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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의 상처는 하나같이 깊었고, 결코 딱지가 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상처가 서서히 봉합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이제 그들이 모인 곳은 잔칫집처럼 보였다. 이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나는 보았다. 봉래산 어디에 있는 기이한 마을을 말이다.
성석제가 돌아왔다. 보무도 당당에, 일필휘지로. 그가 벌이는 잔치에 나는 숟가락을 슬쩍 얹었다. 자고로 잔치에는 먹을 게 많아야 한다. 이 잔치엔 풍성한 웃음과 아픔의 미학이 듬뿍 담겨있다. 웃어도 눈물이 배어있고, 울어도 기쁨이 솟는다. 나도 그들과 같이 어울려 본다. 앗싸라 비야. 정 주면 내 집이고 마음 나누면 가족이지, 별게 있나. 이 풍진 세상에!
봉래산에 별별 사람들이 다 모였다. 봉두난발에 먹을 수 있는 거면 다 먹어치우는 여산이 우리의 주인공이다. 열혈남아에 순정마초인 그는 스님을 아자씨라 부르며, 스님 앞에서 곧죽어도 육식을 한다. 법보다는 불법과 친하며, 공무원을 스리슬쩍 속이면서도 필요한 만큼만 법을 어기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여산이다. 그런 여산과 찌릿찌릿한 눈길을 주고 받는 여자가 이령이다. 그녀는 무지막지한 남편 밑에서 차마 겪을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여산과 만났다. 딸을 지키지 못한 어미의 아픔과 가혹한 운명을 딛고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목이 터져라 이태리 칸소네를 부르는 노인네 영필. 부잣집 적장자로 태어나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다, 하루 아침에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교통사고로 부모가 세상을 뜨고 그 충격으로 할아버지도 세상을 뜨니,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가 할 일이라곤 군대에 가는 것 밖에 없었다. 믿어야 할 사람을 믿었어야 했는데 교활한 친척을 믿어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이었고, 친척들에게 몇 푼 받아 운명의 회한을 풀다 인생이 거덜나고 말았다. 이제 그에겐 남은 것이라곤 늙은 몸과 오직 하나 뿐인 그대인 소희 밖에 없다.
처녀로 부잣집의 재취로 들어가 이용만 당하고 돈 한 푼 건지지 못하고 쫓겨난 소희. 나이 든 그녀가 갈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교장이었던 죽은 남편은 그녀의 젊음만 이용한 채 한 푼의 유산도 남겨주지 않았다. 저당잡혔던 인생에 대한 분노를 그녀는 방화로 풀고 나온다. 이제 그녀는 여산에게 어무이라 불리며 이 곳에서 산다. 아울러 영필이의 관심과 사랑도 한 몸에 받으며.
하늘에서 내려 온 듯 빼어나게 예쁜 자연미녀 새미와 그녀의 불쌍한 동생 준호. 새미는 어릴 때 부터 의붓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이를 알게 된 동생과 함께 의붓아버지를 응징한 후 집을 나온다. 이 아이들에게 이 곳은 집이자 가정이며 천국이다.
운명의 그 날, 생리대를 사러가던 새미가 전국구 조폭의 눈에 띄고 만다. 세미는 자신을 범하려던 세동의 중요 부위를 훑는 사고를 친다. 이 곳을 아지트로 삼으려 했던 그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다. 이제 마을 사람들과 조폭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조폭은 그들의 자존심을, 마을 사람들은 생존을 걸고 사투를 벌인다.
그들의 싸움에서 마을 사람들이 밀려야 정상인데 결과는 다르게 나온다. 혈연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뭉친 가족과 말로만 가족인 조폭과의 싸움은, 물량으로 승패를 겨룰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 처참하게 터지고 깨지고 피를 흘리지만 결국 봉래산의 주민의 승리로 돌아가고 만다.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타인을 신뢰하고 서로를 위하는 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 만이 아니다. 내 상처로 상대를 이해하고, 그 상처로 상대를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인 것이다.
