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만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공포스런 범죄 스릴러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아니, 전혀 안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대의 뜨거운 피가 식어서일까? 비인간성에 의한 폭력과 노골적인 섹스 묘사, 사이코패스 등 악마 같은 인간들의 엽기가 자아내는 스릴러 등은 많이 부담스럽다. 추리소설은 일어난 살인사건에 감춰진 사실을 찾아가는 지적 게임의 하나이기에 자주 읽지만, 별 이유 없이 잔혹하게 인간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에 좇기거나 좇는 호러 스릴러 소설은 소름과 분노만 일 뿐 정신건강에 도움되는거라곤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스릴러 소설을 손에 들었다. <알렉스>란 책인데, 책 광고의 두어 가지 카피가 흥미를 자아냈다. 첫째, "<양들의 침묵>의 클래리스 스탈링 이래 가장 놀라운 여주인공의 탄생!"이란 카피였다. 소설보다 영화가 더 알려진 양들의 침묵은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중 가장 잔인한 영화를 꼽힌다. 평소 즐기지 않는 장르지만 이 책과 영화는 읽고 본지라 과연 <알렉스>가 비교할만한 책일련지 관심이 갔던 것이다. 둘째,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를 뛰어넘는 유럽 사회파 스릴러의 거장!" 이란 문구에도 마음이 끌렸다. 사회파 소설은 일단 내용이 있다. 살인자에게도 안타까운 이유가 있고 분노가 있다. 유럽추리소설 대상, 코냑페스티벌 신인상, 미스터리문학 애호가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묘하게 어울려 뭔가 있을 거라는 느낌과 함께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책을 읽게 한 것이다.
책은 530여 쪽,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체 구성(플롯)과 스케일은 확실히 신선하고 놀라웠다. 각각 별개의 내용과 결말인 듯 하면서도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마지막 한 장까지 교묘하게 짜여진 복선과 반전은 전 유럽 추리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작가의 필력을 단번에 인정하게 하였다.
2부. 앞서 납치의 공포로 연민을 자아낸 알렉스. 2부에서는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저지르는 연쇄살인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이를 좇는 카미유는 항상 뒤처지는 형국이다. 주로 알렉스에 초점을 맞춰 책을 읽게 되나, 카미유의 가족사와 관련한 내면흐름도 범상하지 않은 무게로 다가온다. 알렉스의 범행 방법은 일단 상대를 흉기로 내려쳐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 입속에 다량의 고농축 아황산용액을 들어붓는다. 그녀는 살인현장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기도 하고 노트북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지만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않는다. 섹스가 없는 유혹. 이런 알렉스를 추적하는 카미유는 황망하다. 경찰이 발견하기도 전에 스스로 탈출한 여자의 실체를 알고 보니 아황산으로 이미 세 명의 남자를 죽게 한 연쇄 살인범이라니…….그러고도 알렉스는 계속해서 트럭 운전사를 같은 방법으로 보내버린 후 그녀의 오빠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을 한다. 카미유는 예기치 않게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 한 가지를 불쑥 떠올린다. 아내 이렌의 시신과 태중에서 죽은 아기. 카미유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로 녹아내린다. 2부는 이렇게 암울한 비극과 절망과 상처가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지러이 난무한다.
3부. 알렉스의 일기장 등 소지품을 확보한 카미유는 알렉스의 오빠 토마스 바쇠르를 심문해 나간다. 만약 이 책이 알렉스의 자살로 허무하게 끝맺음 하였더라면 빼어난 감각과 심리묘사에도 불구하고 그저 평범한 B급 스릴러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 3부로 인하여 이 책은 작가의 역량이 매우 유려하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알렉스가 왜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보이던 죽은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사건의 전말이 치밀한 안배에 의해 충격적으로 하나씩 밝혀지며 놀라운 반전과 결말이 그려지고 있다. 2부까지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졌던 카미유 반장의 캐릭터가 엄청난 포스로 살아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이렌의 죽음에서 생겨난 악령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자기 예술세계에 빠져 자신을 방치했던 어머니에 대한 앙금도 씻어내게 된다. 트라우마의 상흔을 팽팽히 잡아당겨 힐링 코드 승화시키는 작가의 필력에서 단순 흥미꺼리 스릴러 장르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문학적 힘을 발견한다. 정말로 프랑스가 배출한 조세프 룰르타비유, 뤼팽, 메그레 경감 등 '로망 폴리시에 Roman Policier' 캐릭터 계보에 카미유 베르호벤의 이름을 추가하여도 될 만하다.
