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읽은 부분은 딱 한사람의 재판이다. 잔 다르크. 내 집에서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 2명이 내가 잔 다르크처럼 장난친다고 한다. 그래서 잔 다르크만 세 번 읽었다!!
잔 다르크(줄여서 잔느라고 하겠다.)는 정말로 불쌍하다. 아니 지들이 지들나라 못지켜서 잔느가 대신 싸우려고 나갔는데... 특히 고놈의 왕은 진짜 배은망덕한 놈이다. 잔느가 영국의 포로가 되면, 도와줬으니까 몸값을 주든가 해서라도 구해와야 할텐데, 완전히 두손 두발 다 놓고는 잔느가 화형당해 죽자 그제서야 깨달은... 참 멍청+배은망덕+얌체+기타등등 한 왕이다.
이 잔느 이야기에서 느낀건 또 있다. 잔느가 진짜 강하긴 강했구나... 왜냐면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잔느가 같힌 감옥의 벽 두께는 12피트(약 7m정도라고 한다.)였고, 거기에다 두 손목, 발목을 쇠사슬로 묶고 5명의 경비병을 세웠다고 한다. 이정도면 영국이 얼마나 잔느를 두려워 했는지 나온다. 이렇게 막강한, 그것도 여전사를 잡았으니 그 장군(아님 다른 그외의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
잔느말고 불쌍한 사람은 또 있다. 잔느의 재판때 부당하다고 옳게 말한 이들과 3등서기관이다. 이들은 정의의 소리를 내다가 체포당하거나 다른 곳으로 쫓겨났다. 정말 무심하다. 이렇게 자신이 나쁜 쪽의 의견을 지지하는데 다른 사람이 옳은 쪽의 의견을 제시했을 때, 그사람이 20년된 친구든 30년된 친구든 그사람은 적이 되는 것이다. 뭐 다른사람은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나는 그게 이 부패된 사회의 정치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왜 이 책을 어린아이들에게 권장하지 않는 지도 알았다. 아직 좋은 세상도 모르는데 사회의 나쁜 면만 보게 될까봐라고 생각한다.
잔느에게는 제대로된 무덤도, 초상화도 없다. 무덤은 그녀가 마녀라고 해서 화형당했기 때문에 없고, 초상화는 한 서기관이 어설프게 한 손에는 흰 깃발을, 한손에는 칼을 든 걸 그린 아주아주 어설픈 스케치 뿐이다. 어떻게 나라를 구한 영웅에게 이런 대접을 할 수 있는 걸까.
나의 꿈은 심리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최초의 여자 신부님'이 되는 것이다. 나는 성당에 다니는데, 신부님은 모두 남자이다. 여자는 수녀님이 되는 거다. 근데 주위사람들이 최초로 그렇게 시도하면 위험이 뒤따른대서 접었다. 하지만 잔느를 보면서 조금의 용기를 얻었다. 잔느도 '최초'로 여전사이자 남장을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해 잔느는 죽었지만 잔느는 절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아주 간절히.★ |
|
제목에 끌려 올해 3월에 사놓긴 했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가 오늘에서야 펼쳐들었습니다. 근데 정말 재밌는 책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서 죽은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 때문에 죽은 것이며, 크산티페도 생활력강한 한가정의 어머니이지 절대로 악처만은 아닙니다. 성인의 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예수!... 재판 당시 보여준 변론에서 그의 또다른 면을 볼 수 있었고,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냥 화형 당한 마녀쯤으로만 알고있던 잔다르크는 눈물날 만큼 멋있는 인간임을 알게 해주었고, 토머스 모어는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써 신하로써 영혼을 파느니보다 육체를 파는 길을 택한 사람으로 "왕의 충직한 신하로서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신하로서 죽는다"라고 남긴 그의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직은 여기까지밖에 읽질 못했습니다. 그치만 많은 것이 부족한 저에게 지금까지 읽은 부분만으로도 정말 많은 도움을 준 책입니다.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본 상태도 좋구요, 내용에 맞는 그림도 많이 들어있어서 더 재미있었던것 같아요... [인상깊은구절] 모어는 미끄러운 단두대로 올라가면서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행관, 나는 자네를 위해서 기도하겠네. 제발 나를 안전하게 부축해 올라가 주게. 내려올 때는 나 혼자서 잘 내려올 테니까." 그리고 사형집행에 임하는 집행관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또 다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형집행 전에 머리를 쑥 내밀며 자신의 수염이 잘려지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토머스 모어가 사형당하기 전에...) |
|
정의란 무엇인가? 법은 정의로운가? 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되는가?
