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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늙은 여인의 고독한 일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익살스러움을 가미하여 그 무게를 덜어주고 있다. 집안에서 은둔자처럼 일상을 보내는 마테아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나중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여운처럼 독자들에게 남기는 듯하다.
내용물을 고심하다가 쪽지를 넣은 타임캡슐을 아파트 마당에 파묻을 때도, 114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때도, 게시판에서 본 ‘만남의 장소’에 나갈 때도, 이웃들과도 마주치지 않으려던 그녀에겐 나름대로 용기를 낸 행동들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 흔적을 남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평범하여 존재감이 없었던 마테아. 외롭게 보이지 않으려 애쓰던 그녀가 번개를 맞은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었다. 기대만큼 관심을 받지 못해 실망하지만 남편 엡실론을 만나게 된 것도 특별한 일이었다. 둘만 존재하는 삶이라는 표현이 그녀의 삶에서 남편과의 생활과 남편과의 소통이 전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함께 하던 일상도 특별할 것이 없는 나날들이었다는 것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현실 도피적으로 엉뚱한 상황들을 상상하는 장면들이 싱겁고 우습긴 하지만 스스로 고독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다.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단련시킬 수 있을까.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가면서 느끼는 많은 두려움들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애쓰고 있다.
자신의 재미없는 일상들을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서 독자들이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하지만, 혼자 남겨진 갑작스러운 외로움과 두려움을 그렇게 간신히 버티고 있었음을 책의 후반부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큰 용기가 필요했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즉흥적으로 노인에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인터뷰하는 장면과 늘 별말이 없던 오게B의 삶에 대한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죽음보다 삶이 훨씬 더 힘들다는 보행기 노인, 삶이란 원래 힘든 것이라는 오게B의 말은 그녀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시공사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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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이 책은 2009 ‘타리에이 베소스’ 상 수상을 했고, 2013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 최종 후보 작품이다. 처음에 생각보다 책이 작고, 얇아서 놀랐다. 하지만 내용은 깊고 여운이 길게 납니다. 주인공 마테아 마르틴센은 어릴 때 부터 참 짠했다. 어릴 때부터 눈에 띄지 않고, 출석부에서 불리지 못했고, 병돌리기 병조차도 선택되지 못했다. 벼락을 맞았을 때 벼락한테 선택받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 외로워보였다. 마테아는 운동장에서 돌멩이를 세고 있다가, 번개를 받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한 남자 아이들이 다가왔고 졸업 후에 그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와 자신 밖에 없을 정도로 그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하지만 그가 은퇴 후 사망을 하자 마테아는 큰 걱정에 휩싸인다. 그 동안 남편이 출근하고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주변 이웃들의 눈에 띄이지 않게 움직였다. 그렇게 남편이 죽자,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게 된다. 그녀는 고독사에 대해서도 걱정한다. 집에서 혼자 죽어 20년 뒤에 뼈로 발견이 될까봐..
이 책을 보면서 참으로 공감이 많이 갔다. 나도 혼자 오랫동안 살고 있어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 같아서 무섭고, 나도 고독사를 당할까봐 무서웠다. 다소 우울한 내용으로 흘러갈 수 있는데 마테아는 엉뚱한 행동한다. 자신의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벌인다. 평생 남편만 알고 다른 사람을 몰랐던 단절된 생활을 하다 주변에 섞이려고 하는 마테아의 노력은 짠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그녀가 왠지 나와 겹쳐보여 더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고독과 죽음. 이 책을 보며 나는 좀 더 일찍 주변과 소통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미리 읽게 되어 참 좋았다. 작가는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인데 이런 깊이 있는 책을 써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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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 셰르스리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 지음.
예순. 그리고 일흔. 그리고 여든. 그 이후의 삶은 어떨까. 60세가 더 이상 '노인'이 아니라 제2의 시작이구나를 부모님을 보며 깨닫는 요즘 문단에서는 여든을 넘어 이제 100세 할아버지 마저도 못마땅한 현실에 안주하고 죽음을 그저 앉아서만 기다리진 않는다. 오히려 길지 않은 남은 생, 좀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해 그들만의 도전, 또 한번의 리그를 유쾌하게 시작한다. 10년 이상 나이어린 여자친구와 멋진 연애를 하는 할아버지의 베이징 여행기, 인류의 굵직굵직한 사건현장에 어쩌다보니 함께 했던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 이어 이번엔 대인관계가 서툴지만 늘 언젠가는 인기인이 될거란 기대를 놓지 않는 할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심지어 이 할머니의 삶은 아주 드라마틱하지도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만도 않는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그녀. 마테아.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시시한 아줌마'가 이젠 동네의 새로운 '시계 아줌마'로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멋지진 않지만 그래도 운율은 맞출 수 있었다.