여러 스릴러 작품을 읽지 않아 서투른 평가일지 모르나 이쪽 장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 상당히 괜찮다. 간결하고 명징하게 상황을 그려내면서도 생략을 통한 모호함을 섞어 독자 스스로 상상에 의해 작품을 재해석하도록 유도하는 기법이라든지, 격자식 교차서술로 사건의 추적과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는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책의 말미에 참 괜찮은 구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라는 말이 와닿았다. 진실과 정의라... 이 <알렉스>는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3부작' 시리즈 중 <세밀한 작업>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작가의 최신작이자 국내 첫 출간작이라고 한다. "피에르 르메트르"란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작품이 나올 때마다 관심 가져봐야겠다. 의외로 마음에 든 책읽기였다. |
|
‘알렉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의 느낌은, 검은 바탕에 붉은 옷을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이었고, 또 이 알렉스라는 이름이 주는 중성적인 느낌이 무조건 좋았다. 이제 와 ‘알렉스’라는 이름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알고 있나 찾아보니 남자이름인 알렉산더의 애칭이란다. 아니 이런 당황스러운 일이….(난 지금껏 알렉산드리아의 애칭인줄 알고 있었다^^;;) 이 책을 받고 보니 책이 엄청 두껍다. 내용만 528쪽…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매 회마다 알렉스와 까미유 반장의 이야기가 1회씩 교차로 나온다. 그런데 작가는 친절하지 않았다. 1부를 보면서 이 여자가 주인공 맞는지 아리송했다. 그리고 책 앞 표지에 적혀 있는 말, 왜 ‘슬픈 살인자’라고 적혀 있는지 의아했다. 이 여자는 분명히 ‘나탈리’라고 불리웠고, 납치당해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으며, 또 지금은 최소한의 인권마저 무시당한 채 발가 벗겨져 새장속에 갖혀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새장은 크기도 어정쩡해서 똑바로 서 있을 수도, 편하게 앉아 있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누구나 한 번씩은 돌아보게 만드는 그녀. 그녀는 자신에게 있는 다른 매력에 설레이며 그저 한 번 욕심을 부려 일탈했고, 그것은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앞 표지와 연관하여 드는 생각. ‘그녀가 충격을 받아 살인마가 되는 것이 아닌가?’ 25장까지 읽을 때는 이 여자가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납치되어 절대 살아나지 못할 것 같던 그녀였지만, 극적으로 살아 남았다. 그리고 발생하는 살인사건들. 그녀는 현재 일어난 살인 뿐만 아니라 과거의 살인마저도 자행했다. 그것도 동일한 패턴으로... 허걱!!!! 하지만 2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탈리 그랑제였다가, 로라였다가, 줄리아였던 그녀는 드디어 알렉스가 되었다. “저는 알렉스라고 해요” 잔잔한 전율… 3장까지 읽고 나서야 알렉스의 살해 동기가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시종일관 담담했던 것이 결국은 그녀의 아픔에 대한 그녀만의 감싸안는 방법이었고, 그녀가 간직한 드러나지 않은 내면세계의 아픔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강간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남자들이란…’하고 조심스럽게 남정네들을 도매급으로 욕했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더 심한 이야기…. 어디까지 알렉스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인지… 차라리 세상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묻어두고 싶다. ‘가엾은 알렉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그 시점에 알렉스를 그냥 살아가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까미유 같은 형사가 있었기에 알렉스는 자신을 덜 슬프게 여기지 않을까? 정작 까미유 자신도 깊은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까닭에 알렉스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에서 예심판사의 말이 까미유의 생각을 정리해 주는 듯 하다. “진실이라, 진실이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반장님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표지에 있는 처음엔 섹시하게 보였던 그녀의 뒷모습이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 던지고, 이제는 적어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보인다. 콧노래까지 묻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곧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나비처럼 날아서 아지랑이처럼 아슴하게… 처음 생각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책은 잘 넘어갔고, 번역본임에도 문장이 매끄러워서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작가가 친절하지 않은 탓에 앞의 내용들만으로는 스토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도록 해 놨기에 더더욱 끝을 향해 책을 넘길 수 박에 없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이 낯선 작가의 세 번째 책이라고 하니 다른 책들도 많이 궁금해져 버렸다. 작가가 똑똑하다. 앞으로 알렉스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 아픔으로 기억될 것 같다.
|
|
무더운 여름밤을 지내기에 딱 좋은 소설은 뭐니뭐니해도 추리소설인 듯 하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즐겨읽는다. 최근 북유럽의 추리소설들이 많이 등장해서 또 다른 재미를 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프랑스의, 키 145cm, 예리한 지성과 뛰어난 감성. 비틀린 독설가에 남다른 정의감의 소유자인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을 만나게 되었다. 작가인 피에르 르메트르의 카미유 형사반장의 3부작 중 두번째 작품인 <알렉스> 나탈리,레아,줄리아,엠마, 나탈리... 빨강머리, 갈색머리... 마치 카멜레온과 같이 묘사되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수식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고 슬픈 살인자... 강렬한 표지와 함께 그녀를 묘사하고 있는 이 문장은 그녀의 행적을 어서 쫒아봐야겠다는 조바심을 갖게 한다.
이야기는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일단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뒤에 숨어있는 범인, 음모, 사연등이 전개된다. 이 이야기도 커다른 틀은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다른 소설과 좀 차별되는 느낌이다.. 두꺼운 책을 덮어야 이 책의 진짜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알게 되니 말이다.
파리의 한 복판에서 한 남자에게 납치당하는 한 여인... 그렇게 사건은 발생한다. 1부는 납치된 알렉스와 형사반장 카이유의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납치된 후 겪게되는 알렉스의 고통, 어떻게든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한 그녀의 처절한 사투..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자신을 파먹기 위해 다가오는 쥐들과 기싸움을 벌이며 그녀는 결국 그곳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아내 이렌을 납치사건으로 잃은 카이유.. 그래서 그는 이런 납치사건은 절대로 맡고 싶지 않다. 과거의 고통과 함께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점점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가게 된는 그.. 결국 범인 알아내지만 그 범인은 도주 중 자살을 하고 알렉스가 있는 장소는 오리무중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범행현장.. 그러나 그곳에는 부서진 새장과 쥐들의 시체만 있을 뿐 납치된 여인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행적을 쫒던 중 그녀 주변의 남자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수사는 다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2부는 나탈리, 레아, 줄리아, 엠마등의 이름으로 행세하며 무작위로 남자들을 살해하는 살인자 알렉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1부에서 "왜 하필 나예요?"라고 납치범에게 묻는 알렉스... 2부의 살인 장면들을 보면서 "왜나면.. 너니까.."라고 말하던 납치범의 대답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자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살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묻지마 살인을 방불케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연결고리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원인도 있어보이지 않았다. 방법 또한 대담하고 계획적이며 치밀하다.. 아름답고 슬픈 살인자의 모습이 아니라 잔인한 살인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살인... 자신을 똑 같은 방법으로 죽이는 ..을 하고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살아있는 동안의 진짜 이름은 알렉스였다.
