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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이상 신경과 의사로 일했으며 그 경험을 십여 권의 책으로 남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올리버 색스의 미발표 글들을 모아 묶은 책이다. 최근에 그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텔레비전에서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그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작가의 자서전 『온 더 무브』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요즘 같은 시기에 필요한 것은 따듯함이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는 그의 일상, 두 번째는 치료 경험담, 세 번째는 노후의 사유들. 그의 글을 읽으면 솔직함과 유머, 따듯함이 함께 잘 어우러져 있음을 느낀다. 그는 멈추었지만 그가 남긴 책들을 통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는 올리버 색스를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나는 이 성실한 작가의 작품을 충분히 활용한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지금 내 나이가 그때 아버지 나이의 거의 두 배이며, 그렇게 오래된 기억이 나의 심금을 울린다는 사실이 나를 울고 웃게 만든다.
이렇게 마음을 잡는 문장이 보이면 줄을 긋고 '나의 심금을 울린다'를 따로 노트에 적어놓는다. 지금은 알지 못할 어느 시간에 나는 올리버 색스처럼 내 심금을 울리는 나의 부모님에 대한 어떤 기억을 찾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은 이어지는 틈으로 독서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생각하며 이국의 의사에게 감사할 것이다.
나는 평소 주기율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올리버 색스는 열 살 때 사우스 켄싱턴 과학박물관의 주기율표 앞에서 느낀 경험을 평생동안 자신의 신념과 삶의 원형으로 삼았다고 한다. 좋아하는 작가에게 희열을 주는 주기율표를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독자를 변화시키는 작가란 얼마나 멋진지!
올리버 색스는 유체이탈체험이나 임사체험이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뇌가 일으킬 수 있는 '의식과 경험의 통상적 범위'에 속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위 체험을 한 사람들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신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세 번째 밀레니엄에서 바라본 신>은 종교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으면서 종교에만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이었다. 알면서도 안 되는 것은 많다. 다이어트와 공부가 그렇듯이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젖어들게 한 내용이다.
1장과 2장에 비해 3장은 비교적 짧은 산문들이다. 길이가 짧은 만큼 내용엔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독서행위의 긍정성에 대한 내용을 소개해본다.
개인의 독서 행위는 기억과 경험만이 아니라 감각양식과도 제각기 독특하게 결합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 동안 단어의 소리를 듣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읽은 것을 시각화한다. 어떤 사람들은 문장의 청각적 리듬이나 강약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어떤 사람들은 문장의 시각적 모습이나 형태를 더 민감하게 의식한다.(316)
‘직접 읽기’와 ‘읽어주는 책 듣기’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가 책을 직접 읽을 때는 자유자재로 건너뛰거나 되돌아오고, 다시 읽고, 문장 한가운데서 심사숙고하거나 몽상에 빠질 수 있다. 그에 반해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것과 오디오북을 듣는 것은 직접 읽기보다 수동적인 경험이고, 타인의 음성의 변덕에 놀아나기 쉬우며, 대체로 내레이터의 페이스에 맞춰 진행된다.(317)
나는 몇 년 전, “21세기의 정보와 통신“이라는 제목의 패널 토의에 초청되었다. 패널 중 한 명은 인터넷의 선구자였는데, 자신의 어린 딸이 하루에 열두 시간 동안 인터넷 서핑을 하며 광범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내가 그에게 ”따님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나 그 외 무엇이라도 고전문학을 읽었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대뜸 ”아뇨, 내 아이는 그 따위 것들을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내 놀라움을 소리 내어 표현하며,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를 제대로 이해했을지 의문이고, 광범위한 정보를 습득했는지는 몰라도 정보는 지식과 다르며, 그녀의 정신은 얄팍하고 알맹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중의 절반은 박수갈채를 보냈고, 나머지 절반은 야유를 보냈다. (347~348)
평생 과학을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따듯함을 잃지 않았던 노의사는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까지도 글을 썼다. 이 책 마지막 문단을 옮기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책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을 전해본다.