이뉼의 역사를 보면 수 많은 재판이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지고 있다. 그 속에는 수 많은 비극과 희극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살아나기도 하고 죽어지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자신의 정당화하기도 하고 삶을 통해 자신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 있는 재판을 통해 역사의 뒷면을 볼 수 있다. 무엇이 진실되어졌는지, 그들이 어떻게 항거했는지, 그리고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는지.
악법도 법이라고 했던 소크라테스도 살 수 있는 길은 있었다. 살고자 했다면 그는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많은 나이가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 아니다. 다만 죽음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항변하였던 것이다.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경우는 소크라테스만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잔 다르크도 그랬다.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하였고 순수하게 모든 것을 바쳤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다른의 마음을 타오르게 만든 불꽃이 되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마녀가 아닌 마녀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마녀라는 오명으로 항거도 하지 못한채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의 마녀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죽었다. 힘이 없엇던 그녀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었을까? 재판을 통해 자신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도 도와 주지 못했다. 아니 도와 줄 수 없었다. 도와주는 사람들조차 마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대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마녀 재판은 메시아적 사회운동의 기세를 꺾고 카톨릭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반 민중 속에 뿌리박힌 마녀사상과 마녀재판은 기본적으로 지배자들의 교묘한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갈릴레오 갈리레이 재판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슬픔과 고독속에서 갈리레이는 심각한 류머티즘과 습관성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시력은 상실되었지만 그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그는 1642년 1월 8일에 죽었고 1984년에서야 교황청에서 그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죄도 없는 사람이 죄인 되고 그리고 구속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필체가 아니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드레퓌스가 간첩이라고 그랬다. 그는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를 인정받아 악마도라는 곳으로 유배되어 버린다. 그러나 진짜 간첩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재판을 통해 자신의 억울함조차도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파카르 중령은 에스테라지 소령의 배속 신청서의 필적이 낯이 익었다. 그래서 시작된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못된 재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하게 된다. 12년 후에 그레퓌스에게 무죄가 선언된다. 죄가 없어도 죄를 받았던 시대에서 진실이 알려지는 시대로 변화해갔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역사가 다시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
|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쿠바 혁명의 아버지 피델 카스트로의 법정 최후 진술입니다. 그런데 이런 항변 내지는 자기 정당화를 넘어서 담담하게 악법과 그에 따른 심판결과를 받아들인 이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랬으며 토마스 모어 역시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초연하게 죽음의 길로 나아갔지요. 박원순 님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는 이렇게 시대의 재판 결과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양들을 불러내어 이를테면 복권을 시도하고 있는 책입니다. 앞에 거명한 분들은 생사를 초탈하였기에 역사적 사후 보상 따윈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애초 그런 걸 염두에 두고, 명망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영문도 모르고 억울함을 호소할 길도 찾지 못한 채 애처롭게 부르짖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도 있습니다. 중세 마녀재판에 의해 화형당한 이들이나 핵무기 비밀 누설 혐의로 간첩죄를 덮어썼던 로젠버그 부부 등이 그러합니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는 이렇게 파국적 결말이 예상됨에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킨 이들과 부지불식간 격랑에 휩쓸려 버린 사람들을 포함하여 10개의 재판 기록을 실증적 근거를 제시하며 꼼꼼하게 평설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랄 수 있는 게 책 제목에 인용된 최후 진술을 남겼던 토마스 모어의 재판 기록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테면 괘씸죄로 기소된, 감히 헨리 8세의 심기를 건드린 불충한 죄인 토마스 모어, 그는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지요. 그런데 국왕의 처분에 대처한 방식이나 법정 진술 태도를 보면 역시 대인배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결코 투박하지 않고 정중하게, 악랄하게 비꼬지 않으면서 법률 논리를 조목조목 제시하며 부드럽고 온건하게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을 알고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맙니다. 