신뢰의 붕괴란 아픔을 딛고 서로에게 가족이 되는 멋진 산수화를 성석제는 보여주었다. 그는 해학이란 이름의 잔치로 그들의 상처를 씻어주었고, 멋진 가족도 만들어주었다. 잔치에 숟가락을 슬쩍 얹은 나도 그들의 가족이 되고 싶다. 이 세상에 가족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비록 그들의 상처가 깊다 해도 그들은 상처를 훈장으로 만든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의 가족이 되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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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핏줄이 섞이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 가족을 이루며 사는 모습. 피를 나눈 진짜 가족보다도 오히려 피의 그 찐함을 느낄수도 있는 사람들. 한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동거동락을 하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만나 진짜 식구가 되어가는 이들의 이야기. 우리는 그들을 가족이라 부른다. 정작 진짜 가족에게서는 버림받거나 상처를 주거나 받았던 사람들이 이제야 서로를 위하고 걱정해주는 진짜 가족을 만났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했다. 진짜 가족이 되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예전에 보았던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를 기억했다. 그 영화에서도 전혀 가족이 아닌, 처음엔 이상한 사람들이 모였다. 별 이상한 내용이 다 있다 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게 되다가 그들이 나누는 진정한 가족애와 따뜻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영화였다. 영화에 대한 감동으로 그 여운이 오래갔던 영화였다. 이들 여섯 명이 모여 사는 모습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너무도 다른 사람들 여섯 명이 봉래산 깊은 곳, 영화 세트장으로 있었던 지금은 여행객들의 인적이 끊어진 마을에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했다. 봉두난발을 하고 있는 말더듬이 김여산과 가진 자로 살다가 모든 것을 다 잃고 이곳 마을로 들어와 강에서 불법으로 고기를 잡는 박영필이 있다. 그녀에게만 오면 죽어가던 식물도 살아나는, 식물에 힘을 불어넣어 식물가꾸기를 하는 소희가 있다. 그리고 남편을 피해 온 이령과 좀처럼 시골마을에서 보기 힘들게 어여쁜 새미와 새미 여동생 준호가 그 구성원이다. 이들 식구가 살고 있는 곳에 이 마을을 접수하러 온 조폭들이 서로 부딪힌다. 생리대를 사러 간 새미의 아름다움을 보고 새미가 가는 길을 따르는 짙은 선팅이 된 차를 몰고 있던 조폭들 때문에 일이 벌어졌다.
새미가 살고 있는 마을을 접수하려는 조폭들과 마을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전쟁을 시작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조폭들에게 금방이라도 마을이 접수당할것 같았지만 웬걸, 마을 사람들이 의외로 강하다. 그들이 뿌리는 똥무더기와 마시던 액체도 무엇이 들어 있었던지 조폭들은 당하고만 있다. 조폭들로 인해 초토화될것 같은 강마을은 흩어졌던 한가족이 모이듯 그렇게 서로가 한마음이 되어 서로를 보듬어 안는다.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상처를 받고 산 사람들, 가족에게 버려진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한 가족으로 똘똘 뭉치게 되며 우리의 마음 한쪽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해준다.
성석제 작가, 그의 글을 읽었겠거니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글이 처음이다. 조폭들의 이야기라 살벌할 것 같았지만 웬걸, 굉장히 익살스럽다. 조폭들도 빈 곳이 많아 보이고 작품 속 인물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웃기다. 멋드러지게 노래부르는 것도 굉장히 웃기게 표현을 해서 저절로 킥킥거려진다. 그래서 다들 그가 돌아왔다며 반겼나 보다. 그의 입담에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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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루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로 생리대를 사러가는 새미를 따라 나선 준호는 몸집과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턱없이 낮아 생떼를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다. 산길을 걸어가는 새미를 눈여겨 본 조직 폭력배 정묵의 수하인 세동과 명철 역시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지만 강마을 식구들처럼 서로를 배려하는 정적인 유대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두목인 정묵 앞에서는 그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돌봤지만 정묵의 눈 아래서 벗어나 욕망을 좇던 세동을 준호가 혼내줌으로써 새미 남매는 조직 폭력배들과 막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자연적 질서와 섭리를 따르며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지 않고 지내던 강마을에 이방인들의 침입은 마을 주민들이 더욱 결속하여 한 식구로 자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상처입고 병들어 시들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재주가 뛰어났던 소희는 남편 인생의 조화(造花)로 살았던 지난날을 뉘우치며 정체성을 잃고 지내다 강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부잣집의 적장자로 태어나 부러울 게 없이 지내다 자멸의 길로 접어든 영필은 지난한 방랑 끝에 머물고 싶은 땅을 찾아 강마을에 안착하였다. 영필은 소희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았고, 강마을에서 마주 보고 사는 사람들과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지냈다.
![]() 성도착증 환자인 남편의 볼모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벗어나기 위해 강물에 몸을 던졌다 구조된 이령은 강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먹는 것을 찾는 감각이 뛰어난 여산은 인분을 농사일에 이용함으로써 화장실을 천연비료 생산 공장으로 변신시켰고, 조폭들과의 싸움에서는 화장실 구덩이를 시의 적절히 활용하여 승리로 이끈 마을의 해결사였다. 행동대원 세동이 불구의 상태에 놓이자 조폭의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고 판단한 전국구 조폭들은 궁벽한 강마을을 접수하여 불행을 초래한 이를 색출해 응징하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어머니 격인 소희는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한 가족으로 묶인 점을 되짚으며 조폭들의 습격에 불안해하던 새미를 온기로 품었다.
