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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이 오르다...
슬프다.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속에 갇힌 두 남자의 한바탕 무언극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그들의 삶에 너무나도 몰두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한낱 힘없는 관객이 되어 그들의 탈출기를 감상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것은 당신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연극을 통해 당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와 대면해 보십시오." -21p
나의 문제가 곧 당신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문제는 이 무언극 속의 두 배우에게서 비롯되었다. 슈투름운트드랑(질풍노도)를 전공한 독문학과 교수 클레멘스는 여제자들과 성관계를 하고 최고 학점을 주었다는 이유로 형을 살고 있고 그의 감방 동료 하네스는 교통경찰을 사칭해 법규를 위반한 차량으로부터 돈을 갈취해 구속된 사기꾼이다. 전직 대학교수와 사기꾼. 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묘한 상황도 연출 되는 게 우리의 인생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들이 복역하고 있는 이젠뷔텔 교도소에 유랑극단이 찾아오게 되고 그들이 선사하는 연극 '미로'를 통해 클레멘스와 하네스는 연극배우 혹은 광대를 자처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감옥이라는 미로에서 탈출 즉 탈옥을 감행한 것이다. 유랑극단의 버스를 타고 이젠뷔텔의 정문을 유유히 통과할 때에는 이 미로 같은 지긋지긋한 삶도 출구는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간 그뤼나우에서 잠시 잠깐의 일탈과 함께 생의 참담함을 다시 마주한다. 패랭이꽃 축제가 한창인 그곳에서 유랑극단 버스를 타고 온 클레멘스와 하네스 그리고 감방 동료들은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연극은 시작된다. 죄수가 아닌 배우들의 인생이. 그뤼나우에서의 나날은 달콤한 핑크빛만 계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은 그들이 처한 또 하나의 막다른 길목이었을 뿐이다. 이젠뷔텔 교도소장과 그뤼나우의 시장의 합심으로 탈옥수들의 일탈을 담은 연극은 조용히 막을 내리고 제2막의 시작은 다시 이젠뷔텔 교도소의 감방 안이다.
2막의 막이 오르며... 또다시 연극이길 바라는 현실은 계속된다. 다시 찾아온 유랑극단이 상연한 공연은 '고도를 기다리며' 이다. 한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은 클레멘스와 하네스를 닮았다. 아니 클레멘스와 하네스는 그들을 닮았다.
연극은 타인의 삶을 즐거운 방식으로 알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극은 세계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세상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22p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 그것이 장밋빛 미래든 그리운 누구이든 삶의 면면에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성취하고 포기하고, 계속된 반복 속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깨닫지 못한다. 무엇을 향해 나가는지, 무엇에 목말라 있는지.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미로와 같고 생을 다하는 날까지 알지 못하는 그 무엇, 고도를 기다림에 끝없이 목말라 한다.
보시다시피 이 작품 속에서는 두 개의 연극이 상연된다. <미로>와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것이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 될 수도 있고 아예 그 속에서 침몰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 미로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 끝에 뭐가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더 크기에 우리는 그 미로 속으로 발을 내딛길 주저하지 않는다. 우왕좌왕하며 미로의 출구를 찾기 위해 막다른 길을 끊임없이 맴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수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미로 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함과 용기의 산물. 그들이 바로 인간이다. 생의 무지막지함 앞에서 넘어지고 쓰러져도 꿋꿋이 버텨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무모한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이들, 인간, 즉 우리 말이다.
우리는 잎으로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얼마 뒤 밤나무 잎, 보리수 잎, 아카시아 잎 등 갖가지 나뭇잎을 한꺼번에 매단 이상한 나무가 탄생했다. 우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 메마른 나뭇가지에 잎사귀를 달았다. 즐거운 작업이었다. 우리는 나무를 한 바퀴 돌면서 이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얼마나 놀랄지 상상해 보았다. -110p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허구한 날 무언지 알 수 없는 막연함을 가득 담은 '고도'를 기다린다. 그것이 사람인지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인지 독자인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막연함 속에서도 '고도'라는 것이 삶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고도'를 통해서, 그것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무기력한 자신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클레멘스와 하네스가 연극의 소품인 나무에 잎을 매달면서 품었을 희망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앞으로 올 매일의 날들이 달라지길 바라는 염원, 지긋지긋할 정도로 따분한 미로 속 같은 감방에서의 해방.
If....
