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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통해 이정명 작가를 처음 만났다. 아, 뭐라고 해야 할까. 읽는 내내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참 더디게도 읽어나갔다. 그 이유는 내용적인 아픔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 이면에 '글'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하는 사유 덩어리를 저자는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글로 시작해서 글로 끝나는 소설이다. 뭔가 말이 좀 이상한가? 소설이라는 게 당연히 글, 활자의 나열이지 뭐라고... 맞다. 여태 나는 책을 읽으며 내용을 읽은 것이지 글을 읽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글이란 건 단순나열 된 활자일 뿐, 그 이상을 보려 한 게 아니라 내용의 깊이를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을 통해 비로소 나는 '글'을 마주한다. 글로 지배되어온 우리, 지금도, 앞으로도 인간은 글에 지배되어 살아갈 것이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가 왔다 해도 우리 가슴을 움직이는 건 여전히 '글'이 주는 감동과 여운이 몇 배로 크기 때문이다. 이 작품 또한 '글'에 의해서 살고 죽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스기야마는 와타나베는 히라누마는... 모두 글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진정으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반면 나는 '글' 앞에서 여태 까막눈인 채로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전시戰時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우리 세대는 전해 듣고 학교에서 배웠던 것으로 아픔의 크기를 가늠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누구라도 알 수 없다. 그들의 아픔을, 고통을, 처절한 외침을, 참혹한 시대상을,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로 다가올 뿐이고 간접적인 슬픔을 함께할 뿐이다. 왜 죽여야 하는지, 왜 죽는지 알지 못한 채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절규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아픔을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을뿐더러 짐작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겪어보지 않았던 일에 대한 고통의 크기는 가늠하는 게 아니다. 고개 숙여 애도를 표하는 것 이상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는 그들의 아픈 외침을 몰랐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픔과 고통의 크기, 절반에 절반도 덜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게 절절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아픈 시대에, 억압당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절규의 외침이 이명처럼 들리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글'과 '문장'으로 죽음, 살인 사건을 파헤쳐가는 이 작품은 놀랍도록 서정적인 감정을 선사한다.
자유를 갈망했던 이들이 부르짖는 글의 외침!
결국엔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만 남는다. 그럴듯하게 각색되고 부풀려져 새로운 이야기를 형성해간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는 자신을 변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체념, 회한, 아집, 고통, 분노, 상념, 절망 같은 온갖 감정의 찌꺼기들이 뒤섞여 여과되고 정화되어 급기야는 창조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 소설은 그것을 추적해간다. 죽은 스기야마, 백정 같은 야수의 모습 뒤에 미치도록 순수하게 시를 사랑한 한 남자와 그에게 시의 아름다움을 전한 우리의 윤동주 시인의 이미지는 다른 듯 닮아있다. 글로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하고 글로 소통한 모습이 그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한 편의 시로 소설은 시작된다. 영원한 안식년에 든 잔혹한 간수 스기야마 도잔, 그는 후쿠오카 3수용동을 지키는 유령으로 사람들에게 남는다. 살아서 잔인함을 일삼던 그의 최후도 잔인한 형벌을 면치 못한다. 주머니에서 나온 시 한 편이 그의 죽음을 풀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마지막으로 그와 교대근무를 했다는 이유로 어린 간수병 와타나베가 이 열쇠를 쥐고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글로 살아갔고 음악으로 치유되었던 사람들의 뒤를 쫓는다. 이 안에 히라누마.... 윤동주 시인이 있다. 윤.동.주. 학창 시절에 그의 시에 깊게 빠져보지 않았던 학생이 없었을 만큼 그는 우리에게 너무 가깝고 또 먼 사람이다. 그의 시가 길이길이 남았기에 가깝고 지켜주지 못했기에 멀기만 한 사람, 그런 시인을 글로 만난다는 건, 팩션이라 해도 눈물 나게 반갑다. 어린 나이에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 헤는 밤>, <서시> 등을 읊고 그를 느껴보려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흑백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인과 내가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헤아리길 바랐던 시절이 있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시인의 서정적인 시와 이정명 작가의 서정성이 덧입혀져 감동을 극대화한다. 미스테리한 죽음을 추적하는 소설이지만 그 속에 글, 아름다운 시가 존재하고 그 시를 쓴 윤동주 시인이 스며있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아니하리오.
시인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글(책)이 전하는 가슴 떨림이 없다면 기나긴 이생에 마음 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쓸쓸한 가을날에 바람과 함께 한 장 한 장 넘기는 책 넘김이 좋고 추운 겨울밤에 이불을 덮어쓰고 따뜻한 이야기를 느끼는 것이 좋고 봄은 봄대로, 여름은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 글과의 사투를 벌이는 것이 좋다. 글을 사랑한 이들의 삶을 통해 글이 인간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역설하는 이 소설 덕분에 나는 까막눈에서 점차 눈을 뜬다. 글은 읽고 느끼는 이에 따라 다각도로 해석된다. 창살 속에 갇혀있는 자들의 절규는 '글'로서 절절하게 표출된다. 한 단어가, 한 줄의 글이, 목에서 피가 솟구칠 것만 같은 외침, 절규, 아우성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 스산한 창살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구현하려 하는 어린 와타나베의 활약과 그 안에서 글, 시로 진한 우정을 나눴던 스기야마와 윤동주를 쫓고 자유를 향한 열망을 담은 죄수들의 합창의 향연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자유 속에 살면서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 채 억압당해 있다 한탄하는 그것이 말이다. 창살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곳에서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의, 세상을 향한 외침이 왜 그리도 절절하게 들리던지... 윤.동.주. 그의 유일한 무기는 문학, 시였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총성과 포화 속에서도 글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낼 것이다. 문학을, 시를,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원할 테니 말이다. 시대의 희생자이자 역사의 포로였던 윤동주 시인이다.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과 작별한 그였지만 그는 우리와 진정으로 작별한 게 아니다. 그의 글은 남았으니까, 시는 곧 윤동주 시인이고 시인은 시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픈 역사를 들춰보는 건 결코 유쾌할 수가 없다. 아프지만 기억해야 하기에 작가는 이 소설을 써내려 갔을 것이다. 비록 윤동주 시인의 생애 마지막, 형무소에서의 1년의 궤적을 재구성한 팩션소설이지만 누구도 사실은 알되 진실은 알지 못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도 탄생했다. 윤동주 시인을 이 가을과 함께 다시금 기억할 수 있어서 값진 시간이었다. 이 계절의 별은 유난히 밝다. 마음이 시리도록...
*1, 2권 통합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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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들 중 윤동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많은 이들이 윤동주의 시를 읊고 시가 적힌 종이를 가슴에 품고 다니듯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윤동주의 시가 적힌 연습장을 갖고 있었고 그의 시들을 코팅해서 갖고 다니곤 했었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윤동주를 가슴에 품었다. 마치 첫사랑을 좋아하듯 그렇게.