자신의 의지적 역량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기에 거스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때문이었지요. 그러면서도 참수형 집행 교도관을 오히려 위로까지 하고 있으니... 대인배, 소인배란 말이 회자되고 있는 요즘 정말 그 그릇의 크기가 짐작하기 어렵다 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역사란, 아니 인류의 진보란 자신의 신념과 대의를 위해 일신의 영달, 심지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토마스 모어 같은 이들의 노력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아니 진행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의로운 이들의 저항이 집적되어 어느 순간 시대는 임계치에 이르고 결국 모순적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 그간 역사의 경험칙이었으니까요. 근대 시민혁명도 절대군주의 권위에 대한 저항들이 누적되어, 조금씩 누수가 진행되다 어느 순간 빵하고 터졌던 것입니다. 이 책은 이런 역사적 재판에 대한 기록이자 논평입니다. 법정의 풍경을 사진이나 그림을 곁들여 현장감 있게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또 사건의 쟁점을 두고 펼쳐진 공방의 배경이나 논리도 깔끔하게 정리해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역사적 재판의 실체를, 아니 그 윤곽이나마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의미심장한 내용을 즐독했다 할까요. |
|
역사를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은 "행동의 지침을 삼기 위해서"이다.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고 후세 까지도 정의롭고 올바른 행동이었다고 인정받을 만한 일들을 나도 하기 위해서 역사를 읽는다. 투표란 형태든, 직접 공무를 담당하든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역사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도서관에 재판 판례집과 같이 놓여 있었지만 실제 내용은 한 권의 역사책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같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역사적인 재판들에 대하여 우리 역사와의 비교를 해준다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 와 일제에 침묵했던 문인들, 마녀사냥과 빨갱이 사냥, 드레퓌스와 지식인, 필리페 페펭의 제판과 친일파 처단, D.H.로렌스의 재판과 반노, 즐거운사라 같은 외설소설 문제. 단순히 읽고, 놀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의 비교를 통해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책들이다. 이런 역사를 몰랐기에 우리는 근대에 이 바보같은 재판들을 반복했던 것일까?
또 한가지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역사적 명문들의 원문을 실었다는 것이다. 많은 책들이 이 책에서 다룬 사건들, 재판들을 다루지만 대부분은 저자의 말로 바뀌어 실린다. 이 책에서는 그 원문들을 완역으로 실었고, 사진을 곁들여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그 책임을 묻는 것도 새로왔다. 정말 주옥같은 금언들을 읽었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공작과 나 사이에는 나는 오늘 죽고 공작은 내일 죽는 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같은 토머스 모어의 죽음에 초연한 금언들.
20세기의 문명 국에서 중세 마녀재판과 꼭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에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느꼈다. 인류가 중세 로마인들의 문명보다 발전된 삶을 살고 있는가? 글쎄. 어느 순간에 다시 암흑시대로 돌아갈 지도 모든다. PS.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당시 "미국인"에 대한 "미국의 피해"에 관한 "미국법정"의 불의한 재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반미시위와 항의가 있었고 더블린에서는 화염병 까지 날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피해"에 관한 "미군법정"의 불의한 재판이었음에도 우리 신문들은 반미시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어느것이 잘못된 것일까? [인상깊은구절]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흘러간다. 세상은 변하는데 판결은 영원히 바꾸지 않을 수 없다. |
|
잘못 알고 있었던 선입견을 일깨워 주는 책이었으며 순교자처럼 죽어간 사람들의 신념을 통해 대중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배우게 된 책이었다. 이 책은 먼저 소크라테스의 재판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었던 모순들, '악법도 법이다' 라고 기억하고 있던 말이 오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말을 했다. '자네는 내려진 법의 판결이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하고, 개인에 의하여 무효화되고 철회되면서도 국가가 존립하리라고 생각하나?" 이 구절을 독재정권이 이용해 법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했다고 한다. 뼈 아픈 현실이다. 재미 있었던 것은 소크라테스가 "지혜 조사 사업" 이라는 것을 벌였다는 것이고 그 사업을 통해 사람들을 비웃었으며 그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법정에 올랐고 법정에 올라서는 마치 사형을 받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배심원들을 비웃었다고 한다. 그는 죽고 싶었을까? 두번째장은 예수의 재판이다. 예수의 재판을 통해 유럽의 반 유대주의를 읽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집단적 광기에 의해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주고, 결국은 해골산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갔다. 예수가 죽기직전 예언했다고 한다. "저 모든 건물을 잘 봐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혀에 처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유대인은 예수때문에 나치독일시절 학살을 당해야 했을까? 