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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설가의 존재 증명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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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사실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핸드메이드는 손으로 만드는 일을 뜻한다. 이번에 출간된 박형서의 단편집의 제목은 『핸드메이드 픽션』이다. 굳이 소설집 제목에 ‘소설(fiction)’이란 단어를, 그리고 ‘핸드메이드’란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는 내 속도를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게 정상적인 건지 어떤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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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사실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핸드메이드는 손으로 만드는 일을 뜻한다. 이번에 출간된 박형서의 단편집의 제목은 『핸드메이드 픽션』이다. 굳이 소설집 제목에 ‘소설(fiction)’이란 단어를, 그리고 ‘핸드메이드’란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는 내 속도를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게 정상적인 건지 어떤지 알지 못했다. 정류장이 보이면 잠시 멈추었다가, 그곳에서의 날이 다했거나 다했다고 느껴지면 망설임 없이 출발했다. 그게 바로 내가 한 일이었다. 다음 정류장은 뭐지? 바로 이다음은? 나는 매일같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 무언가 생각이 나면 곧바로 거기로 덤벼들었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지어내서라도 덤벼들었다. 그러는 동안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엷어져감을, 대신 다른 것들이 그 빈자리로 속속 밀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조금 쓸쓸한 일이긴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되돌아보니 나는 내 어린 시절과는 아예 무관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었다.(「정류장」48쪽)

 

일반적으로 정류장은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상반의 이미지를 가진 두 언어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정류장」에서 ‘정류장’은 궁상과 통증이 일상인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꿈을 상징하는 언어였다. 아버지는 ‘나’의 안전함을 위해 정류장 설치라는 꿈을 실행시켰으나 그 꿈의 대가는 처연했다. 아버지는 정류장을 통해 자식인 ‘나’를 지키고자 했으나 ‘나’는 남의 자식이 되었다. 삼십 년의 세월은 ‘나’를 한 사람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죽은 아버지의 부름이었을까. 나들이를 나온 ‘나’는 잊고 있던, 자신과 무관하다고 믿었던, 과거의 흔적이 가라앉은 마을의 호수와 재회하게 된다. 아버지가 세운 정류장은 사라졌을지언정 아버지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버지들의 이야기는 이어지는지도 모른다.

 

「나무의 죽음」은 콘크리트 도로를 내는 일로 발생한 상춘리 주민(으로 알려진) 백발노인과 영면리 주민(으로 알려진) 붉은 애송이의 민원에 얽힌 다툼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의 자료들을 근거로 상대방 마을 쪽에 길을 내야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는 대부분 이해득실 때문이다. 그들이 각각의 마을 주민이라는 사실은 가짜로 판명난 상황이니 그들이 얻을 이익 따위는 없었다.

 

어쩌겠는가? 기필코 그렇게 되리라는 걸 알기에, 나무는 부질없는 원망 대신 가지를 숙이고, 뿌리를 웅크리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이파리부터 떨어뜨리며, 저에게 남은 시간을 묵묵히 헤아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무는 흩날리는 수분을 호흡해 줄기에 머금고, 부지런히 하늘에서 땅으로 햇빛을 나르고 또 다가올 계절을 위해 다음의 씨앗을 준비하는 듯 보일 테지만, 필경 그렇게 보일 테지만, 그러나 이 모든 걸 가능케 해주던 신비한 유대감은 이미 조각조각 끊어져나간 뒤여서, 거기 우두거니 서 있는 건 나무처럼 생긴 공백이거나, 캐비닛에 갇힌 미망이거나,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빚어올린 가난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나무의 죽음」83쪽)

 

두 사람은 땅의 운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남은 시간을 묵묵히 헤아리는 나무였다. 상춘(賞春)은 그들의 운명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남은 건 영면(永眠)의 운명이었다. 언젠가 죽을 운명임에도 지루하게, 혹은 불안하게 이 땅을 살아가는 누군가처럼.