위압적인 조폭들의 침입에 맞서 정면 돌파하기는 힘들다고 여긴 마을 사람들은 잠시 마을을 비웠다가 돌아오자는 말에 흔들리지 않은 소희는 그동안 그녀가 강마을에서 안착한 과정 을 술회했다. 척박한 곳을 일궈서 밭을 만들고 씨앗을 뿌려 열매를 거두기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썼던 것처럼 소희는 자연물과 영혼이 연결된 강마을에서 조폭들과 맞서 나갔다. 자연의 가르침대로 손에 든 견고한 무기는 없지만 자연 속에서 얻은 '말벌의 정예 전투원', '고추 잿물 폭탄', '십 년 묵은 분뇨 폭탄' 등으로 조폭들을 초토화해서는 스스로 물러가게 했다.
조폭들과의 싸움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여산과 정묵이 지도자로서 책임을 지고 접전에 들어갔을 때 준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통렬한 울음은 여산을 아버지라고 여기며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집중하여 여산을 지지했던 마을 사람들은 피를 나누 형제, 자매들보다 더 끈끈한 이들로 한솥밥을 나눠 먹는 식구로 자리했다.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을 때 그 짧은 시간이 소중한 순간으로 인식되기까지 강마을 사람들은 지난한 시간 속에 에둘러 궁벽한 생활이지만 행복을 조금씩 알아가는 마을에 안착할 수 있었다. 말없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흘러가는 강줄기처럼 강마을 사람들 역시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서로 돕고 배려하며 질박한 삶을 이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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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렸다. 예약판매 때도 설레였고, 집으로 책이 왔을 때도 온 몸이 근질거렸고, 읽고 나서는 흥분과 떨림이 내 온 몸을 휩싸고 돌았다. 역시, "[위풍당당]은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p235) 이라고 표현한 문학평론가(차미령님)의 명명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사실은 나도 근사한 뭔가의 수식어를 찾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알아버리는 씁쓸함만 일깨우게 되었다.
[위풍당당]은 이야기 곳곳에 펼쳐지는 성석제 작가 특유의 언어의 향연은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말의 쓰임새가 이렇게나 다양하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곳곳에 드러나는 글의 의미마저도 '피식' 입가에 미소를 피어나게 하고 저마다의 웃음 소리로 웃음을 마음껏 쏟아내게 만드는 마법같은 재주를 부려주었다.
성석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재미있고, 표현이 익살스럽고, 뛰어난 이야기꾼답게 입담과 재담이 상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고 읽기 이면에 깔려있는 주제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위풍당당] 이야기의 큰 줄기는 아주 깊고 외진 산골짝에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여섯 명의 남녀노소가 모여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게 되고 뜻하지 않은 일로 전국구 조폭들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한판의 소동을 다루고 있다. 다소 평범하고, 영화의 시나리오에나 어울릴 듯한 간략함 마저 들 수 있지만, 작가의 뛰어난 재담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묘사는 평범한 자체로 놔두지 않는다. 이야기 곳곳에 펼쳐지는 서술 방식이나, 등장인물들이 쏟아내는 말이나 육체에서 내뿜는 소리는 가히 언어 마술의 절정이란 표현을 쓰고 싶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특히나 이번 [위풍당당]에선 작가의 기존 작품에선 얼마쯤 느끼지 못했던 자연이나 소설 속 배경에 대한 묘사가 상당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각 장마다의 도입부에 묘사되어 있는 부분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한적한 산골 어느 구석에 들어가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늘에 닿아 있는 깊은 산에 용소라는 곳을 중심으로 흐르는 강을 배경으로 산골마을을 이룬다는 점은 다소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여산과 영필은 그 강으로부터 산골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조폭들이 처음에 산골 마을에 들어 온 곳도 그 강이고, 마지막 혼쭐이 나고 도망가다시피 빠져나간 곳도 그 곳, 강이다. 강은 그 누구에게든 이유를 묻지 않고 모든 것들을 흘려보낸다. 어쩌면 작가는 세상과 등지고 그 깊은 산골짝으로 들어오게 된, 그곳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강을 통해 치유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치유 과정에서 서로의 아픔을 알아가고 보듬어 주고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따로 또 같은 가족을 형성할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이 그 강이 아닐까 생각되어 진다.
[위풍당당]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매일매일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그 변화된 세상에 제대로 발맞추지 못한 패배자들과 세상 어느 곳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 고통만 당한 아픔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산다. 그런데 작가는 사회가 버린 그러한 사람들에게 삶의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주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조폭에 대한 대항도, 불도저를 밀고 올지도 모를 또다른 세상에 대한 저항이 남다르고 그 결속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오늘날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문제점을 작가는 특유의 재치와 글솜씨로 보여주고 있다. 괜히 해학에 있어 '절대 고수'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님을 [위풍당당]으로 또다시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웃었지만, 그냥 웃음으로만 넘길 수 없는 씁쓸한 현재를 보는 듯했다.