반 유대주의가 뿌리깊게 박힌 유럽에서는 무엇인가 적대할 사람들이 필요했고 기독교로 무장된 그들에게 그 적대자는 바로 다름아닌 유대인들이 아니었을까? 역사를 통해 원인을 알게 되었다. 세번째 장은 잔다르크에 대한 재판이었다. 신의계시를 받은 성녀, 숨은 국왕을 찾아내고 프랑스의 승리를 이끌어 주었지만 국왕의 배신과 간신배들로 영국에 잡혀 결국은 마녀 재판을 받게된 잔다르크. 가슴 아팠다. 네번째 장은 토머스 모어 재판이었다. 유모와 기지와 지혜가 번득이는 사람이었지만 헨리 8세의 여성편력과 종교와의 갈등을 묵침묵으로 묵인한 죄로 감옥에 가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다섯번째 장ㅇ은 100만 중세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마녀재판이었다.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는 신흥종교를 제거하기 위해 기독교와 교황청의 대대적인 숙청사업이기도 했다. 시대적 배경에 따라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목적으로 마녀재판만큼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그 시절 죽어간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묵념한다. 여섯번째 장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의 갈릴레이 재판이다. 자신의 주장을 관찰하기 위해 두번이나 감옥에 갔고 결국 풀려난사람.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정신에 위배 된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던 사람. 그의 조각상 아래 부분을 살펴보면 지구와 행성 그림 사이에 그래두 지구는 돈다 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고 한다. 일곱번째 재판은 뒤레퓌스 재판이었다. 독일에 패배한 프랑스는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씌울 희생양을 찾느라 안달이 되어 있었다. 그런 기기에 스파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무죄도 없는 뒤레픠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죄를 뒤집어 쓴다. 명백하게 그가 아니라는 사실, 진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그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에밀졸라를 비롯, 세계 각국에서 그를 위해 규명해주고 도와주었음에도 뒤레프스는 악마도에 유배를 가게 된다.그로부터 2년후 재심이 열렸지만 드레푸스는 다시 유죄를 선고 받는다. 결국 12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야 모든 진실이 밝혀 졌다. 그리고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소련의 원자폭탄 성공을 질투한 미국의 fbi가 꾸민 일이다. 각종 언론들과 사람들또한 미국이 소련보다 뒤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내국에 정보원이 있으리라 떠들었다. 그러다 공산당이었던 그린글래스를 잡고 그는 자신의 누이와 매부를 법정에 세우고 자신은 빠져 나온다. 로젠버그 부부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블로흐 변호사는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그들이 사형당한 한 달후 죽음을 맞는다. (무지 가슴아픈 대목입니다.) 사형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서 블로흐 변호사의 노력으로 로젠버그 이야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구명운동이 벌어졌지만 결국 두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후 모의재판을 통해서야 그들의 죄를 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외설인가, 예술인가의 문제로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 에 대한 재판이 들어있다. 참 가슴 아픈 역사였습니다. [인상깊은구절] 소크라테스가 최후로 했던 말 "오 크리톤, 아스클레 피오스에게 내가 닭 한 마리 빚진게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갚아주게." 로젠버그의 장례식에서 블로흐 변호사가 했던 연설 " 다른 모든 세계가 알고 있듯, 미국은 이제 민간인의 옷을 입은 군사 독재의 바퀴 아래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돌 같이 딱딱한 심장, 굳어버린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살인자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로젠버그 부부의 주검을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라우넬, 그리고 에드거 후버의 문전에 놓습니다. 그들은 그 부부를 죽음으로 몰아간 전기의자의 스위치를 직접 누르진 않았지만 분명히 스위치를 누른 사람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미국의 전통이 아닙니다. 미국의 정의도 아닙니다. 미국의 페어플레이도 아닙니다. 로젠버그 부부를 죽인 것은 바로 나치즘입니다. 오늘의 교훈을 우리가 잊는다면, 우리는 비굴해지고 무릎끓고 살게 되며 공포에 떨게 될 것입니다. 광기, 비이성, 야만과 살인이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
|
도서관에서 책들을 살펴보다 제목을 보고 친구랑 깔깔 웃어대던 책. 제목만 보고 제멋대로 판단해 재미없을거라 생각해 읽을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던 책. 하지만 지금은 왜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제목으로만 판단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만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세상에서 여러 논란이 되고있는 10가지의 재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10개 모두 너무 유명한터라 모두들 알고있을만한 재판이다. 소크라테스부터 잔다르크, 예수......로젠버그부부의 재판까지. 이 중에서 나는 내게 가장 인상깊은 두가지 재판만 꼽아 이야기하려 한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첫번째로는, 바로 책 제목에 관한 대사가 나온 유명한 영국의 재판관 토머스 모어에 대한 이야기이다. 끝없는 승진을 반복하며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가 도데체 왜?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사실 조금 어이없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토머스 모어가 살던 시대는 헨리 8세의 집권시대인데 그는 아들을 가지기 원했으나 왕비 캐서린과의 자식은 딸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다 죽어버렸다. 