소설가 이정명은 『뿌리 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로 너무도 유명한 작가이다. 그가 한국인이 좋아하시는 시인이자 스물여덟 살에 옥사한 윤동주(1917~1945)의 이야기인 『별을 스치는 바람』을 새로이 냈다. 그의 신작 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데 '별 헤는 밤' , '서시' 의 시인 윤동주의 생애 마지막 1년의 삶을 이야기한다. 후쿠오카 형무소를 배경으로 청년 시인 윤동주와 그의 시를 검열하고 불태운 냉혹한 검열관 스기야마 도잔의 이야기이고,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인 들을 포함한 사람을 비인간적이고 잔혹하게 다룬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한 사람은 감옥의 창살 안의 죄수로, 한 사람은 감옥의 창살 밖에 있는 간수로,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의문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책속의 화자, '나'는 열아홉 살의 학병으로 헌책방을 하는 어머니 덕에 책속에 파묻혀, 책속에서 말하는 문장들의 영혼을 느끼며 살아왔다. 전쟁 때문에 군복을 입었고, 책속에 숨은 책벌레를 잊었고, 문장이 말하는 영혼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높은 담장에 둘러쌓인 이 차가운 형무소 안에서 점점 영혼이 말라가고 있었다. 그는 근무교대를 하고 나서 한 사람의 시체를 발견한다. 악마라고 불리울 정도로 심한 행동을 했던 검열관 스기야마 도잔의 시체를 발견하고, 누가 스기야마를 죽였는지 사건을 떠맡게 된 와타나베 유이치. 유이치는 스기야마의 품에서 시가 적혀진 종이 쪽지를 발견하며, 누구의 시 인지, 누가 옮겨 썼는지, 그에 따른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윤동주 개인의 삶을 다룬게 아닌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열아홉 살의 학병이자 간수를 내세워 윤동주와 윤동주의 시를 사랑했던 스기야마를 바라보고 있다. 지쳐있던 그의 영혼에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던 윤동주의 시는 스기야마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문장 속에서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 보았다. 단 한 줄의 문장에서도 서로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거울을 통해 그 사람을 들여다 보듯 한 줄의 시에서 그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다.
시는 영혼을 비추는 우물이에요. 우리는 더두운 영혼의 우물속으로 두레박질을 던져 진실을 깊어 올리죠. 그리고 시로부터 위로 받고, 지금부터 배우며, 시를 통해 구원받아요. (1권, 236페이지 중에서) 문학은 참 여러가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지쳐있는 우리의 영혼을 숨쉬게 하고, 병든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마음을 달래고 많은 위로를 받는다. 그런 우리들 처럼 스기야마도, 유이치도 윤동주의 시에서 그렇게 한줄기 빛을 느꼈다. 제국을 위해서였다는 그들의 만행에 다시 한번 나라 잃은 설움을. 핍박받는 그 형무소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위한 시를 쓰는 윤동주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책에서는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들, 문학 작품들이 자주 언급된다. 윤동주의 시 21편이 전문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서 마치 윤동주의 시집인양 그렇게도 생각되어졌다. 솔직히 윤동주의 시를 사랑했어도 그의 시를 많이 알지 못했는데 제대로 볼수 있어서 그 기쁨이 컸다. 색색의 포스트 잇을 붙여 가며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젊은 날에 가버린 그의 삶이 너무 안타까워서도 읽었다.
고흐의 서간집과 화집을 사랑하고 유난히 별을 사랑했던 윤동주가, 특히 좋아했던 고흐의 그림을 나도 다시 한번 들여다 본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란 그림속에서 고흐를 느끼고 윤동주의 마음을 느낀다. 그림을 보며 나도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란 시를 읊어본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후 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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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출산휴가 들어가게 된 국어선생님을 대신할 기간제 교사를 뽑았다. 최종 후보자 두 분의 수업 시연이 있었다. 국어교사는 아니지만 나도 참관을 했다. 시와 관련된 단원이었다. 한 분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해볼 사람?" 첫 멘트였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참관 교사를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수업 시연을 한다.) 이 선생님께서 본인이 낭송해보겠다고 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윤동주의 '서시' 정도는 암송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날 수업 시연을 하는 선생님의 시낭송에 어이없게도 나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 무슨 어설픈 감정이입인지!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내가 시인 윤동주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이라고, 서시를 제대로 해제해 본적도 없고 시를 가르쳐 본적도 없는 일개 사회과 교사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선생님의 시낭송에 울컥하다니. 나는 눈물을 감추며 조용히 퇴실했다. 혼란스런 감정을 나도 해석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나버린 것이었기에. 90년대 초반까지 연예인들의 목소리를 빌어 시낭송을 담은 음반이 출시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한번도 사서 들어본 적은 없다. 이런 테잎을 사서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신나는 댄스와 빠른 가사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음반들에 묻혀 시낭송집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돈 안되는 짓을 왜하나 하며 한심해 했다.
2013년, 출근길에 지역 방송사에서 송출하고 있는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손석희 방송은 대선 이후 듣지 않는다 ㅠㅠ) 아이를 데려다 주고 혼자 차를 타는 5분, 딱 그 시간에 맞춰 라디오에서 한 시인이 시낭송을 한다. 아침마다 그 시간만 되면 시낭송과 시 소개에 귀기울인다. 시를 읊는 라디오 프로에 쏙 빠진 30대 아줌마의 내 모습이라니. 10대때의 시선으론 꿈도 꾸지 않았던 20년 후 현재 내 모습이다. 시가 점점 내게로 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에 푹 빠져버렸나보다. 작년 여름 이정명의 신간이 나왔을 때 워낙 이정명 소설은 대중성 있는 역사소설이었던 전작들로 인해 『별을 스치는 바람』역시 재미만큼은 보장할 것이다라는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 보기엔 뭔가 아깝단 생각이 들어서 친한 동료에게 빌려 놓고 자꾸만 후순위로 밀어내고 있었는데 급기야 해(年)가 바뀔 때까지 미루게 되었다. 서서히 책을 읽어야한다는 의무감보다 책을 돌려줘야한다는 책임감이 몰려왔다. 핑계가 필요했다. 계절을 그 핑계로 삼았다. 따뜻한 봄도 왔으니, 가벼운 소설 읽기로 들어가보자. 딱 그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가벼운 책 읽기?', '따뜻한 책 읽기?' 착각을 해도 한참 착각을 했다. 막상 책을 읽으니 오슬거리는 마음, 자꾸만 시큰해지는 코끝, 나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감정 수습이 안될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 감정제어가 안되는 사람이었나, 혹시 나의 어떤 상황이 이 책의 내용과 결부되어 영향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등 별의별생각을 다해봤다. 바쁜 것 외에는 슬플 일도, 마음 쓸 일도 없었다. 결론은 순전히 이 소설때문이었다. 어설프게 아는 시 몇 자락만이 윤동주에 대한 정보가 다였던 내게 재작년에 읽은 『동주』(구효서)는 윤동주의 생애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때 잡은 대강의 윤곽이 이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두 책은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알아가는데 있어 연결하여 책읽기로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구효서의 『동주』에서 윤동주가 일본 유학 이후 체포되기 전까지의 삶을 다루었다면 이정명의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윤동주의 수감 생활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책 모두 픽션이다. 『별을 스치는 바람』 1권에서는 윤동주가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다. 화자는 스무 살도 안된 교도소 간수 유이치. 스기야마 도잔이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간수병의 비참한 죽음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시점이 현재와 과거를 들락거리고 화자도 왔다갔다 한다. 나중엔 스기야마의 서술인지, 유이치의 서술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점점 스기야마같은 간수병이 되어 가는 유이치의 변화때문일 수도 있다. 그만큼 작가 이정명이 구성한 이야기 꾸러미의 틀이 견고하고 치밀하다.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이 책에 감탄한 것은 작가의 문장때문이다. 전작 중 『뿌리깊은 나무』밖에 읽어보지 못해 그의 문체나 표현에 대한 평가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의 가슴 저 밑을 건드리는 그가 한 표현들을 주워 삼키느라 체할뻔 했다. 