오랜 기다린 만큼 그 이상의 놀라움과 떨림을 내게 안겨준 작품에 찬사만 터진다. '소설가 성석제' 팬으로서 혹자가 나에게 작가에 대한 찬사가 지나치다 못해 넘친다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위풍당당]을 읽어 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 [위풍당당]은 25개로 구성되어 있다. 소제목들이 하나같이 시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제목이 다양한 노래들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제목으로 등장인물의 상황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또다른 감각을 볼 수 있어 마냥 행복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위풍당당]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기는 건 무슨 조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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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산들바람 맑은 물결 위에 발을 적실 때 - 론타니, ‘아름다운 시냇물’ 강, 이라고 쓴다. 그러자 내 기억에 저장된 모든 강물 소리가 순식간에 거대한 강줄기를 만든다. 바닥을 애무하듯 흐르다 여울을 만나면 여울의 형태를 소리로 쓰다듬는. 그 맑은 소리를―때로는 세찬 소리를―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묵묵히 흐르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저물녘 붉은 빛의 산란을 그대로 수면에 담아내어 넋을 잃게 하는. 바람이 물결에 발 담그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그 청명함에 놀라 감았던 눈을 화들짝 뜨고 만다. 미소 띤 평온이 네 맘에 우러나 오만도 두려움도 사라지게 해 - 모차르트, ‘미소 띤 평온이’ 성석제의 장편소설 <위풍당당>은 강의 속성을 닮은 이야기이다. 아무리 급한 여울을 건너왔어도 이내 평온을 찾는. 세파에 밀려 흐르고 흐르다 용소에 이른 사람들로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된다. 한때 인기리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여파로 지역 관광지가 될 뻔했으나 바람만이 드나드는 촬영세트장은 그들의 새로운 생활 무대가 된다. 출렁임을 멈추지 않던 과거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진다. 외관만 번지르르한 촬영세트장의 가식적인 공간에서 지난 삶이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세상과의 단절이 주는 평온을 만끽한다. 강마을에서의 생활은 지난 시간을 견뎌낸 보상일까. 부모의 비명횡사로 균열이 일기 시작한 ‘나’ 중심의 가족 체계는 조부의 충격사와 친족의 계략으로 영필의 황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운명을 바꾸어버린다.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본능을 뒤늦게 몸으로 깨달은 그는 결핍이 주는 활력과 절제가 주는 자족의 균형을 찾아가며 여생을 즐기려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환영에 지나지 않았음을 남편이 죽은 이후에야 깨달은 소희도, 남편의 성적 학대가 낳은 비극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려던 이령도 강마을에 이르러서야 오만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위로하며 희망을 가져라. 새로운 사랑 또한 즐길 수 있으리 - 스카를라티, ‘위로하며 희망을 가져라’ 또 다른 강의 속성은 낮은 곳을 채우지 않고서는 차오를 수 없다는 점이다. 가끔은 폭우로 범람하며 먹장구름의 배경이 될 순 있어도 강물의 밑바닥에 허공은 있을 수 없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남자와 성폭행하는 양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새미와 그의 동생 준호. 가출하여 강마을에 정착한 남매는 마을을 위기로 몰고 갈 사건에 휩싸인다. 새미에게 음욕을 품었던 조직폭력배를 때려눕힌 것이다. 이 소설의 발단이다. 뒤탈이 저어된 영필은 남매를 잠시 떠나보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임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폭의 보스인 정묵은 조직의 자존심과 기강을 세우기 위해 수륙 양쪽으로 강마을에 난입한다. 전개이다. 야산과 야산에서 자라는 식물의 결실과 그 결실을 먹고 사는 사람들과, 심지어 동식물이 소화기관을 거친 증거물까지 가세하여 승승장구하는데, 안타깝게도 도중에 어리숙한 준호가 뒷덜미를 잡히고 만다. 위기다. 준호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마을 사람들의 가장격인 여산과 정묵의 예사롭지 않은 결전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애써 끌어모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절정. 그렇다면 결말은? 항상 너의 옆에 있어, 맑은 기쁨 네게 주리 - 아르디티, ‘입맞춤’ 강물은 한결같이 흐른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발견한 마지막이자 보편적인 강의 속성이다. 좀처럼 피딱지가 형성되지 않는 생채기에도 미끌미끌한 물이끼가 가득한 강바닥인 양 틈 없이 닿는 위무의 손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새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 옆에 네가 있으므로 자신의 존재감을 찾게 된 사람들은 ‘나’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너’ 중심의 세계에 이른다. 그들의 이러한 흐름은 자연발생적인 가족에 가까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까 급급해 하는 동시에 자기의 안위와 이익 챙기기에 혈안인 조직과 대조를 이루면서 신생 가족은 햇살에 무방비로 노출된 강물처럼 반짝인다. 반짝인 채로, 여전히 흐른다. 