마테아.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세상에서 가장 웃기지만 그 사실을 본인만 아는 조금은 웃픈 할머니. 남편의 은퇴만 기다리며 그럭저럭 대인관계가 서툴어도 잘 버텨왔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건 어찌보면 그야말로 자기만의 세상에 너무 빠져있어서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이고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섣불리 사람을 믿었다가 그 사람에 의해서 완전하게 세상과 단전하게 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니까. 마테아는 적어도 마트에 장을 보러가는 정도의 외출은 이전에도 하였고 심지어 남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타인의 집 가정부로 잠깐이긴 하지만 사회활동을 시도해보기 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유머러스함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고 키우던 개 스테인을 자살인것 처럼 떠나보내긴 했어도 분명 자신의 실수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등 성격이나 성향자체가 이상하다고 보기에는 너무 억울할 수도 있다.
마테아. 그녀는 어쩜 보통의 우리와 너무 닮아 있다. 사회생활을 잘하고 못하고는 직장생활을 무난하게 견뎌내는냐로 판가름 나는 요즘 생계를 위해 버티기만 되는 요즘은 진짜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무엇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다. 마테아가 밤늦게 외출을 삼가게 된 까닭도 이웃 소녀의 납치사건이 계기가 되었던 만큼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녀를 변명해주고 싶은 안타까움이 들었다. 더군다나 유네와 같은 이웃이라면 나도 정말이지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중간 중간 예상치 못한 발랄함에 피식피식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가끔은 낯선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도 한다. 전화번호부에서 골라낸 불운한 이름들. 나는 주간지나 일간지에 실린 광고 사진을 오려내서 편지지에 붙이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오늘 단 하루만 한 상자에 5크로네! 헤우게루 슈퍼마켓으로 오세요."
정말 편지의 글을 믿고 슈퍼마켓을 찾은 누군가가 계산대 앞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을 상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기도 한다.
마테아가 그토록 원하던 남편 엡실론과의 사랑은 미혼인 내게 여러모로 부러운 모습이었다. 아내를 위해 서투르지만 상자를 만들어주고, 그 상자바닥에 사랑하는 마테아에게 라는 닭살스러운 멘트를 남기며 얼굴을 붉히는 엡실론의 모습은 그가 어떤 외모인지 여부를 떠나 오래도록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는 충분하게 느껴졌다. 물론 몇가지 세심하지 못한 부분도 보이지만 완벽하지 않아 더 좋은게 아닐까. 그런 엡실론이 그녀곁을 떠나는 순간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마테아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각인 시켜두기 위해 세상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려고 노력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녀뿐 아니라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이자 유일하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엡실론의 부제는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책에서는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지구에 남아 있던 사람들보다 나이가 덜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예를 들면, 엡실론과 함께 있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오게B와 마테와의 대화속에서 그녀는 삶이란 원래 힘든 것이고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자신의 삶도 나름 제대로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본다. 나의 삶은 얼만큼 제대로 였다. 제대로라면 그래서 기쁘고 행복한지 심지어 신께 감사한 맘이 드는지도. 저자가 병에 걸려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겨울 때 삶과 죽음에 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역자의 말에서 보았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또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보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엡실론과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 좋은 이웃을 만날 확률과 통계적인 수치는 어느정도일까 와 같은 그런 고민들.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라는 타이틀을 새삼 다시 읽어본다. 읽기 전 책소개만 접했을 때는 작아진다는 것이 죽음만을 뜻하는 줄 알았는데 다 읽고나니 비단 죽음뿐만이 아닌 것 같다. 얇고 술술 읽히지만 이 책은 아주 가벼운 듯, 다소 싱거운 결말이지만 그 짧은 시간 지금 내가 깊게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혹은 너무나 경솔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는지, 혹은 살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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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을 읽었을 때 내가 떠올린 인물은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979년생이라는 저자의 프로필을 접한 후였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엉뚱하다 싶은 인물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젊은이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죽음을 동경하는 염세주의자가 아닐까 했던 나의 짐작은 어느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마테아였고, 그녀가 엡실론이라 부르는 이와 함께였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는 듯했는데, 이는 그녀의 강렬한 바람에 따른 것이었다. 