세상을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신뢰한다.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며, 지금이 인류의 마지막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좀 더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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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더무브』에서, 『고맙습니다』, 『의식의 강』. 모두 이게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책이라 생각하면서 읽었었다. 그러고도 이 책이 다시 나왔다. 그런데 이건 속아서 사기 당하는 느낌이 아니라, 고마운 느낌이다. 이렇게 올리버 색스의 책은 더 이상 읽지 못하나, 싶다가, 하나씩 건져 올리는 느낌. 이건 당연히 고맙다. 이제는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책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읽는다. 이 책을 공동 편집했다는, 그의 마지막을 함께한 작가 빌 헤이스가 몇 권은 더 엮을 만한 글이 있다고 했을 뿐더러 이미 나왔던 책들도 다시 출판되고, 또 읽힐 것이니 말이다. 올리버 색스가 ‘삶은 계속된다’고 하는데, 죽어서도 그의 ‘글쓰기는 계속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말이 아닌 셈이다. 글을 작가의 삶이나 시대의 상황과 떨어뜨리고 읽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 글들을 올리버 색스가 한창 활동할 때 썼다고 한다면 느낌이 아주 다를 것이다. 이 글들은 올리버 색스가 죽음을 앞두고 썼고, 우리는 그의 죽음을 뒤로 하고 읽는다. 그럼에도 죽음의 그늘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에 감동받고, 더욱 그가 그리워진다.
그의 글들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사랑’이라 이름 지은(이건 편집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첫 번째 부분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미 『엉클 텅스텐』 (또는 『이상하거나 멍청하거나 천재이거나』. 이 둘은 같은 책이다)에서 한참을 썼지만, 그래도 그의 삶을 끝까지 차지했던 몇 가지의 기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나 보다. 수영, 박물관, 도서관, 갑오징어, 화학, 그리고 뇌. 평생을 좋아한 이것들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탐닉해오던 것들이었다.
두 번째 부분은 ‘병실에서’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가 의사로서 만난 환자들과 병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역시 이미 여러 책들에서 그런 얘기들은 했다. 그런데도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그 책들에서 한 얘기를 반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책들에서 한 얘기의 앞 얘기, 뒷 얘기들, 그리고 또 다른 얘기들. 그는 의사였기에 환자들을 만나고,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려 했다. 그 치료는 그냥 증상만을 보고 겉을 치료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안을 들여다보고, 그들과 함께 숨쉬려 했음이 이런 글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했다. 그 기록이 그의 여러 책들로 이어졌고, 또 이 감동적인 책으로도 이어졌다.
마지막 부분은 그 밖의 얘기들이다. 우주에 대한 얘기, 청어에 대한 얘기, 양치식물에 대한 얘기(『오악사카 저널』이 생각난다), 새로운 원소 찾기에 대한 얘기, 시력과 책의 활자에 대한 얘기, 코끼리의 걸음걸이에 대한 얘기, 은행나무에 대한 얘기, 음식에 대한 얘기, 그리고 이 부분의 제목이 된 <삶은 계속된다>라는 글. 나는 이 <삶은 계속된다>라는 글 옆에다 이렇게 적었다: “죽음을 앞두고 ‘삶은 계속된다’라고 적는 이 도저한 담담함. 그에겐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었다. 자신이 특별하지만, 또한 특별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그런 통찰이 나온다.” 말하자면 그는 세계의 연속성 속에서 자신을 파악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기에 현재가 불만족스럽지만, 세계를 개선하려는 과학자들의 분투가 보이고, 또한 세계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자신이 죽으면 세상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쉬워 보이지만,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열심히 살았고, 또 열심히 생각해 온 사람.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진보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시 한번 안녕! 올리버 색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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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렀다고 여길 때,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기록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려서, 자라면서, 철이 들면서, 어른이 되면서, 어른에서 더 나이가 드는 사람이 되어 가면서 제 삶의 굽이굽이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남보란 듯이 잘했던 일만이 아니라 어설프고 모자라고 부끄러운 지난 날마저도 내보일 수 있을 만큼의 용기와 당당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가능할 텐데.
이 작가의 삶을 따라 가다 보면 마냥 찬탄하게 된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얼마만큼의 용기를 얻는 기분도 든다. 세상이 좋은 곳이고 더 좋은 곳이 될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길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이렇게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작가가 있었던 세상이라서, 이 작가가 믿어 준 세상이라서,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나로서는 이 작가의 말과 당부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책은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첫사랑이다. 작가의 모든 첫사랑들. 취미와 책과 수업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 그래, 이런 것들이 이 작가의 생에서는 첫사랑이 되었더란 말이지. 이에 비해 내 첫사랑은 얼마나 얇고 남루한지, 떠올릴 게 별로 없어서 자칫 쓸쓸해지려고 했다. 위대한 사람은 철이 들기 전부터도 남다른 집중력으로 몰입하는 자질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괜한 질투심을 느낀 셈이다. 쓸쓸할 일이 아니다.