하느님이 당신을 강하게, 더 강하게 만드네 - 엘가, ‘위풍당당행진곡’ 인생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희극이다. 희대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하나 둘 강마을에 모여든 사람들이 거쳐온 방을 바라보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길항할 수밖에 없는 측은한 인생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유일한 위안으로 여겨질 만큼. 그러나 멀찍이서 바라보면 그네들은 각자의 역경과 고통을 나름의 방법으로 이겨낸 인생이다.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시간도 흐름을 멈추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울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고된 작업이다. 울음 대신 웃음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한층 고된 작업이다. 웃음으로, 그것도 해학에서 비롯된 건강한 웃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자는 울음은 아는 사람이다. 작가는 누구보다 채플린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소통과 이해로 사랑을 일궈나가는 강마을 사람들은 거짓된 공간에서, 머잖아 허물어질지 모를 터전에서 진실된 삶과 마주한다. 그러면서 강해진다. 이제 그 누구도 이들을 막을 수 없을 터. ‘덜컹대는 오토바이(세상) 위에서 자연스럽게 덜렁대지 않으면 자빠질 염려가 있다(P.97)’는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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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이분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 돈이 있는 자와 돈이 없는 자. 심플하고 날카로운 구조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이분법의 경계가 모호하지도 흐릿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행여 이분법 중간 어디 즈음 고개를 내밀라치면 예전 오락실에서 보던 두더지 머리 내려치듯 사정없이 내려쳐 버린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이분법이 가진 구조의 힘이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힘과 돈을 가진 쪽은 모든 것을 가진다. 미디어와 권력은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따라 간다. 내 생각이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이고 편협한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예술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존재보다 예민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동시대에 일어나고 벌어지는 온갖 일들에 세밀하게 참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면 예술가로서의 직무를 방기하는 것이라 추론한다. 이 생각도 나만의 편협한 것이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성석제와 그가 내놓은 작품 「위풍당당」은 예술가로서 그의 창작을 통해 동시대를 비꼬고 풍자하며 에둘러 조롱하여 나와 같은 독자로 하여금 실소와 함께 현실의 피곤함을 배설하게 해준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긴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는 존재일 뿐인가. 인간이란 뭔가.” (p.188) 조폭 보스가 시골 촌뜨기에 의해 자신의 조폭 동생이 다치자 데리고 있던 조폭 부하들을 깡그리 모아 시골로 쳐들어간다. 그런데 녹록하지 않은 시골 촌뜨기들에 의해 똥물 공격을 받는다. 어이가 없는 것인지 화가 나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멘붕 상태에서 자조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까지 이르게 된다. 분명 이분법 저 끝에 있는 존재에게 던지는 똥폭탄이다. 근래 몇 년 동안 많은 책을 통해 “분노하라”, “짱돌을 던져라”, “닥치고 O해라” 말이 많았다. 하지만 저 끝에 있는 존재들에게 닿지 않는다. 아무리 분노해서 닥치고 짱돌을 들어 던져도 내 발치에 떨어질 뿐이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루하며 지쳤다. 차라리 똥폭탄이 저들 머리위에 떨어진다는 해괴망측한 설정이 속 시원하다. “그는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30수 최고 원단으로 만든 양복에, 아르마니 넥타이를 매고 페라가모 구두를 신은 채, 베스사체 선글라스 끼고 까르티에 시계 차고 봐줄 사람 하나 없는 개떡 같은 절벽을 바보 같은 부하 한 놈 때문에 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구두에 그놈의 똥을 묻히고.” (p.65) 소설 속 조폭은 시골 촌뜨기들과는 단순 비교로 상대가 안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시골로 쳐들어갔다. 흔히들 하는 방법이다. 시골 촌뜨기들은 명랑만화에나 있을 법한 방법으로 조폭을 상대한다. 똥통에 가두고 고춧가루를 뿌리고 벌을 쏘이고 똥을 퍼붓는다. 공상과학에서나 등장할 대치형태다. 조폭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것도, 치명적 공격을 가한 후 조폭 보스와 협상하는 것도 시골촌뜨기들이 우위에 있다. 시골촌뜨기들의 결정에 왈가왈부하지 못한다. 애초에 시커먼 벤츠를 타고 시골 촌뜨기지만 빼어난 외모와 싱싱한 젊음을 가진 새미를 발정난 수캐처럼 뒤쫓은 것 자체가 사실 말이 되지 않아야 할 말이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이라 설정하는 것이 말도 되지 않을 현실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이놈의 세상이다. 작가는 말도 되지 않는 현실과 소설의 현실을 대치시킨다.