삶은 언제나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영위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한 만약이 모여 발현되고 실존하기를 서슴지 않는 게 인간이라는 종족이다. 만약에 이 만약이라는 가정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삶은 지금보다 더 막막하고 삭막한 허허벌판의 시든 잡초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삶에 대해 뭔가 기대를 할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게 인간을 살게 하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촉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감에 있어서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이 가정법 속에서 살아가는지 자문해 보았다. 그건 매초 매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 그 간절함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 그 용기에 호소할 수 있는 만약이라는 많은 가정법이 모여 삶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난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소, 클레멘스." "여러 번 생각했소. 견뎌 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에게 닥치는 것,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 내야 해요. 가끔은 타인도 견뎌 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함께 지내기가 한결 쉬웠소. 모든 면에서." -127p
감방 동기로 만나 무한한 신뢰와 존중의 상대가 된 클레멘스에게 하네스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이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주어진 오늘이기에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닌 주어진 오늘이기에 악착같이 살아내는 것. 그렇게 견뎌 내는 삶 속에 진짜 유랑극단이 아닌 감옥의 유랑극단 단원 클레멘스와 하네스가 있고 그 건너편 객석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인 내가 있다. 그들의 무언극에 결말은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계속해서 '고도'를 기다리는 클레멘스와 하네스가 있을 뿐이다.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bridge)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이 죄를 저질렀지만 어쨌거나 감옥이라는 곳은 마냥 벗어나고 싶기만 한 곳이다. 그들이 형기를 다 마칠 때까지는 암흑 속을 걷는 나날이겠지만 의지할 수 있는 동료와 함께이기에 그 길에 미약하게나마 불빛은 비출 것이다. 소설 속에서 회자되는 연극도 그러하고 클레멘스와 하네스의 충동적인 탈옥도 그렇고 결국 삶은 무수한 시행착오 속에서 이어지는 하나의 극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다린다. 나를 살게 하는 가정법을 지탱하면서 내 슬픔을 함께 나누어줄 누군가를, 내 고단함을 함께 짊어지고 가줄 누군가를, 누구나 결여된 채 살아간다. 그건 자신 혼자만이 아닌 나, 너, 우리가 함께 채워 나가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결국 지크프리트 렌츠는 말한다. 함께 가는 거라고, 이 험한 세상 너와 내가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클레멘스와 하네스를 이어주는 마음을 통한 빛의 다리는 결코 무너지거나 끊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이어져 있다고...
살아가면서 나를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줄 사람, 내 앞길이 너덜너덜해진 종잇장처럼 얇고 가늘더라도 묵묵이 지켜보며 다독여줄 사람... 그런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내 삶의 고단함이 다는 아니더라도 약간은 희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며 가정하며 부푼 희망을 품고 세상을 바라 볼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희극적인 두 유랑단원을 지켜보던 나는 그리고 이렇게 외치겠지, Encore~!!! 그러니 계속해서, 이 비극적인 생 한가운데 서있는 나를 위해 당신들만의 희극을 상연해달라고. 당신들의 연극같은 삶의 행진은 계속 되어야 하는 거라고.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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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 4편을 본 적이 있다. 무언가를 -‘완전히’가 아닌 ‘순간적’으로라도- 잊고 싶었기에 선택한 것이었다. 영화 한편이 끝나고 앞쪽 퇴장로가 아닌 뒷문으로 나가서 다음 영화의 상영관으로 들어가고, 영화가 끝나고 다시 또 뒷문으로 나가서 다음 영화의 상영관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나니, 아침에 일찍 들어갔던 극장에서 4편의 영화를 모두 다 보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저녁이었다. 생각해보니 한 끼도 먹지 않고 그렇게 내리 영화 4편을 본 것이었다. 집중해서 본다고 봤는데 영화가 다 끝나고 나왔을 때는 내용이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나지도 않았다. 눈은 영화를 보고 있었고, 머릿속은 잊고 싶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잊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보 같은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그날 하루가 다 끝날 때쯤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날, 자려고 누워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은 원점이었다. 나는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잊고 싶었던 일을 잊은 것도 아니고, 피하고 싶었던 일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부딪혀야 할 현실은 여전히 내 몫으로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여전히 함께 해야 할 일상과 삶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견뎌내야만 했던,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그 삶.