2부는 병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 준다. 의사로서의 작가가 의사여야만 경험하고 알 수 있는 일들을 말해 주고 있으니 독자로서는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가의 다른 책에서 본 내용과 비슷해 보이는 것들도 있었는데, 이건 내 기억력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확신할 수는 없겠다. 읽었어도 모르는 건 여전히 모르는 거니까. 관심의 정도에 따라 2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3부는 정녕 우아한 산문들로 채워져 있다. 소제목마저 '삶은 계속된다'이다. 얼마나 아늑하고 듬직한 말인지.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절에 그저 붙잡고만 싶은 구절이다. 한 편 한 편 아끼면서 읽었다. 이 중에서도 더욱 나를 머물게 했던 글은 '깨알 같은 글씨 읽기'와 '정원이 필요한 이유'다. 책과 정원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열망을 작가의 글에서 거듭 만난 듯하여 더없이 반가웠다.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바꾸려는 노력 중에는 두 가지 큰 방향이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좋은 것을 자꾸자꾸 발견하고 알려서 더욱 넓혀 가는 것. 또 하나는 나쁜 것을 자꾸자꾸 발견하고 알려서 없애는 데 힘을 쏟는 것. 이 작가는 앞쪽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남긴 글을 읽고 있으면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나도 앞쪽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작은 몫으로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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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판형과 디자인, 질감까지 모두 마음에 든다. 다들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노랑과 초록이라니, 훌륭한 조합입니다. 여름과도 잘 어울리지요.
* 애인은 조금 시큰둥하게 읽은 모양입니다. 다만 제 경우에는 앞선 민음사의 여름 두 권을 쓰라리게 읽은 뒤에 접한 즐거운 글이어서 좀 더 후한 평을 주게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 지금 이 리뷰를 적는 와중에도 애인은 올리버 색스를 되게 좋아한다며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약간 저를 놀리는 것 같은 것은 저의 기분 탓이겠지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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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그 자리에》는 천 권의 일기를 썼고 천 권의 노트를 남긴 올리버 색스의, 2015년 타계한 후 발간된 두 번째 책이다. 발표된 적이 없는 글이 약간 있고, 나머지는 <뉴요커> 등의 잡지에 발표한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글들이 첫 번째 챕터 ‘첫사랑’에, 의사로서 임상 경험을 기반으로 한 글들이 두 번째 챕터 ‘병실에서’에, 생의 마지막 시기에 씌인 것들을 포함한 이런저런 글들이 세 번째 챕터 ‘삶은 계속된다’에 실려 있다.
“나는 대체로 학교를 싫어했다.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들으면, 정보가 한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수동적인 게 싫었고, 매사에 능동적이라야 직성이 풀렸다.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배워야만 했다. 나는 좋은 학생이라기보다는 좋은 학습자였다...” (p.63)
이상하게도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생각이 옆길로 새어나갔다. 잘 정돈된 문장으로 일상과 신기한 임상 기록을 적는 올리버 색스의 글 옆에 나는 주석처럼 상념을 달아놓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병과 나의 독서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고, 그가 사랑해마지 않은 운동인 수영을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면, 그는 역도와 모터사이클도 그만큼 사랑했을 것 같다.) 하는 나를 떠올렸다.