“그런데 따라오고 있다. 검정색 벤츠에 탄 사내들. 우리에게 뛰쳐나온 맹수. 끈 풀린 미친 개 같은 인간들. 시속 오 킬로미터로 걷는 새미를 시속 오 킬로미터의 속도로 따라오는, 짙은 선팅으로 시커먼 유리 속,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세 인간들.” (p.24) 시커먼 벤츠를 타고 시커먼 속내를 감춘 채 히죽거리며 서성이는 인간들은 소설의 조폭처럼 멍청하거나 어설프지 않다. 집요하고 꼼꼼하며 성실하다. 그럴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는 새미만큼 매력적이거나 그들의 먹잇감이 될 정도의 깜냥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지만 도처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는 것 같다.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저들의 새미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추정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자기 가족한테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야. 상처를 줬을 수도 있지. 어쨌든 옛날 가족과는 다들 남남이 되었어. 그리고 여기 이 마을에 어찌어찌 와서 다시 한식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우리는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했다.” (p.164) 다소 진부하고 늘 들었던 말인 것 같지만 작가는 소설 속 시골 촌뜨기들이 조폭들이 말하는 식구의 개념이 아니라 제대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식구가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해소한다고 설정한다.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이 자신의 조폭 부하들에게 함께 밥을 먹는 게 ‘식구’라고 했었다. 소설 속 조폭 보스 정묵이 [비열한 거리]를 보고 따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인성과 정묵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밥만 같이 먹어서 식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택하여 식구가 된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새미와 그의 남동생 준호가 갑자기 시골에 나타난 것도 이령, 소희, 영필이 시골에 나타나 식구가 된 과정도 그랬다. 공동체적 담론밖에는 해소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의도로 판단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좀 촌스럽다. 물론 소설 속 플롯은 아기자기하고 기상천외하며 유쾌발랄하다. 플롯을 담는 얼개가 흔한 것일 뿐이지. 이것 또한 작가 성석제의 힘이다. 고소(高笑)하게 갈무리하는 것.
***** “자신보다 약간 더 큰 키에 몸무게가 삽십오 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체구로 사뿐사뿐 리듬을 타면서 걸어오는 스님을 봤을 때, ‘오 마이 갓네스,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합장을 하고 말았다.” (p.50)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웃었던 장면이다. 소희가 시골 산자락에 은둔하고 있는 스님과 처음으로 우연히 마주치던 장면. ‘오 마이 갓네스,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합장을 하고 말았다. 나는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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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림 같이 예쁘고 아기자기 하다. 하지만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아픔을, 혹은 슬픔을 혹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다. 핸드폰이 잘 터진다 전국구로 광고하지만 아직도 깡촌 시골 어딘가는 그것이 무용지물이다. 이 마을이 그런 동네다. 핸드폰은 터지지 않고 마을로 들어가려면 배편이 제일 빠르다.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적고, 핏줄로 이어져있진 않지만 가족과도 같은 끈끈한 뭔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 그 한가롭고 한적한 동네에 전국구 조폭 형님들이 나타났다. 이 촌스러운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예쁜 얼굴을 지닌 새미를 관찰하다 어찌해볼 요량으로 새미에게 다가갔지만 새미의 동생 준호에게 조폭이 봉변을 당한다. 조폭 형님 정묵은 강마을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들이닥치고 조용한 동네에 한 바탕 난리가 나는데....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보는 나와 저 안쪽... 내면의 나와는 많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는 사람의 인생과 내면에 숨겨진 인생은 많이 다르다. 아무리 조용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눈물 나는 사연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 게 사람들의 인생이다. 여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시기하며 살지 않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사람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관대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매를 맞고, 이상한 행위를 요구 받았던 이령, 엄마의 결혼과 이혼이 반복되면서 누가 아빠인지도 모르고 사는 아이. 그 아이의 새 아빠는 그녀를 겁탈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동생과 집을 나온 새미, 금줄(?)을 물고 태어나 늘 떵떵거리며 살았던 영철.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영철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친인척들은 그 많은 땅과 돈을 나눠버렸다.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돈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줬다면 이렇게 당하고만 살지 않았을텐데.. 사람을 원망하다 이 마을로 들어오게 된 영철. 중매로 전부인과 사별한 남편을 만난 소희. 이미 일남 이녀의 자식이 있었던 남편이었기에 아이를 낳지 않았다. 남편은 재단 이사장이 되고 소희는 이사장 사모님으로 지역 사회에서 봉사를 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하지만... 유언장에 그녀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외로운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며 꼭 지들 같은 것들끼리 모여 산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손가락질 하며 비웃을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 그들이 전국구 조폭과 한바탕 일을 벌인다. 피를 나눈 가족이나 형제보다 더 끈끈하게 조폭을 몰아내고자 노력한다. 변변한 무기(?)도 없고, 변변한 힘을 자랑하는 이도 없지만 그들은 가족이 되어 가족보다 더한 힘을 발휘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고 힘이다. 가족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 사회 안에서는 가족들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다. 가족이 있으면서도 가족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강마을. 이 작은 마을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닌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터무니 없는 것을 요구했던 것은 아닌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심한 행동과 언어로 이야기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이들은 다른 의미로 가족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식구가 되었다. 그들이 만든 가족.. 그 따스함에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자칫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이렇게 재미나고 맛깔스럽게 표현하다니... 성석제 작가에 대한 무한 애정을 발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가족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위풍당당.. 그들의 인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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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공간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사건은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옹벽진 시골 촌동네에서 일어난다. 그 마을은 강으로 절벽으로 산으로 둘러쌓여 사람의 접근조차 자유롭지 못한 곳이다. 문명이 이기인 핸드폰도 작동하기를 거부한다. 현대인들에게 이 마을의 유일한 용처라면 현대의 느낌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곳은 사극 드라마 세트 촬영장으로 사용되었다.
