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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한다.'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은 무력은 단기적으로는 사람을 굴복시키고 강한 힘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기세가 영원하진 못하다. 반면 펜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휘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칼을 쥔 자들은 펜을 의식하고 펜을 쥔 자들이 남기는 글을 통제해왔지만 그 탄압조차도 펜에 의해 기록되는 운명을 피해갈 순 없었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는 바로 펜, 아니 붓으로 권력을 견제하며 그 위력을 보여준 사관에 관한 책이다. 사관이 언제 어떻게 등장했고, 어떻게 영역을 넓혀가며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됐는지..
조선시대 사관의 임무는 사초를 작성하고, 왕이 승하하게 되면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사초를 작성하기 위해 사관은 왕의 일거수일투족과 정사를 기록해야 했는데, 성리학의 영향이 커지고, 또 신료들의 요구로 사관의 입시 범위는 점점 넓어져갔다.
조참,경연,윤대은 물론이고 인사가 이루어지는 정청, 나아가 백관회의나 사신 접대자리 및 왕의 나들이에까지 사관이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왕이 신하와 독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동석을 요청하는 사관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관의 영역이 확대된 데에는 조선 초기 관제의 개편과 함께 예문관이 독립하게 되면서 겸임이 아닌 전임 사관이 등장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 체계가 자리잡혀 가면서 대간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자질이 뛰어난 인재들이 사관이 임명돼, 왕에게 사관 역할을 강조하며 그 역할을 획득해 나간 것이었다.
사관의 입시를 처음부터 환영한 왕은 없었다. 세종조차도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니. 왕에게 있어 예문관 소속 전임사관은 비서 역할을 하는 승정원 소속 겸직 사관과 달리 껄끄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사관 입시는 피할 수 없는 대세였고, 성리학적 이념에 걸맞는 왕권견제수단으로 또 역사를 기록하는 조선의 통치 시스템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사관은 역할은 더욱 막중해졌다. 비단 입시 공간 뿐 아니라, 사관이 주관적 평가를 하는 사론을 언급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단순히 기록을 넘어서 역사인식을 반영했고, 당대 공론과 비판을 담아냈던 것이다.
상상해보면 사관은 일종의 3D업종이 아니었을까. 왕의 말과 표정 몸짓까지 놓치지 않고 속필로 내용을 빠트리지 않고 적었을 사관을 떠올려보면, 온 신경을 곤두세웠을 모습이며 혹여 빼먹은 내용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당황했을지가 그려진다. 상당한 지적 수준과 숙련도가 요구되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스트레스와 과로를 동반하는 업무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사관의 역할이 인정됐다 하더라도, 그 임무의 특성상 필화와 실록 편찬과정에서 왜곡과 정파적 이해에 편승해서 실록을 편찬하는 여지는 여전히 존재했고, 실제로 발생했다. 연산군대에 사관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발단이 돼, 무오사화가 발생했고, 사림들이 크게 피해를 입었던 것이 그 대표적 사례였고, 실록 수정본이 네차례나 편찬됐던 것은 당파적 이해를 반영한 조치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초나 실록과 관련해서는 수 많은 우여곡절과 파란이 발생했다. 그럴만큼 왕의 행적을 기록하고 사초를 작성한다는 것, 나아가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왕의 곁에서 쉬지 않고 붓을 놀리는 사관이 머리 속에서 그려졌다. 임진왜란 때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갔던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 같이 오명을 남긴 사관 역시 존재했고 권력의 위력에 움츠러들었던 사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관들은 무오사화 때 희생됐던 김일손, 직필했다 참형당한 안명세처럼 목숨을 걸고 사초를 남긴 사관들이 있었다.
