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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작품 아니면 비평. 평론이 무엇이기에 예술을 엿 먹이는 건가? 평론이 예술을 더욱 더 아름답고, 감동스럽게 만들 수도 있지만, 정치적 올바름은 예술을 파괴할 수도 있다. 시각적인 것을 이념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을 이념에 종속시키려는 일련의 작업 때문에 점점 더 예술은 생소하게 되고, 접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할 예술작품과 이해하지 못하는 평론 과연 누구를 탓하리 다 내 탓이다. 내가 무식해서 아니면 그들 탓인가? 알 수도 없는 단어들을 만들고,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 같은 문장들로 읽어도 그 의미 파악이 되지 않는 글과 작품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서 점점 예술작품과 교감할 마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보면 아름답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면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예술을 좋아하고, 바라보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 열정과 즐거움을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이들.” 훌륭한 작가, 위대한 작가들은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물론 그들의 작품이 위대하기에 그러겠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공감을 주기에 그들이 더 위대한 것 아닐까? 자연은 위대하기에 인간과 소통하는 것일까? 아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존재하기에 우리와 교감을 한다. 우리도 명작과 만나서 느끼는 감동 그것이 작품과 우리의 소통일 것이다. 물론 위대한 작품들과 난해한 작품을 바로 맞닥뜨리는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이가 있으면 좋은 것이다. 그러기에 소통을 도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시각의 폭을 확장하고 사고력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점점 관객과 평자간의 거리는 멀어져만 간다. 학문이며 이념이 개입되는 예술은 뚜렷한 계급적 성향과 정치적 성향으로 양분되고, 배움의 정도에 따라서 나뉘어 진다. 점점 이런 흐름이 현대의 예술계를 장악하는 것 같다. 진정한 소통은 안되고 점점 그럴듯한 과대포장으로 예술은 왜곡되고, 거장들의 작품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여 그 명성을 깎아 내리고. 학계라는 특권 “학계에 통용되는 이론은 근본적으로 탐구의 도구가 아니라 정치의 도구이기 때문”으로 그들만의 영역으로 전락시킨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정치적 논리이고, 그 위에 자기 과시를 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이에 적절한 조롱과 예술작품 그 자체로 돌아가라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닌가 8명의 화가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으로 글은 펼쳐진다. 쿠르베 <사냥감>, 사실적으로 그리려는 노력과 쉽게 이해가 되는 예술, 흔히 말하는 사실주의 하지만, 그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주석들이 난무한다. 눈으로 판별되는 관점보다 상상의 관점이 더 중요하고 결국에는 더 진짜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마디로 이론에 중독되어간다. 마크 로스코 <무제>, 이런 작품은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들다. 이론가들의 전방위적인 해석의 왜곡과 의도적으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으로 이 작품을 망치고 있다. 이 작품의 유혹적 매력은 주로 형태와 색의 조작에 내재되어 있다. 추상과 단순함과 육감적인 색은 결합함에 있어 독특함에 있다. 모든 예술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암시를 다룬다. 거기에 정의하기 힘든 강력한 매력이 있다. 틀린 생각에서 철저히 깨어난 우리 학자들만 있다. 로스코의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다. 그저 바라봄이 요구되는 그림일 뿐이다. 확실히 장식적이다. 추상예술에서 너무 깊은 의미를 끌어내려다 보면 바로 그 예술 자체가 대체적으로 가장 먼저 희생된다. 사전트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예술사와 역사공부는 지평을 늘리고, 선입견들에 도전 우리 문화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고, 과거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관람자의 주목을 흩뜨리는 것, 인형의 집 속에서 소유와 예의범절의 세계에 억눌리고 있다. 값비싸고 약간은 이국적인 분위기 일본항아리에 대한 해석과 섹슈얼리티, 성적테마, 성해방, 탈문명화 캠페인의 일부 등 참 해석은 자유다. 루벤스 <술 취한 실레누스>. 루벤스적, ‘호사스럽고, 육감적이고, 넘쳐나는 느낌을 주는 것.” 자기의 그림에서 ‘스스로를 구현하고 있는 것’과 그리스 신화의 인물을 그렸을 뿐이다. 그러한 ‘읽음’은 오늘 날 사방에 싸구려로 널려 있어서 충격을 주기에는 너무나 흔하다. 여전히 우리의 예술 경험을 더럽히고, 저질화하고, 욕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윈슬로우 호머 <만류> 현대화, 극사실주의, 호머의 과묵함과 그의 작품의 ‘완벽한 사실주의’, 그는 내가 그린 그림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묘소나 해석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히고 있다. 