『나는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 실외 수영을 했지만(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했다), 겨울에는 어쩔 수 없이 동네 YMCA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1976~1977년에, 나는 웨스트체스터의 마운트버논 YMCA 실내수영장에서 열린 장거리수영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미터짜리 풀을 무려 500번 돈 후 더 헤엄치려고 하는데, 심판이 “그걸로 충분해요! 제발 그만 귀가하세요”라고 하소연하는 바람에 그만뒀다. 혹자는 500번쯤 돌면 엄청나게 단조롭고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수영을 단조롭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수영은 극단적인 기쁨과 행복감을 선사하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이종의 황홀경에 빠지곤 한다. 나는 스트로크 하나하나에 매번 몰두한다. 그러면 마음이 자유롭게 둥실 떠오름 넋을 잃어 트랜스에 빠진 듯한 상태가 된다. 나는 수영 말고는 그처럼 강력하고 건강한 도취감에 빠져본 적이 없으며, 수영을 하지 않으면 금단증상을 느낄 정도로 중독되어 있다.』 (p.13)
- 수영을 시작하고 십팔 년 정도가 지났다. 그 중 빠지지 않고 주기적으로 수영을 한 것이 십 년 정도이고 오 년 정도는 아예 하지 않았고 나머지 삼 년은 하다 말다 하였다. 지금은 다시 수영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간은 아내의 수영 강습에 할애하고, 아내가 먼저 나간 다음 십오 분 정도 내 수영을 한다. 주말 아침 한강에 나가 세 번이나 네 번 정도 왕복을 하는 것으로 운동을 삼은 적도 있고, 미사리 조정 경기장에서 개최되는 3킬로미터 수영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올리버 색스가 20미터짜리 풀을 500번 돌았다면 아마도 실내 수영장에서 하는 10킬로미터 수영 대회쯤 되었을 것이다. 이제 야외에서 개최되는 일반인 수영대회는 대부분 오리발 착용을 의무화 하고 있다. 그러나 실내에서는 맨발로 한다. 올리버 색스가 참가했을 실내 10킬로미터 대회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금은 모르지만 여하튼 있었다) 그 대회에 참가한 이의 말을 듣자니, 수영을 하다 중간중간 화장실도 다녀오고, 간식거리도 먹는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시간은 무아지경 중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질병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 시작이 환자의 꿈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깨어남》(알마, 2012)에서 소개한 환자의 경우, 1926년에 급성 기면성뇌염acute encephalitis lethargica에 걸렸는데, 밤새도록 하나의 중심 주제에 대해 그로테스크하고 끔찍한 꿈을 꿨다. 그녀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성城에 갇히는 꿈을 꿨는데, 공교롭게도 그 성의 형태와 모양이 자신과 똑같았다. 그녀는 마법과 주문에 걸려 무아지경에 빠졌다. 세상의 종말이 왔고, 그녀는 지각知覺 있는 석상石像이 되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너무나 깊은 잠에 빠졌으므로, 그 무엇오로도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기존에 알고 있던 주음과 전혀 다른 죽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깨우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마침내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대경실색할 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그녀가 파킨슨병과 긴장증catatonic에 걸린 것이다.” (pp.98~99)
- 나는 안구형 중증근무력증 환자이다. 눈꺼풀이 내려오는 안검하수 증상을 겪고 병원에 입원하여 각종 검사를 하고 그것으로도 결론이 나지 않아 또 다른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일 년여 정도 한 다음에 결정된 병명이 안구형 중증근무력증이다. 병증이 나타나기 몇 년 전부터 나는 되풀이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두운 밤에 운전을 하고 있는데, 핸들을 붙잡고 있으며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려 놓은 상태이고 앞뒤옆으로 다른 차들도 보인다. 그런데 점점 시야각이 좁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눈은 완전히 닫히고 청천벽력 같은 어둠만이 남는데, 나는 여전히 운전 중인 상태이다. 내가 운전하는 차의 앞뒤옆으로 다른 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나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확실히 알 수 있다. 운전을 멈추지도 못하고 눈을 뜨려고 애를 쓰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이 상태가 계속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큰 사고의 당사자가 될 것임을 나는 인식하고 그 두려움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 깨어나고는 했다. 갑작스러운 안검하수의 증상을 나는 운전 중에 겪어야 했다. 꿈 속에서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나는 거의 감겨진 눈으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운전석에 눕다시피 했고, 그러고도 고개를 한껏 뒤로 제낀 다음에야 아슬아슬하게 앞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강변북로를 달리고 잠실대교를 건너는 삼십 여분의 운전 끝에 집에 도착했다. 나는 다음 날 출장에서 돌아온 아내와 함께 대학병원을 찾았고, 곧바로 입원 조치되었다.
