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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현대극'의 시초로 꼽는 작품이며, '부조리극'으로도 유명하다. 어찌보면 미술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난해한 느낌을 주는 것이 '현대의 부조리극'이라고 하지만 '무논리 속의 논리'를 느낄 수만 있다면 '현대극'만큼 재미를 주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무논리 속의 논리'라는 표현은 애초에 숨겨놓지 않은 물건을 찾아내는 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이미 널리 알려진 극의 내용이라 굳이 스포일 것도 없는 사실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극에서 '고도'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말이다. 이를 두고 돌아오지도 않을 '대상'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인물들의 넋두리만 실컷 구경한다며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극의 예리함과 명철함에 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에는 이 책처럼 '만화형식'이 아니라 직접 연극을 관람하며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서 절절하게 느끼거나, 극본을 읽으며 무한한 상상력과 더불어 불현듯 깨우침을 얻는 방법이 훨씬 탁월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파악했다면 연극관람이나 극본읽기를 권하는 바다.
암튼, 극의 줄거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인물이 '고도'라는 이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줄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건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강의 줄거리를 쭈욱 지켜보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유심히 듣다보면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도'가 무엇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야 일단은 짜증이 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분명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사람일 거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허나 정작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 극의 중반쯤 지나면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정말 사람인가? 라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왜냐면 이 극에서는 애초부터 '시간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해가 떠있으니 '낮'인건 알겠는데 아침인지 점심인지 해질녘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저 하룻밤을 지새운 것 같은데도 극중 인물은 50여년 전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기다리던 이들이 죽어서 떠드는 것인지 살아서 나불거리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횡설수설하다가도 딱 한가지 사실을 떠올리며 모두가 수긍하고 만다. 그건 바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짐작했듯이 극중 인물들 가운데 제대로 되 인물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는 '블라디미르'인데, 다른 인물들의 엉뚱한 이야기에 그조차 말의 앞뒤가 꼬이고 말아 극의 내용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런 엉터리 말 가운데 정곡을 찔리는 듯한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기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에 수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고, 서울대에서도 100권의 선정도서로 손꼽은 것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절대 '똑같은 감상'으로 읽어낼 수 없기에 독보적인 작품인 것이다. 만약 이 극본을 시험문제로 낸다면 '정답없는 답안'속에서 논리적이고 명쾌한 답안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명문대학일수록 <고도를 기다리며>를 독보적으로 해석해낸 유능한 학생을 탐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 뻔한 답안은 피하기를 권한다. 이미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식의 해석은 누군가가 먼저 써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누구'를, 혹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목적'한 바도 없이 순수하게 '기다림'의 순기능만을 얻기 위해서 마냥 기다리는 것일까? 이를 테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처럼 실제로는 너무너무 궁금해서 얼른 소식을 접했으면 좋아 죽겠다는 심정이지만, 행여나 '나쁜 소식'이라고 전해질까 두려워서, '소식 없음'을 희소식으로 여기며 묵묵히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시대적 배경은 '2차세계대전 종반'이고, 공간적 배경은 '폴란드'라고 널리 알려진 탓에 작품속의 '고도'는 독일에게 억압받고 있는 폴란드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련군(해방군)'이라는 해석도 있다. 허나 현대극의 특징은 '배경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굳이 그런 해석이 '정답'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그렇기에 관객이나 독자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적절한 배경을 설정한다면 각자 나름의 '고도'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단지 그 '고도'가 아직 오지 않고 있음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여긴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럼, <고도를 기다리며>는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불명확해도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고도'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불행하거나 절망에 빠져있지 않고,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한 기다림으로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더더 나아가 굳이 '고도'가 찾아오던 말던 아무런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 만족하며 즐거울 수 있다면 가히 '해탈의 경지'에 다달았다고 주위의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다. 때론 '고도'가 정말로 찾아왔다는 상상을 해도 좋다. 마치 아기가 즐겁게 놀다가도 퇴근하고 돌아오는 엄마를 만나듯이 말이다. 그 순수하고 해맑은 아기의 표정이 바로 '고도'가 참으로 돌아온 순간일 것이라는 상상이 즐겁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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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통적인 연극 서술 구조를 지양하고, 현대 연극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개척하는 데 기여한 부조리극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는 작품이며,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는 인간을 둘러싼 가식적인 문명의 오물에서 멀어진 존재의 사막으로서 대상이 불분명한 암담한 기다림만이 강요되는 실존의 장소가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말 그대로 고도라는 이름의 어떤 사람을 기다리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매일 어떤 장소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두 주인공은 자기들끼리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 계속 고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왜 기다리는지, 고도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면서 겪는 황당한 사건들을 보면서 실컷 웃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의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대를 알아야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탄생했다. 당시 사람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 속에서 간절하게 희망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그래도 언젠가는 전쟁이 끝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고난과 역경의 긴 시간을 견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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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기원은 동서양 모두 공통적으로 원시 지역사회의 종교 의식에서 자취를 볼 수 있다. 신의 탄생, 죽음, 부활을 노래와 춤으로 찬미하던 원시민족의 제례 의식은 의식을 집행하는 신관과 따르는 사람들이 배우와 관객의 역할을 하면서, 신을 모방하고 신에 대한 두려움과 경이감을 해소했다.
연극의 기원을 노동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동안 능률을 높이거나, 고통을 덜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됐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극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생하여 인간 본성의 표현과 사회적 요소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또 언어가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이 가미되어 본격적인 연극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45년, 세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혼돈과 분열이 사람들에게 과학과 문명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1950년대 프랑스 극작가들에 의해 부조리극이 탄생했다. 부조리극의 뿌리는 인간에 대한 가치를 탐구하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부조리극의 극작가들은 다소 비관적인 입장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인간은 절망과 혼돈 속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조리와 혼돈 그 자체만을 강조했다.
1950년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가 파리의 녹탕빌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이로써 현대 연극의 주요 경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부조리극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1961년 미국에서 마틴 에슬린의 저서 [부조리 연극]이 출판되었다.
초창기 부조리극은 그 난해함 때문에 모두 푸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분노한 관객들이 입장료 환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도 차츰 부조리극이 무엇을 말하는지 받아들이고, 베케트의 [고도를 기댜리며]가 노벨 문학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마침내 고도를 기다리는 데 지쳐 어디론가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1막이 끝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1막의 마지막 장면이다. 두 사람은 결국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처음처럼 서 있다.
고도가 무엇을 뜻하는 것이든, 그들은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불안하고 암울한 미래를 예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의 지배를 받던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막연한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조롱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직접 용기를 내어 앞장서서 해결하려 들지 않고, 고도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지식인들의 용기 없고 비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제목 그대로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조리극이 아니라면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고도를 만났다.'는 결론이나 장황한 대사와 상황으로 1막을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무엘 베케트는 그것으로 끝을 내지 않고, 말과 다르게 자리를 떠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을 침묵 속에 세워든 채 끝을 맺는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더욱 의미 있게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자아와 희망을 잃고 실존주의의 패배감만 내세우는 국민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고 희망이 올 것이라 말해 주고 있기에, 이 작품은 단순한 부조리극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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