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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MidLife 알랜 B.치넨 / 사람들에게 사실이나 이념을 들려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영혼과 맞닿을 것이다. <하시드 속담> (15) 오래된 속담의 조언대로, 저자는 중년이라면 통과의례처럼 맞닥쳐야 하는 장애물과 시련, 치유와 기쁨들에 대한 이야기를 ‘중년을 위한 옛날 이야기’를 빌어 들려준다. 인용구처럼 자신의 메시지가 머리에만 남지 않고 가슴을 울리기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좀처럼 이 책에 몰입하지 못했다. 친절하고도 세밀한 그래픽 덕분에 눈꼽 만큼의 상상력과 해석이 필요 없는 영화와 드라마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구체적인 사실정보와 논리를 중심으로 한 실용서만 읽어온 탓일까? 극도로 상징화된 은유를 사용하는 옛 이야기는 메시지가 뭔지 한 눈에 드러나지 않아서 오히려 갑갑했다. 이야기 끝에 나오는 저자의 해석을 찾아 읽어야만 그 글의 의미가 이런 거였던가 하는 뒤늦은 이해에 도달할 때면, 굳이 옛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까지 했다. 직선적이고 빠르게 흐르는 경쟁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멀리 돌아가고 일정 시간의 사색을 통해서만 깨달음을 주는 책에 대한 소화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모양이다. 어쨌든 읽어내고 말아야겠다는 목표 하나로 마치 시험공부라도 하듯이 여러 번 다시 읽고, 줄을 치고, 베껴 적어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저자의 이야기의 10분의 1도 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이야기는 다소 우울하고 기분 좋은 않은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중년에는 젊은 시절 가졌던 높은 이상과 낭만적인 꿈들을 포기하고 냉정한 현실을 직면하면서 위아래 세대를 지원하기 위해 삶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흔을 넘긴 이 세대는 젊은 시절 가능하리라 믿었던 이상과 성취, 꿈의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타협할 것은 타협해야 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집중도 안 되는데, 기껏 말하는 내용도 김이 빠졌다. 포기할 건 포기하라니.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꿈을 놓지 않은 삶의 대가는 가혹하기까지 하다. 동화 속 주인공은 꿈을 놓지 않은 대가로 가정도 잃고 본인의 목숨도 잃는다. 이제 나이 마흔인데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다. 이 세상에 내 자취를 남겨놓은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30대나 40대의 나이에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중략) 문제는 그들이 젊었을 때의 휘황찬란한 이상을 자신들의 현재와 비교하고는 의기소침해지는 데 있다. (48) 뭔가를 이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는 나이 마흔.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초조함이 잠시도 쉴새 없이 마음을 뒤흔드는데, 저자가 하는 말은 나를 적잖이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중년이란 원래 그런 시기이다. 쓸데없는 비교와 망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 ’ 나 같은 독자의 반응을 미리 예상했을까? 저자는 꼭지글의 말미에 이런 글을 남겨두었다. 마법의 상실은 슬픈 게 아니라 발달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일 뿐이고 이를 거절할 때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상실이란 단순히 마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서 가족으로 또 다음 세대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로 변화는 것뿐이다. (61) 이상과 꿈에 대한 현실적인 타협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고 우리 세대에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인 듯 했다. 여태껏 자신의 성공과 내적 관심에만 초점을 맞춰왔던 삶에서 [후대를 위한 베풂]이라는 세대의 역할에 눈을 뜨고, 오롯이 견뎌내어야 한다는 의미인 듯 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바통을 이어받아 내 몫만큼의 계주를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내 몫을 놓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이기의 모습인가 [마법의 상실]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중년에 가지게 되는 죽음과 악에 대한 관점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중년에 이르면 죽음, 사악함과 같은 비극들과 자연스러운 대면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젊은이들이 보는 것처럼 극복해야 할 대상도 아니며, 특정 사악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님을 안다. 죽음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다. 개인이 자기 본위의 관심에만 쌓여 있는 한 죽음은 재앙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자아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개인이 사적인 관심을 초월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초월한 것에 스스로를 위임하게 된다면 – 예를 들어 자신의 아이들이나 사회적 활동 – 죽음은 덜 위협적이게 된다. 개인은 죽어야만 되나 아이들이나 사회적 이상은 계속 살아나간다. (139) 언젠가 어떤 책에서 죽음을 ‘생존 경쟁에서 다음 세대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정의한 것을 읽었을 때, 나는 내 아이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내 아이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삶의 터전을 물려주기 위해 내가 떠나야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죽음의 의미를 똑같이 부여했다. 죽음에 대한 정의와 연결 짓자 그제서야 [베풂의 세대]의 의미도 수용되었다. 더 이상 젊지도 늙지도 않은 중간지대의 우리는, 젊은이의 도전과 성취를, 노년의 아름다운 생의 마무리를 지원하는 고귀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래서였다 보다. 먼저 그 길을 가셨던 어머니 아버지들이 언제나 우리를 안쓰러워하고 짐이 되어 미안하다고 말을 그리도 반복하셨던 이유가. 이처럼 중년은 젊은 날의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자신감은 사라지고 자신의 한계와 운명의 길을 받아들이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 역시 수동적인 체념의 의미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이익과 성공의 관점을 넘어서 인류와 역사관점으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현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중년에 이르러서 주어지는 위대한 선물이기도 하다. (물론 가만히 있다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지혜를 갖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젊은 시절 단단하게 부러지지 않던 절대선과 도덕에 대한 기준을 버리고, 보다 복잡하고 모호하고 불확실하지만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운용할 수 있다.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과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오히려 한바탕의 웃음으로 치유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삶에 꼭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과 지혜가 중년의 무기로 주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본인과 자신의 환자들이 경험한, 중년에 느끼게 되는 좌절감과 두려움들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 고금을 통해 공통적으로 겪어온 자연스러운 장애물이라는 점과 그것을 어찌 해결해나가야 하는지를 <옛 이야기>들을 통해 보여주었다. 굳이 유치한 <옛 이야기>로 시작했어야 했냐는 투덜거림으로 글을 시작했지만, 단순한 이야기가 가진 위대한 힘을 인정하고 넘어가야겠다. 오랫동안 전해진 이야기란 여러 사람의 공감하는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에 또 다시 크고 넓은 공감대를 이끌 수 있다. 쉽게 기억하고 다시 전달하게 하는 파급효과 역시 이야기가 가진 위대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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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구본형 선생님의 변화경영연구소에서 무료로 운영하고 있는 연구원 프로그램의 강사(교재)로 채택되어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세계 여러곳의 중년에 관한 이야기들로 부터 그 상징성을 꺼내고 실제에 적용해 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생물학적 나이로 중년에 접어든 나에게 의미있는 책읽기 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가슴에 와닿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내안의 여성스러운 면과 그것에 대한 억압이 나만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며 수천년을 내려온 이야기들에 면면히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책의 의미를 이해를 잘 하지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또 깨닫는다. 많은 책들이 그 시기에 따라 읽혀질 수 있음을 말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젊은이를 위한 이야기와 중년을 위한 이야기와 노년의 이야기가 다를 수 밖에 없음을 말이다.
나는 이책에서 중년에 들어선 사람으로 나의 인생에 있어 현재라는 시기가 내안에 억압되어 있던 것을 풀어주고 그것을 나의 전체의 인격이라는 입장에서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시기임을 깨닫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