클레멘스와 하네스, 두 남자와 죄수들의 잠깐 동안의 일탈은 나에게 그날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일탈이 영원할 거란 것이 아닌, 일탈이 끝나면 다시 현실이라는 것을 만나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감옥에서 같은 감방을 사용하게 된 두 사람은 어느 날 감옥으로 공연을 온 유랑극단의 차를 몇 명의 죄수들과 함께 훔쳐 달아난다. 그렇게 그들이 도주하다가 도착한 곳은 어느 소도시 그뤼나우. 그뤼나우의 패랭이꽃 축제가 한창이던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유랑극단의 버스와 그 차에 타고 있던 죄수들에 대해 오해를 하고 죄수들을 유랑극단의 단원들로 착각을 한다. 죄수들은 당황하지만, 사기꾼 하네스가 기지를 발휘하면서 매 순간 잘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그만큼이었다. 그들에게는 죄수라는 신분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만기 출소가 아닌 탈출이니 쫓기는 신세였고, 그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옥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들을 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도 있다. 이젠뷔텔의 죄수들처럼 과감하게 감옥 밖으로 탈출 하는 것을 시도하거나, 잠시라도 잊고 싶어 미친 듯 술이라도 마시거나, 어떻게 해서든 그 순간의 시간들을 보내려 애를 쓰는 많은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실존하는 감옥(피하고 싶은 현실)은 우리의 눈앞에 그대로,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남아있다. 잠시 회피했다고, 눈을 감았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고 잊힌 것도 아니었다. 견뎌야할 그 삶은 그저 잠시 동안의 일탈을 눈감아 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부딪혀야 할 현실 속의 모습 그대로인 채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은 견뎌내야만 하는 그 시간들을 우울과 함께 보내는 게 대부분일 수 있다. 이렇게 눈앞에 실존하는 감옥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유쾌할 리 없다. 우울하고 괴롭고 고통스럽다. 꼼수를 써서라도 피해가고 싶은 순간들의 연속일 것처럼 어두운 순간들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현실의 감옥을 탈출하는 이들의 모습을 참으로 엉뚱하고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이들이 탈출하는 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시도로 보였는데 그걸 가능한 일로 만들었고, 그뤼나우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던 그 잠깐의 순간을 즐기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여줬다. 사회의 유명인사가 되고 그게 실제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그들 자신이 진짜 배우이고 합창단원이 된 것처럼, 그들의 현실은 그게 아닌데 그들이 보내고 있던 그 시간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만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이 죄수이고 감옥을 탈출한 상태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듯이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탈출해서 보낸 그 시간들은 실제일까 아니면 상상일까? 만약 상상이라고 한다면 한번쯤은 그런 판타지를 꿈꾼 것이 살아가야 할 남겨진 시간들을 견디는데 괜찮지 않을까? 그들의 다음 장소로의 이동과 뒤쫓는 감시를 벗어나기를 희망했던 것이 실패로 끝났지만, 다시 돌아간 그 감옥에서 바깥세상으로의 그 잠깐의 일탈은 어쩌면 감옥에 남아있는 그들의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 시간을 견뎌내야 다시 바깥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바깥세상의 많은 것들을 다시 만나고 싶고 즐기고 싶다는 바람은 변함이 없기에 말이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듯 높은 담장 안의 감옥으로 되돌아온 그들은, 그들이 저질렀던 일탈의 결과물을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다시 맞닥뜨린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마지막을 선택한 사람, 이번에는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탈출을 계획하는 사람,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 어떤 선택이 각자에게 가장 현명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실히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우리)은 그 순간 생각을 해야만 했고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들을 다시 또 만나게 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바깥세상의 자유로움을 경험했고,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줄도 몰랐던 예술에 대한 가능성도 발견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감옥 안에서 느끼는 가장 큰 것은 그들에게 닥친 현실을 직시하고 누군가와 함께 견디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 앞에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그들이 감옥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 감옥 안에서 견뎌야 할 시간이 아직 더 남았다는 것이고, 다시 탈출이 아닌 그 안에서의 견디는 시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죄로 들어온 그 감옥, 자유로웠을 때는 그 가치를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자유, 그리고 이제 다시 그 자유를 찾아 나갈 수 있는 순간에 대한 기대로 묵묵히 견디는 것뿐이다. 클레멘스와 하네스가 선택한 것은 그것이다. 그 감옥 안에서 남아서 견디는 것, 그게 그들이 감당해야 할 지금의 현실이고 그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처럼. 단지 그 짧은 일탈의 시간은, 그 시간을 공유했던 누군가와 함께 더 잘 견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그 순간 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남겨진 그 시간을 견디는 것뿐이었으므로. 그 견디는 시간이 누군가와 함께라면 조금은 더 의지가 되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길 것만 같은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저자는 하네스의 마지막 선택으로 보여준다. 기가 막히게, 이번에는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음에도 하네스가 플레멘스와 함께 감옥 안에서 남겨진 시간을 견디는 것을 선택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저자가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라면, 견뎌야만 하는 게 그 삶의 선택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여서 따스한 위안이 되는 괜찮은 시간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게라도 견뎌진다면 살아가는 순간들이 조금은 즐거울 수도 있지 않겠냐고.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도움이 될 리 없다. 피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완전하게 해결하기 전까지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였다. 혼자가 아닌 그 누군가와 함께 견딘다는 것은 상당히 큰 위로와 용기로 다가오기에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말이다. 우리가 힘든 일 앞에서 가까운 친구나 가족을 떠올리고 그들에게 도움 받거나 기댈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그 마음을 하네스와 클레멘스를 통해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조금은 더 따스해지고 포근해지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여러 번 생각했소. 