흔살의 잔이 시골 외딴 농가에서 혼자 살면서 써 내려간 아흔 살의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지나간 세월의 회한과 소소한 삶의 행복,피할 수 없는 현실등을 잔잔한 이야기로 들려주는 따뜻한 이야기


.'나는 왜 이 기나긴 생의 끝자락에서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생활을 글로 적어두는가? 마지막으로눈을 감은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욕구때문인가? (p108)'

'사실 내가 유일하게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나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지루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다. 평소에는 정신 없이 흐르는 시간이 그럴 때만 축축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모를까,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p178),

'사실 내가 유일하게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나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지루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다. 평소에는 정신 없이 흐르는 시간이 그럴 때만 축축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모를까,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p274),

'앞날이 나를 전처럼 끌어당기지 않으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 나에게는 미래보다 추억이 우세해지시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은 편이 더 좋다. 세피아색과 흑백색일 때 이미지는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과거는 내 머릿속에서 고운 색을 덧입지만 미래는 어둡고 칙칙해서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p404)'



YES마니아 : 플래티넘 n******m 2020.03.12. 신고 공감 5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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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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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갈등이나 흥미진진한 사건이 없이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있어서 누군가에겐 다소 심심한 책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고 잔잔한 가운데 웃게되는 부분들도 있어서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읽었습니다. 중간중간 시간이 날때마다 조금씩 읽었는데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일상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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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갈등이나 흥미진진한 사건이 없이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있어서 누군가에겐 다소 심심한 책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고 잔잔한 가운데 웃게되는 부분들도 있어서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읽었습니다. 중간중간 시간이 날때마다 조금씩 읽었는데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런 소설이 생각보다 마주치기가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n******4 2021.04.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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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토마토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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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잔은 아흔 살. 외딴 시골 농가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다. 아흔 번째 봄을 맞던 날. 잔은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별일 없는 나날 속에서도 그날 그날의 기분을 기록하고 문득 떠오르는 추억을 적어보기로 한 것이다. 체리토마토파이 - 베로니크 드 뷔르 저이 책은 아흔 살 잔 할머니의 일기입니다. 잔 할머니의 시선으로 본 세상 이야기.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한 이야기.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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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잔은 아흔 살. 외딴 시골 농가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다. 아흔 번째 봄을 맞던 날. 잔은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별일 없는 나날 속에서도 그날 그날의 기분을 기록하고 문득 떠오르는 추억을 적어보기로 한 것이다.

체리토마토파이 - 베로니크 드 뷔르 저



이 책은 아흔 살 잔 할머니의 일기입니다. 잔 할머니의 시선으로 본 세상 이야기.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한 이야기. 소소한 행복으로 채워져 있는 이야기...

잔 할머니의 술 사랑(?)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책... ㅋ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되신다면 분명 와인이 생각날 겁니다. ㅋ)


아흔 살에 잔 할머니처럼 늙을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사숙고해서 옷을 한 벌 사야겠다. 어디든지 입고 갈 수 있는 소박하고 깔끔한 옷. 입기도 편하고 벗기도 편한 옷. 이 괴상한 생수병 같은 몸뚱이를 가리려면 그 수밖에 없다. 내 나이쯤 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육신을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리기 위해 옷을 입어야 한다. 체리토마토파이 - 베로니크 드 뷔르 저


저는 이 문장이 참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내 나이쯤 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아직은 욕심도 많아서.. 포기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싸매고 있는 저를 봅니다. 나이가 들면.... 포기할 건 포기가 될련지... 모르겠습니다. ^^


잔 할머니의 소소한 일상이야기... 체리토마토파이입니다.


YES마니아 : 골드 j*****8 2020.07.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