상징적이고 환유적인 암시와 완벽한 사실주의 어느 쪽이 맞는지. 고갱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보다>. 보헤미안 낭만주의 예술가, 좀 더 자연적은 것으로 문명에 대적, 고발하려는 의도를 회화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 혹은 정치적 잘못의 요약한다. 그러면 예술가 고갱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고호 <한 켤레의 신발> 반 고흐가 그린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철학적 시나리오에 그의 그림을 끌어들이고 있다. 예술사라는 공부의 틀을 형성하는 것과 예술을 배우기 위함, 미적인 만남을 언어적 만남으로 대체하여 예술의 경험의 왜곡하고 있다. 어떤 작품을 마주하고, 왜 이것이 명작인지는 대부분의 명성 때문이 아닐까? 이런 명성을 안겨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작품을 소유하고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 아니면 소위 평론가 아니면 또 다른 작가들.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해석으로 작품을 만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평론가나 안내해주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진정한 예술의 가치는 느낌이겠지만. 예술이나 일반적인 일에 대해서의 배움에서 상대방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교육의 주된 목적이 아닐까? 니체는 인간의 역사는 해석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 정도로 해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과 논쟁할 수 없다. 그러면 해석이 말도 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명 인간은 나름 해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또한 감동의 느낌과 해석에 의한 느낌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그럼 그 차이는 무엇일까 이 글을 읽다 보면 비평은 새로운 창작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 같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예술작품을 논하는 것은 조금은 월권 같은 행위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리뷰를 쓰고 있다. 대부분 취미생활이지만, 일군의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리뷰를 쓰고 있다. 어떤 소설을 읽고 거기에 대한 느낌을 쓴다는 것과 어떤 이론에 대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글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대부분 리뷰어들은 글 쓴 저자에 비해 그 분야의 지식이 모자라는 편이 일반적이기에 작품에 대한 비판은 쉽지가 않고, 그릇된 비판을 하기가 쉽다. 물론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전문적인 리뷰도 가능하겠지만. 또 전문적인 평론가나 작가들의 평론을 접하게 된다. 잘 쓰여진 평론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저자의 의도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새로운 감동을 선사한다. 하지만, 많은 평론은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을 위한 말 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 과연 예술작품에서 평론은 필요가 없는가? 평론은 필요하지만, 진정 작가의 의도와 예술의 가치를 밝혀 줄 평론이 필요한 것이지 전문적이고, 소수적인 그들만의 언어로 펼치는 평론은 자제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예술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적인 감동과 아름다움, 적절한 평론이 어우러지면 예술은 더욱 풍성해지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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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 세 명과 함께 서울 방배동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차고를 개조하여 월세로 놓은 곳이니 난방이 될 리 없었고, 도로 쪽으로는 홑겹 유리 미닫이문이 셔터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면 문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지만 우리는 하나뿐인 연탄난로 주변에 모여 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곳이 마치 로마시대의 지하묘지처럼 음산하다며 '카타콤'이라고 불렀었다.
술도 못 마시고 전공도 전혀 달랐던 나는 물과 기름처럼 좀체 섞이지 못하였다. 그들로부터 가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안주감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캔버스에서 살아나는 갖가지 형상들과 붓을 잡은 손의 유연한 움직임이 그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재미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밤이 늦도록 이젤 앞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기곤 하던 그들과 달리 나는 밤이 깊었다 싶으면 으레 냉기가 도는 침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준 후, 간신히 고양이 세수를 마치면 서둘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곤 했다.