이렇듯 사건이 마무리가 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3부에 있었다. 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살인자가 되었는지.. 왜 그 남자들이 알렉스의 살인의 제물이 되었는지.. 3부를 처음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그러한 일련의 행동에 대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오빠가 등장을 하면서는 조금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뒤의 추악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가슴아픈 이야기였다. 유럽소설에서 많은 소재로 등장하는 소아 성폭행문제..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 순간도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누려보지 못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해 버린 알렉스 그녀의 복수가 물론 정당화되서는 안 되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밖에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그녀의 행동은...이 이야기의 가장 근원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그녀의 선택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의 예심판사의 이야기 "진실이라. 진실이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반장님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 그렇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비로소 이 책의 진상을 알게 되고 슬프고 아름다운 살인자 알렉스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추리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뭔가 정리가 되고 제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책의 경우는 책을 덮은 후 먹먹함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알렉스와 함께 그녀의 아픔과 함께 보낸 비오는 일요일 밤이었다..
단신의 카미유 형사반장과 부유하고 귀족같은 미남 형사 루이 루이와는 대조를 이루는 외모와 철저한 구두쇠이지만 일 만큼은 열성적인 아르망.. 카미유 형사 반장의 3부작. 첫번째 작품이 <세밀한 작업>이었고 이제 마지막 3부작이 나올 차례라고 한다. 어찌보면 부조화속의 조화와 같은 한 팀이지만 그들의 활약이 또 기대가 된다
|
|
알렉스. 그녀의 이름은 알렉스다. 나탈리, 레아, 줄리아... 금발머리, 빨강머리, 갈색머리.. 이름도 다양하고 머리색도 다양하다. 수많은 이름과 상황마다 변하는 외양.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어느 날 밤 파리 한복판에서 남자에게 납치당한다. 경찰과 대치하던 납치범은 다리 밑으로 떨어져 자살을 하고, 알렉스는 혼자 남겨진다. 경찰이 알렉스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급습하지만 알렉스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연이어 이어지는 끔찍한 죽음. 죽음의 공통점은 가해자가 목구멍에 아황산을 부었다는 사실... 그녀에게는 어떤 비밀이,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책 표지가 매혹적이다. 빨간색 드레스도 그렇고 아름다운 여자의 뒤태도 그렇고... 이야기도 그 표지만큼 매혹적이고 잔인하고... 슬프다. 살인은 분명.. 나쁘다. 누가 누구를 해치고 아프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들을 보면 화가 나고,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 한 켠이 묵찍해진다.
어린 시절 내 편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다. 언니와 싸워도, 오빠와 싸워도 심지어 동생과 싸워도 부모님은 늘 제일 말썽은 “너”라 지적하셨고, 어떻게 매번 이기려고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내가 바랬 던 것은 딱 하나다. 언니나 오빠 혹은 동생과 싸우는 것에 대한 잘잘못을 가려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네가 많이 화가 났구나. 그래서 이렇게 큰소리 낸 거구나.”라고 하는 내 마음의 이해였다. 윽박지르지 않고 그냥 조용히 안아주었다면 싸움닭(?)이 되지 않았을 텐데... 늘 모든 탓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현실이 당시엔 많이 아팠다. 아니 내편(?)이 없다는 서운함이 눈물 나게 서러운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그것마저도 추억(?)일 수 있지만 나이가 먹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서운한 맘이 남는다.
그런 사소한 일들도 아픔이 되고, 조금의 앙금이 남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어떻게 어른이 될 때까지 견디고 참아 왔을까? 마음의 상처와 서걱거림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 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이 일어나는 원인을 보면 죄지은 사람들이 버젓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게 문제란 생각을 해 봤다. 누군가의 눈에 눈물 나게 하고 아픔을 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웃고 행복해 한다. 심지어 점잖은 미소로 사람들을 배려한다. 그걸 보는 알렉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세상 어디에도 자신을 지켜줄 작은 울타리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복수”라는 단어겠지?
사건의 말미로 갈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고 화가 났다. 얼마 전에 읽은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가정이 가장 위험한 곳인 사람도 존재한다는 말” 이 책에도 적용 가능한 말이다. 이젠 가정이란 곳이 편안하고 따스한 곳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가정이 이렇게 무너진 걸까? 책 표지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고 슬픈 살인자라는 말이 있다. 읽으면서... 그 말에 공감했다. 그녀가 짊어진 상처가 너무 아파 마음이 먹먹했다. 재미있고 슬프게 읽었다.
다만.. 카미유 반장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몰입을 방해했다. 나는 한 개인의 사생활 보다는 사건 자체 혹은 사건을 맞이한 인물의 심리 상태 변화에 초점 맞추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표지만큼... 매혹적인 소설이다. |
|
인물 캐릭터가 다소 코믹하고 독특하다. 탐정소설 사상 유래 없는 최단신 145cm의 기럭지를 소유한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의 등장이 그것인데, 성장발육이 남달리 부진한 배경에는 모친의 열정적인 화가 인생에 있어 아우라처럼 스며든 끽연이 한몫했다는 점과 함께 그림이라는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까탈과 괴팍함으로 무장한 비폭력주의자인 카미유를 중심으로 부유함을 지녀 세련된 외모와 매너, 해박한 지성과 조각 같은 디테일로 주위를 빛나게 하는 루이 형사와 편집광적 수전노 근성에 짓눌려 살면서 지칠 줄 모르는 일벌레 아르망 형사가 파리 경시청 강력반을 주도한다. 또한, 130kg에 육박하는 체중만큼이나 해박하고 이해심 넓은 르 구엔 서장과, 거만하지만 정의를 사랑하는 예심판사 비다르의 언변이 인간미와 위트를 더한다.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주름잡는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를 뛰어넘는 유럽 사회파 스릴러의 거장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는, 사회 주변의 이슈에 천착해 약자에 대한 일상화된 폭력을 다루고 있으며, 절망적인 억압 속에서 삼십 년의 세월을 견뎌낸 한 여인의 이야기를 거시적인 안목으로 파헤치고 있다. 치명적인 팔색조 매력을 과시하는 알렉스는 다양한 이름과 아름다움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끄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에서는 알렉스와 카미유의 시선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한 남성으로부터 알렉스가 납치와 감금을 당하고 탈출하는 과정 이후로 끔찍한 살인현장이 목격된다. 마지막 3부에서는 카미유 베르호벤 수사팀이 알렉스의 주변인물을 심문하면서 뒤틀린 욕망의 희생양이 된 알렉스의 과거 속에 폭력적인 보호자가 배후로 드러난다.
