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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로 널리 알려진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돈에 관해 쓴 글이다. 신랄하고, 적확한 문장이 연속이다. 여유만 있다면 책 전체를 메모하고 싶을 정도였다. 허투루 쓴 문장이 하나도 없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나라, 프랑스와 미국이 돈을 대하는 태도. 돈과 사랑. 이데올로기론. 반자본주의 사상가, 종교인을 향한 조소.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거참, 돈 안 밝히는 척 하지 마요. 돈 있으면 편하고, 돈 생기면 좋잖아요."
저자가 비판하는 사람, 그러니까 모든 걸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20대 나였다.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조소하는 네그리, 월러스틴 글을 좋아했고 진짜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지. 돈을 향한 태도와 사유가 바뀌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면서 세월은 흐르고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더군.
문제는 시장보다 이데올로기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푸틴이 경제를 생각했다면 전쟁을 일으켰을까? 경제보다 위대한 러시아라는 민족주의적 신념이 전쟁을 추동했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은 대만을 침공할까? 글로벌 공급망을 생각한다면 안 일으키는 게 답이다. 하나의 중국, 통일이라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더 세게 작동한다면 대만 침공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여러 전문가의 지적이 생각난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는 책도 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인간의 신념이다. 돌이켜 보면 그러한 신념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역사적으로 흘러갔는지를 공부하기 위해 종교학을 전공으로 한 거 같다. 제대로 공부하기도 전에 졸업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무조건 돈을 향한 욕망을 긍정하고, 모든 사람이여 돈을 벌기 위해 눈이 벌겋도록 노력하라, 이런 자기계발적 메시지를 던지는 건 아니다. 부자도 불쌍, 가난한 사람은 더 불쌍한 게 현대사회라고 평가하며 니체를 끌어온다. 지나친 격차는 공동체를 해하니 어느 정도까지 허할지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돈 생각하면 글 쓰고 생각하는 걸 업으로 절대 삼지 말라는 자폭 개그도 인상적이었다. 여하튼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보다는 덜 팔린 듯하다.
--- 돈은 빤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중 하나다. (중략) 돈은 천박하면서 고귀하고, 허구이자 현실이다. 돈이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고 맺어주기도 한다. 돈은 너무 넘쳐나도 두렵고, 너무 모자라도 두렵다. 돈은 악을 행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을 행하는 악일 수도 있다. (11쪽)
이 세상에서 돈이 제공하는 유일하게 정말 귀한 값어치는 시간, 마르지 않는 시간의 풍부함이다. 이런 면에서 돈이 자유를 줄 수 있다. 돈이 너무 없으면 생이 우리를 감금하는 영원한 현재로 제한된다. 나는 늘 밥벌이와 살아야 할 이유를 구분해왔다. 때로는 그 둘이 일치했지만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13쪽)
욕심 많은 사람은 사유와 글쓰기 분야의 일을 당장 때려치워야 한다. 대기업은 이쪽 일을 택한 자들은 잘 먹이고 입히지 못하면서 팔자 좋은 문화적 무산계급만 양산한다. (문인 활동에는 이와는 다른 만족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23쪽)
걸인처럼 살아가겠다는 가난에의 의지, 무소유 취향은 근대인의 눈에 비이성적으로 비친다. 가난한 자들의 탁월한 위엄 대신 노동의 탁월한 위엄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49쪽) 이제 돈벌이는 아무 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었다. 한편, 가난은 신학적 가치를 보존했찌만 신앙이 처하는 일종의 시험으로 간주되었다. 요컨대, 가난은 극복해야 할 시험이지 덕으로 추앙받을 일은 못 된다. (49쪽)
프랑스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부러움과 시기를 사지 않으려면 소박한 척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프랑스인과 반대로 부를 과시한다. (58쪽)