견뎌 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에게 닥치는 것,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 내야 해요. 가끔은 타인도 견뎌 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함께 지내가가 한결 쉬웠소. 모든 면에서.” (127페이지)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감옥으로 찾아온 유랑극단이 공연하는 <미로>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미로 안으로 죄수들이 들어가는 것을 상상했었다. 미로를 통해 사라지는 죄수들, 그리고 그 미로를 통과한 죄수들이 만나는 자유로운 세상.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인처럼 죄수들에게 그런 판타지를 선물하려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삶은 역시나 현실이라는 듯,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흐름은 그들에게 판타지를 허용해 주되, 현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살아가는 지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충고 같았다. 우리 눈앞에 실존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감옥은 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해질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으로 현실을 마주하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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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더위의 연속이다.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지도 며칠 째다. 책을 펼쳤다. 지크프리트 렌츠의 <유랑극단>이란 책이다. 지크프리트 렌츠는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와 함께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작가다. 본문의 마지막 장은 130쪽이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청소년 문학에 관해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쌓여 있는 책 중 가장 얇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이 책이 내 시선을 사로잡은 또 하나는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담긴 표지와 거기 적힌 ‘인생에 관한 우아하고 지적인 농담 혹은 판타지’라는 문구였다. 아마도 현재의 내가 더운 날씨와 어떤 기다림으로 ‘우아하고 지적인 농담 혹은 판타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이젠뷔텔 교도소에 ‘유랑극단’ 버스가 들어온다. 유랑극단은 <미로>라는 제목의 연극을 공연한다. 15분간의 휴식 시간 동안 ‘나’ 클레멘스와 하네스는 뭄페르트, 불찬 등 감방 동료와 교도소를 탈출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그뤼나우 패랭이꽃 축제’가 열리는 그뤼나우시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유랑극단 행세를 하며, 합창단 창단과 향토박물관 개관, 시민 대학 설립을 도우며 새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신분은 죄수이자 도망자! 유명해질수록 그들은 불안했다. 클레멘스는 교수 시절 자신의 가장 흐리멍덩한 학생이었던 이졸데 브롬페트를 지역 기자로 만나기까지 했다. 정착은 도망자의 역할이 아니다. 그들은 예술가들의 도시 덴마크로 가기로 하지만 시상식에 초대를 받아 도망을 미룬다. 시상식에 간 그들은 경찰에게 잡힌다. 미로(迷路)에 갇히면 나올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의 교도소 탈출은 교도소장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죄수들은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 혹은 교도소장이 죄수들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삶은 일정 시간을 견뎌야 희망이 온다는 깨달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면 불찬처럼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데스 역시 탈출의 실패 이후 자포자기했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와 ‘이젠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삶을 대하는 자세를 말할 때 인용되는 문장이다. 의미는 같지만 해석은 천양지차다. 하나는 절망 쪽에 가깝고 하나는 희망 쪽에 가깝다. 수감생활의 절반을 보낸 하데스와 클레멘스가 기다리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했던 것은 희망이 아득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나갈 날이 정해져 있어도, 기다림에 끝에 희망이 있음이 확실해도 오랜 기다림은 늘 사람을 지치게 하다. 설렘은 사라지고 확실했다고 믿었던 것들은 모호해진다. 하네스와 클레멘스가 본 두 번째 연극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남자의 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고도를 기다리며>였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억나지도 않는 그날 읽다가 포기한 책이다. 지금처럼 불볕더위가 내리쬐던 여름이었거나 지금도 기다리는 어떤 기다림에 지쳐 책을 읽을 힘이 없었던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긴 기다림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그 사람들과 한결같이 그 길을 응원해 주었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나는 늘 사람은 희망 때문에 산다고 생각했다. 희망이 없는 삶은 살아도 죽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희망 때문에 살기도 하지만 내 곁에 있는 한 사람 때문에 살기도 한다. 두 남자가 고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하네스가 클레멘스가 삶의 미로(迷路) 속에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표지의 거울을 보듯 마주 보고 있는 두 남자에게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위로하며 함께 있었다. 이 책은 130쪽의 얇은 책이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책이었다. 삶은 언제나 ‘한번 들어서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미혹의 길’이었다. 외로움과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나 혼자 건너온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 혹은 오만이다. 돌이켜보면 그 길은 미로(迷路) 혹은 위로(危路)만은 아니었다. 미로(美路)이기도 했다. 곁에 있어준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책은 내게 삶의 위로(慰勞)를 주었다. 무더위와 기다림으로 지친 내게 한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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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으로 <침묵의 시간>을 읽었는데 짧으면서 강렬한 이야기에 빠져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작품 또한 짧으면서 인생이란 무엇인지 한번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생각해 보게 한다. 인생은 한판 연극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막이 오르면 언젠가는 막이 내리고 지나간 시간들은 다시 오지 않는다. 연극과 같은 인생이 미로에 갇혀 허우적 거리고 있다. 한치앞도 모르는 인생,미로에 갇힌 인생처럼 들어갔던 문으로 다시 나오게 되고 한번 빠져들면 어떤 길이 존재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렇게 유랑극단의 연극 <미로>와 함께 감방 동료로 만난 대학교수 클레멘스와 사기꾼 하네스의 연극은 시작되었다. 부적절한 관계를 했던 여제자에게 차등의 점수를 주었다는 이유로 감방에 오게 된 '슈투름 운트 드랑'의 교수 클레멘스는 길에서 가짜 교통경찰을 하며 돈을 받던 하네스라는 사기꾼과 함께 감방 동료가 되는데 그는 도통 아무일에도 흥미가 없는 듯하다가 감방에 유랑극단이 오고 나서부터 생기를 찾는다.