 

‘나’도 ‘그/녀’도 아닌 ‘너’이다. 이인칭 대명사가 등장하는 소설은 흔치 않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의 ‘너’와 ‘너의 마을 사람들’은 ‘닭이나 돼지처럼 그저 태어나고, 밋밋하게 살아가다 조용히 늙어죽(9쪽)’는, 무료한 일상이 생활인 사람들이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너’가 마을 밖의 세상을 꿈꿨던 것은, 도망을 반복했던 것은 생존이 아닌 삶을 향한 최소한의 몸부림 혹은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눈에 이방인과 이장의 기이한 죽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활기(16쪽)’는 ‘너’의 몸부림과 같은 것으로 보였다.

 

「신의 아이들」의 시인인 ‘나’에겐 두 명의 제자가 있다. 지유는 자신을 산골 마을에 은둔케 했고 설기는 은둔생활 동안 만났다. ‘나’가 판단할 때 전자는 재능이 많은 천재였고 후자는 재능이 없음에도 필사적으로 시를 쓰는 노력파였다. 사실 설기는 다른 재능, 조각의 천재였다. ‘나’가 설기의 삶을 몰랐더라면 그의 시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시는 함축된 언어로 나를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문학으로, 쓰고 싶다고 해서 쓸 수 있는, 아무나 쓰는 문학이 아니다. 고로 한 줄의 시를 쓴 자들은 모두 훌륭한 시인이다. 그들의 시가 모두 훌륭하진 않더라도. 시는 ‘그들’을 살게 하는, 존재하게 하는 원천이었다.

 

누가 감히 이곳을 꿈꿀 것인가? 이곳은 혹독하다. 이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충분히 거칠고 사나워져야 한다. 나는 그와의 추억을 잊어버리는 쪽으로 진화했고, 그래서 이곳에 젖어들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야 말로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한 일이었다.(「갈라파고스」141쪽)

 

‘갈라파고스’는 에스파냐어로 거북이란 뜻으로 갈라파고스 신드롬은 ‘너무 오랫동안 한 가지 환경에만 순응해 살다보면 달라진 환경과 변화에 적응할 수 없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무료한 일상은 견디기 힘들지만 수시로 변화는 환경은 두렵다.「갈라파고스」의 ‘나’ 성범수와 청년처럼. 그럼에도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존재하려면 변해야 한다.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에서 ‘나’는 자신의 글이 장편소설 「부티의 천년」계획안임을 밝히고 있다. 소설이 아닌 글이 소설이 된 것이다.  ‘나’는 어떤 계기로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부티의 천년』은 어드벤처 액션 로망스로 엽기 코드가 다분하다. ‘나’는 <한분태 뼈다귀 해장국집>에 갔다가 주인아저씨 허벅지 위에 있는 시궁쥐 한 마리를 보면서 「피리 부는 사나이」의 빠진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나’의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부티였다. 부티는 천년의 여행을 하는 동안 한스 뷘팅으로 한펀팅으로 한분태로 이름을 변경한다. 달라진 환경에 변화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아니던가.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의 그들의 죽음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제로라 할 수 있다. 「갈라파고스」의 성범수는 「자정의 픽션」의 가난한 연인이 먹을 수제비의 운명에서 도망간 멸치 무리의 리더로 부활한다. 「자정의 픽션」의 탈출한 멸치 이야기도,「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의 부티와 쥐 마야의 결혼도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지만 존재가 불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있을 법한 세계인데 박형서가 그린 소설의 세계는 누가 봐도 허구인 세계이다. 「열한시 방향으로 곧게 뻗은 구 미터가량의 파란 점선」은 [금부은부의 고증]이라는 탐사를 떠나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들의 한 일은 황당함, 그 자체이다.

 

그렇게 20세기의 한국은 천 년 전 인도만큼이나 슬픈 곳이었다. 툭하면 사람들이 떼로 죽어나갔다. 가족을 읽은 한국인들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울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울음은 과격했지만 너무 짧았다. 복수를 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닐 터이나, 그럼에도 한펀팅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죽으면 그들은 엄청난 애도를 한 후에 순식간에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남겨진 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취하는 태도가 망각이라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조그마한 나라의 사람들은 가슴에 이미 너무 깊은 한이 맺혀 있어, 정상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별의 고통을 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잊어버리지 않고, 그저 수긍했다. 한국인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그를 잃은 후 평생 그리워하며 사는 것이 애초에 정해진 자신들의 운명인 것처럼 굴었다. 그러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184쪽)