그때 같이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은 미술대학으로 유명한 H 대를 다니다가 1학년말 작품 전시회에 걸렸던 자신의 작품에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이듬해 D 대학 천안 캠퍼스에 재입학 했었다. 당시 그는 전시회 작품으로 정부미 포대를 똑 같이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만 그리면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정부미'를 '전부미'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전두환 정권이었던 당시의 사정은 예술이든, 언론이든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공안정국의 삼엄한 분위기는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검열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친구는 그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교수님과 학교 당국에 호소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친구는 D대학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미술 관련 모 사단법인의 이사장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사의 평가는 언제나 평론가와 그 시대의 권력자의 몫이었다. 당사자인 작가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시되기 일쑤였고, 의식 있는 평론가의 항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인 지금도 통치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은 법의 잣대로, 또는 평론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처벌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이 책은 예술사에서 평론가의 부당한 해석을 작품을 예로 들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이 당시의 평론가에 의해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일반 독자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부당한 평론가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언어 폭력범이 될 수도 있음이다.김태호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혹은 다른 예술의 영역이든, 당신이 에술을 '살기로'작정했다면 이 책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결의를 굳건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당신이 미학이나 예술사 혹은 예술평론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이 책에서 그 학문이나 활동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예술의 메인 이벤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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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음악과 미술분야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할 수준이라서 안타깝습니다. 물론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음악과 미술분야에도 전문가 수준으로 활약하시는 분들이 많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라도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박물관 혹은 미술관은 꼭 찾아서 감상하는 것은 나도 그곳에 가보았다고 주장하기 위한 체면치레용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는 평론을 읽게 되면 당연히 ‘그렇구나!’ '아하! 이렇게 해석하게 되는구나‘하고 감탄하게 되니 귀가 얇은 것이라기 보다는 눈아 얇다고 해야 되나요?
그런 저의 편견을 깨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로저 킴볼의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입니다. 예술이라고는 번역하였지만, 미술평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판의 정도가 상궤를 넘어 충격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리뷰의 제목을 ‘평론을 난도질하다’라고 적게 되었습니다.
“능수능란한 글 솜씨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무장한 일부 평론가들의-특히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누리고 있는 일부 평론가들의-지나친 정치의식 또는 정치적 의도가 예술 행위 자체를 중심에서 밀어내버리고 마치 자기네들이 주체인 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김태호교수님은 추천사에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학구적인 예술사의 본질이 어떤 식으로 점차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연구,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정신분석 등) 학계의 여러 가지 급진적 문화정치의 볼모로 붙잡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명의 거장 화가들과 그들의 걸작들이 오늘날 몇몇 예술비평가와 철학자들에 의해서 터무니없이 재해석되고 진보적 이념의 환상에 끼워 맞추어지는 역겨운 모습이 저자의 재기발랄한 문제초 여지없이 폭로된다.”고 출판사는 요약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리는 왜 예술사를 가르치고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답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술에 대해 배우기 위함은 물론이고, 예술이 전개된 문화적 배경에 대해 배우는 것, 예술의 발전에 대해 배우는 것, 그리고 역사의 진행에 따라 예술가들이 어떻게 ‘문제들을 풀어갔는가’에 대해서 배우기 위함이다.(26쪽)” 그런데 “그 예술사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개입의 한 형태’라는 관점에 대해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 책(57쪽)”이라고 저자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술작품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여지가 많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이해한다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의적 해석도 정도껏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특히 대가의 작품을 제멋대로 찟고 발기는 행태는 눈뜨고 봐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평론을 평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평론을 평하는 수준을 넘어서 난도질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는 말씀을 숨길 수 없습니다.
저자의 감시망에 걸린 평론은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그리고 반 고호에 이르고 있으니 그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보아도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쿠르베일까 궁금했는데, 쿠르베의 작품을 평한 존즈 홉킨즈 대학교 마이클 프리드교수는 전방위적인 해석의 왜곡과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이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쿠르베의 작품이 선두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최근에 연재를 마친 칼럼에서 다른 분의 글을 인용하여 조목조목 따져들어가는 형식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자 역시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어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리드교수는 (…) ‘쿠르베가 연극적인 것을 패배시키기 위해 취해야만 했던 방법들은, 그가 생산했던 예술이 흔히 구조적으로 여성적인었다는 것을 표했다.’고 주장한다.”라고 인용하면서 ‘구조적으로 여성적인 예술’이 도대체 뭐고, 그렇다면 ‘구조적으로 남성적인 예술’은 또 뭐란 말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에 대한 저자의 거칠고 날선 비판은 읽는 사람의 흥미를 끌어올리는데 충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읽다보니 참 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사전트의 작품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을 주목할 많한 그림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저자가 이 그림이 바로 보스턴미술관에 걸려있다는 친절한 소개까지 곁들였는데, 불과 몇 주일 전에 방문했던 보스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사뭇 가물가물하다는 것입니다. 미리 이 책을 읽었더라면 사진도 찍고 더 자세히 살펴볼 걸 그랬다 싶습니다.