산다는 건 크고 작은 의식들을 끊임없이 거행하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의식의 집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P298
두 주인공은 범죄자 또는 희생자와 형사라는 전혀 상반된 관계로 출발하지만, 가족으로 인해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행과 퇴행을 거듭하는 미성숙한 감정 상태와 방어기제가 드리워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모친에 대한 애증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내면의 멍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카미유와 유년 시절 자기표현의 상징성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간직했던 알렉스에게 가족의 정체성은 자기정체성까지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거대한 크기로 발화된다. 1부와 2부에서는 그녀가 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살인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나 랜덤하게 걸려드는 사내들에게 증오심을 발산하는 광기로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폭력과 방치 속에 휘둘려가며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받았다. 참혹한 고통과 비애 속에서 삼십 년의 시간을 살아낸 그녀가 처음으로 꾸었던 바람은 냉혹한 현실에서 처참히 와해되고 만다. 그 꿈을 무너뜨린 자에게 진실이 아닌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노라. |
|
내 이름은 알렉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살인자.... 등이 훤히 보이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과 함께 표지에 써 있는 글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끈다. 그녀는 왜 슬픈 살인자일까? 끝에 가서 그녀가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인해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껴보지 못했던 알렉스는 어느날 우연히 가발을 쓰면서 자신이 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기분이 든다. 가발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비로써 아름답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다니던 직장에도 사표를 제출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그녀는 맘껏 하루를 즐기다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왜 그가 자신을 따라다닐까? 의문을 잠시 접어두고 집으로 향하던 중 누군가가 의해 폭행을 당하고 납치가 된다. 그녀를 납치 한 남자는 그녀를 알몸으로 만든 후에 새장 속에 넣어 매달아두고 사진을 찍는 둥 그녀를 말라 죽게 만들 생각이라고 말하며 떠나 버린다.
한 여자가 납치 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제보로 인해서 수사팀이 짜여진다. 145cm의 신체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강력반 형사 반장인 카미유는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아내가 임신 8개월에 납치되어 납치범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 그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으로 남아 있어 한동안 납치사건을 맡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전직동료 루이와 아르망과 함께 납치 된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한다.
알렉스는 자신을 납치한 남자가 누구인지 그가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이유도 모르겠다. 심한 갈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여기에 자신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배고픈 쥐들의 존재까지.... 알렉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를 느끼며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카미유는 카미유대로 납치된 여인 누구인지 그녀를 납치 한 사람이 누구인지 수사를 벌이던 중 여자를 납치한 사람의 신원을 파악하고 그를 쫓는 와중에 그만 납치범은 스스로 자살을 하고 만다. 이제 납치된 여자의 행방은 더 오리무중이다. 납치범이 찍은 사진 속 납치된 여인의 모습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하지만 그녀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난항을 겪게 된다. 이윽고 납치 된 여인의 소재를 확보하고 달려가지만 새장 속 여인은 사라졌다. 그녀가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일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와중에 그녀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사건과 맞닥드리게 되고 사라진 여인이 무서운 살인자라는 인식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여자를 잡기 위한 수사는 어려움에 빠지는데....
스토리를 이끌고 있는 화자는 두 사람이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살인자 알렉스와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자식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했던 어머니를 둔 강력반 반장 카미유.... 여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교차된 시선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또한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두 사람 다 아픈 과거가 있다. 카미유의 들어나 있는 아픈 과거 말고 사건의 본질이며 알렉스가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숨겨진 과거는 이야기의 가장 큰 핵심을 이루고 있다.
짜임새 있고 흡입력 강한 스토리는 책의 두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다. 중간부에 살짝 느슨한 면이 조금 있지만 그건 한번쯤 숨고르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자의 작품이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이후 두번째인데 역시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가다.
올 해 들어 읽은 스릴러 소설 중에 내가 뽑은 매력적인 작품 세 작품 안에 드는 책이라고 생각을 했다. 145cm의 단신 강력반 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이란 이름으로 저자는 3편의 시리즈물을 계획했다고 한다. '알렉스'는 두번째 이야기고 첫번째는 '세밀한 작업'이고 마지막 3편은 이제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첫번째도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거 같고 3편 역시 나오면 바로 국내에도 출간이 되어 읽어보고 싶다. |
|
55세의 나이에 뒤늦게 데뷔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는 정말 조금의 과장도 거짓도 없이 올 여름의 발견작이다
옮긴이의 말을 빼고 장장 528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을 그야말로 열흘 굶은 사람이 밥을 삼키듯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 소설은 정말 두 가지가 매력적이다. 첫째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마구 휘몰아쳐가는 팔색조처럼 변화무상한 플롯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지만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해가는지는 예측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불현듯이 전혀 다른 맥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희생자인가 싶으면 가해자이고 가해지인가 싶으면 또 피해자이다. 때문에 연민을 느끼기가 무섭게 분노를 느끼고 또 분노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안타까움에 마구 젖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배설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속에서 그저 따라잡기에 급급할 뿐이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는 객관화가 가능한 음미의 여유가 있지만 '알렉스'에게는 보여지는 이야기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저 소화시키기에 급급할 뿐이다. 우리는 '이 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여유조차 없다. 그저 만날 뿐이다. 이해불가능한 대상 그대로 대면할 뿐이다. 마치 작품속에서 알렉스와 같이 있자마자 그저 욕정말고는 다른 건 느낄 수 없었던 펠릭스와도 같다. 알렉스란 타자는 날 '이해하겠어? 못 이해하겠어?'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물을 뿐이다. '여기서 끝까지 볼거야? 아님, 다른 데로 갈거야?'
W A R N I N G ! ----------------------------------------------------
아래 부터 스포일러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이왕이면 소설을 읽고 아래를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소설이 초반부터 반전이 펼쳐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포일러를 유출시킬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당신은 이 이야기에 동참할 것인가? 아님, 내버려두고 다른 곳을 갈 것인가?