이 책은 의문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 자체도 재미가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시대의 암울함을 묘사하고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려 한 그의 글솜씨에 더 많은 매력을 느꼈다. 이정명 작가의 연배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글이 한창 무르익은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감히 해보았다. 어쩌면 한 권으로도 끝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두 권으로 엮을 정도로 양이 많은 것도 그만큼 하고 싶었던 개인적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인간의 선악에 대한 규정, 글(언어)이 주는 힘, 문화예술의 저력, 평화에 대한 갈망 등을 담아내고 싶었했었다는 게 느껴진다. 스기야마 도잔과 윤동주란 인물의 대척점을 통해 그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코 가벼운 소설 읽기가 될 수 없었고 따뜻한 책 읽기도 될 수 없었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 와중 이 책을 만났으니 그에 대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희멀건 형체는 잡힐 듯 하다. 시를 읽다 울음을 터트려버리는 나 자신을 보며 내가 왜 이럴까에 대한 놀람에서, 알수 없는 감정의 폭발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시의 힘을 느꼈다. 시란, 경험과 시간이 응축되어야 그 맛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시어가 담아낸 함축적 의미를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어가 나의 경험과 지나온 시간들로 자동 연결되어 감정을 관장하는 뇌로 전달되는 것이다. 시를 포함한 문학의 힘, 책의 힘, 문화의 저력이 왜 그토록 강한지 충분히 공감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이렇게 독자를 휘어잡고 많은 것을 가슴으로 담기게 하는 작가가 그 동안 얼마나 연마하고 사유하고 고뇌했을까, 생각하니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함이 솟아 올랐다. 별, 바람, 하늘, 시. 가장 멀리 있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 가장 넓은 존재, 가장 압축적인 존재. 이 네 가지 단어에서 이미 인간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은가. 시공을 초월한 자연의 언어에 인간의 가슴을 담은 인공의 언어들. 그것이 사람을 울리고 웃게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직설이 아닌 은유와 비유의 내공이 얼마나 센 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악마라고 불리던 간수병 스기야마 도잔도 동전의 양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누구도 개별화된 개인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사람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악인이 될수도 선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일 뿐이다. 광기어린 폭력으로 조선인을 대했고 지독한 검열로 책과 편지를 불태웠으며 죽음을 부르는 고문으로 '스기야마 도잔'이란 이름을 죄수들에게 인두로 지진 것처럼 새겨놓았던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고결하고 숭고한 시인인 윤동주와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역설적인 관계가 소설 전체를 양끝으로 팽팽하게 끌어 당긴다. 끝없는 긴장감만 줄 것 같지만 곳곳에 작가 본인이 하고 싶은 말들을 등장인물의 독백처럼 심어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감탄과 생각의 시간을 주어 긴장으로 인한 피로를 녹여 주기도 한다.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1권, 220쪽) "하지만 전쟁의 광기가 언어를 초월해도 그 야만성을 증거할 것은 결국 언어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순결한 언어만이 가장 참혹한 시대를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1권, 228쪽) "나는 죄없이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보았다. 그것은 전쟁이 나의 영혼에 가한 폭력이었다."(2권, 247쪽) 이런 식으로 작가는 전쟁에 대한 혐오와 글이 가진 무한한 힘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 한다.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는 생각의 전개는 못해도 어느 정도 두리뭉술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었다. 그것을 작가의 재능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딱부러지게 대변해주고 있어서 더욱 감사했다. 문학성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시에 대한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이 소설이 단지 내게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즐거운 시간을 제공하였으며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 만든 것만 선물해준 것이 아니다.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시의 존재감이다. 왜 문학 시간에 시를 배웠고, 억지로 시를 읽혔으며, 시를 쓰게 했는지....... 왜 시인들은 팔리지도 않을 시집을 엮어내며 결국 시를 남기려 하는지....... 직설적인 언어로 뱉는 것과 돌고 돌아 더 많은 걸 담아내며 한 쪽의 종이 면적에 짧은 몇 글자 남기는 시어들과 무엇이 다른지, 어떤 것이 더 미지의 감정을 건드리는지. 감정을 지나 사색과 사유로 넘어가게 하는지. 이정명 작가는 소설 속 윤동주 시인의 입을 빌어 시에 대해 정의한다. 말씀 言 절 寺 = 말의 사원 = 詩 시는 말 중에 가장 깨끗하고 낮은 말들의 집단 "시는 영혼을 비추는 우물이에요. 우리는 어두운 영혼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져 진실을 길어 올리죠. 그리고 시로부터 위로 받고 시로부터 배우며, 시를 통해 구원받아요." "'똥물에 파도치는 소리'라는 욕에는 '쓸모없는 말'이라는 뜻이 숨어 있어요. 상징과 은유는 문장에 생명을 불어넣는 장치죠. 늘 볼 수 있는 흔한 사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이게 하거든요." "시는 삶이에요.당신은 당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시를 써왔어요.잉크로 종이 위에 쓰는 대신 온몸으로 거리에다 시를 썼죠." (1권, 236~238쪽, 일부 발췌) 내가 그 기간제 선생님의 시낭송에 울컥해버렸던 것은 내 삶을 통해 나의 시를 써왔고 그것들이 맞닿은 어느 한 부분에서 이성적인 의식을 할 새도 없고 응축된 경험과 시간들이 폭발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냥'이 아니다. 삼십대로 넘어가며 스스로 고민하고 갈등했던 여러 생의 과제들에 대한 시간들이 쌓일수록 나는 보이지 않게 내적으로 성숙하고 깊어 갔던 것이다. 쾌락과 표면적 즐거움과 속세적 성공이 우선되었던 20대를 지나 그 시간들과 경험들이 숙성되어 깊은 맛을 우러내기 시작한 나이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숙성될지는 더 살아 봐야하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치열히 하던 중에 다시 들어온 윤동주의 '서시'는 열 네 살때 만난 '서시'와는 분명 다르다. 작가의 말처럼 내 삶 자체가 한 편의 서사시다.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다른 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묽은 기름 한방울 떨어뜨린 듯 부드러워지고 고소해진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 네 단어가 유리알 파편처럼 빛난다. 내 안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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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신윤복> ... 이번에는 윤동주다... 팩션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이정명의 새로운 이야기.. 별을 스치는 바람.. 별, 바람.. 그것들과 함께 연상되는 아름다운 시.. 그리고 윤동주.. 순수한 영혼 윤동주의 시를 불태운 악랄한 교도관이자 검열관이었던 자의 죽음이 얽힌 미스테리 팩션..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기 전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 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은 끝이 난다. 후쿠오카 형무소의 교도관이었던 '나' 와타나베 유이치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문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던 나는 오히려 붉은 죄수복으로 갈아입은 하급전범이 되버린다.. 죄목은 포로 학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라고 맘 속으로 외친다. 아무것도 막지 못하고 악마들의 광기에 침묵하고 죄 없는 자들의 비명에 귀를 닫은... 그래서 그는 이야기하려 한다. 인간이 아닌 자들의 이야기.. 가장 순결한 인간과 가장 타락한 인간들의 이야기.. 그리고 어두운 우주를 가로질러 온 만 전 별빛의 눈부심에 관한 이야기... 이렇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오게된 '나'를 통해 한 명의 죄수와 한 명의 간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조선인들을 수용한 3수용소 그 수용소의 교도관인 스기야마 도잔.. 모든 죄수와 간수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경멸하던 그.. 그가 가슴에 흉기가 꽂히고 대들보에 벌겨벗겨 매달려진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의 간수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한편의 시.. 형무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경찰을 부르지 않고 이제 막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 신참내기인 나에게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알아나가게 되는 진실..