단순히 기록을 넘어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필로 꿋꿋하게 역사를 담아낸다는 사명감을 지녔던 사관들, 때로는 필화에 휘말려 희생되면서도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다고 당당하게 붓을 들었던 사관들. 그렇기에 1893권 888책에 달하는 방대한 왕조실록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록은 지금까지도 기념비적인 역사기록으로 인정받으면서 총칼보다 영원한 펜의 힘, 붓의 위력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는 6년인가 7년만에 재독하는 것이었다. 처음 봤을 때에는 책이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재독하니 처음보다는 정돈된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지만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사관에 대해 처음 읽었을 때와 별 차이 없는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다만 이번에는 사관의 마음가짐을 생각하며 읽을 수 있었다.그들도 자신이 남긴 기록이 청사로 후세들에게 거울이 된다는 것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기록하는 자의 운명, 펜을 쥔 자의 사명감을 묵묵히 감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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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사옵니다.” 조선 태종 때 사관 민인생이 사관의 편전 입시를 거절하는 태종에게 했다는 말 속에는 사관들의 꼿꼿한 기개와 직필 정신이 드러나 있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는 술술 읽을 수 있는 가벼운 교양서는 아니다. 25대 철종임금까지 1893권 888책이라는 세계 왕조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역사의 기록물이자, 사관들의 노작인 실록 속에는 성리학적 가치에 충실하고 했던 사림의 혼과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로서의 역사 의식과 피와 땀이 배어있는 것이다. 이 책은 사관 직의 기원, 조선시대 기구나 직제 속에서 사관의 소속이나 역할에 대해서나 실록의 편찬 과정, 실록의 가치에 대해서 역사연구가 답게 중국 사례나, 우리 역사속에서 통시적으로 꼼꼼하게 훑고 있다. 또한 실록에 사관들이 직접 기록한 사초내용에 대해서, 또 왕권을 견제하며 사관들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관이나 희생됐던 사관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고 있어서 역사를 기록하는 자의 위험한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정독하며 읽는 수고를 하게 했다. 조선시대 사관이 그 역할 면에서 그 이전 시대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사관이 성리학적 통치관에 입각해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역사서술이 자국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시대의 사관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것이다. 그런만큼 조선 사회에 성리학적 가치가 뿌리 내림과 비례해서, 사림의 중앙 진출과 더불어 사관들이 붓끝으로 기록하는 영역이 넓어지고, 확대돼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히 필화 사건은 끊이질 않게 된다. 태종이 아버지 태조의 죽음을 맞이하자마자 실록 편찬을 서두른 것이 발단이 된다. 송포 등 신하가 사관의 직필을 보호하기 위해서 왕이 죽은 뒤 삼대 뒤에 실록을 편찬하자고 상소를 올렸지만 태종은 태조가 사망한 뒤 1년 반에 실록을 편찬하기로 밀어붙였다. 실록이 당대사 위주로 편찬되면서, 그로 인해 조선시대 내내 사초로 인한 필화의 위험성을 안게 되고, 사관 역시나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됐던 것이다. 조선 들어 사초로 인한 첫 필화의 대상이 고려 말에 사관을 지냈던 이행이라는 점은 조선시대 사관의 운명에 대해 여러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창업 후 전 왕조인 고려의 역사 편찬을 서둘렀던 조선, 다른 사관들은 이성계가 실권을 잡은 뒤 민감한 사실(史實)들을 삭제한 뒤 사초를 제출했지만 이행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 건국의 부당성을 그대로 담은 사초를 낸 이행은 결국 여러차례 심문을 받은 뒤 귀양을 가는 처지가 되고 만다. 사관의 입장에선 사초 때문에 때로는 관직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걸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이런 대쪽 같은 직필의 정신이 역사를 남기게 됐다는 점에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당시 공자의 춘추필법-대의 명분에 입각한 직필 , 객관적이고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하는-으로 기록해야 했던 직필정신은 성리학적 통치 이념이 확립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당파에 의한 정파적인 실록 편찬으로 빛이 바랬다는 점은 애석하기 짝이 없다. 당파에 의한 사록 편찬은 필화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먼저 편찬했던 실록을 뒤엎고 수정하거나 새로 편찬하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서 사초를 작성한 희생된 사관도 여러 명이 생기게 되었다. 무오사화는 사화(史禍)라 따로 부를 만큼, 김일손의 사초로 인해 사림들이 훈구세력의 반격을 당하게 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선조 실록의 경우 북인이 집권하던 당시 편찬되었다는 이유로 인조 반정 뒤에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은 선조 실록의 수정을 주장하게 되고,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실록 역시나 소론 계열 주도로 실록이 편찬되면서 명종 때 신임사화가 노론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술됐다면서 소론계열에서 실록의 수정을 주장하고 나선 사실 역시나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명종대 사관 안명세 역시 그러했다. 