'The Rape of the Masters'라는 상식 밖의 제목을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라는 거침없는 제목으로 옮긴 옮긴이의 기발함도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미술 평론 역시 회의주의적 시각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도판을 책 한가운데 모아 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림을 왜곡해서 해설하고 있는 부분에 넣어 쉽게 그림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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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그 작품을 보는 순간 느끼는대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확실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그 작품을 감상한다면 내가 모르던 부분들을 많이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미술사조의 변천에 따라서 그 작품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어떤 상황에서 그리게 되었는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공부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되고, 전시회장을 갈 때에 도슨트 운영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예술 작품보다 더 장황한 배경설명이나 평론들이 그 작품을 돋보이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 미술작품에서는 더욱 그런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전에서 'R.Mutt'라고 사인한 남성 소변기를 <샘>이란 작품명으로 출품했던 '마르셀 뒤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서는 거절을 당했지만, 기존의 예술 개념을 깨뜨린 '개념예술'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쳑했다는 것이다. <샘>이란 예술 작품 하나만으로도 예술, 그리고 평론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사진 출처 : Daum 검색)
평론이 어떻게 예술 작품을 '엿 먹이'는가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그럴듯하게 예술 작품들을 과대 포장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는 작품을 천재의 작품인양 평가하기도 하고, 미적, 성적인 면에서 역겨울 정도인 작품을 이것은 예술 작품이니까 하면서 미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거장들을 범하는 것이다. 어떤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위대하다고 생각해 왔던 기존의 생각을 공격하거나 희석시키거나 때로는 전복시키고자 하는 평론을 쓰는 것이다. 이런 평론은 예술 작품에 대한 책을 몇 권만 읽어 보아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 "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는 예술사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개입의 한 형태'라는 관점에 대해 반격을 하고자 하는 책이다." 고 저자가 말하듯이 예술 작품이 평론가들에 의해서 어떻게 능욕당하고 있는가를 (평론계가 예술을 '엿먹이는'가를) 이야기한다.
저자인 킴볼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7명의 화가들의 작품이 평론가들의 능숙한 글솜씨, 화려한 미사여구에 의해서 어떻게 평가되었는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반 고흐에 대해서 그가 알고 있는 '엿먹이는' 평론의 사례를 이들 화가의 이야기와 함께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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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 이야기이니, 그에 해당하는 작품이 함께 실려야 이해가 빠르겠으나, 작품 사진은 책의 중간에 몇 장이 한꺼번에 몰려서 실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 장을 다시 그 부분으로 펼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작품 중에는 폴 고갱의 <죽은 자의 혼이 지켜 보다>가 있다.
" '예술가 고갱'은 그 어디에도 없다. 폴락 교수는 페미니스트적 논박을 하기 위해 예술을 버렸고, 아이젠만 교수는 다양한 도착적 환상을 위해 예술을 버렸다. 둘 다 참으로 말도 안 된다. 그들에게 영향력만 없다면, 그들의 글으 그저 웃어 넘기면 그만 일 텐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들은 완전 혐오스럽다. " (p. 221) 폴락 교수와 아이젠만 교수가 폴 고갱의 <죽은 자의 혼을 지켜보다>에 대해서 어떤 평론을 썼는가는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인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에서 또는 도착적 환상에서 이 작품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작품을 그린 폴 고갱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는 염두에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유명 평론가들이기에 그들의 이런 평론은 그대로 작품을 이해하는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오류적 평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는 감상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로 남겨지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한 켤레의 신발>도 하이데거의 평에는 반 고흐가 실제로 이 그림을 그린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철학적 시나리오에 그의 그림을 끌어 들이는 사례가 되는 평론이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의 드높은 변주곡들은 반 고흐의 예술과는 별반 관계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의 평론에 귀기울일 수도 있으니... 저자는 이 작품에 대한 데리다의 평을 '말장난', '요점없는 추상화 볶음 요리'라는 표현까지 쓰게 된다. 그러나 예술 작품에 대하여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나 감상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평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그들의 허튼 소리와 얼토당토 않은 평(글)을 그 평론을 쓴 사람의 인지도만을 믿고 그렇게 생각해 버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예술 작품들, 그리고 문학 작품들을 대하면서 그 작품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대사조에 따라서 작품들이 엉뚱한 평가를 받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 (...) 예술이란 이름 아래 창조되는 모든 작품 또는 행위를 정지적 올바름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엿먹이는' 수많은 이론가들이나 철학자들에게도 일침을 가하는 " (추천사 중에서) 그런 책이 필요하기도 한데, 그런 의미를 가진 책이 <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번역한 '역자의 말'을 읽어 보면 이 책을 쓴 킴볼 역시 " 좌파, 페미니즈, 포스트모더니즘, 성적 정체성 같은 관점에서의 해석들이 난무하는 데 대한 반작용이기는 하겠지만, 킴볼은 반대로 너무 우파적, 보수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 킴볼의 태도는 듣기에는 참으로 좋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순수할 때에만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말이 된다. " (p. 254)
어쩌면 좋을 것인가? 킴볼은 예술 작품의 이해에 있어서 교수들이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서, 감상자들이 스스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데에 오류를 범하는 것을 걱정하고, 평론가들의 평이 자신들의 생각에 지나치게 좌우되는 것을 염려했는데, 역자는 오히려 그런 저자의 생각들이 너무 한 방향으로 쏠리지는 않았는가를 또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훌륭한 예술 작품이나 문학작품에는 훌륭한 해석들이 존재하며, 그 해석은 그 작품들을 대하는 우리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준다는 말을 한다.