이야기의 초반은 이 이야기를 구성하게 될 많은 단서들이 제시된다. 조선인이라는 명목하에 누명과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자들 한글로 글을쓰고 학문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있는 자들..그들의 분노 의무동의 설치와 그 의무동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선율 검열실과 그 검열실 안쪽의 압수저작물 서가.. 미처 소각하지 못한 많은 책들.. 이 많은 단서들은 무엇인가
히라누마 도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 언도.. 즉 조선말인 한글로 글을 쓴 죄였다. 그의 압수 저작물 도스토엡스키의 <죄와벌>, 폴 발레리 시집,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프랜시스 잠과 마리아 릴케의 시집들.. 그리고 그 사이에 들어있었던 많은 그의 자작시들.. 이것을 검열해야하는 검열관은 히라누마 도주,윤동주의 시에 그의 영혼을 빼앗긴다. 문학적 작품들 그리고 윤동주의 시로 인해 알게 되는 활자. 글자들의 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총과 칼의 힘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 , 한 문장임을 그는 깨달아 간다. 죄수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윤동주의 서신들을 기다리게 되는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글자. 그리고 그 글자들이 모여 이루는 영혼의 울림에 점점 동화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는 저작물 서가에서 밤을 새우며 세익스피어를 읽고 프랜시스 잠의 시를 느끼며 글을 읽기 전의 세상과 글을 읽은 후의 세상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살인사건의 범인은 의외로 빨리 밝혀진다. 그의 가혹한 행위에 앙심을 품은 죄수들.. 그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그는 살해를 당한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을 당한 그 스기야마 도잔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악독한 교도관이 아닌 시인이자. 음악을 사랑하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새롭게 밝혀지는 그 스기야마 도잔에 대한 진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 모델인 윤동주와 죽음을 당한 스기야마 도잔.. 그리고 형무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행된 어떠한 일들... 본격적인 이야기는 2권에서 그 실체가 밝혀질 듯 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용되었던 윤동주의 생애 마지막 1년 그 생에 대한 의문이 바로 이 소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죄수와 간수 극과 극의 상황이지만 그들은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소통하고 화해하고 교감한다. 오랫만에 접하는 윤동주의 시는.. 그 배경이 일제 강점기의 한 형무소이고 그것을 읽고 감동하는 한 악랄한 일본인 간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울림과 감동이 더 배가 되어 다시 느껴지는 듯 하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하나 밝혀지는 진실들도 재미있지만 간간히 나오는 그의 , 프랜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들은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와 흥분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듯 하다...
"시는 영혼을 비추는 우물이에요.우리는 어두운 영혼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져 진실을 길어 올리죠. 그리고 시로부터 위로 받고, 시로부터 배우며. 시를 통해 구원받요."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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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이게 누구를 그린 소설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첫 장면이 심상찮다. 우리가 아는 그 이름부터 등장하는 게 아니라 1945는 전쟁이 끝나고 전쟁 포로로 감옥에 갇힌 후쿠오카 형무소의 간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의 독백은, 그리고 형무소에서 인간 백정으로 불리며, 죄수, 특히 조선인 죄수들을 혹독하게 다뤘던 스기야마 도잔의 죽음으로부터 이어진다. 스기야마 도잔은 반 까막눈으로 지독한 검열관이었다. 그는 조선어로 된 모든 서적을 불살랐으며,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아내 편지나 서적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그 글과 서적의 주인에 몽둥이찜질하는 이였다. 그가 살해당한 것이다. 와타나베 유이치는 그의 죽음을 조사하라는 형무소장의 명령을 받고 스기야마 도잔이란 인물을 캐내기 시작한다.
죽은 스기야마 도잔의 간수복 윗도리에서는 시를 적은 종이쪽지가 발견된다. 시의 정체가 궁금하다. 이 시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스기야마를 캐낼수록 관련성이 깊어지는 한국인 청년 죄수 히라누마 도주의 것이 아니었다. 스기야마는 히라누마 도주의 나약한 시적 감성을 비아냥거리고, 그를 굴복시키려 하였지만 점점 그에게 끌려간다. 그에게 끌린다기보다 그의 시(詩)에 끌리고, 그의 감성에 끌려간다. 급기야는 반 까막눈인데도 시를 적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모국어를 잃고, 시를 잃은 청년은 오히려 힘을 잃어간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윤동주.
“펜은 칼보다 강하다.”란 말을 저주스럽게 생각해왔다. 정말로 펜이 칼보다 강하다면 그런 말이 왜 필요하겠냐며, 펜보다 센 칼의 시대를 저주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믿어버린다면 내가 들고 있는 펜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그래도 간직하고 싶어했다. 그런 마음을 저주하기도 했다. 《별을 스치는 바람》 1권은 그 짐승 같은 시절, 글을 써야만 했던 한 식민지 조선의 청년과 글을 전혀 모르던 한 일본인 청년 사이의 대결이자 교류를 보여준다. 그 대결과 교류는 글, 문자, 시를 둘러싼 것이다. 그 힘에 관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부질 없고, 가장 필요 없고, 저주받아야 할 것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그것에 매달려야만 할 것 같은 것.
스기야마 도잔이란 인물이 있었을까, 윤동주는 감옥에서 저렇게 지냈을까 하는 의문은 가질 필요가 없다. 애당초 소설이니까. 픽션이라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의 감동과는 다른 감동을 이 픽션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 2권이 남았다.
스기야마가, 이정명이 옮긴 시 중 한 구절을 나도 옮기며 소리 내어 읽어본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 <바람이 불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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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에 대해 정성껏 혹은 혼을 다해 말하는 일이 어느새 좀 어려워졌다. 쉽게 읽기와 단편적 쓰기만 가능하다. 읽기와 사색, 글쓰기 사이에서 방황하며 줄세우려한지 한 해 두 해도 아니지만 그동안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 왜 읽는지마저도 희미한 상태로 앞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쳤다. 시간이 멈춘다. 문장과 책으로 쌓인 벽이 허물어진다. 이 바람을 타고 식민지 청년들이 목숨처럼 읽었던 모든 작가와 책들이 불어온다. 어쨌든 작가 이정명이 윤동주를 말한다면 그건 반드시 읽어야한다는 뜻이다. 윤동주의 시(詩)에도 생(生)에도 관심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뜻이며 당장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언젠가 <절정>이라는 특집극을 보고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시인에 대해 썼었는데 이 삶은 그보다 더 무겁단 말인가. 아는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다행인가. 시를 읊조려본다. 그는 스물 아홉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두 시인의 삶이 다르지 않다. 시작부터 먹먹하다. 또 이 시대인가.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삶은 더 팍팍하고 더 불꽃 같고 더 짧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하던 그는 이제 없다. 잔혹하고 끔찍한 상상력으로 복원하는 일제의 만행과 생체실험, 그의 마지막 1년을 그려내는 이 소설이 소설이 아니라서 막막하다. 읽을 수 있을까. 그의 삶을 끌어안기에 이 계절과 시대가 가혹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序詩))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형무소, 삶 뒤에 남겨진 것들의 헛헛함과 팍팍함, 무겁고 퀴퀴한 공기가 전부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고독한 짐승처럼 고독했던 한 간수(스기야마 도잔)가 1944년 겨울 어느 날 나체로 천장에 목매달린 채 발견된다. 징병되어 형무소로 온지 3개월 된 신참 와타나베 유이치에게 그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라는 은밀한 지시가 내려지고,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앳된 소년의 형무소 구석구석 탐험기가 시작된다. 슬프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미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제3수용동에는 악질 중의 악질로 손꼽히는 조선인 죄수들이 산다. 그들이 대단한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제 나라를 찾겠다는 투쟁이 겁나 제국 스스로가 이름 붙인 것이다. 모든 기록과 서류를 검토하던 와타나베는 거칠고 난폭한 최치수 일당을 스기야마의 살인자로 내정한 다음, 그의 삶과 수감생활을 하나하나 캐지만 전쟁통의 여느 인생이 그렇듯 뭐하나 뚜렷한 게 있을 리 없다. 수용동 내의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사실로 쓰여진다. 불리한 진실을 소각되고 유리한 진실이 탄생한다. 다만 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차례로 소동을 일으켜, 들어간 지 3일이면 영혼마저 잃어버린다는 독방으로 기어들어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눈여겨본다. 최치수에게 다가간 와타나베는 스기야마와 최치수 본인에 대해 묻고 들으며 전쟁을 나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영혼마저 내놓은 간수 스기야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조각난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간다. 그러던 중 간사한 기회주의자 소장에 의해 살인자는 최치수로 낙인 찍힌다. 그는 없는 죄를 인정한 채 사형당한다.