그래서 헨리 8세는 이혼을 하고자 마음먹었으나 가톨릭법상 이혼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강대한 권력으로 이를 무시하고 영국교회는 왕의 소속이라는 담대한 발언까지 해버렸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대법관이던 토머스 모어는 사직서를 냄으로서 조용한 거부권을 내새웠다. 결국 그는 단두대에까지 올라가고 그 곳에서 그는 처형 집행관에게 이 말을 한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네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그는 대법관이라는 명예와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모든것을 내놓을 줄 아는 사내였다. 그 뿐만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거둬갈 이 에게까지 배려하는 이 모습. 저절로 박수가 쳐진다. 사소한 진실, 거대한 거짓. 희생양 로젠버그 부부. 두번째, 로젠버그 부부. 로젠버그 부부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생각난 책이 있었다. 중학교때 독서 토론부에서 다뤘던 책. '모스가족의 용기있는 선택'이란 책이다. 그 책에서는 공산주의 가족인 모스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는데 중간에 잠시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가 나온다. 처남에 의해 희생된 로젠버그 부부. 사실 정말 소련군의 스파이였다고도 하지만 뭐 어떤가, 그들은 어떻게하든 희생양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진실이 최고의 죄가 되고, 때로는 친혈족에게서까지 외면당하는 진실. 하지만 결국 진실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빛이 되지 않는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신념을, 진실을 지키고 주장하는 그들이 멋있고 아름답다.
|
|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는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동물은 이성이 없고 모든 행동을 본능적으로 행동하지만 사람은 본능이 아닌, 자기가 지니고 있는 이성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물에게는 법이 없다. 정글의 법칙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법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동물에게는 없는 법이 인간 사회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이 법이란 놈은 항상 우리 주위를 서성대고 있는데. 문득 몇 년전에 보았던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바다위의 커다란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호. 그 혼란의 와중에 정말 얍삽하게-거친 말이지만, 얍삽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린다.- 구명정의 한 자리를 차지하던 남자가 있었다. 모두들 느낀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 얍삽함이란...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라면 모두들 그 남자와 같이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에게 목숨이란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니까. 밀림에 불이 났다고 생각해보자. 언제가 한번쯤은 보았을, 자연 다큐멘터리 화면을 떠올려 보자. 불꽃이 이글거리는 사이로 수많은 동물들이 살 길을 찾아 황급히 달아나는 장면을 말이다. 그리고 화재가 끝났을 장면도 떠올려 보자. 어떤 동물들이 죽음을 맞이했을까? 아마도 너무 어리거나 늙은, 아니면 병든 동물들일 것이다. 튼튼한 동물들은, 인생(?)의 절정기를 달리고 있던 동물들은 대개가 그 불구덩 속에서 탈출했을 것이다. 다시 타이타닉호로 돌아가보자. 왜 우리는 그 남자를 얍삽하다고 하는 것일까? 머리 속에 떠오른 장면을 정지시켜 놓고 그 남자에게 클로즈업한 시선을 조금만 뒤로 물러나게 해볼까? 그 남자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누굴까? 여성, 노약자, 어린이들이다.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다르지 않은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그런 극한 상황에서 자신보다 약자를 보살피는 것일까? 본능이 아니라 이성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도록 하자.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지만, 법은 약자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법이 없다면 인간 사회는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법이 있음으로 최소한의 절차를 거치게 하였고 그 와중에 약자는 조금이라도 보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에 대한 정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한마디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재판들이 이 말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단어를 조금 바꾸어 보면 단순한 연관정도가 아니다. “유권무죄, 무권유죄” 조금만 뒤로 물러나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해서, 예수, 토마스 모어, 잔다르크, 갈릴레이, 드레퓌스, 로젠버그부부, 마녀들에 대한 재판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권력의 한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위의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소용돌이에 몸과 정신을 모두 빼앗기고 있을 때, 이들은 그 소용돌이를 거스르려고 했고, 그 때문에 이들은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사실 신문기사를 보다보면 힘이 좀 있는 사람은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법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지나친 일반화인가?- 어쩌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법은 약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모든 것이 힘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인간에게 있다는 이성은 그저 허울좋은 껍데기일 뿐인가? 