엡실론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성립조차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약해보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남편의 소개로 남의 집 살림을 봐주는 자리에 종사할 뻔했으나 자신이 만들어버린 견고한 성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이 인물은 그 일을 받아들이길 꺼려했다. 결국 그녀의 삶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나이 많은 여성들이 경제적인 독립이 불가능했던 게 과거의 일이라곤 하지만 그녀는 정서적으로도 엡실론에게 가히 의존적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는지는 고민을 하면할수록 의문만이 생겨났다. 모두에게 우스꽝스럽게 들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저자는 그녀와 엡실론의 결합을 설명했다. 번개를 맞아 눈썹이 다 타 들어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유일한 인물이 엡실론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동안 아파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엡실론 외의 모든 인물들이 무관심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그 이유로 마테아는 엡실론과 기꺼이 하나가 되기로 결심했던지도 모른다. 젊은 염세주의자로 마테아를 내가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그녀가 죽음을 의식한 행동을 한다는 점에 있었다. 버킷리스트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삶에 속한 동안 자신이 하고픈 일을 써 내려간 것이었다면 그녀가 마련한 리스트는 어떻게 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가를 고민한 흔적이었다. 이를 테면 나이든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가스불을 켜놓고 끄는 것을 잊어버린다든지, 유언장을 작성해보거나 자신의 장례식을 떠올려보곤 하는 식이다. 하지만 죽음을 향한 강렬함은 삶을 놓지 않으려는 열망과도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활활 집기가 타오르게끔 놔두지 않으며, 너무 오래 누워 있는 것에 대해서도 누워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가장 많다며 몸을 일으킨다. 현관문 밖에 며칠간 쌓아두었던 신문도 스스로 거둠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죽은 척을 해도 살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질투심이 강했다. 모임에서 다른 여성과 춤을 추는 엡실론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과 엡실론의 관계를 그 여성에게 드러내고파 안달을 낸다.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임신’한 몸매를 각인시키려 드는 그녀의 모습은 눈물겨워 보인다. 기회는 끝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식어가던 사랑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기회가 엡실론의 은퇴와 함께 찾아오는 듯했다. 24시간 붙어 있다고 행복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녀에겐 엡실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보였다. 주변에 대화할 사람 하나가 없는 그녀의 인생이 남편의 은퇴와 함께 드디어 꽃피는구나 싶었짐나 엡실론은 떠난다. 죽음에 의한 갈라섬.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왠지 이 죽음이 엡실론이 스스로 택한 게 아닐까 싶었다. 죽음을 원하던 건 엡실론이 아니라 마테아였거늘, 세상은 마테아에게 절대고독의 늪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과하게 동경한 죄를 묻는다. 이제껏 막연히 상상했다면 드디어 결행할 때가 왔다. 사랑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마저도 사라지고 난 마테아에겐 망설일 하등의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래 전 검은 물과 하나가 된 강아지와 하나가 되려 든 그녀의 선택은 존중 받을 것인가. 마침내 사이렌 소리가 그녀의 것이 된 것으로 보아 그녀의 선택은 어느 정도는 틀리지 않은 듯도 하다. 살아있다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온갖 스케줄에 스스로를 엮고, 한 치의 휴식조차 자신에게 선사하지 않는 이들은 어쩌면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일 수도 있다. 죽음을 생각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기를 바라며 바삐 움직였을 이들과 달리 저자는 등장인물에게 죽음과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그 대면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마테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유쾌한 게 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자 걸음을 빨리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작아질 뿐이다. 그런 게 인생이다. 삶과 죽음이 만나고, 결국에는 소멸하고야 마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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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첫번째 노르웨이 소설일 것이다. 북유럽 문학은 좀 우울하고 창백하지 않을까?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책장을 넘겼다. 어떤 면에서는 그 선입견이 맞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했다. 작품 속 마테아의 삶은 지독하게 우울하고 외롭고 비참하면서도 우스웠다.