이야기는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이곳까지 굴러들어 온 마을사람들과 그 마을을 접수하러 간 "전국구" 조폭들과 벌어지는 일전을 코믹하게 터치하고 있다. 시골마을을 얕잡아 보고 의기양양하게 쳐들어간 도시의 조폭들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을사람들은 마음을 모아 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이해와 깊이가 높아간다.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되어버린 마을사람들과 조폭이라는 인위적 가족간의 대결을 통해 가족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주제는 좀 무거울 수 있지만 이야기의 톤은 오히려 가볍고 경쾌하다. 저자의 걸쭉한 입담을 통해 쉴새없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약자들의 꾀와 기지로 강자를 물리치는 민담적 요소의 스토리 구성도 있지만, 장면장면을 멋지게 묘사하는 이야기꾼 성석재의 탁월한 재능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똥, 방귀등과 같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장면에서조차 전혀 역겨운 느낌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이 마을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주어진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눌러 살면서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이다. 조폭 두목의 말을 빌리며 이들은 "오지 촌동네 병신새끼들"이다. 노인, 여자, 아이들, 말더듬이 등 사회적 약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과거 진짜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남편과 아버지로부터 성적학대를 받았던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 인생의 조화(造花) 역할만 한 사람도 있다. 이들은 마을을 찾은 조폭들로부터 부당한 간섭과 편견에 맞서 싸우면서 서로가 한 몸이 되는 진정한 가족으로서의 경험을 체득한다.
대장 정묵을 정점으로 구성된 조폭도 일종의 가족으로 볼 수 있겠다. 자신들만의 규율과 삶의 원칙이 있다. 그들은 왜 이 시골마을을 찾아왔을까? 도시의 때가 전혀 묻지 않는 곳에 그들만의 수련장 내지 합숙소를 짓기 위해서이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자연상 장어"를 찾고 웰빙개념의 시골 숙소를 생각하는 조폭은 과거 끈끈한 정에 바탕을 둔 그런 감성적 조폭이 아니다.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매순간 전전긍긍해야만 하는 현대의 보트피플의 삶을 닮았다. '끊임없이 변화해야 산다. 안주하면 도태된다. 고착되는 순간 진다. 조직 건강성을 위해 평균이하의 조직원을 도태시키거나 혹독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두목 정묵의 이런 말들을 보면 조폭이야말로 바로 현대인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성석재의 <위풍당당>은 "가족이 뭐나요, 아자씨"라며 평소 좀 덜떨어진 모습을 보인 여산이 조폭두목 정묵에 맞서 위풍당당하게 결투에 나서는 장면에서 핵심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 싶다. 그는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가족에서 아버지 역할을 한다. 외부의 불의에 맞서 온몸으로 맞서 결국 마을을 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자는 우리 아버지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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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약판매로 구매했더니 미니현판과 함께 비닐 포장되어 있었다.
미니현판을 분리한 후의 책의 앞면. 미니현판은 방문 앞에 달아놓고 위풍당당하게 살아야겠다.
책의 뒷면.
성석제 작가는 색깔이 아주 뚜렷한 작가다. 고전에나 나올 법한 해학을 현대로 불러들여 소설을 맛깔스럽게 한다. 소설의 주요 근거지가 농촌이라는 점도 더해져서 고전이나 근대 소설을 읽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에서도 그의 진가는 어김없이 발휘되어 ‘역시’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시인으로 출발한 그의 면모를 보여주듯 제목은 함축성을 띠고 있다. 각 장을 넘어가면서 캐릭터 하나하나의 이력을 소개하는 것도 이채롭다. 간혹 과거와 현실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묘사하여 헷갈리게 하는 부분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의 글이 거침없이 흐르다보니 한바탕 웃고 책을 덮으면 일장춘몽과 같이 남는 게 없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소설의 제1 요소는 재미다. 독자는 책에서 짜장면 값이라도 뽑아야 한다. 이것과 비슷한 말이 어느 칼럼에 나왔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책값이 짜장면 두 그릇에 해당하는 데서 나온 것 같다. 물론 킬링타임용의 그저 그런 책과는 구분될 수 있도록 재미 속에 작가의 의도와 주제를 교묘히 숨겨놓아야 한다.