여기에서 내 생각을 말하자면, 훌륭한 작품들에는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이 올바르다면 우리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 해석 자체에 어떤 사심이 들어가 있다면 우리들이 작품을 대하는데 큰오류를 가져 오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평론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내려놓는 마음은 경쾌하지가 않다. 그동안에 평론이 작품을 위한 평론이 아닌, 평론을 위한 평론, 작품을 치장하기 위한 평론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평론에 대한 불신이 더 가중되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대할 때에 내가 느끼는 그것이 곧 내가 그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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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능욕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능욕’이란 “1.남을 업신여겨 욕보임. 2.여자를 강간하여 욕보임.”의 사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평의 내용으로는 조금 과격한 말이라 생각할 수 있다. 왜 이런 말이 사용되었는지? 거장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비판의 상태를 넘어 능욕의 수준이 되는 내용을 살펴볼 수가 있을 듯해서 마음에 감긴 글이다. 읽으면서 ‘엿 먹인’이란 감각적인 표현이 소통될 수 있는 내용인지 확인해 보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였다. 책은 거장 화가들이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평론에 의해 어떻게 그 명예가 훼손되었으며,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는지 일곱 명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하나씩 택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명작들에 대한 독특한 시각으로 평론가들의 생각이 펼쳐진다. 기존의 명작에서 작품을 주관적인 잣대로 관찰하면서 그들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보여 준다는 말이다. 그들은 화려한 어휘를 구사한다. 꿈 보다 해몽이라고 제멋대로의 해석을 붙이고, 심지어 창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기성의 작품을 난도질한다. 이런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와 야합한 예술행위 자체를 중심에서 밀어낸 비평이다. 이럴 때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분석된다. 뜻하지 않은 일들이 타인에 의해서 윤리적 올바름의 문제와 관련되어 논해진다면 황당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비평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다. 당대의 이데올로기도 한 몫을 한다. 그런 것들이 중심에 서고 예술적인 표현이 가장자리에 설 때 예술비평의 내용은 상당히 다른 색깔을 띠고,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라 여겨진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 주변 환경들에 얽매여 평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글의 작가는 그러한 생각에 기반을 두고 기존의 억지 비평, 특히 정치색에 의해 왜곡된 비평을 예를 들어 우리들에게 보여주면서 작품의 진짜 가치를 찾아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많은 예들이 작가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쿠르베의 그림들에 의한 프리드 교수의 이해는 자신의 연극적, 연극이란 말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이론을 동원한 왜곡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사실적인 쿠르베의 그림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 성적인 흐름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프리드 교수의 견해이고 그것은 작가가 들으면 너무나 허황되게 생각할 작품의 이질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이다. 쿠르베의 작품에 대한 생각은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존재하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추상적으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해석하는 잘못을 범하면서 작품을 능욕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적으로 생명력을 지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프리드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너무 작품을 부정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논지다. 러시아 출신 화가 로스코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다. 그는 이야기가 담긴 사실주의 화가로 인정받기 위해 평론가들에게 강권하여 그의 생각에 동조할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대해 피터 셀츠와 애너 체이브 등은 은근한 농조의 현란한 언어로 의미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작품의 본질이 훼손되는 결과가 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또한 사전트의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이란 작품에 대한 루빈교수의 해석은 가관이다. 이 작품은 집단 초상화로 섬세함, 굴곡, 개연성, 충만함의 문명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루빈 교수는 이 작품에서 왜소함과 억압된 동성애적 경향 등의 말을 이끌어내고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제시된 것들을 성적인 요소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다. 내용의 신빙성은 도외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극대화하여 작품에 농담을 거는 듯함을 느낀다. 루벤스의 ‘술 취한 살레누스’는 찬탄할 내용이 많다. 역동적인 잎사귀들, 과일들 또 인상적인 인물, 피리 부는 사타로스들, 젖을 빠는 판신들, 흥겨운 법석꾼들 등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많다. 