우습다니? 일종의 블랙유머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삶은 죽음보다 더 고된 것일지도 모르고 나이가 많이 든 이후에는 죽음이 크게 두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작중 인물의 말. 하지만 나는 좀 생각이, 아니 표현이 다르다. 죽음은 삶보다 어렵다. 무의미하게 외롭게 처참하게 하루를 이어가며 삶이 지속되는 것을 바라보는 이의 고통도 끔찍하겠지만 (원하지 않는)죽음이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공포는 그에 비하면 더 극심한 괴로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죽음이 덜 두렵다는 데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 60세, 70세, 80세라고 해서 삶의 애착이 점점 줄어들거라는 건 어쩌면 젊은 사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직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았으니 그냥 머리로만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건 아마 80세까지 살면서 어쩌면 몇 번의 죽음을 눈 앞에서 마주했지만 그것을 피해 살아 남았기에 죽음이 덜 생소한 것일뿐 두려움의 총량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대한 애착과 같은 의미라면 말이다.
바나나는 수정 작용이 불가능한 식물이며, 열매를 맺으면 바로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씨 없는 열매를 지닌 거대한 풀이라는 이야기다. 붓다가 특히 바나나를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바나나의 무의미한 삶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절망적인 인간의 삶을 상징했기 때문이라나. 바나나처럼 구부정하고 암술과 수술이 없는 꽃의 소유자이며(폐경의 늙은 여자 노인), 곧 씨 없는 열매라고 자신을 묘새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보고있자니 바나나가 새삼 그렇게 무의미의 상징으로 존재하기도 하는구나 싶다. 그리고 나는 문득 마테아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재빠르게 돌아서 발길을 돌려 밖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일 것 같다. 아마 내가 조금 더 적극적인 인간이라면 마테아에게 바나나 파이라도 구워서 가져다 주겠지만.
집에서 홀로 텔레비젼을 보는 시간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가는 소식을 듣는 날들이 많아질 때, 그 때의 무력감과 우울감은 숨이 막힐정도로 잘 느껴져서 읽는 것이 힘들정도였다. 주인공이 선택한 삶의 마지막 하루는 영화의 엔딩컷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각자, 자신의 부고기사를 매일 써본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많은 생각할 거리를 선물할 것 같다.
나는. 나 **은...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오늘과 내일의 삶이 보다 선명해질 것 같다. 하지만 매일 자신의 부고 기사를 쓴 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겠지. 태어난 이상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죽음. 나는 어릴 때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 것이 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죽음이란 가능한 먼 미래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도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붙잡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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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에서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는가’에 대한 실험을 본 적이 있다. 피실험자들과 한 방에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 있었지만, 실험 결과 사람들은 그 특이한 타인을 그다지 기억에 담아두고 있지 않다는 결과였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는 사실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들이 다들 나만 바라보는 것’ 같이 소심해지는 경우를 종종 겪곤 한다.
이 책의 주인공 마테아는 그런 소심함이 극대화된 인물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봐 전전긍긍한다. 현관을 나설 때면 감시창을 통해 밖의 동정을 한참씩이나 살피고, 아침 신문을 들여올 때조차 이웃과 마주칠까 조심스러워 한다. 마트의 점원에게 단순한 도움조차 요청하지를 못하는 그녀는 114 교환원에게 자기 전화번호를 묻는 것으로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에게 의지할 것은 남편 엡실론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남편은 은퇴 후 세상을 떠나버리고, 마테아는 외로움과 공허한 삶을 근근히 이어간다. 그런 그녀는 ‘문득 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누군가가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상념에 빠지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죽을 확률이 가장 높다는 생각을 떠올리곤 ‘그렇다면 얼른 일어나야지’라는 생각도 한다.