'알렉스'의 건너편에서 작가 르메트르는 내게 이렇게 물어온다. 이 말은 내게 이 작품은 그저 재미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것은 내게 저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이 예수 이야기를 두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불트만은 예수 이야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나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칸트를 빌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중요하냐고. 예수의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전설이냐가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한다는 데 있다. 윤리적 결단말이다. 즉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본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나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 하고 그냥 하던 대로 살 것인가?' 이것이다. 예수가 진정 실존한다면 바로 우리의 결단 위에서이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기억과 인상이 뒤범벅이 된 말이니만큼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자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뉘앙스의 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난 이 책에서 불트만의 목소리를 빌린 르메트르의 말을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바로 이 공감의 여부가 소설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내게 그 두 번째의 매력을 가진다. 즉, 프랑스의 대표적인 형사 '매그레에로 복귀'가 가져다 주는 매력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정말 매그레적이다. 당신이 매그레를 읽어보았다면 이 소설의 결말을 읽을 때 당신 역시 떠올릴 것이다. 도대체 정말 정의로운 것은 무엇일까? 그냥 법대로 하는 게 정의로운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매그레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매그레가 다른 탐정이나 형사들과 구별되는 그 만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다. 그는 법보다 사람을 더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그 사람에 따라 적용해야 할 법도 적용하지 않고 적용하지 않아야 되는 법도 적용한다. 이 소설의 형사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카미유도 오로지 사람을 위해 적용할 수 없었던 법을 사실은 교묘한 수법을 쓰면서까지 과감히 적용해버린다. 문제는 그 사람이 연쇄 살인마라는 점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살인마에게 충분히 동정이 갈 만한 사연이 있었고 살인 역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그 전에 펼쳐진 엽기적인 살인 모습은 쉽게 그에게로 마음 문을 열지 못하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카미유는 그러한 행위를 취하는 것이다. 공감한다면 이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어리둥절한 가운데 페이지를 넘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이 소설이 압도적인 재미와 그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카미유 시리즈 첫 권부터 제대로 소개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가치란 카미유와 알렉스가 서로 형사와 연쇄 살인마의 관계라 하더라도 사실은 동병상련의 관계였다는 것에서 생겨나는데 그 관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첫 권부터 읽어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소설도 어느 정도 풀어놓고 있기는 하다. 카미유와 알렉스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카미유가 결국 알렉스의 삶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건 거기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카미유는 유명한 여류화가이기도 한 자신의 어머니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지 않으려 든다. 사람들은 그런 카미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145CM의 단구이기도 하다. 그 작은 키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편입되지 못하고 경계 위에 서 있게 된다. 아니 그 작은 키가 늘 뇌리에 새겨져 있어 카미유 스스로 경계 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한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하지만 그런 생활은 자신에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건 무엇보다도 어머니 때문이다.
우선 그는 키가 14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의자에 앉기만 하면 두 다리가 지면에서 20센티미터 이상 떠올라 대롱거리게 되는 단구의 사내이다. 이러한 그의 신체 조건은 오로지 자신의 그림에만 일생을 마친 모친이 임신 중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댄 데서 비롯된 영양 장애성 발육부진의 결과이다. (P. 532.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렇게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 일 보다 자신의 일이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카미유는 늘 그림만 그리는 어머니만 보았다. 한 번도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카미유는 자신의 이 고독, 이 홀로 있음이 어린 시절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기울여주지 않았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조차도 자기 일에 빠져 있는데 하물며 그 누가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겠는가!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그녀의 그림을 남김없이 처분함으로써 표현하려 한다.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할 가정에서 조차 내버려져 있음. 카미유가 알렉스의 삶에서 보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 역시 자기처럼 버려진 존재였다는 것. 그래서 카미유는 소문난 민완형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 소설에서만큼은 무능하게 비쳐진다. 카미유가 싫어하는 예심판사는 대놓고 그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과연 그 자리에 적합한지 의심스럽다라고까지 말한다. 전작과는 다른 그의 머뭇거림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알렉스와 자기와의 비슷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카미유와 알렉스 사이의 유사성은 르메트르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알렉스'의 삶을 읽으면서 떠올린 소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였다.'
알렉스와 보바리(그리고 카미유)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녀들이 속한 가정 자체가 그녀들을 가두는 새장이요 억죄는 굴레라는 것이다. 보바리와 알렉스는 모두 고통만 가중시킬 뿐인 가정이라는 감옥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 자유로움을 그녀들은 책 읽기를 통해 표현한다. 보바리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듯이 알렉스 역시 정말 많은 책을 읽는다. 하지만 결국 보바리는 완전한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로움을 구하기 위해 저질렀던 불륜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그녀를 파멸시켜 버린다. 알렉스 역시 마찬가지다. 보바리의 불륜과 알렉스의 살인은 모두 그 원죄가 되는 대상을 지워버리려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르메트르는 교묘하게도 알렉스의 살인이 먼저 대상을 유혹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이러한 공통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게 보바리의 불륜과 마찬가지였던 알렉스의 살인 역시 결국 그녀 자신을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방아쇠가 된다.
보바리는 말하자면 알렉스와 카미유의 원본과도 같은 존재다. 개인적으로 바로 여기에 르메트르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주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보바리를 읽어보면 알게되겠지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히스테리의 여자다. 그는 조금도 현실에 안주할 줄을 모른다. 늘 책을 통해 발견해낸 세상을 자기가 몸소 직접 느껴보고자 한다. 더 넓고 더 높은 곳을 언제나 꿈꾸기에 그녀는 현실에서 늘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런데 이 히스테리는 알렉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녀는 살인을 하면서도 늘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에 젖는다. 그러니까 그녀는 전형적인 사이코 패스는 아니다. 그녀는 늘 외로워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한다. 술을 마시면 그녀는 발작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 이건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관계를 맺는데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서 탐문중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이 필요할 때는 동료 형사가 도맡는다. 그는 악담과 빈정거림 그리고 위협의 명수이다. 그건 일종의 히스테리적 반응이다. 자신의 모친에 대해서 부리는 성질 또한 히스테리의 일종이지 않은가. 보바리와 알렉스 그리고 카미유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 히스테리이다.