유랑극단이 감방에서 행할 연극은 <미로>이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오는 사람이 없다는 미로,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 같은 미로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단다. 연극이 상연되고 십여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에 하네스와 그의 친구들은 바쁘게 움직여 모두 유랑극단 버스에 올라탄다. 하네스를 따라 클레멘스 교수도 올라타게 되고 그들은 유유히 감옥의 문을 벗어나게 된다.유랑극단 단원이라도 된 듯 말이다. 그들이 탈출한 것을 감옥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자유를 느끼며 달리고 달리고 그러다 패랭이꽃 축제가 한창인 '그뤼나우'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은 패랭이꽃으로 유명해진 도시이며 거기에 발맞춰 문화적으로 함께 발전하려고 발돋움하고 있는 중인데 마침 '유랑극단'이 마을을 찾아와 준 것이다.그러니 얼마나 대환영이겠는가.그들은 죄수들이지만 그뤼나우마을에서는 '유랑극단' 단원이 되어 합창도 하고 그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대접을 받게 된다.그런가 하면 그동안 조용하던 하네스의 지휘아래 그들은 하나가 되어 그 마을에 안착하여 저마다 능력을 발휘하기로 한다. 클레멘스는 강의를 하고 하네스는 박물관을 맡게 되고,그런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정말 연극처럼 가능하게 되고 마을은 더욱 그들로 인해 활기를 찾게 된다.
좋은 것은 때가 있는 법,미리 떠났어야 했는데 그만 발목을 잡히고 만다. 그들의 노고에 상을 수여하기로 한 것, 그들은 이왕에 상까지 받고 멋지게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의견을 일치한다. 그런데 상을 받는 자리에 교도소장도 있고 자신들이 떠나온 곳의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뭐야 이곳 그렇다면 교도소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래도 주는 상을 받고는 떠나려 하는데 그들을 기다리는 버스,유랑극단이 되어 그뤼나우 마을에 왔듯이 유랑극단의 버스를 타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들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교도소측과 그뤼나우 마을이 함께 쓴 각본이었을까. 누군가에 의해 쓰여진 시나리오에서 자신들은 그것이 교도소를 떠나 정말 자신들이 쟁취할 수 있는 자유를 찾은 듯 그렇게 누군가가 지켜보는지도 모르고 트루먼 쇼를 하듯 가뤼나우 마을에서 한판 연극을 벌였던 것인지.
그뤼나우에서 만끽했던 자유 때문인지 하네스는 다시 잠잠한 생활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적응을 하지 못해 자살을 하기도 하고 탈출을 하기도 한다. 탈출을 할거라고 생각한 대장격 '사기꾼 하네스'는 탈출 대신 클레멘스와 함께 남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낼 것을 택한다.그가 왜 남은 시간을 '견뎌내려고 하는 것일까?' 그들이 다시 돌아간 감옥에 다시금 유랑극단이 찾아 오고 감옥에서 상연한 연극은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그렇다,미로와 같은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 지금까지 빨리빨리 결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사기를 치며 살았다면 클레멘스 교수와 함께 하면서 하네스는 '인생은 견디어 내는 것,고도를 기다리듯 기다리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의 시간들도 잘 견디어 왔다.탈출과 다시 감옥행을 반복하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자신의 자리 하나 번듯하게 없이 '사기꾼'이라는 말을 듣지만 클레멘스와 함께 하면서 그는 '인생'이란 것을 배우게 되고 들여다 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치려고 해도 '미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고도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희망'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비록 세상밖에 자유가 있다가 해도 그 또한 연극과 같은 세상이다.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을 벗어나 잘 살 수 있을까.감옥생활을 하면서 익숙해진 감옥,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많겠지만 지금까지 무척 많은 미로속을 거닐어 왔다. 답이 없는 듯한 미로 속에서 희망도 없이 길도 없이 그저 허우적 거리며 살아 왔다면 이젠 미로가 안개가 걷히듯 무언가 살짝 보이기 시작이다. 클레멘스 교수가 그뤼나우 마을에서 택한 강연은 '판타지'이다. 이 이야기 또한 판타지적이면서도 연극적이고 그런가 하면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심오함이 함께 하는 이야기다. 대학교수 였던 클레멘스도 참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견디어 내고 있다. 그렇게 하는 속에서 제자들이 그를 찾아 오기도 하고 그는 자신이 결코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데 사기꾼 하네스는 인생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견디어 내야 할까. 그래도 인생은 견디어 내야 한다. 그것이 혼자라면 힘들겠지만 누군가와 함께 의지하면서라면 좀더 쉽지 않을까,그렇다 하네스는 인생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일장춘몽과 같았던 유랑극단을 타고 그뤼나우 마을에서 느꼈던 시간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남은 시간들 새로운 희망을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듯 이겨낼 것이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인생이란 그런것 같다. 