 

한펀팅이 만난 세상 이야기를 보면 소설 『부티의 천년』의 세상이라고만 볼 수 없다. 「열한시 방향으로 곧게 뻗은 구 미터가량의 파란 점선」의 T교수의 행동은 자신의 치적을 위해 황당무계한 일로 피지배자를 억압하는 지배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박형서의 소설들은 언뜻 보면 황당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 세계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놀라운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박형서는 반복해서 이 소설들은 자신이 창조한, 진짜가 아닌 허구의 세계를 그린 이야기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나는 소설가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목소리로 들렸다. ‘나’는 이 땅에서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소설가는 그렇게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흥미로운 독서였다.

 

 



YES마니아 : 로얄 m****6 2012.01.0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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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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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안에 이 책 속의 작품 중 하나인 '자정의 픽션' 내용 일부가 실려 있다.(<자정의 픽션>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가의 소설집이 따로 있어 헷갈렸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라면 마땅히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구했고, 해당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른 작품들로 넘어가서는 그만...... 읽기 전까지만 해도 교과서에까지 실린 우리 작가임에도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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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안에 이 책 속의 작품 중 하나인 '자정의 픽션' 내용 일부가 실려 있다.(<자정의 픽션>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가의 소설집이 따로 있어 헷갈렸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라면 마땅히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구했고, 해당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른 작품들로 넘어가서는 그만......

 

읽기 전까지만 해도 교과서에까지 실린 우리 작가임에도 내가 몰랐다는 것에 좀 많이 미안함을 느꼈다. 이래서야 우리 문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제 몫을 못하는 게 맞는 거니까. 그래서 이 책 다 읽고 마음에 든다 싶으면 <자정의 픽션>도 구해서 봐야지 했는데, 아직 내 영역 안으로 들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고 찾아 읽기에는 취향이 다른 작가였던 셈이다.

 

상상력은 흥미로운 힘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른 성향의 상상력을 갖고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괴기스러운 상상력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낭만적인 상상력을 추구할 것이다. 나는, 나는 어느 쪽의 상상력에 마음이 쏠리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상상하는 일에 그다지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편이라고 해야 하나? 상상하는 글짓기에도 소질이 없는 것 같고. 이미 지난 일을 되새기는 기억과 관련된 상상은 더러 해 보곤 하지만, 비합리적이고 환상을 담은 상상에는 크게 매력을 못 느껴 왔던 것 같으니.(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끌리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 이 작가가 펼치는 상상의 세계에도 몇 걸음 들어섰다가 돌아 나오고 말았다. 글을 읽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유쾌해지는 기분이 안 들면 나는 더 들어서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작가를 만나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대신 현실에 충실한 내 속성을 정면으로 확인했다. 다만 이 책도 보류해 둬야 할 것 같다. 내 취향이 또 바뀔지도 모르니.    

YES마니아 : 로얄 j***6 2017.08.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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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자신를 증명하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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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처음은 언제나 설렘과 걱정이 함께 한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처음 접하는 작가의 소설은 특히 그렇다. 어떤 글을, 어떤 방식으로 들려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접하는 박형서의 소설 『핸드메이드 픽션』도 그랬다. 이 책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한다면, 흥미롭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장르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정말 재미있고, 어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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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의 처음은 언제나 설렘과 걱정이 함께 한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처음 접하는 작가의 소설은 특히 그렇다. 어떤 글을, 어떤 방식으로 들려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접하는 박형서의 소설 『핸드메이드 픽션』도 그랬다. 이 책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한다면, 흥미롭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장르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정말 재미있고, 어떤 소설은 정말 애닯고, 어떤 소설은 기상천외한, 어떤 소설은 정말 놀라웠다. 그러니까 박형서란 작가는 실로 대단한 글쟁이라 할 수 있겠다.