을사사화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으로 사초를 작성했다가 참형을 당하고, 그 가족까지 종이 되는 참혹한 운명에 처하게 됐지만, 훗날 선조 즉위 후 안명세는 신원되게 되는 데서 알수 있듯이 이 과정에서 사관들의 희생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실록이 사실(史實)을 원형 그대로 전달 보존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조선 후기 실록자료는 당색에 의해 윤색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짙어졌고, 이런 문제는 결국 실록에 등장하는 사론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후세인들에게 실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에 관련된 역사의 본질적인 고민을 더더욱 무겁게 만드는 짐을 지워주게 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누가 어떻게 어떤 관점으로 기록하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은 최근 뉴라이트 학자들이 기존 국사 교과서를 대폭 수정하자고 나서고, 이 과정에서 정권의 입김이 들어가는 과정을 연상하게도 한다. 권력의 입김으로 역사의 기록과 평가를 수정하려 하는 자, 역사의 기록을 두려워하는 자는 대체 누구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예문관 소속의 전임 사관 여덟 명이 있었고, 춘추관 소속의 겸임사관까지 합하면 모두 쉰 두 명의 사관이 있었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관 또한 적지 않다,사관들은 왕의 견제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조선의 관직체계상 겸임사관이었던 승정원 소관의 승지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왕명 출납기관이 승정원의 성격인만큼 전임사관들은 승지와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견제를 받아가면서, 그의 붓끝을 피하고자 했던 태종을 좇아가며 입시를 청해 진드기 사관이라는 말을 들었던 민인생이나(이 책의 제목 또한 민인생과 태종과의 대화에서 따온 것이다) 중종때 직필과 지조를 꼿꼿하게 지켰던 사관 백인걸, 정조 실록에 졸기를 통해 조선의 창업에 협조하지 않았던 고려 말 길재를 충신으로 재평가했던 홍여강 등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했던 사관들의 면면과 직필 정신은 사론을 통해서 빛을 발하고 있다. 사론이란 실록 편찬자들이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논평한 것인데, 실록의 사론은 당시대에 대한 사관들의 시대인식을 보여주는 공론이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전란의 와중에서 임무를 방기하고, 사초를 버리고 제 살길부터 찾았던 조존세, 박정현, 김선여, 임취정 같은 사관도 있었다. 그들은 이 행적으로 말미암아 두고두고 사관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사초에 기재됨으로써 역사의 냉엄한 평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를 읽으면서, 흥미로왔던 또 한가지는 사관을 대하는 태도나 실록에 기재되는 사초를 대하는 왕의 자세를 보자면, 그것이 바로 후세의 평가와 함께 나란히 가고 있다는 점이다. 입시 반경을 넓혀주고, 사초를 작성하는 사관들에게 허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세종과 성종의 경우, 사관의 예리한 붓끝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나 사직을 이끄는 체제의 한부분임을 일찍이 수용했던 왕이었기에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연산군은 무오사화 이후, 사관들의 직필을 근본적으로 봉쇄하려했던 임금이었다는 점은 그가 폭군이었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하고 있다. 연산군은 자신이 두려워할 것은 사서뿐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역사의 평가를 의식했던 왕이었기에, 후세의 호된 평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그런 행적으로 오히려 실록에서 더더욱 혹독한 평가를 받게된다. 기록되는 자, 비판과 감시의 대상이 돼야 하는 권력자, 21세기 현재의 권력자 역시나 비판의 붓끝에서 예외일수가 없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들이는 권력자의 자세 역시나 역사 속에서 충분히 배울 가치라는 점을 되새겨 보게 한다.
왕조 중심, 지배자 중심의 역사서술이라는 것이 실록의 한계라고 지적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실록에는 왕조시대라는 시대적 한계가 더 많이 반영돼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는 불상사 속에서도 사관들이 이 일을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는 말조차 실록 속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이 사관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임란의 전화 속에서도 태인에 살았던 초야의 선비 안의와 송홍록은 전주 사고에 보관됐던 실록을 끝까지 지켜낸 것도 인상적이었다. 정부의 녹을 받는 사관이 아니더라도 붓의 힘을 믿었던 조선 사림, 선비들의 꼿꼿한 기개 역시나 조선의 실록과 역사를 보존하는 든든한 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의 순서가 어떤 체계로 서술됐는지, 두서 없어 보이고, 산만해보인다는 것이다. 사관에 대한 통시적인 흐름과 조선의 관료조직 속에서의 위치, 중국의 사례, 실록에 담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목차와 흐름으로 서술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럼에도 뉴라이트 교과서 수정 파문을 지켜본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정독을 요하는 내용이었음에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컸다. 꿋꿋하게 직필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관의 행적 속에서, 권력을 견제하는 붓의 힘을, 역사의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기꺼이 고백할 수 있으니 말이다. 권력의 힘 조차도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결정하지 못할 뿐더러 그런 강압적인 행위야 말로 오히려 추상같은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다는 사실(史實)을 이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