인간은 동물과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너무 절망하지 마시라. “우리는 여러분 앞에 출두했지만, 여러분은 역사 앞에 출두할 것입니다.” 드레퓌스 사건 때, 클레망소라는 사람이 했던 말이다. 인간은 역사를 기록하고 그 역사 앞에서 모든 정의가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의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일 것이다. 물론 모두가 졸라같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물론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하고, 대개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만 말이다.- 로젠버그 사건 때, 조그만 쪽지와 함께 5달러, 10달러를 보낸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인간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
|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느꼈던 점이 있다면 바로 스스로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인간 자신이 실은 얼마나 비이성적이며 오만한가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놀라움이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지금은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적 사실로 인정받아지지만, 갈릴레이가 카톨릭 교회에 의해 오심을 받았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1984년이었다. 심판이라는 이름하에 정의를 행한다고, 혹은 진실을 규명한다고 하면서 몇 백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마녀재판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른 희생양을 찾아 묻어버리는 않았는지. 이 책에 적혀진 사람들 말고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정의가 정의로 둔갑하지는 않았는지. 무서운 일이었다.그리고 그것들은 아주 먼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현재까지 자행되고 있다는 것에 큰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반성해 봄으로써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을 가야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다시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모어와 같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처형을 받은 사람들이든 갈릴레이와 같이 목숨을 유지한 사람들이든 그들은 희생자들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역사의 한 면을 다시 반추할 수 있었으며,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인상깊은구절] 모어는 미끄러운 단두대로 올라가면서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행관, 나는 자네를 위해서 기도하겠네. 제발 나를 안전하게 부축해 올라가 주게. 내려올 때는 나 혼자서 잘 내려올 테니까.' 그리고 사형집행에 임하는 집행관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또 다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형집행 전에 머리를 쑥 내밀며 자신의 수염이 잘려지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
|
'의미'와 '재미'...흔히 거론되는 두가지의 평가기준이다. 둘다 동시에 만족되기 힘든 기준이라는 점에서 '두마리의 토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 책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이런 점에서 볼때 무척 희귀한 책이다.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주기 때문이다. 자칫 딱딱한 법리논쟁을 연상했던 나에게, 아니 어느정도는 이걸 기대하며 이 책을 구입했던 나에게, '재미'라는 의외의 선물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전혀 뜻밖에도 시민운동가 박원순은 '이야기꾼'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예수, 잔다르크, 토마스모어, 드레퓌스 등등...인류사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전환기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과 그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 이러한 역사적 모순과 전환이 집약된 세기의 재판들... 자유와 정의를 향한 투쟁, 현실법정에서의 패배 그러나 역사라는 법정에서의 승리...저자가 말하고자 했던건 이런게 아니었을까.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휩쓸려 페이지를 정신없이 넘겨댔던 내가 그 '의미'를 제대로 요약하기엔 너무나 버거울 뿐이다.
특히 많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건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미 알고있던 내용이지만, 같은 사건이라도 쓰는이에 따라 이렇게 와닿는 느낌이나 감동이 다르다니... on이나 off에서 소통하며 어딘가 낯설고 이해가 어려웠던 담론들,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채워지는 느낌이다. 그들은 이미 이책을 읽었었구나... [인상깊은구절]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진실을 향한 행군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엑스트라, 그가 바로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인간의 권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주는 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 그 정의가 이제 의미없는 빈말이 되어버렸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다.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때, 관용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때,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위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