그런데 앨퍼스 교수는 여기에서 여자 사타로스가 아이들 중 한 명에게 젖을 주면서 이아이게 페니스를 만지작거린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항문을 통한 성적 해결의 그림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어불성설로 작품을 능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윈슬로우 호머의 만류에 대해 보임교수의 인종주의적 해석, 고갱의 그림에 대해 아이젠만 교수의 다양한 도착적 환상으로 본 내용, 반 고흐의 그림에 대해 말장난으로 일관하고 있는 데리다의 이해 등은 작품을 겉으로만 파악하는 무의미한 평론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런 평론들이 기존의 출중하고 뛰어난 작품들을 독자들에게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비평가들의 의무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가진 글이다. 그렇다. 작품의 감상은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관념으로 하는, 현란한 언어로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 작품은 감상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그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잘못된 비평의 여러 경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리고 기회에 여러 작품을 감상해 보는 행복도 함께 누렸다. 예술 작품을 대하는 참된 평론이 독자들의 시선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명화들을 순수하게 감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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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도조무의 수필집에서 평론가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글을 읽었다. 작가의 입장에서 평론가들의 평론 몇 개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에 영향을 미치고 더 나아가 대중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독자 혹은 감상자의 입장에서 난해한 작품의 평론은 그 작품에 대해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다. 문제는 이 평론이 바람직한가 아닌가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작품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고 좋은 평론을 만들어 내는 가 하면 어떤 평론가는 그냥 자신의 생각가는 대로 평론을 해서 이상한 평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권위있는 평론가라고 모두 바른 평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어떤 영화감독의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영화감독이 말하길 자기는 그냥 찍었는 데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의미를 붙여서 뭔가 있는 것 처럼 만들어 주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보이는 대로 그냥 찍었는 데 그것을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감독의 시선이 독특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뻗어나갈 소지가 있는 시선을 평론가들은 더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처럼 평론은 작품이 지닌 가치보다 더 많은 가지를 만들어서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좋지 않은 평론을 꺼내서 비판하고 있다. 글쓴이는 무시하는 편이 비난하는 것 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면서 평론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집어서 이야기 한다. 하지만 원문을 보지 못하고 작가의 이야기만 듣고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알기 어려운 점이 있다. 책에서는 자세하고 이것은 말이 안된다 혹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의 어조로 자주 이야기하는 데 이런 이야기를 한 권을 들어서 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도 든다. 작품의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알 수 있었지만 배경지식 없이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아쉽다. 책의 내용이 어려운 것도 어려운 것이지만 글쓴이가 하고 싶은 말을 너무 자세히 그리고 장황하게 많이 해놓았다는 느낌이었다. 단지 좋지 않은 평론에 대해서만 말하기 보다는 좋은 평론과 대비해서 말해보는 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는 평론을 평했다는 것에 가치가 있다. 특히 권위있는 평론가의 평을 평함으로써 평론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보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사실 대부분의 예술의 시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위 말하는 보통 사람에게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예술로써 발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어떤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 자신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솔직하게 큰 감흥이 없었다고 용감하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혹 그것이 피카소의 작품이더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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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삶을 간접적인 방법(책, 문서, 신문..)으로 들여다보거나, 쉽게 접근하기 위해 평론가들의 설명이 곁들여진 것을 참고로 하여 작품을 이해하거나 내 머릿속에 그 정보들이 얕으나 깊으나 저장이 되어진다. 그리고 다음번에 다시 그 작품을 대하게될 때 작품뿐 아니라 그 화가까지 훨씬 친숙하게 다가오게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멀게만 느껴졌던 예술들이 기분좋은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통이 미술작품과 독자와의 거리 뿐 아니라 화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면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것일까? 바로 작품과 화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평론가들의 그릇된 의식의 표출이 수면위로 뜨게 된다. 미술 평론가들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책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이다.