“... 사람들은 독서와 관련하여 제각기 독특한 신경경로neural pathway를 형성하며, 개인의 독서 행위는 기억과 경험만이 아니라 감각양식sensory modality과도 제각기 독특하게 결합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 동안 단어의 소리를 ‘듣는’가 하면(나도 단어의 소리를 듣는다. 단, 정보 수집을 위해 독서를 할 때가 아니라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할 때만), 어떤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읽은 것을 시각화한다. 어떤 사람들은 문장의 청각적 리듬이나 강약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어떤 사람들은 문장의 시각적 모습이나 형태를 더 민감하게 의식한다.” (pp.315~316)
- 극심한 스트레스와 그로인한 불면때문에 삼일 정도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적이 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첫 번째 날에는 그렇게 책만 읽다가 날이 밝자 그대로 일어나 출근하였다. 두 번째 날에도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각종 상념에 시달리느라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잠깐씩 눈을 감았다 뜬 것을 제외하면 수면이랄 것도 없는 시간을 보낸 후 날이 밝자 일어나 출근하였다. 세 번째 날에도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억나지 않는 어떤 소설이었는데, 그렇게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가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금 내가 눈을 감고 있고 책은 가슴팍에 내려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계속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독서는 사라졌지만 나는 계속 문자를 읽어내고 있었고 이야기는 그 문자를 따라 진행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다시 일어나 출근하였고, 그날 퇴근 후에 다시 예전처럼 잠을 자기 시작했다.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 / 양병찬 역 / 모든 것은 그 자리에 (Everything In Its Place) : 첫사랑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 / 알마 / 369쪽 / 2019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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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을 찾으시는 분들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미리 읽어보셨지 싶습니다. 또 인간이 갖고 있는 장애나 질환을 거기까지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극복하거나 어떻게 같이 살아가는지를 눈여겨 보는 올리버 색스에 대한 시각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계실수도 있구요. 그런 올리버 색스가 죽기 전까지 써 왔다는 글들을 모아 출판한 이 책은, 책 제목부터 다시금 우리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 놓지요. Everything in its place. 회사생활을 하면서의 사람들간의 부대낌. 어쩌다 인생길을 같이 가야 하는 사람들과의 부대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간의 부대낌. 내가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부대낌. 등등을 겪으며 내가 심리학을 이해한다면 조금 뭔가가 나아질까 하는 희망(?)을 꿈꾸다 접하겐 된 올리버 색스. 제가 이해한 답은 스스로도, 남을 위해서도, 자연적인 치유력을 믿으며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하겠다는 겁니다. To have everything in its place. Everything in its place. 올리버 색스의 이 책을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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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메를로 퐁티였는지 에드문트 후설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판단의 개입을 지연시키고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나의 인식이 대상에로 뻗어나간 생김새를 관찰하고 숙고하고 충실히 기록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지고의 미감이라는 것, 이걸 말한 자가 누구였을까. 둘 다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의 논조에 미감에 관한 생각이 뒤섞며 제멋대로 주조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김우창의 책에서 읽은 글귀를 무의미하게 왱알대어 내것인양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우창의 글귀에 그런 말이 있었나.) (있었다.) 그것이 왜 지고한 미감인지 알 길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해 낱개로 얻은 지식을 명료하게 이어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가닥을 잡으려면 계기가 필요했다. 실은 가닥을 잡겠다고 작심한 바조차 없다. 부끄럽지는 않다. 원래 이런 허세로 사는 게 인간이요, 내가 그로부터 예외여야 할 이유 따위 없으니 말이다. 다만 그 가닥 잡을 계기를 놓치지 않은 내가 대견하긴 하다. 올리버 색스의 에세이집 <모든 것은 그 자리에>는 그의 유작이다. 우리말로 금수저 집안에서 나선 오만 데 정신을 팔고 살았던 그는 신경외과 전문의면서 소설가이기도 하였다. 그 방대한 지식과 조밀한 상상력을 보노라면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보다는 "오메 잘났네" 하는, 못나터진 질투심만 일어나곤 하였다. 지금도 딱히 다르진 않으나, 한 가지 다르다면 그의 글에 배어있는 세상을 향한 뜨거운 긍정과 치열한 사랑을 볼 줄은 안다. 제목에서 전치사 in을 음미할 만하다. Everything In It's Place. 