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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아기부처를 읽었다. 나는 평소 한강의 많은 단편 소설을 읽었는데 이렇게 2000년에 한국 소설 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한강의 작품을 만나고 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이 소설은 유명한 앵커였던 남자가 화상을 입고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그와 결혼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한다기 보다는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줄 뿐이다. 서로를 가둔채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있어 타인과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을 만큼 그런 그들의 모습이 딱해 보인다. 사랑이 이런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까.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불가의 업처럼 여기고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난다는 내용인데 한강의 이번 작품은 대상을 탈 만큼이나 빼어난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그 순간 왜 나는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나에 대한 미안함보다 자신의 행복할 권리를 주장하는 그에세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삼 년동안 한번이라도 기꺼이 나와 몸을 섞은 적이 있었는가 고 한달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었다. 더러운 벌레 피하듯 몸을 피하곤 했던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그럴 때마다 내가 남모르게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졌는지 아느냐 고도 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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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의 작품은 처음이다. 매끄러운 문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표현, 무리 없이 이끌어가는 이야기 전개 솜씨.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한 강의 소설은 잘 읽힌다는 미덕을 갖고 있다. 확실히 잘 읽힌다는 점은 소설에서 미덕에 속한다. 거기에다 가볍거나 천박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연배가 속해 있을 소위 신세대 작가군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느끼게 한다. 이미 어느 정도 주목 받는 작가로서 신인의 반열에서는 벗어났다고 보여지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첫인상의 깨끗함이 기분 좋다.
소설을 비롯한 문학예술이 무엇인가의 도구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거나 개인의 실존적 고민만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무언가 사치스럽고 소부르주아적인 활동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단순히 시간이 흘러갔을 뿐 아니라 그 당시에 믿었던 절대적 가치들이 이제 더 이상 진리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에 대한 반동(反動)이 나타났다. 치열했던 현실 참여는 소위 '후일담 문학'이라는 영역 속에 갇힌 채 숨죽이고 있고, 무거운 주제들 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온갖 가벼움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 시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축복 있으라 그대 가벼움이여!
물론 한 강의 소설을 이런 가벼움의 범주 속에 집어넣는 것은 부당한 폄하이다. 사실 한 강의 소설은 그 반대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개인이 처한 실존적 고민과 그에 맞서는 인간들의 담담한 솔직함을 그려내고자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가치들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도덕적 당위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욕망을 지닌 인간으로서 매일매일 부딪히는 사소한 문제들이 우리를 훨씬 더 괴롭힐 때가 많다.
잘 나가는 TV앵커인 남편의 전신에 아로새겨진 화상 흉터. 그 흉터를 이해하고 감싸안아야 한다는 당위와 그 흉터를 혐오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욕망은 서로 별개의 문제이다. 당위와 현실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꿈 속 아기 부처의 일그러진 모습. 하지만 갈등에 대한 한 강의 해결책은 여전히 모범적이다.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단은 그러한 갈등조차도 껴안아야 할 업(業)으로 상정된다. 몸에 대한 욕망은 다시 한번 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며 잠복되는 것이다. 그러한 규범적인 해결은 그녀의 소설이 안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인상깊은구절] 그 때, 좁다란 등산로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봤다. 남자라기보다는 남자애라고 불러야 할, 기껏해야 스물한두 살밖에 되지 않았을 앳된 얼굴이었다. 연하게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은 그 애는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눈부시게 흰 몸이었다. 근육이 붙은 것은 아니지만 군살이 없었고, 그렇다고 마르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그 반라의 몸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온몸의 핏방울들이 머리끝으로 몰려올라와 곤두섰다. 그 남자애의 가슴을 만지고 싶었다. 그 매끄러운 살갗에 젖가슴을 비비고 싶었다. 내 매끄러운 몸이 그 애의 몸에 스치는 느낌, 부드러운 살끼리 차지게 문질러지는 느낌을 맛보고 싶었다. 길이 좁았으므로 남자애의 어깨는 내 어깨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새빨갛게 귓불을 물들인 채 나는 눈을 내리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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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총 10편의 작품중에서 대상 작품인 한강의 <아기부처>는 단연 돋보였다. 