프랑스인이 가장 목소리 높여 성토하는 것은 소득불균형이다. 하지만 프랑스인은 성공도 경계하고 의심스러워한다. 그들은 성공의 이면에 늘 수상한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렇지만 미국에서 성공은 과장이 심한 미국인을 만드는 바로 그 요소다. (중국과 인도도 사정이 비슷하다.) (63쪽)
금기는 실제로 완전히 금지된 것이 아니라 욕망과 쾌락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66쪽)
경제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프랑스에서 돈에 대한 비난은 더욱 강경해졌다. 이데올로기의 정의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 시장경제로부터의 가설적 탈출을 꿈꾸어보는 것. 우리 동포 가운데 일부가 이제 인간답게 살아갈 도리가 없으니 이제 우리는 번영은 그들을 타락으로 이끈다고, 진정한 부는 재화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고 설명할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 금송아지를 실컷 욕하면 기분전환이 된다. (67쪽)
모름지기 모럴리슽는 혐오의 대상, 자기가 성토한 악덕에 덜미를 잡혀 어느 날 갑자기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이 있다. (74쪽)
프랑스인은 주로 자기 계급에서 낙오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부의 장점을 누릴 수 있는 한에서, 부를 형식적으로 비판한다. (76쪽)
지금의 반자본주의에는 통찰, 비난, 예언이라는 세 가지 이론적 유익이 집중되어 있다. (중략) 자본주의는 지금 중세 유럽에서 사탄이 담당했던 역할을 맡고 있다. 자본주의의 죄목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다. 뭐가 좀 안 풀리면 다 자본주의 때문이다. 심지어, 자본주의의 적진에는 부족이 많기도 하다. 일단 공산주의에 향수를 버리지 못한 족속(프랑스에서만 꼽아보자면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현대성을 비판하는 족속(슬로베니아 출신의 슬라보예 지젝, 이탈리아의 안터니오 네그리), 반자유주의 보수파(장클로드 미셰아), 대재앙을 경고하는 메시아주의자(미국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탈성장을 부르짖는 급진적 환경주의자 족속(나오미 클라인, 니콜라 윌로, 장피에르 뒤피), 신앙인(교황 프란체스코, 이슬람 정통주의자 타리크 라마단), 극우-극좌 족속(마린 르 펜의 국민전선, 장뤼크 멜랑숑의 좌파전선, 올리비에 브랑스노의 반자본주의신당) 등이 있다. 이 사상가, 경제학자, 종교인 들은 자본주의를 열렬히 미워한 나머지 자기가 없애려는 체제에 꽤나 집착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다. 그들은 무조건 반대하고 본다.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쾌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원한다. 지성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는 망할 거라고 설명한 지 2세기가 다 됐다. (119~120쪽)
지금도 이 우화는 지속되고 있다. 부자들이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 수작은 좀 진부하지만 그래도 위기 때마다 팔자에 만족하라는 교훈을 그럴싸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부자들은 불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자임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저녁 8시 뉴스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부자를 본 적 있는가? 그리고 권태에는 계급 장벽이 없다. 오늘날, 권태는 노동자들의 삶에도 깊이 침투해 있다. 연신 하품을 하고 지리멸렬해하는 생활은 백수냐 직장인이냐와는 별 상관이 없다. 부자들이 전용기와 요트를 전전하는 호화로운 삶에 싫증을 낸다는 말은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가난뱅이들도 성냥감 같은 집에서, 서민용 임대아파트에서 넌더리 내기는 마찬가지다. (148~149쪽)
지금의 부자들은 대부분 큰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자가 아니라 단순히 돈의 힘을 무지막지하게 입증한 자들이다. 그들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은행잔고뿐이다. 그들의 기쁨, 그들의 여가는 여느 사람과 다를 것 없다. 그들은 이제 대단한 교양이 아니라 평범한 재미를 원한다. 부자는 보통 사람과 공간적 거리를 둘 뿐, 아예 의식 구조마저 달리하려 들지 않는다. 니체는 당시에 벌써 이러한 변화를 예감했는지 가난뱅이와 부자는 낮은 천민과 높은 천민일 뿐이라고, 즉 어차피 취향은 똑같은 부류라고 말한다. 가난뱅이는 "가시 돋친 원한"에 사무치고, 부자는 "음탕한 탐욕"에 좌우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오늘날의 세계란 그런 곳이다. 인정을 받기 위한 경쟁 속에서 천민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죽어라 달린다. (21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