누구의 삶이 더 가엾고 슬픈지 논하기에는 시대가 어지럽다. 전쟁에서 승리국이 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일본국과 다른 나라들. 가해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든 전쟁 안에서 영혼을 잃어가기는 매한가지다. 영혼을 잃으면 곧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와타나베는 마흔이 넘은 스기야마의 고독한 생과 마지막을 추적해가는 한편, 최치수를 비롯한 조선인들에 대한 엄청난 소음을 듣는다. 그는 헷갈린다. 혼란스럽다. 시와 문장과 별과 책을 사랑하는 민족, 힘겨운 노역장에서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늘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미소마저 띄고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나중에 모든 것이 꿈과 희망을 나누는 시간이었다는 걸 안 순간 그는 전율한다. 영혼까지 하얗던 민족, 전쟁의 적국이 아닌 식민국임에도 제국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민족, 조선인들의 모든 문장과 시, 책의 중심에는 매순간 히라누마 도주(윤동주)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이 이야기는 혹독하게 스러져가는 전쟁중의 어느 형무소에서 스기야마 도잔이라는 한 일본인 간수의 영혼을 구원한 조선인 시인에 대한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문장'과 '시(詩)'라는 빛으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한 남자와 한 남자에 뜨거움에 대한 것이다. 글이 뛰어난 동주는 온 편지가 검열을 당해 자신들처럼 이 형무소 안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소각될 때, 서러움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종이 위에 쓸 줄 알았다. 독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던 최치수 일당은 유약한 외모 속 강인한 생명력을 먼저 알아보고는 음모에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동주는 굴복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동조는 목적은 같되, 방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를 바보라 놀리던 최치수가 어느새 동주를 맹신해 저지르지 않은 죄를 모두 인정하고 떠날 만큼 제3수용동의 동주라는 인물은 크고 빛났다. 자기가 가진 모든 빛을 동주에게 얹어주고 떠난 최치수도 마찬가지였다.
동주는 수감동 안 모든 죄수들이 눈물로 쓴 편지를 소각되지 않도록 대필했고, 이를 세상으로 내보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스기야마였다. 뼛속까지 악마인 줄로 알았던 스기야마는 날마다 날아드는 동주의 편지글 속에서 봐서는 안될 것을 본다. 두 영혼이 통한 것이다. 그것은 금기시 된 영역이자 금지된 사랑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희미한 문장과 시로서 우정을, 영혼을, 전쟁을, 이를 제외한 수많은 것들을 나눠고 이겨왔다. 스기야마는 동주의 천재적인 시적 재능을, 동주는 스기야마의 악마 같은 외면 속에 가려진 전쟁의 상처와 개인의 나약함을 통찰했다.
수용동 안에 들어온 제국병원 의료진과 미도리라는 간호사, 간호사가 연주하는 오래된 피아노, 형무소 안의 유일한 꽃과 희망이던 피아노 반주 맞춰 노래하는 성가단은 조선인을 비롯한 모든 수감동에서 '별'처럼 여겨지는 죽지 않은 하나의 인간성이다. 누구도 말살하지 못할 내면 깊은 곳의 순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고문과 매질로 독방 생활을 자처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무엇 때문에 동주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다. 그즈음 이전까지는 없던 의료진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잊혀져가는 기억과 가눌 수 없는 육체, 잃어가는 영혼을 두눈으로 확인할 뿐인 일련의 일들로 스기야마는 갈등한다. 소각해야 할 시(글)와 더 깊이 탐구하고픈 시(글) 사이에서 고뇌하는 스기야마는 나중에 와타나베가 그런 것처럼 동주를 감싸고 보호한다. 죽음을 막아주고 시를 쓰길 부탁했으며, 살아남길 희망했다. 하지만 이들의 간절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은 서서히 부서진다. 단 하루라도 조국으로 돌아가 햇살 아래 바람을 맞으며 별을 바라보고 싶었을 이들의 한숨과 눈물과 희망이 행간마다 너울댄다. 꿈처럼 아득하다. 돌아오지 못한 영혼이, 말살되어간 육체와 영혼과 모국어와 문장들이, 자신이 쓴 시로 단 한 권의 시집을 출판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냉전시대에 희생당한 청년의 꿈이 바스러져 간다. 문장과 단락과 페이지마다 살아숨쉬는 이들의 영혼이 아우성치기라도 하는 듯.
시는 감동에 감정을 더한다. 릴케와 고흐와 프랜시스 잠과 스탕달과 도스토예프스키와 괴테, <몬테 크리스토>와 <삼총사>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이 소설을 관통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제3수용동에 수감된 이들에게는 단 한 권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권의 책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영혼마저 팔았을 그들에게 책은, 불꽃처럼 사라져가거나 냉혹한 손길에 소각될 가지지 못할 유일한 희망일 뿐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별이 없었다. 형무소 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도 없었다. 안과 밖이지만 전쟁 속에 갇힌 건 같았다. 동주는 단 2년을 선고받았을 뿐인데도 영영 민족과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짐승같은 타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에 별은 어디를 비추고 있었을까.
한 권이 아니, 두 권의 문장 전체가 시처럼 반짝인다. 그들은 죽어 시가 된 것인가. 다소 아스라이 그려진 실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하지만 진짜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끔찍한 이야기를 언급할 자신이 없다. 와타나베가 밝히고자 다가간 진실은 우리(조선인)만이 피해자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스기야마와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이미 벌어진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뭐가 있었겠으며, 있었다한들 가능했을까.
살려준다는 의료진 말에 그들은 의무병동으로 옮겨져 주사를 맞았다. 처음에는 약인 줄 알았다. 나중에야 독인 줄 알았다. 어떤 이는 왜 죽는지 모른 채 죽어갔다. 굵은 주사기가 팔뚝을 뚫고 약물이 몸 속으로 흘러들어갈 때, 그가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짓밟는 거라는 사실과 영혼을 갉아 먹히고 있다는 사실과 곧 모든 시와 기억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매 순간 가늘게 부서져내린 희망이지만 이 순간에도 희망을 찾아 주사와 피아노 반주의 노래소리를 바꾸었을 그의 마지막 희망이 내게는 다급한 절망이란 게 멀쩡한 정신을 좀먹는다. 밤하늘의 별은 당연한 것이 아닌데도 아이들의 연날리기는 일상이 아닌데도 자라는 풀과 웃지 않는 벌레와 다정하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쓰다듬는 손길은 일상이 아닌데도 모두가 그런 줄 안다. 단 한권의 책을 갖기 위해 지하로 가는 땅굴을 파고, 자유로운 바람과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보기 위해 즉시 총알이 날아와 박힐 상황을 무릅쓴 채 나가려 했던 이들의 시간을 이제와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지 먹먹하다. 내 평온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뼈저린 사실을 왜 우린 종종 잊는 걸까. 어째서 더 죽을 힘 다해 살지 못할까. 왜 이루지 못할 일에 매달려 불평하고 왜 바꿀 수 있는 일은 쉽게 포기해버릴까. 암울한 시대도 이용가치는 있다.
겨울을 나기만 하면 또 한철을 날 수 있다던 감방 안의 작은 희망, 부스러기를 붙잡고 한마음으로 책과 책을 말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다. 이제와서 위기철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잘 써먹는 위기도발, 한국공격(속터지는 독도발언), 내부결집으로 몰아가고 싶진 않다. 피를 갈아채울 순 있어도 그렇다고 출생의 비밀을 가릴 순 없다. 우린 강했고, 타국을 공격하지 않고도 그 누구보다 용기있게 싸워 영혼을 불살라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장렬하게 꺼져간 불꽃 같은 민족이다. 잘못은 글과 말과 조국과 어머니를 가진 민족의 몸과 영혼을 태워 없애기만 하면 깡그리 소각될 거라 믿었던 어리석었던 이들에게 있는 것이고, 비록 수용동 담장벽을 넘지 못했던 초라한 연이지만 연을 만들어 날려보려 했던 이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했대서 희망을 탓할 수 없었던 이들은 절망 속에 든 희망을 끌어안고 전사했다. 시는 종이 위에 글로 쓰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정신으로 쓰는 것.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일본이라는 제국은 몰랐고, 하얀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민족은 알았다. 그래서 이겼다.