여기서 '정확히 그 자리에'가(at/on) 아니라 '있어야 할 영역에'의 의미(in)를 사용한 데서 그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전의 저작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거니와, 수많은 환자 이야기에서 그는 환자를 '병증을 가진 자'이기보다 '병증과 함께 사는 자'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환자는 어디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이들이 아니다. 병증은 그 자체로 훼손된 인간의 면면이지만, 그에겐 그 훼손마저도 세상의 한 모습이요, 비록 회복시켜야 할 증상인들 제거하고 세상으로부터 쫓아내야 할 무언가로 여기질 않는다. 언젠가 비평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엄정한 언어로 풀어내는, 작품을 향한 가장 뜨거운 사랑고백"이라 말한 적 있다. 작품으로부터 받은 짜릿함, 희열, 즐거움, 또는 우울감, 처연함, 깊은 슬픔 등의 마음덩어리를 꼼꼼히 살펴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 -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이라고 설명하는 와중이었다. '미감', '미적 체험' 등이 미학의 용어임을, 그리고 미학이 실제로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 - 감성을 다루는 데서 시작하였음을 감안할 때, '미감'을 달리 말하면 '감성의 동역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현실의 구획 속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구획 바깥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어떤 정서적 고양의 순간을 가리키지 않은가. 새롭게 본다는 것, 일상을 벗어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예술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도 하지만 (문광훈) 결국 그 눈을 얻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계기의 중대함만큼이나 그것이 계기임을 알아차리는 태도도 중대한 것이다. 어쩌면 더 중대한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렇게 생각한다.) 흔하게 보던 것들을 '흔하게 보던' 태도로 보아선 일상을 벗어난 눈 따위를 얻을 리 만무하다. 오래 보고, 늘 보던 태도의 기저에 도사린 관념을 의심해야 한다. 그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보려면 판단을 계속하여 밀어내야 한다. 판단이란 관념의 하위여서, 판단의 개입은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는) 미감 - 이 글로 치면 감성의 동역학과 양립할 수 없다.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취미판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다는 점에서 미감은 당연히 구획을 전제한다. 동시에 미감은 그 구획을 언제든지 넘어설 수 있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역설이 판단을 지연시키고 대상을 음미하는 태도를 지순한 미감, 구획 없는 감성의 다이내믹스를 정초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라니, 그건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불능성은 그만두어야 한다는 정언보다는 그만둘 수 없다는 숙명의 전거이다. 연대는 바로 그런 미감의 공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사회성이 더 이상 인간의 조건이 아니게 될 때라면 모를까. Yet everyone might (or must) be in one's place. 아직은 감히 올리버 색스의 지고한 태도를 나는 따라갈 수 없지만, 흉내는 내보련다. 한국말로 이렇게 표현하면 딱 맞겠다 : "순리대로 살아야지." (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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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엽고 예쁘게 생긴 책으로 색을 참 잘 써서 만들었다
* 도서관 이라는 챕터에서 어린 시절 서재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 책에 관한 추억이나 서재에 대한 회상을 좋아해 이 부분만 특히 여러번 읽었고 역시 좋았다
*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서재였다. 그곳은 커다란 오크 판으로 마감된 방으로, 네 벽이 모두 책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한복판에는 집필 및 연구용으로 견고한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재에는 히브리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특별한 장서, 입센의 희곡에 관한 모든 것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 칸짜리 선반에는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 손이 쉽게 닿는 책장 아래쪽 칸들에는, 세 형들의 소유물인 모험과 역사에 관한 책들이 즐비했다. 내가 키플링의 <정글북>을 발견한 것은 바로 거기서였다. 나는 주인공 모글리와 깊은 동질감을 느낀 나머지, 그의 모험을 나만의 판타지 세상을 향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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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그 자리에 _올리버 색스 자연은 진공을 혐오하며, 우리도 그렇다. 텅빔이란 공허함, 무, 무공간성, 무장소성, 즉 모든 결핍을 의미하며 혐오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하지만 무 보다 더 실제적인 것은 없다. 데카르트에게 빈 공간은 아예 없었고, 아인슈타인에게 장 없는 공간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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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올리버 색스를 너무 좋아해서 이 작품도 샀는데 역시나 너무 좋았어요. 별다섯개! 올리버 색스는 과학 알못인 저도 잘 이해할 수 있게 글을 잘쓰는것 같아요. 읽는내내 감동적일 정도로..(?) 좋았어요. 페이지 수 줄어드는게 안타까울 정도.. 그리고 표지도 예쁘네요. 도서정가제가 빨리 폐지되었으면 좋겠어요.. 책 많이 사읽게.... 요새는 책 살때 할인 못받아서 너무 아쉬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