성석제 작가가 책에서 그리고자 한 ‘가족애’를 강조했다면 주제는 돋보였을지 모르지만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기껏 강조한 것이 신파극에나 나올 법한, 새미가 떠나려고 할 때 소희가 안아주며 말하는 부분이나 조폭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고민할 때의 장면 등 서너 페이지뿐이다. 자연에 대한 파괴도 그렇다. 좀 뜬금없기는 했지만 고작 말미에 중장비와 덤프트럭 들여온 게 전부다. 나머지는 본문 중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독자가 부담 없이 읽으면서 느끼게 했다. 못 느껴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독자는 천차만별이며 작가의 의도에 독자를 꿰맞출 수는 없다. 요즘 작가들의 책을 읽다보면 이런 점을 간과한 책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런 책은 진중하다 못해 너무 경직되어 있다.
책은 강으로 시작해서 강으로 끝난다. 책의 시작이 고풍스럽고 아주 인상이 깊었다. 마지막 끝날 때도 시작과 비슷하게 구색을 맞추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성석제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예판 구매한 거라서 책의 안쪽에 성석제 작가의 사인이 있다. 인쇄가 아닌 친필이라고 한다. 성석제 작가의 손이 아팠겠다. ^^
띠지를 분리한 후의 책의 앞면. 산 부분을 만지면 오돌도톨함을 느낄 수 있다.
책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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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석제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다. 단편집 <참말로 좋은날>을 읽은 게 다 인듯 하다. 제목은 참말로 좋은 날이었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고단했고 처한 상황은 벼랑끝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고 반어의 표현으로 묘사된 그들의 삶을 보았다.. 드디어 입담계의 아트, 재담계의 클래식.,,(차미령의 해설...)라고 말하는 성석제의 책< 위풍당당>을 만났다..
봉래산속에 위치한, 지금은 쇠락해진 예전의 드라마 세트장.. 그 허위의 공간에 각양각색의 사연과 상처를 안고 모여든 사람들.. 그 사람들은 피로 얽힌 가족이 아닌 그저 같이 밥을 먹고 생활을 하는 식구였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보듬어주는 깊은 산이 있었고 그들을 쓰다듬어 주는 깊은 강이 있었다. 강에서 적당히 법을 어겨가며 낚시를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여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지만 조부와 부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전 재산을 친척들에게 빼앗기고 근근히 손을 벌리며 살아온, 가곡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영필노인.. 나무와 꽃 여러가지 식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힘을 가진 소희.. 남편의 구타와 폭력, 그로 인해 딸까지 잃고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산의 품에 안긴 이령.. 엄마의 남자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지능이 5학년 수준인 동생 준호와 함께 힘없이 찾아든 새미.. 그렇게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가던 그들에게 위기가 닥친다..
조폭들의 등장.. 여기에 나오는 조폭은 어딘가 어설프다. 요즘은 조직에 들어가려고 해도 스펙(?)이 있어야한다는 것.. 정말 재미있다.. 보스 양정묵은 무게는 잡고 있지만 인간적이다.. 마을로 폼나게 들어온 그들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당한다. 그것도 천연무기(?)로 ... 벌침, 고추가루물, 똥물.... 마치 <나홀로 집에>에 나오는 도둑들이 어린아이의 장난감에 당하듯 그렇게 당한다.. 그리고 조폭들을 물리치는(?)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은 그야말로 끈끈한 하나의 끈으로 묶이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
왜 그의 소설을 입담의 진면목, 해학의 결정판... 등등의 말로 표현하는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더운여름 봉래산속, 어설픈 거구의 한 사내와 명품으로 치장한 조직보스와의 한판 대결.. 결국 사태는 정리되고 여기 저기 상처입고 똥물을 뒤집어쓴 조폭일당들이 시동이 걸리지 않는 모터보트에 옹기종기 앉아 노를 저어 강을 건너는 마지막까지 웃음줄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 행동, 소리가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눈앞에 아른거린다.. 눈은 책을 읽고 있지만 머리속에서는 한편의 영화가 지나가고 있다.. 책을 덮는 순간 눈앞에 THE end라는 엔딩자막이 마구 올라가고 그들의 결정적인 NG장면도 상상이 되는....
재미있다.. 그리고 감동적이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완벽한 가족이야기... 가족.. 따뜻하고 항상 위로가 되며 안식처가 되어주는 그런 울타리.. 하지만 요즘은 그 의미의 막이 점점 얇아져 그저 가족이라는 관계로 그 틀을 유지하는 성향이 있는 듯 하다..꼭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서로를 보듬고 있는 이들이 진정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찌보면 식상할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작가 특유의 전개로 이 5월에 가족이라는 것을 또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보게 한 그런 이야기인듯 하다..
고요한 듯 우뚝 서있지만 그 안에 많은 생명들을 안고 있는 산과 고요히 흐르는 듯 하다가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 그러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삶도 격정과 함께 이제 온화함을 찾아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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