견디어 내고 기다리고,그러다보면 뜻하지 않은 희망도 만나게 되고 좀더 둥글둥글 세월을 받아 들이게 되는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속도위반을 하여 먼저 간다고 해도 모두가 가는 끝은 똑같은 인생인데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고 길이 보이지 않는 미로속과 같다 해도 견디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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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너무 갇혀있다보면 꼭 자동차 안에 오래도록 갇혀있는 것과 같아서 멀미가 난다. 멀미가 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차에서 내려 바깥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것이다. 삶의 멀미를 느낄 때 치유하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다. 그동안 또아리 틀 듯 있었던 공간에서 훌쩍 벗어나 낯선 곳의 새로운 공기로 허파를 가득채우는 것. 그 것이다. '독일어 시간'으로 유명한 독일 작가 지크프리트 렌츠의 '유랑극단'을 만났던 곳은 그렇게 떠났던 여행 길의 어느 열차 안에서였다. 차창 밖으로 마치 거대한 공룡 같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하늘 아래로 초록으로 산뜻하게 채색된 넓게 드리워진 풍경들을 순간마다 새로이 만날 때, 소설 '유랑극단'의 주인공 클레멘스와 하네스는 유랑극단의 버스를 훔쳐타고 감옥을 탈출하고 있었다. 감옥은 그들에게 '빠져나오지 못한 미로'와도 같았다. 그들이 감옥에서 보았던 유랑극단의 신비한 연극 그대로 말이다. 클레멘스는 교수였으나 자신의 여제자들과 학점을 대가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하스네는 경찰로 위장하고 속도 위반 차량들에게서 과태료를 부정 수취했다는 이유로 감옥으로 와 있었다. 그러한 갇힘은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옥 어디에서도 자신들을 채워줄 새로운 삶의 의미들을 맛볼 수 없었으니까. 그건 바로 '출구없는 미로'란 말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해 줄 의미들을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새로운 변화를 찾아 무작정 떠나가고 있듯이...
우리는 그렇게 닮았다. 그래서일까? KTX의 빠른 속도만큼이나 소설은 술술 읽혔다. 어느새 나는 그 속도만큼이나 거세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도망자들인 클레멘스와 하스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얻게 되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다행히 처음에 그들의 여정은 무더운 여름 막 커다란 강가에 도착한 아이와도 같이 희망적으로 보였다. 우연히 도착한 마을에서 그들은 그들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오래 정체되어 있었던 한 마을을 그들의 새로운 열정과 활기로 다채로운 빛깔로 빛나면서 새로이 미래를 열어나가는 마을로 탈바꿈 시킨다. 하지만 내가 탄 열차가 밝은 들판을 지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어두운 터널로 들어서듯이 그대로 그들에게 희망을 새로이 가져다 준 바로 그것이 또한 그들에게 절망을 가져다주게 될 줄은 몰랐다. 햇살이 건물의 그림자 사이로 사라지면 풍경이 더 어둡게 보이는 것 처럼 아예 자유의 맛을 모르는 것 보다는 한 번 맛보았던 자유를 잃어버릴 때가 더 견디기 힘들다는 말도 있듯이 그들 역시 더욱 좌절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내겐 궁금한 것이 생기고 말았다. 지크프리트 렌츠는 '왜 스스로 유랑극단이 되어 타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들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아무리 도망자들이라 하더라도 다시금 원점으로 불러들여 오히려 더욱 밑바닥으로 데려가는 것일까?'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클레멘스와 하스네 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마치 내 여행의 결말처럼 느껴져서 그 의문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한 동안 풍경의 음미는 내용의 추적으로 바뀌고 결국 왜 그들을 굳이 밑바닥으로 데려갔었는지 나름 그 이유를 찾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건 독자들을 위해서였다. 독자들에게 어디서 삶을 새롭게 만들어줄 진정한 변화가 오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렌츠는 주인공들이 도달한 밑바닥에 우물을 깊게 파고 독자로 하여금 그 안을 들여다보게 한 것과 같았다. 그렇게 해서 그 우물 아래 수면 위에 비쳐진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고운 별빛들과도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바로 그 우물을 통해 렌츠는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바깥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가 가두고 있는 우물 때문이 아니라 그 우물을 바라보는 우리 눈이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것이라고.
궁극적으로 깨달은 '유랑극단'을 통한 여정의 의미는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 막 뭔가가 뇌리를 그대로 내리친 것 처럼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덮은 책 표지를 무심코 더듬는 손끝은 마치 점자를 읽듯 렌츠의 질문을 내게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너는 지금 과연 무엇때문에 일부러 이름모를 곳을 찾아 떠나고 있는 거냐?'고.