바람은 우리가 바람인 줄 모르는 동안에는 바람이 아닌가. 하물며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말을 건넨다. 말을 건네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없이 바스러져간 조선인들과 담장 밖에서 그들을 지켜주던 쓸쓸한 별과 갇힌 이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모래와 흙을 하염없이 실어나르던 바람은 모두 우리 편이었다. 육체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은 영원히 조국을 비추고 또 지킨다. 시인 윤동주의 짧은 삶과 남겨진 시는 엄청난 풍파를 겪고 살아남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여름밤은 책 한 권을 읽기에 지나치게 짧다. 윤동주의 삶은 여름밤에 삼키기엔 너무나 크고 무겁다. 그리고 벅차다. 시가 반짝인다. 문장의 결이 종이 위에 녹아내린다. 그 날 사라진 별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바람과 별과 시가 보일 것이다. 문장은 더이상 그들을 가두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찾은 자유가 오늘 밤에도 그들을 불러내 평소보다 더 밝은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있다고, 자유롭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으스러져 울어버릴 것이다. 오늘밤은 어젯밤과 다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는 새로 씌어야 하며, 이 소설은 누가 죽고 죽이는 지를 떠나 시대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야 한다.
그는 만으로 고작 스물 일곱 되던 해 시대를 등지고 조국을 안은 채 수도없이 많은 작가와 책을 탐하고 숨막힐 듯 아름다운 문장을 뱉어낸 천재시인이었다. 소설 속에 아름다운 문장이 쏟아지지만 모든 문장은 이 천재시인의 삶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시(詩)는 가슴에 박혀 마음결을 어루만지는 가장 고결한 언어다. 시는 용감하고 잔인하다. 뒷이야기는 훨씬 더 잔혹하지만 그게 바로 그가 속했던 시대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이토록 쓸쓸한 이야기가 당신의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면 이 시대 소설은 실패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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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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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지금은 한국 팩션계에 있어 최고 자리에 서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작가 이정명의 신작 '별을 스치는 바람'은 다시 한 번 그가 얼마나 글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믿는지 그리고 그 신뢰에 기반 한 그가 작가로서 가지는 신념 또한 얼마나 강한지 깨닫게 합니다. 때문에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은 지금 이정명 작가에게서 연상되는 것은 땅을 뚫는 굴착기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늘 한 곳을 맴돌며 자꾸만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이 영낙없이 이정명 작가를 닮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 역시 다루고 있는 세계의 궁극적인 모습이나 그 주제는 늘 유사한 언저리를 맴돌지만 작품마다 천착하고 있는 깊이는 이전 작품보다 확실히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기죠.
과연, 이정명 작가가 작품마다 다루고 있는 세계에 있어 궁극적인 유사성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죠. 여기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항상 곧 다가 올 해방 직전의 어둔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 것이 유사합니다.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만 그의 소설 속 세계는 제게 언제나 동 트기 직전의 여명이 뒤덮고 있는 세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변화가 도래하기 전의 과도기 같은 세상인 것이죠. 이정명의 소설은 바로 그 공간 위에서 태어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가 이루어지기 직전이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정조가 정적의 반대를 막고 그의 뜻을 펼치기 직전이며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해방 되기 직전을 그리죠. 이렇게 그의 소설들은 광막한 시대의 어둠을 그리지만 그것은 곧 빛에 의해 물려나갈 어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패배가 결정된 챔피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는 어쩌면 이정명 작가가 낙관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가 이런 묘사를 통해 깨닫게 되는 건 이정명 작가가 작품마다 시대의 어둠에 천착하는 것과는 달리 그에게는 시대의 어둠이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은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얼른 떠오르는 것은, 그 시대의 어둠이 이제 곧 걷혀질 장막임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그걸 누가 과연 걷는 것인가가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즉 다가 올 해방을 가져오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죠. 아마 그것일 것입니다. 이정명 작가가 내내 해방 직전의 시대적 어둠을 그리는 이유가 말이죠. 흰 색은 검은 색과 대비될 때 더욱 그 흰 빛을 드러낼 수 있듯이, 해방을 가져오는 변화를 만들어 가는 주체 그렇게 역사를 보다 희망적으로 만들어 가는 주체를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해 그 배경으로써 이정명 작가는 시대의 어둠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는 또 하나의 이유로 인해 더욱 필요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아무리 해방을 가져오는 주체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길 리는 없기 때문이죠. 그들 역시도 분명 성장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 광막한 시대의 어둠에도 지지 않고 결국은 장막을 빛으로 찢어버릴 그들의 힘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당연히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정명은 시대의 어둠을 단순히 주체를 강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주체가 어떻게 어둠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가 되었는지, 그 역동적인 성장의 궤도를 알기 위해서도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그가 내내 궁극적으로는 유사한 세계를 그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록 좀 더 가지를 쳐내는 것이죠. 어떻게 시대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시대의 어둠에 굴하지 않고 빛을 가져오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경로를 마치 조각가처럼 나중으로 갈수록 더욱 섬세하게 다듬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좀 더 많이 다듬어 내 놓은 모습 자체가 바로 그 작품에 담긴 주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별을 스치는 바람'은 세계의 유사성을 통해 추구하려는 것과 천착하는 주제에 있어, 그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아니나 다를까 그리고 있는 세계는 이제 일제 식민지 시대, 그것도 일본에 위치한 조선인들이 수감된 감옥입니다. 시대의 어둠으로 따지자면 그야말로 최상위의 어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정명 작가의 굴착기 드릴은 이제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간 셈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자, 이런 어둔 상황에서도 과연 해방을 가져오는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과연 그 어둠의 깊이답게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삶은 최악입니다. 몸은 갇혀있는데다가 식민지 백성으로 받는 인간 이하의 취급에 쏟아지는 뭇매로 표현되는 탄압 또한 굉장합니다. 여기저기 물샐 틈 없이 쏟아지는 감시의 눈길에 조그만 운신조차 어렵습니다. 윤동주가 갇혔던 이러한 후쿠오카 감옥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안으로부터 만들어내는 해방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알맞은 비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마치 아케이드 게임에서 최종 보스와 같습니다. 우리의 실력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보여줄 마지막 테스트 같은 것이죠. 그래서 '별을 스치는 바람'이 변화를 만들고 해방을 가져오는 주체에 대한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정명 작가는 이러한 압도적일 정도로 강고한 어둠에도 굴하지 않고 빛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그 모습을 보노라면 이정명 작가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 해도 변화의 싹은 태동하는 것이며 어쨌든 태동되기만 한다면 그로 인해 결국은 절망의 어둠마저 끝내게 된다.'라고.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 어둠은 훨씬 세력이 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것과 맞서 싸울 주체의 힘 또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정명 작가는 이전과는 다르게 주체의 힘을 보다 확장시켰습니다. 쉽게 말해 '별을 스치는 바람'은 주체의 묘사에 있어서도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뿌리 깊은 나무'에서의 세종과 그의 뜻에 동조하는 학자들, 그리고 '바람의 화원'에서 주인공인 주체들과 여기 '별을 스치는 바람'의 주체들 사이에는 명확히 갈라지는 지점이 존재합니다. 그걸 수레에 비유하자면, '뿌리 깊은 나무'나 '바람의 화원'이 무언가를 앞서서 만들어내는 존재, 즉 수레를 앞에서 끌고 나가는 일종의 리더 격인 인물들로 이루어진 주체들이었다면 '별을 스치는 바람'은 그 인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뒤에서 수레를 밀고 있는 인물들, 그렇게 사회 지도자층이 아닌 기층 민중,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그 주체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바로 이 저변의 확대가 이 작품이 가진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두 작품이 변화의 그 첫 빛을 가져오는 존재들이었다면 그들이 일으킨 변화를 현실로 궁극적으로 완성시키는 진정한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기층 민중으로 시야를 보다 확대한 것입니다.