다분히 공격적이고 날센 어조를 풍기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 오호라~~~~~ 제목 자체에서 느껴지듯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다. 직설적인 화법에 어느 부류의 사람들이 뭇매를 맞을 태세이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읽어보니 정말 발칙한 책이었다.
윈슬로우 호머 <만류灣流> 1899년
디에고 로드리게스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년
빈센트 반 고흐 <한 켤레의 신발> 1886년
책에는 8편의 그림들이 나와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풍요로운 미술사의 유산들이다. 그런데 이 그림들이 무작위적으로 편파와 왜곡은 물론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름 하에 능욕당하고 있다. 미술계에 꽤 이름들이 알려진 예술비평가나 교수, 철학자들에 의해 까발리고 찢겨지고 있다고 하면 너무 도가 지나친 억지스러움일까?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꼭 베일을 벗겨아만 자기들의 있는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는것처럼 그들 평론가들은 입맛에 맞는 먹잇감을 구하러 다니는 잔인한 사냥꾼 같다.
1836년 보스턴 중산층 가정(아버지는 철물상, 어머니는 수채화가)에서 태어난 윈슬로우 호머는 자신의 그림 <만류>에 대한 글에서, '내가 그린 그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묘사나 해석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매우 유감이네요' 라고 언급했다.
화가가 그림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렸다면 그것은 이미 화가의 품에서 떠난 그림이었을 터... 순수하게 자신이 경험했거나 평소 그리고 싶은 주제의 그림들을 그렸을텐데.. 이런 그림들을 불순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저자의 신랄하고 진정성 있는 위트와 글 감각에 속이 후련해지는 듯 했다.
분별없는 평론가들로 인해 작품이 성(性)적 타락과 말도 안되는 인종차별주의에 빗대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페미니즘과 식민주의, 공상과학,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신분석.... 말만 들어도 힘겨운 용어와 단어의 틀 구조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예술사와 미술을 폭넓게 알기를 원하고 즐겁게 이해하며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독자들의 알 권리를 충분히 헷갈리게 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드니 아찔하는 듯 했다.
이 책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 어떻게 하면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며 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직설적이지만 명쾌하게 말한다. 예술은 어쩌면 지식과 이성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가슴으로 맞이하는 설레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미술평론가들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평론가들이라면 미술작품에 대해 더 신중하며 더욱 깊이있는 안목이 필요하리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릇된 사고와 편견으로 인해 우리네 예술 유산들이 사장될 수 있으니깐...
책에서 재밌는 그렇지만 조금은 덜 유쾌한 씁쓸함이 감도는 저자의 글에 눈이 멈춰진다.
"거장들을 능욕하는 '학자'들도 진지하지만 않다면 재미있게 읽힐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지하다. 그들은 풍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헐뜯기 위해서 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전적으로 비예술적인 어젠더를 추구하려고 예술의 권위를 이용해먹을 따름이다. 예술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미적인 것이 아니라 숨은 저의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p36)
이것이 바로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의 단순하면서도 가슴 철렁이게 만드는 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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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 중에도 억지 끼워맞추기의 대가가 있는 모양이다. 거장 화가들의 걸작을 자기 마음대로 재해석하고,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이념(페미니즘,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정신분석 등)을 억지 끼워맞추는데도 이들을 실력있는 비평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라는 책에서 이같은 아이러니한 사실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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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라는 제목을 보고 정말 획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제목이 주는 강함이 있어서 왠지 끌리는 책이다.
예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보고 싶은 사람으로 평론가들의 이야기도 때론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나 정치적인 성향에 치우친 평론들은 거슬리기도 했다.
평론가들의 지나친 정치의식 또는 정치적 의도가 예술 행위 자체를 중심에서 밀어내버리고 마치 자기네들이 주체인 양 행세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예술에 관한 한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게 아니라 '눈'이 있고 '가슴'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추천사中
예술작품까지 정치적인 의도로 평론을 하는 자체가 맘에 들지 않는다. 사람들을 우매하게 만드는 것이지 싶다.