유랑버스를 타고 떠났던 클레멘스와 하스네는 사실 우리 마음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다. 소설에서도 인용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사람과도 같이 자신의 삶을 구원할 무엇인가는 늘 나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늘 바깥에서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존재였고 어딘가에 있는 커다란 그늘을 찾아 그 아래 깃들기를 바라는 새들이었다. 하지만 렌츠는 그게과연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말하고 있었다. 차창으로 보이는 저 풍경 어딘가에 네가 안식할 곳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있는 지금 이 곳을 늘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라고. 그렇게 내가 세상을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 부머랭처럼 결국 왔던 그 자리로 계속해서 돌아갈 뿐이라고 말이다. 그 시선의 변화에 대한 부름을 난 단적으로 하스네가 클레멘스에게 선물한다고 감방 안으로 가져왔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썼던 연극용 나무에게서 느꼈다. 단지 나무 하나가 그 안에 깃들었을 뿐인데 정말 '식물학적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처럼 그저 칙칙하기만 했던 그들의 공간이 싱싱한 삶의 빛깔들로 충만한 생활의 공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건 그들에게 더 이상 달아날 필요가 없다는 걸 뜻했다. 이미 그들이 있는 공간 자체가 그들이 추구하던 새로운 삶의 활력과 의미로 가득한 공간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이것이었다. 무언가 변화를 바깥에서 찾기 위해 떠났던 나에게 렌츠는 정말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결국 클레멘스와 하스네는 나를 위해 자신들의 자유를 희생한 셈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내게 심리학자 빅터 플랭클을 생각나게 했다. 유태인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나치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들 보다 꿋꿋하게 버텨냈는데 그건 바로 상상력 덕분이었다. 클레멘스가 그뤼나우 마을에서 '슈투룸 운트 드랑'에 대해 했던 강의 그대로였다.
"그런 결핍을 우리는 그뤼나우에서도 판타지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낙담에 빠진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P. 54)
이와 똑같이 빅터 플랭클도 수용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상상력을 가미해 전쟁 전 자신이 했던 강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현실을 창조해냄으로써 어두운 현실의 아픔을 이겨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바로 그 이야기를 극적으로 꾸며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거기서 아들과 함께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어른들이 지금 전쟁 게임을 하고 있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비록 거짓말이었지만 그래도 아이에겐 진실이 되어 아이는 전쟁으로 인한 어두운 상처 하나 가지지 않은 채, 전쟁을 무사히 넘기게 된다. 이 역시 소설에서 클레멘스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내가 읽은 거의 모든 회고록에는 허구적 요소가 명확하게 존재했다. 서술되는 삶은 자료를 통해 입증되어야 하지만, 모든 삶에는 허구를 통해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는 불명료한 부유 상태와 불분명한 틈이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나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까지 했다. "간혹 진실은 지어낼 수도 있습니다.'(P. 121)
이 모든 기억들과 더불어 렌츠의 말은 정말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 여행이 사실은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자꾸만 바깥에서 바깥으로 움직이는 단순한 몸의 떠남이 아니라 이전의 시선과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과 생각으로 변화할 나를 가꾸어가는 여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정말 유랑과도 같았다. 어디에서든 '결정된 나'를 이루려하지 않고 모든 경계를 넘나들면서 다양한 의미로 새롭게 형성되어갈 '과정상의 나'를 추구해야 할테니까 말이다. 렌츠의 이 소설을 여행의 시작에서 만나게 된 건 정말 다행이었다.
문득 어린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그 시절, 화창한 여름날이면 나는 마루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을 좋아했다. 지붕의 처마가 마치 둥실 떠가는 배라도 된양 여지없이 바다 같은 빛깔을 하고 있는 푸른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그대로 그 속을 헤엄쳐 노니는 물고기가 된 것 같아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방학이라서 옆 집 기흥이는 바다에 가고 뒷 집 수광이는 시골 할머니 댁으로 가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리저리 떠나갔어도 난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껏 뒹굴거리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내 몸의 한 다섯 배나 되었던 그 마루만 있으면 되었다. 하늘이 구름과 어울려 순간순간 그려내는 변화무상한 화폭만으로도 난 이미 여행이 가져다 줄 수있는 새로움을 맛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렌츠는 새삼 나를 그 공간으로 이끌고 갔다. 나 자신에게도 렌츠가 마지막 클레멘스와 하스네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던 그 감방과 같은 공간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렌츠의 당부를 마음에 새길 수 밖에 없었다. 차창에 바라보이는 오늘의 하늘도 그 때의 하늘만큼이나 구름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형상과 빛깔들이 참으로 다채롭다. 하지만 이제 나의 그 눈은 처음 열차에 올랐을 때 처럼 단순히 그것만을 바라보고는 있지 않다. 나 속으로 들어가 그 빛깔과 형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나 자신 또한 음미하고 있다. 그렇게 풍경에게 나를 내어주고 있다.