어릴적 화상을 입어 보기 흉한 상처를 가진 유명 앵커인 남편. 그는 이런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오히려 완벽주의자이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치부를 보이며 사랑을 고백했을때 그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여자는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제 그 흉터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그런 자신을 가학하고... 꿈 속에서 일그러진 아기부처를 부정하는 꿈을 꾸면서 그녀는 힘겹게 자신을 이겨내고 있었다. 마음과 몸이 일치되지 않는 관계. 남편의 상처를 감싸안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그를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 그런 냉정한 그녀에게 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은 서로 타인처럼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도 않고 그와 싸우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육개월째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결국 남편의 여자는 남편의 신체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오히려 여자를 존경한다고 하며 남편을 떠난다. 이제 상처받은 체 돌아온 남편을 그녀는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인다. 통속적이고 어두울법한 이야기를 잘 소화해내 훌륭한 작품으로 만든 작가의 솜씨에 박수를 보낸다. 그밖에 추천작으로 올라와 있던 작품 중에서 특히 재미있게 읽은 것은 짧은 단편 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김민숙의 <비디오 보는="" 여자="">와, 식상할 정도로 자주 등장했던 첫사랑의 소재를 도발적인 표현력을 빌어 시원하게 그려낸 배수아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한창훈의 <돗 낚는="" 어부="">도 아릿한 슬픔을 느끼게 한 좋은 작품이었다. [인상깊은구절] 내 살아온 동안 쌓아온 것들이 고스란히 내 병이야... 이제 와서 보니 후회가 되는구나. 한평생 칼을 품고 살아았던 것 같으니. "이러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 장 더 그릴 대마다 붓이 그만큼 가벼원진다." 어머니는 벼루에 물을 조금 붓고 다시 먹갈기를 시작했다. 염색물이 빠져 희끗희끗한 가마가 어머니의 팔동작에 따라 흔들렸다. 저렇게 독같은 그림을, 정말 삼천 장씩 베껴낼 생각인가.돗>첫사랑>비디오>아기부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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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부처는 한강의 소설중에 제일 처음 읽은 것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 한강의 소설에 빠져 다른 작품도 모두 읽어 보았다. 그녀의 소설에 대한 공통적인 평은 작가의 나이에 비해 너무 소설이 어둡다는 것이다. 아기부처의 주인공도 방황하고 스스로 자책하는 남편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야말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고 즐거움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한 주인공의 모습을 작가는 아기부처로 형상화 하였다. 주인공 최선희는 자신의 꿈에 대해 '난데없이, 아기부처라니.'(p.22) 라며 어처구니 없어한다. 그리고 다시 꿈에서 아기부처를 만나고는 '널 묻어비릴 거야. 묻어버리겠어' '지겨운 것. 지긋지긋한 것'(p.51) 이라며 자신에 대한 부정을 한다. 현실에서 아기부처인양, 남편의 외도와 방황에 대해 담담하게 반응하며, 꿈속에서는 그러한 현실의 자신의 모습을 부정한다.
그녀의 소설은 어둡지만 음울한 분위기로 흐르지 않는다. 즉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철처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상적인 표현도 신선하게 한다. 가령 다른 작가들이 '벼락이 치는'이라 하면 그녀는 '벼락이 하얗게 뒤덮던' 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글을 소설다운 소설로 만들어 준다. 다른 작품들 중에서는 김진초의 귀먹은 항아리가 상당히 좋았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와 손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일상적인 모습에서 시작하여 통일 문제까지 무리없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는 늘 할머니가 살아햐 하는 이유였다' 로 시작되는 부분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우리네 할머니들의 모습이였다.
울림이 없기 때문에 금간 항아리라 하지 않고 귀먹은 항아리라 한다.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된다는 뜻이 있다는 그 귀먹은 항아리를 쌀독으로 쓰기 시작하며 정님은 '그르릉 그르릉' 거리는,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듣는다. 처음에는 듣기 싫던 그 소리가, 1년이 지난 후에는 할머니가 옆에 있는 듯이 반갑게 느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것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친정과 시댁에 대한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도 정님은 할머니를 버리지 않는다. 할머니가 살야아 하는 이유여서 그랬을까? [인상깊은구절] 나는 늘 할머니가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우리 정님이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정님이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정님이 시집갈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정님이 해산바라지는 내가 해줘야 할텐데...... 할머니가 살아야 할 이유를 더 이상 내게서 찾지 못하게 되었을 때부터 급반전이 이루어졌다. 에구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핼미라고 있는 게 맨날 걱정만 끼치고 짐이 되니 내가 얼른 가야 우리 정님이가 심 피고 살지. 할머니는 살아야 하는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내게서 찾았다. 나는 할머니가 살아야 할 이유를 내 아이들에게 갖다 붙이면서 왠지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살아야 할 이유로 뽑히는 것은 결코 영광스럽거나 신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