르메트르는 고의적으로 이 히스테리를 주요한 정서로 부각시킨다.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살인은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히스테리의 징후와 또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왜 르메트르는 히스테리를 가져오는 것인가?
그건 르메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이 히스테리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했었다. 히스테리는 무의식(이 무의식은(특히 라캉에게 있어) 그야말로 '타자' 자체를 의미한다.)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무의식은 도착증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착은 언제나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을 구축하는 태도인 반면에 히스테리는 그것을 전복시키며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히스테리는 굳건한 체제를 아래에서 부터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규범화된 사회에 지속적인 생채기를 일으키며 정상성이라는 것에 계속 "정말?"이라며 의혹을 제기한다. 히스테리란 현실이라는 것이 교묘한 위장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하며 그렇게 틈집을 내고 헤집어서 속에 감추인 이면을 노출시킨다. 결정적으로 히스테리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조우를 가능케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르메트르는 소설 '알렉스'에게 '마담 보바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히스테리를 전면적으로 가져온 것이다. 카미유와 알렉스에게 고통만을 안겼던 지배적이고 정상적인 사회의 표본과 같은 '가정'을 뒤흔들기 위해. 바로 그 '가정'이 카미유의 엄마가 그랬고, 알렉스의 가족들이 그랬던 것 처럼 도착증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밝혀 결국 타자를 돌아보지 않음이 이 모든 비극을 가져온 이유임을 독자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듯 카미유는 정상적인 사회의 견지에서 보자면 예외적인 방법으로 최종 해결을 가져온다. 그러고보면 알렉스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도 절대적 타자를 소설 속으로 가져오려는 르메트르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알렉스는 엔터테인먼트로도 더없이 훌륭하지만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마담 보바리'가 근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을 가져왔듯이 '알렉스'는 지금 현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들을 가져온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더없는 패권적 지위를 누리며 지금까지 군림해온 자본주의가 침몰하는 타이타닉 처럼 좌초되고 있는 요즘 자본주의가 가장 당연시 여겼던 것들에게 차례로 히스테리적 경련을 선사하여 굳건한 포장을 허물고 그 이면의 속내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알렉스'는 보다 징후적이다. 2011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유로 위기가 극심해지고 여기저기서 이민자들의 폭동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일어나던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알렉스'의 살인은 어쩌면 그 과정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말에서 드러나는 진짜 동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도 그렇고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도 그렇고 '흔들기'가 시작되고 있다. 네델란드와 프랑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출간된 소설들이 나란히 흔들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이 소설들이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그토록 많은 대중들의 호응이 그들의 무의식적 바람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어쩌면 이후로 터져나오게 될 거대한 흐름의 첫 표출인 것은 아닐까? 어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첫 태동과도 같은 작품은 아닐까? 내게는 이게 보다 더 흥미롭게 보인다. 결국 롤링 스톤즈의 노래 가사처럼 시간이 가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다.
|
|
너무도 아름답고 매혹적이어서 뭇 남성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알렉스, 그래서 어린시절 이부 오빠로부터 밤마다 성적학대를 당해야했고 희생양이 되어야했던 알렉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살인마가 되어버린 알렉스를 어떻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자신들이 찾는 여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경찰들의 오리무중 수사가 참 아이러니하고 알렉스와 강력반 형사 카미유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가 되어 이야기는 더욱 긴장감이 고조된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급기야 쥐들로부터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납치 사건을 추적하던 경찰의 끈질긴 추적끝에 범인은 밝혀지지만 범인이 죽어버려 납치된 여자의 정체나 납치된 장소도 알지 못하게 된다. 그 순간 알렉스는 기발한 방법으로 새장속에서 탈출해 나가고 그 뒤를 이어 시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알렉스를 찾아내지만 결국엔 놓치고 만다. 한여자의 납치를 신고 받아 출동한 경찰은 키가 145센티 단신의 강력반 형사 카미유! 그는 자신의 아내를 몇해전 불의의 납치사건으로 잃고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는데 꽤나 힘이 들어 이 사건을 맡지 않으려 하지만 세상은 그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를 단신으로 세상에 내어 놓은 유명화가인 엄마에 대한 단상과 납치되어 죽은 아내의 참상에 괴로워하는 카미유의 내면과 더불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1부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엔 2부엔 알렉스의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전개가 될거라 예상은 하지만 스스로 공포와 위기의 상황속에서 탈출할 정도로 여전사와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알렉스가 예상과는 달리 남자를 유혹해 남자들의 두개골을 망치나 각종 도구로 혼절시키고 입속에 아황산을 들이붓는 끔찍한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살인마의 모습으로 등장해 당혹스럽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알렉스가 아닌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모습으로 사건의 흔적을 남기게 되고 그 흔적을 따라 카미유와 다시 뭉친 그의 동료들은 항상 한발 늦게 그녀의 흔적을 찾게 된다. 알렉스를 납치하고 새장속에 가두었던 그는 다름 아닌 알렉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한남자의 아버지다. 한곳에 머무르지도 않고 항상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알렉스를 그는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 경찰 또한 그런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그녀를 뒤쫓다가 드디어 만나게 되지만 그 또한 한발 늦는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파악한 경찰이 그녀의 엄마와 오빠를 만나 심문하는 과정이 3부에 펼쳐진다. 너무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그녀의 행위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지만 3부에서 밝혀지는 그녀의 과거는 왜 그녀가 그토록 잔인한 살인마가 되어야 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카미유 반장을 비롯한 경찰들은 그녀의 살인 행각을 통해 그녀의 살인 동기를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마침내 알렉스의 시신 부검과 유품인 일기장을 통해 열살때부터 오빠에게 강간을 당했으며 성적학대와 폭행도 모자라 더우기 여자의 상징인 자궁마저 파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3부의 이야기는 정말 읽어나가기가 너무너무 끔찍해서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강한 부정을 하게 되는데 그녀를 그렇게 만들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없는 그녀의 오빠를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범인으로 추리하는 심문 과정을 보며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는 당연히 알렉스와 법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데 한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보통은 물적 증거 없이 범인을 처벌할 수 없는게 사실이지만 이 소설은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달까? 사실 2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분명 알렉스는 자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3부의 카미유는 알렉스의 오빠를 살인자로 몰아가고 있으며 그런줄 뻔히 알면서도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그러도록 내버려 두게 만든다. 비록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살인마였던 알렉스지만 아무도 처벌해주지 않는 자들을 스스로 벌하고 또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원죄가 되는 그녀의 오빠까지 물귀신처럼 물고 들어가는듯한 느낌이다. 3부작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아무래도 너무 내용이 길다보니 마지막엔 다소 좀 느슨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새롭게 다가왔으며 너무도 잔인한 복수의 화신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알렉스의 일생이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래도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 마지막 결말은 참 맘에 든다.