렌츠는 클레멘스의 입을 빌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을 내주지 않고는 타인이나 다른 대상에 대해 글을 쓸 수 없다.'(P.130) 라고
나도 지금 그렇게 글을 쓰고 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의 나도 하늘이 그려내는 풍경을 보이며 상상의 이야기를 무던히도 지어냈었다. 아마도 지금의 나 역시 이 여정 내내 그러할 것이다. 이제 그걸 기록해봐야겠다. 돌아올 내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지니고 올지 기대된다. 렌츠에게도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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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야말로 한 인간과의 가장 내밀한 연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한다“ (102) 매서운 추위로 몸과 마음이 꽁꽁 얼어붙는 요즘, 마음에게 훈훈한 햇살 같이 위로를 건네주는 이야기 <유랑극단> 처음 <유랑극단>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제대로 읽히지 않고, 환상에 빗대어진 현실에 대한 강박관념, 무게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고 할까? 이야기가 의도하고 있는 심층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들로, <유랑극단>이 표방하고 있는 ‘인생에 관한 우아하고 지적인 농담 혹은 판타지’를 거부했던 것이다. 현실을 판타지만으로도 충족되지 않을 만큼 무자비한 것이니, 작가 ‘지크프리트 렌츠’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자!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어떤 사건들이 뉴스화되는 첨단의 시대가 아니더라고 해도, 탈옥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눈에 띄는 유랑극단의 버스를 타고 탈옥이 시도되는 상황-그러고 보니, 요즘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탈옥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특히 패랭이꽃 축제를 벌이는 마을 사람들은 전혀 깜깜 무소식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유랑극단’이 방문해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환영하고, 탈옥한 죄수들을 중심으로 더욱 축제가 무르익어가는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나는 그만큼 환상을, 판타지가 주는 삶의 희열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실적 상황에만 굳건한 믿음의 성을 쌓고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었을까? 축제를 벌이며 삶의 향연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르고 있었던 것일까? 자꾸만 이야기에 반발심만이 커지는 듯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작가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당신은 진정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낯설지 않은 작가지만, 내겐 너무도 어려운 작가였다. 작가 ‘지크프리트 렌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침묵의 시간>이란 책을 통해 만난 적이 있어, 더 반가운 마음으로 <유랑극단>을 펼쳤지만, 여전히 쉽게 공감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임이 더 분명해졌다고 생각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이야기 속의 탈옥수들이 억울한 누명으로 어느 정도 탈옥의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희대의 사기꾼, 뇌물 수수 등등의 명백한 죄목이 있음에도 끊임없이 탈옥을 시도하고, 그리고 다시 체포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축제라는 판타지와 얼버무려 놓았으나, 축제의 마지막에 이들은 다시 체포되었다. 내 머리로는, 내 감성으로는 도저히 쉽게 용납할 수 없어, 많은 시간을 책과 씨름해야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를 즈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환해졌다. 바로 끊임없이 죄수들이 탈옥을 감행하는 ‘감옥’이 시사하는 바가 읽혀졌다. 그것을 바로 우리 스스로의 마음의 감옥, 숱한 번뇌와 고통이 바로 ‘감옥’이었다. 번번이 도망치려고 하지만 결국을 제자리로 돌아오고, 또다시 도망치고 회피하려고 한다. 견디는 힘을 기르기보다는 그저 순간을 모면하려고 잔꾀만 부리다보니, 현실을 더욱 냉혹하고 축제와 같은 삶의 희열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다. 우리는 간혹 ‘희망 없는 기다림’이라며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은 아닐까? 탈옥의 중심인물이었던 ‘하네스’는 마지막 탈옥 시도를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말한다. 감방 동료인 교수 양반, ‘클레멘스’에게 “난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소. 클레멘스” (127) “예전에 난 무척 초조했었소. 기다릴 줄도 몰랐지. 그런 초조함으로 고통스러워하기도 했고, 근데 이제 그런 상태를 끝났소. 난 우리가 함께하기를 소망했소. 클레멘스." (130) 그리고 “여러 번 생각했소. 견뎌 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에게 닥치는 것,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 내야 해요. 가끔은 타인도 견뎌 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함께 지내기가 한결 쉬웠소. 모든 면에서.”(127) 이야기 속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의 두 방랑자처럼 하네스와 클레멘스는 남은 형기를 함께 할 것이다. 서로가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서로가 함께 하면서 슬픔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슬픔을 겪은 사람은 함께해야 하는 법’이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슬픔을 포용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길 소망해본다. “나는 똑같은 상태로 지속되는, 영영 떨쳐 버릴 수 없는 절망 그 자체가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103) 나 역시 때론 영영 떨쳐 버릴 수 없는 절망, 번뇌 속에서 몸부림칠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스스로 쌓아놓은 마음 속 감옥에서 끊임없어 도망치려고만 했다. 때론 그 도망이 최선이라 여기면서.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가둬두고 있는 ‘삶의 감옥’이 무엇인지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다. 내가 쉽게 벗어나지 못하면서 늘 도망치기에 바쁜 마음의 감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견뎌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구별하고, 그 견디는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때론 그 절망, 슬픔이 내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특별한 무엇이란 사실이 나를 설레게 하였다. 알 수 없는 인생이기에 그 자체로 기대되는 삶, 기다려지는 삶이라는 사실로 마음 깊은 곳이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듯하다. 고작 100쪽이 조금 넘는 적은 분량의 이야기인 <유랑극단>, 하지만 내게 분명 난제였다. 하지만 2012년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그 어떤 이야기보다 깊은 울림으로, 적절한 방향타가 되어주는 듯하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내 내면의 소리, 그 속의 두려움과 마주해야 할 듯하다. 지금껏 알던 팍팍한 현실이, 그 세상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활짝 열리는 마법이 곧 시작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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