예술에 대한 공격은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첫번째 방식은 그럴듯한 과대포장의 과정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어, 그저 평범한 것을 두고 대단한 천재의 작품인 양 쌍수를 들어 맞이한다든지, 또는 잔순히 역겨운 것을 예술이나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고양시켜 주는 것인 양 하는 것이다. 예술이 근본적으로 더 이상 미적 성취의 관점에서 판단되기를 멈춰버인다면, '평등주의', '무정부주의', '기회주의적 허무주의', '허깨비 혁명 정치학' 같은 끈덕진 유행병에 물들어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P33
정치에 사람들의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든 3S(스포츠, 스크린, 섹스)처럼 예술 작품을 평론하는 사람들 마저 성적인 부분들로 평론을 한다든지 정치적 성향으로 해설을 하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우매함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 예술작품을 느낄 수 있도록 예술을 어렵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이에 낀 존재로 보고 있고, 따라서 어느 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니체의 말을 빌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류라고 간주한다. 좌든 우든, 중요한 것은, 훌륜한 문학이나 그림이 저기 있다는 것이고, 때로는 문학이나 그림에 대한 훌륭한 해석들이 존재하며, 그 해석들로 인해 우리가 더욱 감동받는다는 사실이다. -P255
예술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럿 읽는내내 기분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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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찾으면 사람들마다 작품을 보는 모습이 다르다. 바짝 앞으로 다가가서 모든 작품을 꼼꼼이 챙겨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찌감치 떨어져서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보다가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으면 주의에서 보는 사람 등이 있다. 저마다 자신만의 눈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느끼는 것 같다. 이처럼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신의 시선으로 작품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예술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 사상을 예술이라는 형태로 표현한 만큼 여기에 어떤 기준이나 잣대를 들이대고 좋다, 나쁘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지 않을 수 있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다. 비평이 없으면 물은 고이게 된다. 작품의 질적 향상과 창작 의욕을 높이기 위해서 평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대로 된 평론 문화가 자리를 잡는다면 예술계는 좀 더 발전하고, 작품을 즐기고 감상하는 일반인들에게도 좋은 일이 된다. 예술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작품을 창작하는 예술가들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평하는 평론가들도 중요한 이유다. 평론가들은 예술 작품에 대한 전문가들이다. 일반인들의 시각과는 다른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평하고 논한다. 그래서 평론가들에 의해 새롭게 재조명이 되는 작품이 생기기도 하고, 평론가들의 한 줄 글에 의해 전혀 가치 없는 작품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평론가들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 또한 중요하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철학, 심리학, 인문학 등 전문적인 용어를 가져다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요리를 하는 평론이 있다. 아예 작정을 하고 쓴 평론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어오는 그런 글들이 있다. 작가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도 있다. 책은 이처럼 주객이 전도된 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지은이는 쿠르베의 ‘사냥감’에서 거세에 대한 불안감 등 정신분석을 이야기하고, 마크 로스코의 ‘무제’라는 추상화를 읽혀져야 할 텍스트로 보고 설명을 하려고 하며, 사전트의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을 그림 외적인 것으로 읽으려 하고, 루벤스의 ‘술 취한 실레누스’와 고갱의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보다’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윈슬로우 호머의 ‘만류(灣流)’를 인종차별주의적 시선으로, 반 고흐 ‘한 켤레의 신발’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는 일부 평론가들의 태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한다. 이 책의 원제가 “The Rape of Masters"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은이는 예술가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작품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석하는 비평가들의 행위를 거장 예술가들을 능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과연 이런 글을 보는 일반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지은이는 작품에 대한 자의적 해석 보다는 작품을 작품 자체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지은이가 살펴본 것처럼 예술 작품에 대한 터무니없이 해석이나 자의적인 설명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평론은 페미니즘적 해석, 포스터모더니즘적 해석, 정치적인 좌파적 해석 등 하나의 시선으로만 작품을 들여다보는 비평과 라캉, 데리다, 벤야민 등의 글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많은 평론에 단골 손님처럼 등장하는 점이다. 지은이와 같은 전문가가 이런 글들을 비판할 정도니,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평론을 읽을 수조차 없다. 물론 비평이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지은이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지은이가 이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작품을 작품 자체로 대하지 않고, 정치적인 색깔을 입히려는 평론 문화에 일침을 가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전문가들만의 영역으로 치부된 채 자신들끼리의 말놀음으로 일반인들과는 유리된 채 자의적인 해석을 하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작품은 작품 자체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