 

 8편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녔지만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소설은 <신의 아이들>이다. 화자인 나는 시인이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소설에는 두 명의 제자가 등장한다. 한 명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선택하는 재능을 타고난 시인 지유였고 다른 하나는 재능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지만 열심히 시를 쓰는 설기다.  자신의 재능을 아는 지유는 그로 인해 시인과 부딪히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채 어긋나고 만다. 지친 육신을 달래기 위해 찾은 시골 마을에서 만난 설기는 매일 시를 써서 시인을 찾아온다. 설기에겐 재능이 없었느니 결국엔 그 사실을 일러줘야 했다. 분노하는 설기를 보며 시인은 지유를 떠올리며 시와 재능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신은 인간에게 재능을 주면서, 까닭 모를 심술에 그 계약서를 감춰놓았다.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평생 저만의 가치를 찾아 헤매다 죽음의 경계 바로 너머에서야 비로소 신과 맺은 약속을 알아차린다. 이는 무수한 비극을, 어쩌면 사람이 감당해야 할 거의 모든 비극을 잉태한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과의 계약을 발견했다는 증거는 없다. 달변의 재능을 받았지만 도서관 사서로서의 고요한 생활에 만족할 수 있다. 사냥의 재능을 받았지만 수의사라는 직업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구나 원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노력할 자유가 있다’는 말은 하늘이 내린 재능을 찾지 못한 불행자들을 위해 고안된 위로의 수사일 것이다.’ p. 107~108

 

 제목처럼 둘은 신의 아이들였다. 지유는 신이 시를 주었고 설기는 조각 예술의 재능을 주었던 것이다. 설기는 시가 아닌 나무를 깎고 매만지는 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소설의 구절처럼 우리는 저마다 신에게 재능을 받았을까. 받았다면 어 재능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어쩌면 소설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신의 재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런 슬픈 소설도 있다. 작은 마을을 떠나 큰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으나 그 때마다 어떤 사건에 휘말려 고향에 남겨진 화자의 이야기 <너의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과 댐으로 인해 거대한 물 속으로 가라앉은 정류장과 아버지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지만 가슴 한 구석에 남은 그곳에 대한 기억으로 아파하는 <정류장>속 인물은 전혀 다르지만 낯설지 않다. 그건 마치 갈망하는 무언가를 놓쳐 절망하거나, 목적 없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내 속도를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게 정상적인건지 어떤지 알지 못했다. 정류장이 보이면 잠시 멈추었다가, 그곳에서의 날이 다했거나 다했다고 느껴지면 망설임 없이 출발했다. 그게 바로 내가 한 일이었다. 다음 정류장은 뭐지? 바로 이다음은? 나는 매일같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 무언가 생각이 나면 곧바로 거기에 덤벼들었다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지어내서라도 덤벼들었다. 그러는 동안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엷어져감을, 대신 다른 것들이 그 빈자리로 속속 밀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조금 쓸쓸한 일이긴 했다.p. 48

 

 우연하게 술자리에서 만난 청년이 들려주는 이야기 <갈라파고스>엔 성범수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나오는데, 이 이름은 가난한 연인의 일상을 담은 <자정의 픽션>에서 같은 이름의 멸치로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한분태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인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라는 소설엔 ‘부티’라는 인물이 온갖 풍파를 견뎌 전 세계를 돌고 돌아 ‘한분태’란 이름으로 남은 과정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로 시작은 곧 끝이었던 거다. 

 

 작가 박형서는 어떤 소재가 주어지든 어떤 장르를 요구하든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는 『핸드메이드 픽션』이라는 제목과 ‘여기 실린 이야기 하나하나가 전부 나다. 내 손으로 썼다.’ 란 작가의 말을 통해 스스로 증명하려 한다. 그의 증명은 당당하고 멋지다.

r*********s 2012.01.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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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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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하이브리드 소설. 이 한줄의 문구가 한눈에 쏘옥 들어왔다. 하이브리드 : 이질적인 요소가 서로 섞인 것으로 이종(異種), 혼합, 혼성, 혼혈이라는 의미. 소설에 하이브리드라... 대체 어떤 물건일까? 호기심이 나를 간질간질하게 했다.   평소 왠만하면 제목과 표지만으로 책을 고르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출판사나 인터넷 서점에서 제공하는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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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하이브리드 소설. 이 한줄의 문구가 한눈에 쏘옥 들어왔다.

하이브리드 : 이질적인 요소가 서로 섞인 것으로 이종(異種), 혼합, 혼성, 혼혈이라는 의미.