이 의도를 유츄해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주체들의 단일 기표화 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정명 작가가 일제 식민지 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것도 사실은 이런 식으로 주체들의 하나 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일제 식민지 시대란 어떤 시대입니까? 그건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약자의 자리에 서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조선인은 그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일본인 앞에서는 그저 단일한 조선인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단일 기표화. 이정명 작가는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때문에 공간적 배경 또한 조선인 감옥으로 설정했습니다. 감옥이나 일제 식민지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암울한 상황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바로 신분의 단일성 때문입니다. 일제 식민지의 조선인이 어떤 신분이든 어떤 직업을 가졌던 상관없이 그저 조선인이었던 것처럼 감옥도 똑같습니다. 바깥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든지 간에 감옥 안에서는 그저 죄수이기 때문이죠. 소설에서도 직접 묘사됩니다. 윤동주가 최치수를 비롯하여 조선 사람들은 바깥에서 어떤 신분으로 있었든지 간에 일본인들에겐 그저 '악랄하고 교활한 조선인'으로만 불리죠. 그렇게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조선인'이라는 하나의 기표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이정명 작가는 작품 내내 이러한 단일성 혹은 하나 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건 앞 문장처럼 피해자로서의 단일성이 아닙니다. 그가 이것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건 앞서 말했던 '별을 스치는 바람'에 와서 처음 시도된 주체의 확장과도 연결되는데, 바로 우리가 서로 다른 모습과 신분 그리고 직업을 가졌지만 사실은 모두 '공동운명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소설 속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 민족주의자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의 조선인이었듯이 말이죠. 바로 그 하나 된 운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가져오고 조선인 감옥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가져와 내내 '조선인'이라는 단일한 기표를 독자들에게 주지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 운명체는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시도된 주체의 확장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많은 이들이 변화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이유와 관련됩니다. 즉 변화를 궁극적인 현실로 만드는 동력이 되는 보통 사람들의 참여는 모두가 다 같은 '운명체'라는 자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각이 있을 때 변화를 일으키고 해방을 가져오는 힘은 더욱 커지리라 그는 여깁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가지 설정을 가져옵니다. 하나는 윤동주가 지휘하는 조선인들이 모여 부르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노예들의 합창'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한국어 사용과 책의 소지를 금지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의 조선인들이 둘만 모이면 한국어로 된 책 내용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합창'은 당연히 공동운명체를 나타냅니다. 그럼 책에 대한 장면은?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억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국어 책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그 책의 보존을 위해 조금씩 나눠 읽고 암기했기 때문입니다. 즉 '합창'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들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독방행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어. 그들은 일주일 동안 최대한 많은 분량의 책 내용을 외웠어. 독방에서 나간 그들은 감방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자신이 외운 책의 내용을 전달해 주었지. 책의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없을 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 나누어 기억했지. 한 사람이 한 파트씩, 아니면 몇 페이지씩 나누어서 기억한거야. 짧은 시를 몇 편씩 외워서 시집 한 권을 완성하기도 했어. (P.173)
이렇게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두 개의 장면을 통해 이정명 작가는 '하나 된 우리'라는 공동운명체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한 자각을 가지고 참여할 때 진정한 변화와 해방 또한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소설의 주인공이자 탐정 역할을 맡고 있으며 결국엔 윤동주를 이해하게 되는 일본인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가 윤동주에게서 일본 고관들이 참석한 앞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조선의 독립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노래를 불러서 그것이 장차 일으킬 파장을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셈이냐고 물을 때 윤동주가 하는 답변에서 바로 드러납니다.
이 노래는 남의 나라 형무소에 갇혀 있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표현해 줄 거야. 조선인이든 유대인이든 일본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노래에 담긴 진심은 듣는 사람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어 (P. 92)
이러한 윤동주의 대답은 그 하나가 변화의 빛을 가져올 것이란 걸 의미하죠.
문제는 여기서 이 공동운명체의 자각은 조선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정명 작가는 그것을 국적마저 초월해 확장시킵니다. 사실 국적이라는 것도 인위적인 편 가르기일 뿐 모든 인간은 인류라는 보편적인 종 안에서 모두 '공동운명체'라는 걸 주지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스기야마 도잔 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은 언제나 하나의 죽음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시대가 은밀히 숨겨둔 비밀과 음모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데 여기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스기야마 도잔'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스기야마 도잔은 처음엔 조선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악랄한 간수였는데 윤동주의 시를 통해 그의 진심을 알아가면서 차츰 변화해 갑니다. 비극적인 과거로 자기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스기야마 도잔이 조선인들 역시 자기만큼이나 상처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고 그래서 오히려 그들을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윤동주가 와타나베 유이치에게 그리도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스기야마 도잔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와타나베 유이치 역시 윤동주의 시와 진심을 통해 모두가 하나라는 공동운명체임을 깨닫고 조선인이라는 타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결국 이 둘이 변하게 되었음을 세심한 설정으로 이미 암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이는 스기야마 도잔과 와타나베 유이치가 간수로 오기 전에 가졌던 직업에서 드러나는데 스기야마 도잔은 피아노 조율사였고 와타나베 유이치는 헌책방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공동운명체'임을 보여주기 위해 가져왔던 두 개의 장면과 이 둘의 직업이 정확히 일대일 대응을 이룹니다. 스기야마 도잔의 피아노 조율은 '합창'과 이어지고 와타나베 유이치의 헌책방 전력은 그대로 조선인들의 책 보존 행위와 이어지는 것이죠. 이러한 연결 관계로 이정명 작가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윤동주로 감화되어 국적을 떠나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 이제 이정명 작가가 공동운명체를 어느 정도로 강조하고 그걸 형상화했는지 말했으니 이제 그 외연을 보다 확장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지금 그는 공동운명체라는 걸 얘기하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이 뜬금없는가요? 아니, 전혀 뜬금없지 않습니다. 이정명 작가는 이 소설이 그저 윤동주의 비극적인 삶이 스며든 과거의 이야기로 읽히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오늘 우리의 비유로 읽히길 원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감옥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어두운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 읽히길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억측이 아닙니다. 분명한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검열관의 눈을 피해 윤동주가 이중의 의미를 지닌 교묘한 문장을 쓰는 장면입니다. 이 이중의 의미가 담겨진 문장이 그저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만 나왔을 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이정명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신호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에 나오는 암호를 생각한다면 이정명 작가가 이런 식의 암시에 얼마나 능할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즉 그는 그것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소설 역시도 그렇게 이중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말이죠.
집요하게 강조되는 공동운명체 그리고 그 자각을 통한 참여의 확대를 이야기함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설이 사실은 오늘의 이 시대를 향한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주인공이 와타나베 유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 유이치는 일본인입니다. 그는 책벌레인데다 시도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에게 전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참여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가 일본인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 말고는. 그는 전쟁을 싫어했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니까요. 전쟁은 일본인이라는 단일한 기표에 따라붙는 단일한 의무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윤동주를 만나게 되고부터 그는 변해갑니다. 일본인이라는 자신을 기표를 벗어버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공동운명체라는 더욱 근본적이고 단일한 기표를 입어갑니다. 그렇게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적을 초월하며 다른 많은 타자들을 받아들여 갑니다. 그래서 달라지 게 되었습니다. 일본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전쟁도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권력을 쥐고 있던 몇몇 미친놈들이었다. 누구도 거리를 활개 치는 그 미친개들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때려죽이지도 않았다. 결국 그 미친개들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이 전쟁에 죄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직접 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죄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막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가려는 자들의 음모를 알지도 못했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거나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P.224)
저는 감히 말하지만 바로 이 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별을 스치는 바람'을 통해서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정명 작가의 진심이라고 여깁니다. 바로 이러한 유이치의 깨달음,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 사건엔 설령 그저 방관만 하고 있더라도 그 책임이 있으며 그렇게 세상을 고통과 지옥으로 만드는 상황에 있어서는 무관심 역시도 죄악에 다름 아님을 아는 것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각을 독자들에게 가져오기 위해 그는 소설에서 그토록 우리가 공동운명체라는 사실과 진정한 변화는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사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려고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로 체감되려면 어떤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줘야 합니다. 이정명 작가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보편성을 위해 이정명 작가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비밀리에 벌어지고 있는 음모를 첨가한 것이죠.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오늘 날에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이정명 작가는 그 음모 때문에 사람들이 주로 받게 되는 영향을 의식을 잃어간다는 것으로 설정합니다. 기억을 잃고, 생각한 것을 잊으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감추고 편파적인 보도로 사람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막는 미디어 통제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그 후쿠오카 형무소가 보다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 조선인들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었듯이 지금의 우리나라 또한 소수의 권력자들이 더 강해지기 위해서 이를 통해 우리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렇게 이정명 작가는 과거의 이야기를 보편적 사건으로 만들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임을 느끼도록 해, 지금 우리가 처한,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어둠을 바꾸길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오늘의 우리들에게 단적으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뭔가 변화를 원한다면 참여부터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이죠.