|
|
내 이름은 알렉스... 매혹적이 표지와 매력적인 두께의 책 [알렉스]를 받아들고 기쁨에 젖는것도 잠시 눈코뜰새없이 바쁜 일정에 알렉스와 만나는 시간은 자꾸만 미뤄지고 있었다. 다른소설들과 달리 추리소설은 한번 흐름이 끊기면 긴장감도 속도감도 덜하다는것을 알기에 될수있으면 한번에 제대로 알렉스와 만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였는지도 모른다.
왜 하필 나예요? 왜냐면 너니까....
사람들은 예기치않은 불행과 맞닥뜨렸을때 공통적으로 내뱉은 말이 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런데 이 습관처럼 나오던 말을 비틀어버린 드라마가 있었다. 노희경님의 [빠담빠담]에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살인누명을 쓰고 복역하다 나온 남주 강칠이 이번에는 간이식을 받지못하면 죽을병에 걸렸다는것을 알고 "왜 하필 나에게..." 라는 대사를 읊는다. 그때 그전에는 당연시되던 그질문이 갑자기 힘을 잃는다. "왜 하필 너냐고... 왜 너면 안되는건데..." 그 질문에 당면한 모든 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불행이 나를 피해가기를 바란다. 왜 하필 나여야 하는냐는 질문에는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속뜻이 내포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알렉스가 위기에 처했을때 가해자에게 한 질문 "왜 하필 나예요?""왜냐면 너니까"에는 책을 끝까지 읽기전에는 알지못할 복선들이 깔려있는셈이다. 가해자는 무작위로 알렉스를 선택한것이 아니라 알렉스였기에 그녀를 납치해서 그렇게 끔찍한 고통속에 그녀 스스로가 무너지길 바란것이다.
알렉스는 가발을 보는것을 즐긴다. 작은 변화만으로 상당한 스타일의 차이를 불러오는것처럼 느껴지기때문이지만 그자리를 이탈한후에 구입한 가발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조잡해보인다.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한번쯤 뒤돌아보게 만들정도의 매력적인 아가씨 알렉스의 뒤를 쫓는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을 알렉스가 알아차렸을때는 이미 늦었다. 복부에 가해지는 고통과 공포 무차별적인 폭행에 정신을 잃었던 알렉스가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알렉스는 납치범에 의해 감금되어있는 상태였다. 이책은 1부와 2부 3부로 나뉘어져있는데 각장이 표현하는 주인공이 전부 다 다르게 와닿는다. 1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잔인한 납치범에 의해 감금되어 고통을 받고있는 피해자 알렉스이다. 납치범은 새장을 만들어 알렉스를 좁은 공간에 집어넣고 공중에 매달린채 추위와 공포에 떨게만든다. 새장 바로 옆에는 작은 바구니안에 비스킷을 넣고 쥐를 유인하기까지한다. 시시각각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 알몸으로 그 극한의 공포를 느끼면서 알렉스가 보이는 행동들은 상상을 불허한다.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는것을 느끼게끔 하는 알렉스의 행동들.
납치사건이 벌어졌다.카미유는 납치사건의 해결을 위해 행동을 개시하지만 범인은커녕 피해자의 신원조차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끌수록 피해자의 생존확률은 점점 희박해질뿐인데..상부의 압력은 계속되고 간신히 납치범의 신원을 밝혔다고 생각하자 납치범은 그들을 감금장소로 안내하는대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만다. 여전히 사건은 오리무중인 가운데 간신히 감금장소를 알아내 찾았을때는 이미 피해자는 사라진뒤였다. 그리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살인사건들..
그녀가 지나가는곳마다 죽음의 냄새가 짙어진다. 그녀에게는 살인이 어느새 일상이 된듯 느껴지고 희생자와 그녀와의 어떤 연관점도 보이지않은채 그저 그녀가 피에 굶주린채 살인을 즐기고있다는 인식마저 심어준다. 여러명의 희생자들을 하나로 이어지는 어떤 연결고리조차 보여지지않은채 그저 내키는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 알렉스... 연약한 피해자에서 잔인한 살인마로 알렉스는 완벽하게 변모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알렉스의 뒤를 쫓는 카미유..