소설에 하이브리드라... 대체 어떤 물건일까? 호기심이 나를 간질간질하게 했다.

 

평소 왠만하면 제목과 표지만으로 책을 고르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출판사나 인터넷 서점에서 제공하는 책 소개를 본 후 책을 접하면 재미가 반감되는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사전정보없이 첫장을 넘기는 그 순간, 그 두근거림이 좋다. 이 책 또한 그랬다. 첫장을 넘기고 차례를 살펴보기 전까지 단편소설인것 조차 알지 못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단편소설.

짧은 이야기 속에 긴 여운을 준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포인트를 잡아내지 못하고 허우적 대다가 덮어버린 작품도 여럿 있다. 한마디로 나에게 단편소설은 음... 모 아니면 도.

자극적, 파격적, 실험적, 이런 단어들로 표현되는 작품은 나의 독서취향과는 거리가 조금 멀다. 「핸드메이드 픽션」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하이브리드, 이 단어가 평범하진 않겠다는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역시나 이 책을 읽는 동안 한번의 고비가 왔었다.

첫번째 이야기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을 읽고 두번째 이야기 <정류장>을 만나기 까지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사흘동안 꿈속엔 호숫가 한뼘 쯤 되는 깊은 구멍을 가진 운모바위가 나왔다. 한마디로 사흘동안 운모바위 악몽에 시달린 것이다. 내가 마치 그 이야기속의 "너"인것처럼.

첫번째 이야기는, 독특하지만 어렵다. 정말 어렵다.는 나의 결론

하지만, 첫번째 이야기에서 포기해버렸으면 정말 아쉬울뻔 했다. 뒤에 이어진 이야기들은 꽤나 신선하고 긴 여운을 주는 이야기들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후로 내 삶은 마치 잘 닦인 도로를 주행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등학교'라는 이름의 정류장을 거쳐 '대학으로 이동했다. 그다음은 '입대'였고 '제대'를 지나 '복학'에 가닿았다. 그러면서 정류장은 결코 홀로 서 있지 않으며 언제나 자신과 연결된 다른 정류장으로 인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세상엔 실로 무수한 정류장이 있었다. 머물렀떤 모든 정류장의 흔적이 내 삶의 여권에 남았지만, 각각의 세세한 인상까지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p.46 <정류장 中>

 

신은 인간에게 재능을 주면서, 까닭 모를 심술에 그 계약서를 감춰놓았다.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평생 저만의 가치를 찾아 헤매다 죽음의 겅계 바로 너머에서야 비로소 신과 맺은 약속을 알아차린다. 이는 무수한 비극을, 어쩌면 사람이 감당해야 할 거의 모든 비극을 잉태한다. 삶을 잇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과의 계약을 발견했다는 증거는 없다. 달변의 재능을 받았지만 도서관 사서로서의 고요한 생활에 만족할 수 있다. 사냥의 재능을 받았지만 수의사라는 직업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구나 원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노력할 자유가 있다'는 말은 하늘이 내린 재능을 찾지 못한 불행한 자들을 위해 고안된 위로의 수사일 것이다. 주어진 지리적 환경, 가정형편, 보다 흔하게는 자식의 재능을 발견했다 믿는 부모의 착각으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엉뚱한 길로 접어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분야의 진정한 천재를 발견하고 그 업적에 감동한다는 것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며 애매하기 짝이 없는 운명의 폭압을 극복하여 성취해낸 위대한 기적이다.             p.108~109 <신의 아이들 中>

 

 짧은 이야기 속의 긴 여운, 깔끔하고 담백한 이야기가 전해주는, 심장을 간지럽히는 감성적임, 때로는 해머의 충격이 전해지는 이야기. 그게 단편의 매력이 아닐까?

처음 만난 박형서 작가의 작품, "여기 실린 이야기 하나하나가 전부 나다. 내 손으로 썼다."는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은 평소 봐 왔던 타 작품들과는 다른,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그 만의 독특한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나처럼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이해력이 부족한 이에게는 마냥 어려운 이야기들일진 몰라도, 어쨌든 독특함이 가득하다.

 



m******3 2012.01.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