어둠에 눈감지 말고 못 본 척도 말고 뭔가 이대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책을 지키려 조선인 죄수들이 몇 페이지씩 나누어 암기했듯이 그렇게 시대에 대한 책임을 나눠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현실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 죄수 하나하나가 외운 양은 보잘 것 없었는지 모르지만 결국 모두가 참여하여 그토록 많은 책들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하나의 힘은 보잘 것 없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공동운명체로서 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가 바라는 변화 또한 쉬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죠. 제가 작품을 읽다 무심코 알게 된 이러한 이정명 작가의 진심에 감응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이유로 저는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냥 시에 대해서, 윤동주에 대해서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이 아로새긴 망막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 이정명 작가의 외침이 땅을 진동시키듯 마음을 울려 느끼게 하는 소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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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간수로 유명했던 스기야마 도잔이 처참하게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그의 죽음의 이유를 밝혀 내라는 명령을 받은 학군 출신의 와타나베 유이치. 유이치가 스기야마 도잔을 죽인 범인을 추적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최치수와 스기야마 도잔과의 관계, 그리고 히라누마 도주라는 청년 유이치는 최치수의 무리들을 관찰하던 도중 그들이 수시로 독방을 들락거렸다는 것과 바지의 무릎 부분이 유난히 튀어 나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증거인데, 그건 최치수도 마찬가지였다. 독방을 점검하던 유이치는 독방의 변기대 아래 부분에 동굴이 만들어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최치수는 모진 고문을 당했고, 유이치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새롭게 밝혀진 사실, 스기야마 도잔을 잔혹한 인물로만 알고 있었는데 피아노를 치는 간호사 미도리는 그는 섬세한 사람이며, 음악을 알고, 시를 이해하고 삶을 사랑했다고 말한다. 최치수에게 그를 죽이게 된 이야기를 들은 유이치는 히라누마 도주를 찾아 간다. 스기야마 도잔의 주머니에서 나온 시와 히라누마 도주의 관계는 무엇일까? 스기야마 도잔은 형무소를 오가는 서신의 검열을 담당했다. 처음에 글을 모르던 그였기에 소장은 오히려 그가 그 일의 적합하다고 생각했었다. 스기야마 도잔과 히라누마 도주는 검열관과 편지의 대필자로 만나게 된다. 히라누마 도주는 죄수들의 이야기를 듣고 검열에 걸리지는 않지만 내용은 전달될 수 있게 엽서를 쓰게 되고, 검열을 무사통과 한다. 검열을 하면서 엽서속에 등장하는 책의 내용이나 시를 읽게 된 스기야마 도잔은 그 전의 그가 아니었다. 문장과 글이 이미 그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히라누마 도주가 쓴 시를 읽으면서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히라누마 도주는 윤동주였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했었고, 일본에서 조선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스기야마 도잔이 글과 문장에 빠져든 것처럼 나도 이 책속에 빠져들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감옥에 갇혀있는 창백한 그의 모습이 떠올랐고, 스기야마 도잔이라는 인물이 더욱 미스터리하게 느껴졌다. 스기야마 도잔은 죽었고, 최치수가 그를 죽였다고 한다. 윤동주는 아직 살아있지만,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된다. 2권에서 만나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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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유명한 이정명의 작품은 '별을 스치는 바람'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지는 못했어도 '뿌리 깊은 나무'는 정말로 본방사수하면서 본 작품이였다. 내용이 재미있어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내용 자체가 팩션이라고 하여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허구는 어느 정도가 섞여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잘 만든 작품이라 드라마로까지 제작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새로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작품도 역시 팩션이라는 장르(??)로 만들어졌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일제 말기에 일어난 사실을 재미있게 그려낸 추리소설이라 봤다. 한 마디로 제대로 소설의 광고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얼핏 광고문구만 보고 내린 판단이였다. 책을 집어 들어 읽으려고 하자마자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다. "윤동주"
'서시'로 유명한 바로 그 윤동주이다. 그러고나서도 윤동주가 등장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기만 했지 윤동주에 대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학생시절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무척이나 많이 등장했다. 시라는 장르 자체가 그 당시에는 어느정도 알려질 당시였다. 한 참 '홀로서기'나 대학생들의 낙서를 묶어 시라고는 할 수 없는 시집 비슷하게도 나왔던 당시가 아마도 가장 시가 전성기가 아니였을까 한다.
지금은 시라는 장르 자체가 소멸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읽기도 듣기도 힘들다. 한 때는 서점의 한 공간을 당당하게 차지했지만 어느덧 시라는 책 자체가 어디 있는지도 보기 힘든 실정이다. 누군가는 SNS가 시라는 표현도 하지만 그건 시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만든 시와 단문의 글을 비교한다는 것을 말이다.
거르고 자르고 최대한 배제한 것이 시라면 보태고 늘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이 글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주저리 주저리 이것 저것 쓰는 것은 해도 도저히 압축해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정제된 글을 쓸 능력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시만이 갖고 있는 표현의 확장과 공감이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 시가 갖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시에 대하여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이 책은 소설이지만 시라는 것에 대해, 글이라는 것에 대해, 읽는 것이라는 의미에 대해, 글자라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라 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단지 저항시라 유명해 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시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절제된 글자, 표현되지 않은 수 많은 의미가 행간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읽었기 때문이라 본다.
이런 윤동주가 형무소에 있을 때 벌어진 내용에 대해 팩션으로 그린 소설이다. 도입단계와 책의 중반정도까지는 윤동주가 등장을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아 그저 윤동주가 인물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윤동주라는 인물에 접근하기 위한 메타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인물들이 등장을 한다.
소설이지만 많은 시가 나온다. 저절로 간만에 시를 많이 읽게 된다. 그것도 교과서로 읽거나 제목만 알고 있지 정확하게 차분하게 읽어 본 적이 없는 윤동주의 시가 그 의미와는 다를 수 있지만 - 이 소설은 팩션이라 - 큰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의미를 책 내용과 결부되어 읽으면서 더욱 시를 읽게 만들어 준다. 어떻게 보면 그것으로도 이 책의 목적은 달성한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하게 윤동주라는 시인의 형무소에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읽는 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단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글은 들리는 말과 보이는 글자보다 더 깊은 의미가 그 안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조사 하나로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고 그가 하려는 말과 글에 숨어있는 본심을 읽어낼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표현을 하는 것처럼 본인이 숨기려 해도 미묘한 단어 하나로 그 사람의 진심이 흘러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걸 제대로 집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것은 꾸준히 읽고 읽어 깨달을 수도 있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윤동주와 교도관이 스기야마가 벌이는 지적 싸움에서 - 서로 말과 글로 상대방을 끌어 들이고 유혹하고 의미를 알아 채라고 외친다 -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윤동주 시인이 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덕분에 그저 재미로 읽는 작품이 아니라 여러가지에 대해 읽으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질지 2권으로 넘어가야 겠다. |