마지막까지 읽고나서 그녀가 원한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그녀의 복수는 이루어진것인가...알렉스는 그렇게 복수를 꿈꿨던것일까.. 결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복수였다고 받아들였다. 행복하지못했던 알렉스, 그리고 그녀의 삶을 엉망으로 망가뜨린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복수... 알렉스이기때문에 납치범은 그녀를 선택했지만 알렉스 또한 그럴만한 원인이 있었다. 모든것은 결국 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알렉스 그녀의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 |
|
알렉스라는 제목이 여자이름이라는 건 책소개만 봐도 알겠다. 추리소설이고 유럽 작가고 뭐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스토리가 있긴 한데(미드,일드 가리지 않고 범죄/추리를 많이 봐서 추리가 그렇게 확 땡기지도 않는 편;;), 일단 나는 시각적 효과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기엔 책도 좋고;;). 그걸로 땡치면 도스토옙스키도 톨스토이도 푸코도 벤야민도 스물 다섯 살 이전에 다 읽었다고 봐야 한다. 누가 재밌다고 하면 재밌구나, 누가 재미 없다고 하면 진짜 재미 없을까, 하며 관심갖는 게 독서인의 왠지모를 의지. 남들 좋다는 건 좋다고 해봐야 보편적 취향반영의 또다른 예가 될 뿐이고, 좋아하는 건 취향이 변하거나 달라지는 순간 아니 조금 더 알게되는 순간 확 바뀔 수도 있으니 'favorite'이란 단어를 믿지 않는 편이다. 내가 좋다고 할 때는 그것'만' 좋다는 뜻이 아니니까. 여주인공 알렉스는 인생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월급 뻔한 요양원 간호사(였)다. 간호사라는 직업이 크게 상관없지만 간호사여서 가능한 영역의 놀라운 세계를 제법 그려내고 있는데, 문제의 그 날에는 큰맘먹고 사려고 들어간 가발가게에서 '어반 쇼크'라는 이름이 붙은 모델의 가발을 만지작거리다 쉰 살 정도로 보이는 어떤 남자의 끈덕진 시선을 느끼며 의아해한다.
사랑은 글렀지만, 상관없다. 혼자서 끝낼 준비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그런 고민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것 같다. 이처럼 고독하게 지내지만, 그녀는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가능한 한 일상의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 (인용)
스스로에게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는 선물을 주고, 레스토랑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어떤 남자의 집요한 눈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길 여유도 있으며, 디저트 커피를 마시며 묘하게 계산된 타협의 제스처(무심하게 스쳐가는 단 한 번의 눈길)를 흘릴 줄도 아는 여자다. 혼자란 게 익숙한 여자. 혼자인 게 더이상 어색하지 않은 여자. 그리고 잠시 남자와의 밤을 생각해보지만 곧 고개를 흔들고 만다. 방브스 항구 인근의 동네에 거주한 지 석 달째, 그녀에게 이사는 기분전환이다(이건 나랑 같네;;). 레스토랑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막차 버스에도 굴하지 않고 좀 더 걷기로 결심한 채 발을 뗐는데 의도치 않은 기습적 주먹질과 무자비한 폭력 끝에 화물차의 짐칸 바닥에 던져진다. 왜?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왜? 왜 하필이면 나냐고. 알렉스도 그랬다.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일은 실제 상상에 맡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별로 유쾌할 게 없으니까. 오늘은 친구가 약초냄새를 맡으라며 접근해 마약으로 사람을 기절시킨 채 납치해 장기매매시장에 넘기는 중국에서 온 신종범죄가 이미 발생했으니 조심하라는 카톡을 보내주었다. 가는 날까지 내 장기는 내가 관리하겠으니 제발 이런 엄한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건 원빈 아저씨와 새론이 이후로 마감도장 찍을랬는데 점점 영화가 현실이 되고 있으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여자친구가 놀 거 다 놀고 새벽 두 시에 모시러 오라고 하면 어쩔 거냐는 글에 그래도 '세상이 위험하니까' 당연히 모셔다줘야 한다는 대답을 하는 댓글이 좀 더 많은 걸 보고 그래도 세상에는 괜찮은 남자들이 많구나 싶어서 뿌듯했었다. 고맙고! 물론 내 남자는 아니더라도 따뜻한 세상이 될 수도 있겠는데!
공교롭게도 예전에 보다 만 미드 <크리미널 마인즈>를 새로 시작하는데 시즌1 에피소드1에 비슷한 납치범이 나와 중고자동차 매도인을 가장하여 납치한 여자를 케이지에 넣어놓고 시간이 되면 죽이는 연쇄살인범이 <알렉스>의 범인과 비슷한 지점이 있었다. 물론 그건 소설의 놀라운 비밀과 깜짝 반전이 밝혀지기 전, 중반부쯤까지였지만.
순식간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전복시킨 후 다음 이야기로 나아간다. 납치당해 새장에 갇힌 여자는 경찰이 일주일만에 겨우 그녀의 행방을 찾아낸 순간, 나름의 다른 계획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나는 바보같이 스포를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라서(궁금하지? 궁금해? 계속 궁금해하거나 직접 읽어봐;; 이게 잘 안되는 것. 다혈질에다 성격도 급하니까;;ㅡ> 이게 그거랑 상관이 있나;;) 실제로 나는 밀당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연애든 인간관계든, 내가 미는 것 같으면 그건 그냥 미는 거;; 사이에 섬을 하나쯤 두고 싶은 건 성격인데 그게 다른 사람을 애태울 지는 몰라도;; 밀당을 못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답답해서;; 원래도 내 세계가 강해서 남 세계에 별로 관심 없어서;;ㅡ> 점점 혼자 이상한 사람 되는 것 같은데;;) 다시 돌아가서, 이 추리의 모든 해답은 바로 '알렉스'에게 있다. 그녀의 중심으로 모든 것이 흩어졌다 모였다 한다.
또 하나의 키워드라면 '아황산'인데 이 화학물질이 입에 가득찬 채 모든 구강기관이 녹아내려 죽임 당하는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고, 엄마와 일곱살 위의 오빠와의 관계 또한 원만하다고 보기 힘든데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납치강금된 알렉스는 경찰이 도착했을 때 왜 거기에 없었나. 상황은 뒤집히고 또 뒤집히고, 가해자와 피해자도 뒤집히고, 삶과 죽음에의 집착도 전복된다. 모두 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추론하거나 상상할 뿐이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추리할 수 있을 뿐. 끔찍한 살인묘사들이 돋보인다. 이런 상황설명은 추리작가로서는 굉장한 장점이지만 있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고 현실걱정한다는 점에서 유쾌하지는 않다. 뒷 얘기는 상상에 맡기는 지문 없는 지문이 단숨에 페이지의 끝을 보게 한다. 모든 것이 끔찍하지만 모든 것이 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