마테아의 모습은 때로는 희화화되고, 때로는 고독하고 허탈해 보이기도 한다. 주인공이 이렇게 묘사된 데에는 ‘근육통성 뇌척수염(Myalgic Encephalomyelitis)’라고 불리는 만성피로증후군을 겪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많은 부분 작용한 듯하다. 작가가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느꼈을 인간적인 고통과 외로움, 죽음에 대한 고찰 등이 주인공에게 투영되어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의 일상을 따라다니는 듯 여겨진다. 감시창을 내다보는 그녀의 행동, 길에서 마주친 사람 앞에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남편 엡실론을 추억하는 그녀는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생명이라곤 비둘기와 고양이밖에 없다’고 읊조린다. 어렸을 때 구급차에 실리는 것이 꿈이었다던 마테다는 끝내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물속으로 잠겨든다. 그녀는 죽기 전, 시간을 물어오던 오게B씨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게B씨, 어쩌면 당신은 그리 어렵지 않은 삶을 일부러 힘들게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 말은 어쩌면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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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에 유머러스한 이야기라는 말을 왜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읽는 동안 매우 슬펐으니까요. 전혀 웃기지 않았고 마테아의 삶을 이해 할 것 같았습니다. 더욱 슬픈 건 이 여인이 나이가 많아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서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그리고 남에게 조금의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소심한 사람 마테아의 삶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주 착한 마음씨를 가진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한 그런 여인의 삶이었습니다. 타인에게 전화 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통계청에 다니며 매사에 철두철미하게 생각하는 남편과 일생을 같이 살았습니다. 남편은 그 여인의 모든 것이었고 그의 추억의 대부분은 남편과 같이 공유하는 추억이었고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생각만 하다가 작은 것 하나 실천하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에 더 고민을 많이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자신이 싫어서 빨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타인과의 교류가 적었기에 나의 흔적을 남겨 보려고 노력도 하고 추억이 담긴 물건도 담아 봅니다. 그렇게 타임캡슐을 만들어 봅니다. 그리고 나의 체취도 담아 봅니다. 어떻게 하냐고요? 종이에 지문 찍고 DNA 남기려고 크게 재채기를 하면 됩니다. 남편인 엡실론이 죽은 뒤 이 여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추억도 있고 후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만들어 놓은 많은 추억에 행복해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늙는 다는 것은 매사에 자신감을 더 없어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테아에게는 더욱더 소심한 사람이었기에 더 심하게 자신을 오르라 들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그럴까봐 무섭습니다. 누구의 눈치를 보느라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 많았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추억하며 현실을 이야기하며 이웃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생을 마무리 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유머러스하다고요?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지 못한 이 여인의 삶이 오히려 저는 더 안타깝고 슬퍼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마테아에게는 정말 큰일이었고 하루 종일 고민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내용이 공감이 가지 않고 재미있다면 어쩌면 너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요? 죽음을 맞이하는 여러 가지 모습 중에 가장 현실적이고 마음에 와 닿는 글이었습니다. 비록 소설이라 할지라도 많은 여성들의 삶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특히 저희 어머니들의 세대에서는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엄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너무 외로워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남은 날이라도 하고 싶은 것 눈치 보지 마시고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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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 자신에 대해 더 조바심을 갖고 조급해 할수록 내자신은 더욱 초라해지고 보잘것 없어진다는 정도의 뜻인가? 우리의 작가 '셰르스티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은 본인이 '근육통성 뇌척수염'으로 수주일 동안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던 때가 있었다. 이때 인간의 죽음, 외로움, 고통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느낌을 저자는 이책의 주인공 '마테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지않나 싶다. 마테아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놀랍도록 작고 보잘것없어서 남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죽음을 앞둔 백 살 가까운 할머니다. 주변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다. 오로지 남편 엡실론과의 삶이 전부이다. 남편이 은퇴 후 세상을 떠나버리자 찾아오는 외로움과 공허감은 마테아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외부사람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했던 마테아는 자신만의 삶에서 외부세계로의 탈출을 생각하고 여러모로 노력하게 된다. 남은 생애동안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감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 홀로 나왔고 떠날 때도 홀로 가게된다. 이 세상을 살아갈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지만 결국에는 혼자가 되고 만다. 또한 무리중에 있어서도 고독함을 느낄때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흔적을 남기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하고 알아줄까? 그냥 누군가 죽었다! 아니 죽었는지 조차 모를수 도 있다. 결국은 살아있을 때 좀더 더불어 살려고 노력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들에게 베풀줄알고 함께하는 시간을 갖아야 할지 않을까? 이책은 내자신의 삶의 무게를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더불어 남은 인생을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